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7화 (37/444)

제37화. 하늘을 달리다 (2)

“…그, 언 형은 안 드십니까? 어째 저만 먹는 거 같아서.”

“아냐 아냐. 나는 소릉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진심이었다.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넝쿨째 굴러왔지?!’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이었구만?!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소릉을 마주치기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나는 석차가 적힌 흑판을 응시하며 다음 관문과 최종 관문에 대한 전략을 짜고 있었다.

입관 시험의 네 번째 관문은 경신(輕身).

경신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듯 몸을 가볍고 빠르게 만드는 경공(輕功)을 평가하는 관문이다.

‘사실 중요한 덕목이긴 하지.’

세인들은 경신술 혹은 경공은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천하제일검에 관한 토론은 아무 성 아무 객잔에 가 앉아 있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데, 천하제일쾌는 수식어에서부터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하지만 몸을 가벼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공부와 걸음을 빨리 옮기는 공부는 기실 모든 무공의 토대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정무학관의 학생들의 대부분은 붓대를 쥘 극소수를 제외하면 결국 칼밥을 먹게 될 터, 평생 칼밥을 먹다 보면 어지간하면 한두 번 정도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야 할 때가 오는 법.

그때를 만나면 경공 실력이 본인과 아군의 생사를 가를 수가 있으니 더더욱 중요하다 할 것이다.

‘괜히 병법 삼십육계. 수많은 조언 중에 고르고 골라 서른여섯 개를 뽑아 놓은 목록에 줄행랑(走爲上)이나 금선탈각(金蝉脱殻) 같은 게 끼어 있는 게 아니지.’

덧붙여 현실적으로 경공에 능한 인력이 강호에는 많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 시대의 연락 수단이라고 해봐야 비둘기나 매등을 활용한 전서구나 전서응이 아니면 사람이 직접 뛰는 전령뿐이니까.’

그런데 전자의 경우는 필연적으로 보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하여 정보 시장에서도 결국 인력을 가장 높이 치는 것이다.

아무튼, 서론이 길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내 사문인 파천검문은 경공에 조예가 깊은 문파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 물론 아까도 말했듯이 경신이란 모든 무공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 어느 정도 기초는 잡혀 있었다.

이해하기 쉽게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 과제를 기준으로 삼자면….

‘삼 점짜리 과제를 통과할 정도?’

이는 파천십검 중 겨우 선삼초(先三招)만을 익힌 선무당 검수가 뭣도 모르고 씨부리는 말이 아니라, 사부님께서도 인정하시는 바였다.

‘그렇죠 사부님? 좁은 의미의 경공으로 한정하면 저희 문파는 마땅한 경신술이 없는 거 아닙니까?’

- 어허. 딱 잘라서 없다고 하니까 없어 보이지 않느냐?! 그런 말보다는 필요가 없었다. 라고 하거라!

‘그게 없는 거죠. 무당의 제운종(梯雲縱)이나 곤륜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제갈가의 백학보(白鶴步) 화산의 암향표(暗香飄)같은 거 없잖아요. 저희?’

- …하필이면 꼽아도 말코 놈들의 것들을 꼽느냐?! 예끼 이놈아!

‘진정하세요. 목록에는 제갈가의 백학보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 아무튼! 네게는 조사님이 되시는 내 사부님께서는 절름발이셨다. 하여 걸음을 많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방위의 투로를 열고 닫을 수 있는 보법을 떠올리셨고, 그게 바로 파천십이보인 것이고!

‘…아니 여기서 그런 가불기를 들고 나오시면 제자가 뭐가 됩니까.’

- 뭐가 되기는 고얀 놈이 되는 거지. 원래부터 고얀놈이긴 했지만. 근데 가불기가 무엇이냐?

음.

원어로는 가드 불가능한 기술인데 여기 식으로 하면.

‘뭐, 대처할 수 없는 초식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 …요즘 젊은것들은 참 희한한 말들을 쓰는구나.

‘아무튼 조사님 이야기를 들고 나오시면 반칙이시죠. 한 자루 검으로 천하를 긴장케 만드셨던 사부님이셨으니 사부님께서도 만드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 험험. 내가 좀 대단하기는 했지. 뭐, 내 경우엔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느니라, 덤벼 오는 적은 베어 넘겼고, 도망치는 자는 굳이 쫓지 않았으니까 필요가 없었지.

굳이 발바닥에 땀 나게 뛸 이유가 없었노라는 말씀을 참 멋있게도 하시네….

그런 사부님의 말씀에 ‘하긴 그렇긴 하다.’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사부님께서 계속해 말을 이으셨다.

- 아무튼! 너는 그 말코 놈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느니라.

‘…흐음.’

- 대저 경신법이란 결국 내력이 오 할이고 그 내력을 운용하는 심법이 사 할쯤 되며 나머지 꼴랑 일 할 정도가 요령이니라.

‘…흐으음.’

- 파천의 심법이 네 내력을 장차 심후의 경지로 이끌어 줄 것이고, 네 녀석의 오성 또한 천재라 부를 만하니 차차 요령만 익히면 되는 것이다. 에이잉! 내 몸만 멀쩡했어도 당장에 이 자리에서 이래저래 뛰어보다 보면 뚝딱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인데!! 한데, 만날 제자를 못 믿는다 어쩐다 하더니 정작 네 녀석이 나를 못 믿나 보구나, 에이이잉!!!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뭐, 사부님의 말씀은 맞을 것이다.

파천신공은 따지고 보면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것으로 유명한 마도의 무공들의 원류다.

물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전해진 것이라 작금의 마인들은 생명을 태워 그런 고강함을 얻는 식으로 심법을 발전시켰다.

반면, 내 경우엔 안정적으로 내력이 쌓여서 마공과 비교하면 그 성장세가 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백도의 정종 심법에 비하면 같은 운기조식을 하고 같은 영단을 먹어도 일반적인 그 흡수력이 남다른 것이다.

‘거기에 사부님의 입으로 내 재능은 진짜라 공언을 하시니 나중에 가면 분명히 사부님의 말씀이 맞겠지.’

그러나 당장에 다음 관문에서 오 점짜리 과제를 통과하기에는 그 요령이라는 것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경쟁자인 제갈설지와 정현은 각각 제갈가와 무당파에서 백학보와 제운종을 전수받은 상태.’

두 사람 모두 원작에서 경신 관문을 오 점으로 통과한다.

그런데 내가 다음 관문에서 삼 점짜리 난도를 택해서 네 번째 관문이 끝났다 치면?

‘제갈설지가 십오 점, 정현이 십사 점, 나는 십이 점.’

합격이야 가능한 점수지만 수석과는 좀 멀어지게 된다.

하여,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우소릉을 만난 것이다.

비영신투(飛影神偸) 우소릉.

머지않은 미래에 천하제일쾌(天下第一快)가 되는 인물.

녀석은 지금 내게 딱 필요한 경신술의 요령을 알려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진짜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지.’

그러니 녀석이 먹는 것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를 수밖에.

“어휴, 궁보계정을 참 좋아하네, 자. 자. 여기 내 것도 먹어.”

“…켈록. 아, 안 주셔도 되는데, 이거는 양이 정해져 있어서 추가 배식도 안 된다던데요? 어, 언 형도 드셔야죠.”

“괜찮아. 괜찮아. 깐부끼리는 니 거 내 거가 없는 거야. 먹어 먹어.”

“까, 깐부요?”

“그런 게 있어. 엄청 친한 벗을 부르는 말이지.”

내 궁보계정이 소릉이 네 거가 될 수 있고, 네 경공이 내 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벗의 형태가 있다~ 이 말이야.

* * *

- 저 우소릉이라는 녀석이 지닌 경신술이 그렇게 대단하냐?

‘예, 사부님 저 친구가 저래 봬도 당대 최고 도둑의 피를 이은 친굽니다.’

원작의 우소릉은 중심인물이 아니었다.

후반부가 시작될 즈음 잠시 나왔다가 이내 곧 유명을 달리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이름 석 자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녀석의 등장과 퇴장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원작의 후반부를 열어젖히는 사건인 만인혈(萬人血) 쟁탈전.

만인혈은 이름 그대로 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을 죽여 만든 끔찍한 영단으로, 주화입마에 빠진 천마를 회복시키기 위해 마인들이 제작한 것이었다.

평화에 젖어 있던 백도 무림은 만인혈이 만들어지는 것도 막지 못했지만, 문파와 세가들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내분이 벌어지는 바람에 그 만인혈이 십만대산 코앞까지 옮겨지는 것도 막지 못했다.

백도 무림의 힘이 하나로 모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교의 완전히 부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때 등장한 게 우소릉이었지.’

당시 가보를 털린 세가와 문파들의 성화로 무림 공적의 위치에 있던 우소릉.

그 우소릉이 호교 법왕급 마인의 손에서 만인혈을 탈취해서 무림맹으로 향하는데.

마교놈들이 ‘어이쿠 빼앗겨 버렸네.’ 하고 말 놈들이 아니기에 철저한 추격과 처절한 도주가 시작되는데, 그 과정을 주인공 세대가 도와 결국 만인혈이 마교로 넘어가는 것은 막아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말 그대로 전심전력을 다한 우소릉은 숨을 거두지.’

그때 대사가 아마….

『저는 사실 도둑질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이에요. 사실은 저도 당신들 같은 협객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현과 친구들이 우소릉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니, 우소릉에게 도둑질을 당하는 자들이 주로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탐학한 관리, 세가, 문파였고.

그렇게 털린 재물이 향한 곳은 그 재물들의 본래 주인인 백성들이었다.

그에 우소릉의 죽음은 백도 무림 전체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되고, 백도 무림은 우소릉을 천하제일쾌로 추존함과 동시에 뼈를 깎는 쇄신에 들어간다.

당시에 난 우소릉의 죽음이 참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다.

“…언 형. 진짜로 이 궁보계정 제가 다 먹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게 했던 인물이 닭튀김 몇 개에 행복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응. 먹어. 먹어.”

“넵. 그럼.”

그중에 가장 시급한 생각은 역시 저 녀석에게서 경공의 정석을 뽑아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놈을 어떻게 살릴지 뭐 그런 나머지 고민들은 차차 생각하면 되는 거고.’

그렇게 생각을 맺은 나는 마침 식판을 싹 비운 우소릉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한테 알은체를 한 이유가 뭐야?”

그런 내 말에 우소릉이 ‘아! 맞다!’를 외치더니 주춤주춤 입을 열었다.

“…그, 아까 제 수험표를 보셨겠지만, 제가 지금 탈락 위기입니다. 근데 사실 경신술에는 일가견이 좀 있어서요. 한데 성격이 좀 소심한 편이라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의 방식이 저랑 좀 많이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괜찮으시면 제 경신술을 한번 봐주시고. 몇 점짜리를 응시하면 될지 조언을 좀 부탁드리려도 괜찮을까요?”

그런 우소릉의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음. 마침 내가 하려던 건설적인 대화와 맥이 통하네.”

그러자 우소릉의 만면에 완연한 화색이 드는가 싶더니 이내 시무룩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참, 그런 말씀을 하셨었죠?! 근데 제가 언 형과 건설적인? 그런 대화를 나눌 주제가 될까요?!”

저러기도 쉽지 않은데 어지간히 부정적인 녀석이었다.

이런 녀석이 나중에 어떻게 마인들 손에서 만인혈을 쎄비는 거지?

뭐, 지금의 내겐 오히려 좋은 상황이었다.

지금의 소릉이 녀석은 내가 당기면 당기는 대로 끌려들어 올 것 같았으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되지. 난 경공에 일가견이 없거든.”

“…아.”

그리고 자신감 있게 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나랑 일 하나 하자. 네가 나한테 경공을 가르쳐 준다고 약속하면 조언은 물론이고 마지막 관문인 조별 과제에서 내 조에 넣어줄게. 어때?”

한데, 이 순간.

소릉이 녀석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거절의 말이 나왔다.

“…어. 가르쳐 드리는 것은 좀 어렵겠는데요?”

“왜?! 내가 궁보계정도 다섯 조각이나 줬는데?! 우리 사이가 겨우 그 정도야? 깐부도 하기로 했고! 나랑 친구 하자고 매달 돈을 내는 사람도 있어 인마!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 …상식적으로 그게 되겠느냐?! 이 녀석이 품은 경신술이 천하제일투의 비전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걸 꼴랑 닭튀김 다섯 조각으로 꿀꺽하려는 네놈의 심보 한번….

“…아, 아뇨. 언 형!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곡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 말이 아니라 하루 이틀에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렵겠다는 거예요.”

- …되, 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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