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하늘을 달리다 (1)
- …아무리 생각해도 세 판 연속 해질녘은 심했느니라.
거, 늄으로 끝나는 더 무서운 단어들도 많은데 시대상을 고려해서 봐 드린 거거든요?!
도화진에서 나온 뒤에, 수험표를 돌려받고 기숙사로 돌아와 목욕과 의관 정제까지 마쳤으니 어디 보자….
‘대략 반 시진 정도는 지났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아직도 안에서 끝말잇기 했던 것을 복기하시며 저러고 계셨다.
‘진짜 사부님의 승부욕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신다니까.’
저러시니까 사실상 천하제일검까지 가신 거고, 또 ‘사실상’이란 말이 수식하는 천하제일검 자리는 스스로 만족을 하지 못하셔서 세상에 남으신 거겠지.
- 양심에 손을 얹고 답해 보거라. 솔직히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
뭐, 아무튼.
계속해 구시렁거리고 계시는 사부님을 무시하고, 나는 숙소 밖으로 나와 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석차를 확인하고 다음 관문을 어떻게 돌파할지에 관한 고민을 할 생각이었는데.
사대 기숙사의 패관 앞에 설치된 석판 앞에는 나보다 먼저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한 응시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심각한 얼굴로 나와 같은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끙. 무위에서 최소한 삼 점은 따냈어야 했는데 겁이 나서 너무 낮은 점수를 택했어.”
“아냐, 자네 선택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네. 그냥 이번 기수의 응시생들 수준이 너무 높은 것 같아.”
그런 응시생들을 보며 사부님께서 하시던 해질녘 타령을 멈추시고 의아해하셨다.
- 다들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한 녀석들 같은데, 저놈들은 표정들이 왜 저렇게 안 좋으냐? 어제랑은 분위기가 영 딴판이구나?
‘그럴 수밖에 없죠.’
지루했던 첫 번째 관문 입관을 지나, 두 번째 관문인 무위 시험을 어찌저찌 통과하고 정무학관의 자랑인 사대 기숙사를 목격한 첫날에는 어지간한 응시생들의 머릿속에는 꽃이 필 수밖에 없다.
‘첫날에는 흠모했던 기숙사의 색으로 물든 무복을 입고 학관을 거닐고, 천하를 주유하고, 또 방학을 맞게 되면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생각들에 두근두근할 수밖에 없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딱 하루다.
설렘 속에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세 번째 관문을 지나고 나면 시험 종료까지 남은 관문은 두 개뿐.
‘지금부턴 계산이 복잡해지는 시점이죠. 남은 두 개의 관문에서 저 흑판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점수를 확보해 내지 못하면 간밤에 품고 잠들었던 꿈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테니까요.’
그러니 다들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과 다른 응시생들이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들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끙. 이 흐름이면 그간의 평균 합격 점수들보다 최소한 한두 점은 높게 형성되겠어. 이러다 떨어지면 고향으로 돌아가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는데. 다음 관문인 경신(輕身)에서 모험을 해야 하려나?”
“아서게, 무슨 시험이 나올 줄 알고? 득점도 득점인데 탈락을 해버리면 거기서 끝일세. 조별 과제에서 역전을 하는 방법도 있으니 침착하게 고민을 해보게나.”
“끙. 조언 고맙네.”
응시생들의 입에서 내 이야기가 나왔다.
“그나저나 저 언용운이라는 친구가 부럽구만. 벌써 구 점이라니. 사실상 합격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마 입관처에 가보면 저 친구의 합격 증명 두루마리는 이미 작성이 완료되어 먹물이 말랐을걸?”
“그러게 말이야. 확실히 부럽긴 해. 근데 정급 무사가 무위 오 점에 파훼 오 점이라니? 득점한 점수들을 보면 나는 부러움보다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구만. 무위야 그렇다 쳐도 파훼 관문의 오 점짜리 과제는 도화진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서 빠져나왔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긴 하지. 사실 나도 내심으론 응원하기로 했네, 저 언용운이라는 친구가 지금 전체 석차 이 위인데 입관 관문에서 정급 무사 판정을 받아 감점만 당하지 않았어도 전체 석차 일 위가 아닌가?! 그 명문대파의 자재들을 모두 누르고! 일 관문과 이 관문을 거저먹은 주제에 젠체하는 놈들을 저 친구가 모조리 깔아뭉게 줘서 내 속이 다 시원하다네!”
하여, 석차가 적혀 있는 석판으로 시선을 옮겨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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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용운 / 정급 무사
입관 : 감점 일 점
무위 : 득점 오 점
파훼 : 득점 오 점
현재 총점 : 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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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아래로 한 번, 아래에서 위로 또 한 번.
도합 두 번을 살펴도 흑판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최상단 바로 아래 딱 한 명만을 위에 두고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현재 전체 석차 이 위에 구 득점.’
흑판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응시생들의 말대로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순위였다.
‘원래는 적당히 상위권 성적만 찍어서, 따라오는 보상과 기숙사를 선택할 때 유리함 정도만 확보하려고 했는데.’
하성이도 거두고 원작의 주인공인 정현과도 엮이고 나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
‘그러면 안 되겠어.’
나는 생각을 거듭하며 흑판의 석차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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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갈설지
2. 언용운
3.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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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선 제갈설지가 줄곧 일 위를 하고 정현이 이 위를 하다 마지막에 정현이 뒤집는 전개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제갈설지와 정현 사이에 내가 끼어 있는 지금도 전개가 그렇게 흐른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본디 이야기의 궤도란 건 조금만 틀려도 큰 결과가 초래될 수가 있는 법.
정현이 사형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첫 대목을 원작의 그것과 얼추 비슷하게 통과하긴 했지만, 그게 무슨 결과를 낳을지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정현이 알아서 제갈설지를 누르고 제가 주워 먹어야 할 거 챙겨 먹겠거니 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아는 결과대로 녀석을 쑤셔 넣어야 해.’
이렇게 된 이상 수석으로 간다!
내가 수석을 하고 그렇게 받은 혜택 중에 정현이 녀석에게 줄 건 주고 나머지는 내가 먹는 거지!
“흐흐.”
- …갑자기 왜 그렇게 웃느냐? 군침은 왜 또 그렇게 흘리고…?
아, 근데 생각해보니 수석을 목표로 하기엔 내가 지금 딱 하나가 좀 아쉬운 상태인데.
* * *
작금의 세인들에게 천하제일인을 꼽으라 하면 의견이 제법 갈릴 것이다.
누군가는 무당의 태극검선을 꼽을 거고, 누군가는 화산의 매화검선을 말할 것이며, 아니다 소림의 공덕신승이다 하고 외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마공의 특성상 일대일로 겨루면 십만대산에 웅크리고 있는 천마신교의 당대 교주가 가장 강하지 않을까 하는 답을 조심스레 말할 것이다.
한마디로 결론이 나지 않는 질문인 것이다.
하지만 천하제일투(天下第一偸), 그러니까 천하에서 제일가는 도둑놈을 꼽으라면 모두가 입을 모아 한 사람을 말했다.
뇌전편복(雷電蝙蝠) 우사인(禹士仁).
천하에 자신이 넘지 못하는 담이 없고, 따지 못하는 자물쇠가 없으며, 달리는 것으로 자신을 제칠 자가 없으니 훔치지 못하는 물건은 없다던 사내.
하지만 그는 지난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명부를 저승으로 옮겨갔다.
사인은 감염사였는데, 독이나 고독에 당한 것은 아니었고.
기생충의 갈래인 간흡충에 감염이 된 것이었는데, 황제에게 올라갈 수라상 한가운데 있던 민물 회를 훔쳐 먹고 허둥거리는 숙수와 궁녀들을 보며 킬킬대다 그런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름대로 천하제일 도둑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뭐, 아무튼.
그 뇌전편복에게는 후계를 겸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소릉아. 도둑질이란 손재주가 삼 할, 경공이 이 할 남은 오 할은 간덩이다. 손재주와 발재간은 네 나이 때의 나보다 네가 훨씬 나으니, 그놈의 간덩이만 키우면 너는 이 아비보다 더욱 대단한 대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제일! 아니 역사상 전례 없는 신투가….!”
“…아, 아버지!”
성은 우가요 이름은 소릉(所凌 : 넘어서길 바란다).
우소릉이었다.
“…….”
“…돌아가셨군요. 이제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사실 도둑이 되기 싫습니다.”
이름의 뜻에 나와 있듯 뇌전편복은 자신의 아들이 대를 이어 천하제일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소릉은 태생적으로 소심한 사내였고, 때때로 비관적인 사내였다.
하여, 까딱 잘못하면 목이나 손목이 날아가는 도둑의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느라 옳게 배운 일이 없었고, 연고라 할 만한 집도 절도 땅도 없었다.
‘돈이라도 좀 물려주셨으면 몰라요.’
뇌전편복의 집에는 천하의 보물이 다 있고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을 것이라 세인들은 말했지만, 그 명성과 달리 우씨 부자는 가난했다.
등이 따숩고 배가 부르면 도둑질이 안 된다는 뇌전편복의 인생철학 때문이었다.
‘…인생.’
하여, 우소릉이 이제 어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참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정무학관만 졸업하면 무림맹을 비롯해 천하 모든 세가에서 ‘어서 오세요!’를 외친다고.
또 그런 풍문도 들려왔다. 그 입관 시험이란 게 때에 따라 다르긴 한데 경공만 잘해도 합격하기도 하더라고.
‘이거다!’
하여, 우소릉은 풍운의 꿈을 안고 호북의 단강구의 정무학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무학관의 시험은 우소릉의 예상과는 좀 많이 달랐다.
입관 절차에서 가벼운 호구 조사를 하는데, 아비의 정체를 밝히면 산지 직송으로 뇌옥으로 갈 성싶어 고아라고 했더니, 누가 봐도 잡놈들만 받는 것 같은 정(丁)자가 쓰인 무복을 던져주며 시작부터 일 점 감점을 먹이더니.
이어진 관문부터 계속해서 소심한 우소릉에게 계속하여 살 떨리는 선택을 종용했다.
그 결과.
세 번째 관문을 돌파하고 수험표를 돌려받아 기숙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현재 우소릉의 수험표에 적힌 성적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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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소릉 / 정급 무사
입관 : 감점 일 점
무위 : 득점 일 점
파훼 : 득점 일 점
현재 총점 : 일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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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 될 거야. 아마….’
솔직히 이제 와 생각해보면 파훼 관문은 이 점짜리를 택했어도 될 것 같았는데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선뜻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
터덜터덜 기숙사를 향해가던 우소릉의 눈에 기숙사의 패관 앞에서 전체 석차가 적힌 흑판을 보며 고심을 하고 있는 한 사내의 뒤통수가 보였다.
‘치, 칠십구 번 응시생?!’
우소릉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소릉은 저 사내가 대력궁을 당겨서 부숴버리는 현장에 있었던 응시생 중 한 명이었으니까.
‘이름이 언용운이라고 그러셨지 아마?’
우소릉은 홀린 듯이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흑판에서 방금 떠오른 이름을 찾아보았다.
‘언용운. 언용운. 언용운.’
그 이름을 찾는 데는 찰나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전체 석차 이등?!’
위에서 바로 두 번째에 그 이름이 있었으니까.
‘거기다 파훼도 오 점?! 당신 진짜 대단한 사람이셨군요?!’
이 순간.
어째선지 우소릉의 뇌리에 오늘 아침 우연히 보았던 언용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릴 것 같던 선배들의 앞을 막고 서서 당신들은 틀렸다를 외치며 핍박받는 다른 응시생을 구해주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대협의 모습이.
‘나, 나도 조언을 구해볼까?’
따지고 보면 이곳에서 하얀 무복을 입은 자들은 모두가 경쟁자라지만, 딱 한 사람 언용운만큼은 자기 일처럼 고민을 해줄 것 같았다.
하여 우소릉은 큰맘을 먹고 언용운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하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아, 안녕하신가요?”
“나? 나야 안녕하기는 한데, 니가 왜 내 안녕을 묻지? 나 알아?”
그런데 첫마디부터가 우소릉의 생각과는 달랐다.
이쪽에서 ‘안녕하십니까?’ 가 갔으면 저쪽에선 ‘예 안녕합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하는 느낌의 답이 와야 하는데 날이 선 답이 돌아왔다.
협객보다는 뒷골목에서 흑도패를 마주친 느낌이 조금 났다.
“…어. 그, 그게. 그러니까.”
하여, 우소릉이 말을 더듬는 사이.
우소릉의 손에 들려 있던 수험표가 언용운의 손으로 홱! 하고 옮겨 갔다.
“…우소릉?!”
“예? 예! 아 제가 통성명을 안 했군요?! 이런 멍청한! 죄송합니다. 저는 그 우소릉이라고….”
“비영신투 우소릉?”
“예? 무슨신투요?”
“아, 아직 아니지 참. 비영신투라고 하면 안 되는구나, 와, 우소릉 너도 여기 있었구나?!”
이 순간 우소릉의 눈엔 언용운의 눈빛이 먹이를 발견한 매의 눈빛과 겹쳐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반갑다 친구야!!”
“예?! 치, 친구요?!”
언용운의 팔이 우소릉의 어깨에 착- 하고 걸렸기 때문이었다.
“친구 하자고 말 건 거 아냐?”
“어…? 맞기는 맞을지도요…?”
“그래그래. 시험장에서 바로 오는 거 같은데 우리 친구끼리 오붓하게 점심 먹으면서 서로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보도록 할까?”
모르긴 몰라도 뭔가 잘못 걸린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