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하늘을 달리다 (4)
몇 번의 동작 만에 경신술의 묘리를 깨우쳐 훗날 천하제일쾌가 되는 우소릉의 넋을 빼놨고, 또 그 입에서 비영파천보란 이름을 끄집어냈다.
하지만 자고로 경신술은 묘리를 깨달았다 하여, 바로 자신의 것이 되는 무공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니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나는 곧바로 비영파천보를 몸에 익히기 위한 고민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소릉이 네가 했던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최적의 자세로 몸과 다리를 움직이도록 하는 공부인 신법(身法)을 주로 삼고 몸의 경중을 가누는 공부인 경공(輕功)은 후순위가 되겠지만, 시험 과제가 단순히 목재교 위를 제한 시간 안에 주파하는 것이니 나는 일단 경공을 우선으로 몸에 익게 만들 생각인데 우 선생의 생각은 어때?”
내가 그렇게 운을 떼자.
“서, 선생이라뇨. 그 호칭은 너무 무겁습니다.”
우소릉은 짐짓 곤란한 기색을 보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경신술 일타 강사의 모습으로 돌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별개로 말씀은 맞으세요. 흠. 제 생각에는 이런 방식으로 수련을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근처의 수풀에서 돌멩이를 한 아름 주위와 내 옆에 쌓더니, 그중에 하나를 집어 연무장의 판석 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보통 목재교에 쓰이는 널빤지가 이 정도 너비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언 형께서 비영파천보를 사용해 한 보에 뛰는 거리가 이 정도 되고요?”
“계속해봐.”
“제가 주워온 이 돌들은 제가 살던 강남에선 썩돌 혹은 퍼석돌이라 부르는 것으로, 이렇게 힘을 아주 조금만 줘도 바스러집니다. 거의 뭉쳐진 흙이나 다름이 없죠. 이걸 착지점에 놓아두는 거예요.”
“오. 그걸 부수지 않고 착지하면 되겠구만?!”
“예.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그게 가능하시다면 아마 눈을 밟아도 흔적이 남지 않는 수준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내게 조언해주는 사람이 우소릉뿐이었다면, 저 말이 과연 일리가 있는지를 고민해야 했겠지만 내겐 사부님이 계셨다.
-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 비영파천보의 특성을 생각하면 확실히 제한적이나마 그 정도의 경지에 닿았다 할 수 있긴 하겠구나. 근데 그게 내일까지 가능하겠느냐?
천하제일쾌와 검마의 단언.
더 고민할 것도 없다.
“바로 시작하자.”
나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비영파천보를 몸에 익게 하기 위한 수련에 들어갔다.
퍽!!!!!!
그 과정은 절대 녹록지만은 않았다.
머릿속엔 완벽한 동작과 내력을 갈무리했던 순간이 들어 있고, 몸도 그 순간의 느낌은 기억은 하고 있었으나, 여태까지 쌓아온 이런저런 습관이 생선 대가리 잘라 낸 듯 단박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퍼억!!!!!!
하여 처음에는 열 번을 시도하면 여섯 일곱은 퍼석돌이 터져나갔고.
소릉이 녀석과 사부님께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언 형. 외람된 말씀인데, 당장에 답설무흔의 경지를 보시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말씀대로 단애 절벽에 설치된 목재교를 달리는 시험이라면 자칫 위험하실 수가 있어요. 충분히 합격권이신 걸로 아는데 이렇게 무리를 하실 필요가….”
- 우가 놈의 말이 일리가 있느니라, 내 네 녀석의 향상심은 익히 알고 있다만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거라.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소릉아.”
“…예?”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내려가든지 아니면 돌이나 더 주워줘.”
사부님도요.
보법 이야기할 때 말코 놈들 어쩌고 하시면서 역정을 내셨으면서, 파천의 이름이 붙은 보법으로 제운종이나 운룡대팔식에게 밀려서야 되겠습니까?!
- …그야 그렇다만. 네 녀석의 안위가 우선 아니냐.
아, 됐습니다.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습니다.
퍽!!!!!
그런 단호한 의지 하에 실패를 확인하고.
그를 바탕으로 좋지 않은 습관을 교정하며 계속해 시도하니.
퍼석!!!!
열에 여섯 일곱 터져 나가던 것이, 어느 순간 네다섯이 되었고.
퍼슷!!
네다섯은 금방 하나둘이 되었으며.
해가 서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때에 이르러서는 열 번을 뛰어 단 하나의 돌도 부수지 않는 경지를 넘어.
“!”
- ?!
한 발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 …이걸 해내는구나?! 허. 허허허허! 어디서 이런 녀석이 튀어나와 파천 검문으로 굴러 들어왔는지?!
그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함박웃음을 짓는 듯하셨고.
소릉이 녀석도 또 한 번 입을 쩍 벌렸다.
“가, 감축드립니다!”
“그래. 고맙다. 수련 방식도 그렇고 돌멩이 빠르게 주워와서 깔아준 것도 그렇고 큰 도움이 됐어. 다 네 덕이야.”
“아닙니다!”
“아냐?”
“예. 언 형의 천재성을 바탕으로 제안을 드리긴 했지만, 내심으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될 일인가 했는데. 기어이 해내셨어요!”
“음. 아니라니까 한마디만 할게.”
“…예?”
“저녁에 나오는 궁보계정은 양보 못 하겠다. 형이 허기가 좀 지네?”
- …그 정도는 좀 양보를 하거라!
* * *
무당산에 위치한 수많은 봉우리 중에 개로쌍봉(開爐雙峰)이라는 곳이 있다.
개로쌍봉.
말 그대로 뚜껑을 연 향로(香爐)처럼 넓은 평지가 있는 꼭대기를 가진 거대한 봉우리가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는 모양새를 지닌 봉우리다.
아, 물론.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은 산 아래 멀찍이서 무당산을 응시하며 하는 말.
개로쌍봉의 좌봉에 서 있는 사람 입장에선 우봉까지 백 장(약 300미터)정도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는데, 그 백 장 길이의 쌍봉 사이에 놓인 네 개의 목재교를 뒤로 두고, 불혹 즈음 되어 보이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도사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빈도는 곤륜의 도사로 정무학관에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또 가르치고 있는 한영이라 합니다! 앞선 세 관문을 거쳤으니 본 기수의 시험 방식은 응시생들이 잘 숙지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운을 뗀 한영도사는 뒤편의 목재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빈도는 노파심에 한마디를 꼭 드리고자 합니다. 본 관문은 보시다시피 역량껏 목재교를 건너는 관문입니다! 배점에 따라 발판이 되는 널빤지의 두께가 다릅니다. 거기 죽립을 쓴 응시생?”
“예?”
“일신에 지닌 경신술보다 수준이 높은 목재교에 오르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발판이 부서질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본 관문은 그런 위험이 동반되는 관문입니다.”
“…안전장치 같은 것은 없습니까?”
“응시생은 강호에서 잔혹한 마인이나 지독한 사파인을 마주쳐도 안전장치를 찾으실 겁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백도 무림의 싹을 길러내는 곳. 사실 아래쪽에 천잠사로 만든 그물을 설치해 놓긴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바람도 심하고 안개도 자욱하니 감히 안전하다 단언을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니 앞선 관문에 비해 자신의 역량을 보수적으로 잡으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방금 나와 대화를 주고받은 응시생은 죽립을 벗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바람에 영향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기야, 입관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었고, 무위 관문은 나무로 된 병장기나 활을 당기는 게 과제였다.
파훼 관문도 위험할 것은 없었다.
역량을 잘못 재, 진법에 갇힌 녀석들은 시간이 지나면 도우미들이 꺼내 주었고, 기관들도 나무로 된 화살촉과 독 대신 물감을 사용했다니 앞선 관문들은 사실 위험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반면 이 관문은 까딱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가 있었다.
‘근데. 위험을 굳이 강조하면서 정작 시험장에 저런 걸 세워놨네.’
여기서 재밌는 건.
감독관은 자신의 역량을 보수적으로 잡아 배점을 택하라고 하고 있는데.
정작 응시생들이 모인 우측 편에 석차가 적힌 흑판을 가져다 놓았다는 점이었다.
‘합격권이 아닌 사람은 대놓고 무리를 하라는 건데, 그러면서 겁을 준다?’
이건 대놓고 응시생들에게 압박감을 주려고 만들어 놓은 판이었다.
‘재밌네.’
* * *
뭐, 아무튼.
내가 그렇게 출제자의 의도를 재밌어하고 있는 와중에 감독관인 한영도사의 입이 재차 열렸다.
“더 질문 있는 사람 없습니까?!”
“…….”
“없나 보군요? 그렇다면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응시생들은 좌봉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기 제 옆의 부감독관과 도우미들의 안내를 따라 전체 석차의 순서대로 시험에 임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우봉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건너온 응시생들에게 수험표를 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맺은 한영은 휘리릭- 장삼을 휘날리며 오(五)라는 푯말이 꽂혀 있는 다리 위를 내달려 우봉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 …곤륜의 말코 놈이라더니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제법 그럴싸하게 구사를 해내는구나.
도사들을 대하는 사부님의 평소 태도를 생각하면 엄청난 극찬이었다.
그도 그럴 게 한영의 걸음은 그야말로 구름을 헤치는 용과 같았다.
거침없이 달리는데도 자세에 위엄이 있어서 나부끼는 장삼이 용의 수염처럼 느껴질 정도.
그러나 한영의 걸음걸음에 개로쌍봉의 좌봉에 위치한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린 것은 그야말로 잠시였다.
한 여인이 입을 열자.
한영도사에게 쏠려 있던 이목이 일제히 그 여인에게 옮겨졌다.
“시작하면 될까요?”
입을 헤벌레 벌린 꼴들을 보아하니, 호북제일미라 불리는 그녀의 미색에 사로잡힌 모양이었지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좀 결이 달랐다.
‘제갈설지.’
제갈가의 소무후, 그러니까 작은 제갈공명이라 불릴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졌는데, 무재 또한 역대급이라 제갈세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
무림학관의 검술천재’에서 이른바 주인공 세대의 머리 역할을 하는 주요 인물.
‘그리고 현재 응시생 석차 일 위를 달리고 있는 녀석.’
한영도사가 선보인 운룡대팔식과 무당의 제운종, 우소릉의 무영풍 등과 무림 일절을 다툰다는 백학보를 보여 줄 테지?
내가 그런 제갈설지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일천이백삼십사 번. 제갈설지 응시생 준비됐나?”
“예.”
“호각을 불 것이다. 그것을 시작 신호로 삼도록.”
“예.”
부감독관으로 나선 조교수가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호각을 불었고.
삐익-
그러자마자, 제갈설지가 쏜살같이 오 점짜리 목재교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쌔액-
제갈설지가 내달리는 모습은 한영도사의 그것과 느낌이 좀 달랐다.
한영도사가 쌍봉 사이에 서린 구름과 안개를 거침없이 찢으며 내달렸다면, 제갈설지는 구름 위를 여유롭게 노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뭐, 아무튼.
남이 달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여기까지.
석차순으로 시험을 보겠다 하였으니,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몸의 관절을 이리저리 풀며 내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뒤편에서부터 이런저런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현재 전체 석차 이 등이 정급 무사였지? 저 친구도 오 점짜리 다리를 건널까? 단목 공자.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삼 점, 아니 이 점 정도짜리를 택할 것이라 보네, 한영 교수님의 운룡대팔식과 제갈 소저의 백학보 다음에 정급 무사의 발버둥을 봐야 한다니 눈이 썩겠구만.”
한데, 석차순으로 준비를 하고 있다 보니 나와 내 다음 등수인 정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갑급 무사들이신데, 석차가 나한테 밀리고 있다는 게 자존심들이 상하는 모양인지.
개중에 나를 깎아내리는 자들이 몇 보여서 솔직히 참교육이 좀 마려웠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박한 거 아닌가? 그래도 쌓아놓은 점수가 무려 구 점인데.”
“듣자 하니 가문에서 쫓겨난 망나니라 하던데, 정급이라면 무위 시험은 거저먹었을 거고.”
“흐음 그건 또 그렇군?”
“파훼 시험은 뭐 나름의 수가 있었다 치자고.”
“하하. 그러자고.”
“그리고 경신술이야. 근데 경신술이야말로 몸을 다루는 기술과 내력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피워낸 꽃이 아닌가? 저 치가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건 여기서 끝일걸세. 내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어.”
하지만 시험 중이기도 하고 저러는 꼴 자체가 내심 애잔하기도 해서, 얼굴만 외워놓고 한번은 그냥 넘어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들려왔으니….
“듣자 하니 말씀들이 심하십니다, 들?”
정현이었고.
“어이 거기 단목세가의 뭐시기! 그 전 재산 건다는 말 접수됐다? 낙장불입이야?”
은하성이었으며.
“괜찮으면 저도 걸어도 좋을까요? 저는 언 형께 걸겠습니다. 예.”
우소릉이었다.
…아니.
아니 기껏 넘어가려는데 니들이 여기서 왜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