제35화. 살려야 한다 (3)
사람끼리 힘을 모아 일을 진행하다 보면 뜻이 맞는 부분도 있지만, 반드시 뜻이 맞지 않는 부분도 생길 수밖에 없다.
이는 정무학관의 아버지 ‧ 어머니이자, 오늘날의 백도 천하의 기틀을 마련했다 칭송받는 천하사절이라 하여 다르지 않았다.
천하사절은 백도 무림의 젊은 싹들이 배우고 교류하며 경쟁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뜻이 맞았다.
하지만, ‘젊은 싹’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는 대목에서는 제각기 뜻이 달랐다.
‘그래서 운매(韻梅), 향란(香蘭), 윤국(潤菊), 청죽(淸竹), 매란국죽 네 개의 기숙사가 갈린 거지.’
운혁 슨배임과 아이들이 입고 있는 검은 무복으로 대표되는 기숙사는 그중에서도 향란관이었다.
묵색 무복이 상징인 기숙사라 학생들 사이에서는 묵란관이라고도 불린다.
아무튼 향란관의 설립 취지는 ‘근본에 뿌리를 둔 협객을 길러낸다.’다.
‘말만 보면 그럴싸한데, 그냥 혈통을 보겠다는 거지. 철성 형씨도 저래 보여도 신창양가(神槍楊家), 그리고 산동악가(山東岳家)와 더불어 창술로 유명한 상산조가(常山趙家)의 자제였나 그랬지?’
애초에 설립 취지가 ‘혈통으로 일낸다!’고, 그에 동조하는 녀석들이 모이고 모여 세대를 이어오다 보니.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가장 권위의식이 강하고 체면을 차리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기숙사풍이 되었다고 원작에 나온다.
‘진짜 그 말 그대로네.’
지금도 봐라.
운혁도사의 파들거리는 눈꼬리로 미루어 짐작건대, 운혁은 지금 나를 당장에라도 때려눕히고 싶을 것이다.
- 저 운혁이라는 말코 놈. 당장에라도 네게 달려들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구나.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도 그렇게 보셨는지, 내게 말을 건네오셨다.
하지만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안했다.
‘예. 뭐. 그래 보이네요?’
- 나이도 너보다 최소한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이는데, 그 세월을 무당에서 보냈으면 영초도 꽤나 처먹었을 것이고, 풍겨 나오는 기도도 제법 정종의 무공을 제대로 쌓은 듯 보이는데?
‘그것도 그렇네요.’
그런 내 모습에 사부님께서는 노파심이 드시는지 한마디를 더 보태셨다.
- …흠. 한데 어찌 이리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이냐? 무당의 검술은 흐물거리는 기색이 있어서 검을 쥔 지 얼마 되지 않은 네 녀석이 상대하기엔 번거로울 수가 있다. 무시해서는 안 되느니라.
하지만 나는 알았다.
운혁은 이 상황에서 절대로 내게 덤벼들 리가 없다는 것을.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 지켜보는 사람이 제법 많고, 둘째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될 테니까.
‘운혁은 체면을 중히 여기는 향란관 소속 학생입니다. 그냥 학생도 아니고 자치회라 불리는 학생기구의 부장급 간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응시생들 앞에서 조철성이 개쪽을 판 지금 자신까지 쪽을 팔면, 향란관의 이름은 웃음거리가 됩니다. 저 말코 놈은 절대로 저한테 못 덤빕니다, 사부님.’
- 그러냐? 덤비지 않을 것이면 물러갈 것이지 왜 저러고 있는 것이냐?
더 싸울 의사가 없는 것이 분명하고, 내가 제기한 주장에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사실 운혁 일행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부님 말씀대로 물러가는 것뿐이다.
‘근데 그렇게 그냥 물러나는 것도 체면이 상하는 일이라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 겁니다.’
- 거, 한심하고도 피곤한 종자들이로다. 에이이이잉!
쩝.
원작에서는 용명이 녀석이 중재를 했기에 이런 일이 없었다.
진주언가라는 배경이 향란관 출신들이 물러나게 하는 적절한 명분으로 작용했으니까.
반면 나는 가문에서 쫓겨난 정급 무사인데다 조철성을 부끄럽게 만들어 놨으니 상황이 살짝 꼬였다.
하지만 꼬인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대처는 어렵지 않았다.
‘발을 뺄 명분을 강제로 만들어 주면 되는 거지.’
생각을 마친 나는 일부러 더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운혁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후배의 첨언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역시 무당파가 길러낸 백도 무림의 동량답게 사리에 밝으시군요.”
내 말 한마디에, 운혁이 이렇다 할 행동도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게 암묵적으로 동의를 한 것이 되었다.
고개를 숙임으로써 돌려 멕이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
당했다 싶었는지 운혁이 이를 까득 깨물었지만,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 말에 반박을 하는 순간 운혁 본인이 사리에 밝지 않은 놈이 되거니와 무당파가 사리에 밝지 못한 제자를 배출한 게 되어버릴 테니까.’
킬킬. 그러게 결정을 빨리 내리셨어야지.
물론, 멕이기만 해서야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나는 상황을 확실하게 매조지기 위해 옜다 인심이다 하는 심정으로 계속해 말을 이었다.
“조철성 선배님의 지도도 감사드립니다. 창이 있으셨다면 미욱한 후배가 상대가 안 되었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운혁도 그나마 이 순간이 아니면 발을 빼기가 힘들 것임을 깨달았는지 갈던 이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알면 되었네. 확실히 철성 후배에게 창이 들려 있었다면 자네에게 가혹했을 테지.”
그런데 이때.
뒤편에 있던 하성이 녀석이 빽! 하고 소리를 냈다.
“엥? 검을 안 쓰신 건 우리 형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너는 제발 좀 닥쳐.
간신히 매듭을 지어가는 상황이 어그러질 수 있었기에, 나는 그런 하성이 녀석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을 했다.
그런데 모처럼 마음이 맞았는지 운혁도 못 들은 척 계속해 입을 열었다.
“…흠흠. 애초에 무당의 집안일이라 생각하고 달려온 것인데, 듣고 보니 자네의 말이 일리가 있어 이쯤에서 물러나겠네, 향란관은 세간의 풍문과 다르게 꽉 막힌 곳이 아니라네.”
“그럼요. 그럼요.”
“언용운. 그 이름 기억해 두겠네.”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무튼 살펴 가십시오 선배님.”
“끝까지…. 그래 아무튼 자네도 남은 시험에서 좋은 결과 있길 바라겠네.”
이 대화를 끝으로 운혁은 몸을 돌려 향란관을 향해 사라졌고.
“이봐, 철성이. 일단 가세. 사형이 물러나시기로 결정하셨어.”
홀로 남은 그의 사제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뭘 봐?! 구경났어?! 꼴랑 이 단계를 통과한 녀석들이 그러고 있을 시간들이 있나 보지? 다들 고득점을 해두셨나?! 다들 볼일들 봐!”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었다.
원작의 언용명은 향란관의 선배들을 돌려보낸 뒤, 정현을 북돋아 주었었다.
그러니 나도 그대로 해야 했다.
사실 원작의 언용명이 했던 대사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려울 것은 없었다.
요점은 정현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의 의미를 되새겨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무림학관의 검술천재에서 송문검(松汶劍)은 무당파의 장문인에게 인정받은 제자들이 지니는 검이지.’
그 말인즉.
무당파의 장문인이 태허자를 발고한 일로 무당산에서 겉돌고 있는 정현을 정무학관에 보내며 송문검을 들려 보낸 것 자체가 운혁 일당이 늘어놓던 잡소리들이 개소리라는 반증이었다.
그러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마디면 충분했다.
“허리춤의 검. 좋아 보인다?”
“……!”
* * *
역시 세상일이란 건 생각한 계획대로 많은 되지 않는다.
정현의 뇌리에 송문검만 던져놓고 하성이 녀석과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크!! 거기서 선배들 중 조가를 쓰는 놈이 눈을 부라리면서 일장을 내지르는데! 여기 계신 용운 형님이 번개같이 몸을 트시더니 왼손으로 조가 놈의 손을 쳐내는 동작을 딱! 그리고 오른손으로 일장을 빡! 그러니까 조가 놈이 헉!!”
“에이, 설마 향란관의 선배면 명문대파의 핏줄일 텐데 저기 저 형장이 아무리 대단하다손 치더라도 말이 되나?”
“거, 속고만 살았나. 형장이 조금 늦게 도착해서 못 본 거지,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오. 심지어 여기 계신 소도장은 그 당사자고. 제 말이 틀립니까, 정현 도장?”
“…틀림이 없습니다.”
하성이 녀석은 왜 그렇게 신이 났는지. 칠렐레 팔렐레 내게 오다 정현에게 ‘이것도 인연인데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합시다.’는 말을 던져서 이 꼴이 났다.
“하성아.”
“예. 용운 형님.”
“좀 닥쳐. 밥 좀 먹게. 네가 그러고 있을 때냐? 그 지랄을 할 시간에 어떻게 삼 단계를 통과할지나 생각 좀 해라.”
“…옙.”
정무학관의 학관생 식당은 광동의 특급 주사가 만든 질 좋은 음식들을 마음껏 덜어 먹을 수 있게끔 자율 배식 제도로 운영이 되고 있다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하필이면 원작의 주인공인 정현과 같이 먹고 앉아 있으니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정현.”
“예?”
“그, 저 녀석 말에 일일이 맞장구쳐줄 필요 없어. 아니 그냥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예?!”
“혀, 형니이임!”
니들 원작에선 한참 동안 거의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거든?
‘하, 뭐, 상관없나?’
어차피 학관에 다니는 이상 이래저래 부대낄 거고, 향란관 선배들 일로 이미 엮여버린 이상 밥 한 끼 정도를 보탠다고 별차이야 없겠지.
* * *
아침부터 이래저래 푸닥거리 한번 아주 징글징글하게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의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무후관(武侯關)이라 이름 붙은 세 번째 관문.
이 관문은 파훼(破毁)라는 과제 이름에 걸맞게 진법, 기관진식, 함정 등이 설치된 미궁에서 단서와 묘리를 파악해 제한 시간 안에 빠져나오면 통과를 주고, 시간 안에 빠져나오지 못하면 불통을 주는 단계였는데.
원작에 의하면 일 점짜리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격이 침입자에게 쏟아지게 되어 있는 미로였고.
이 점짜리는 미로에 배치되어 있는 기관에 각종 가벽과 비밀 통로들이 더해져 난도가 높아진 미궁이었으며.
삼 점짜리는 앞의 난도에 초급 수준의 진식의 이해가 필요한 팔문금쇄(八門金鎖)의 묘리를 담은 미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선택한 오 점짜리는 도화진(桃花陣)이라는 진법이 설치된 관문으로.
물리적인 기관과 함정은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침입자는 만발한 복사꽃이 휘날리는 가운데 똑같은 모양으로 다듬어 놓은 복숭아나무 틈바구니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악명 높은 진법을 빠져나와야 하는 관문이었다.
“…칠십구 번 응시생. 통과다.”
하지만 정신계 면역이 있는 내겐 땅 짚고 헤엄치는 것보다 쉬운 관문이었다.
“저, 정급 무사가 도화진을 파훼했다고?!”
“제 동기가 어제 정급 무사들이 치르는 무위 시험의 도우미를 맡았는데 거기서 대력궁을 부순 친구도 나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칠십구 번 응시생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그냥 파훼한 정도가 아닌데…? 유일… 아니지 이제 유일이 아니라 유이지… 아무튼 저 친구 이전에 도화진을 택했던 갑급의 제갈설지보다도 빨리 파훼한 거 아닌가 이거?!”
“맞습니다, 소무후라 불리는 제갈설지는 시간을 재려고 태우기 시작한 향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남겼을 때 빠져나왔는데, 저 언용운이라는 응시생은 무려 두 마디를 남기고 빠져나왔습니다.”
솔직히 내 경우엔 오 점짜리 도화진보다 이 점짜리 미궁이나 일 점짜리 미로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기관이나 함정 같은 것은 송장이나 해골바가지들을 앞세워서 해결했었는데, 이번 시험장에선 그런 것을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아, 아니다. 그거 하나는 힘들었네.’
시간 때운다고.
들어가자마자 진을 찢어버리면 괜한 의심을 살까 봐 안에서 억지로 시간 때운다고 진짜 힘들었다.
원래는 더 개기려고 그랬는데, 사부님이랑 끝말잇기 하는 데도 한계가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