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수치, 쭉정이, 도둑놈 그리고 망나니 (1)
찾아온 저녁 시간.
정무학관의 학관생 식당에서 자율 배식 항목이 아닌 요리를 배식받기 위해 식판을 들고 잠시 차례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무리 지어 밥이나 과일 등을 먹고 있는 다른 응시생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머릿수가 꽤 많이 줄었구나?
‘그러게요.’
- 어제의 너처럼 훈련을 한다고 빠진 인원은 없으려나?
‘아마 없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럴게 금일 석식 자리에서 입관처에서 다음 관문에 대한 사전 안내를 할 것이니, 참석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모든 불이익은 응시생 개인의 책임이라는 알림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런 알림문을 지나칠 사람은 없죠.’
원작을 읽었기에 대충 어떤 과제가 주어지는지를 아는 나도 혹시 모르니 오늘은 밥을 먹고 자리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빠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몇 놈이나 남았나 대충 헤아려 볼까?’
둘, 넷, 여섯, 여덟.
둘, 넷, 여섯, 여덟….
대충 헤아려 보니 현재 인원은 대략 오백 명 전후.
어지간한 세가의 본가 식솔이 모두 모인 수준의 인원이니 이 또한 많다면 많다고 할 수도 있는 수였다.
하지만 이곳에 발을 디뎠던 첫날은 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이 식당을 이용했었다.
‘응시생 개개인은 한참이나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했고, 응시생들의 먹성과 허기를 달랜다고 주사(厨师 : 요리사)들과 일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는 분위기였죠. 진짜 많이 줄기는 했네요.’
그날을 생각하니, 어쩐지 한산한 느낌마저 들 정도.
- 킬킬. 그때만 해도 네 녀석의 배에 붙은 정(丁)자를 보고 너 정도는 깔고 간다는 눈빛을 보내오던 북어 눈깔들이 몇 수레쯤은 되었었는데. 개중에 팔 할 이상이 떨어져 나간 듯하구나?
큭큭.
북어 눈깔들이 그렇죠 뭐.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과 잠시 킬킬거리고 있는 그때.
정무학관 학식의 인기 요리인 궁보계정의 배식을 담당하던 주사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맞지?”
“…예?”
“그 왜 첫날에 식당 앞에서 괴롭힘당하던 동무 구해주던 그 학생 맞지? 얼굴이 훤칠해서 딱 기억하고 있는데, 맞는 거 같은데?!”
뭔 이야긴가 했더니, 운혁 일당에게 갈굼을 당하고 있던 정현을 구해주던 모습을 보신 모양.
굳이 아니라고 잡아뗄 이유가 없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맞을 겁니다.”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때는 얼굴만 빼꼼 보였는데 이제 보니 정급 무사였구먼?! 다른 녀석들은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더만, 어떻게 그리 기특한 생각을 했누, 정급이면 이래저래 부족함이 많을 텐데! 아이고! 내가 학생을 그 비하하는 건 아니고오….”
“예.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 알아주니 고맙네에. 아무튼 그래도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남았네! 학생 같은 학생이 많아야지 우리같이 평범하게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살기가 좋아지는 법인데, 자자 식판 이리 대.”
아니 그랬더니 글쎄.
궁보계정이 한 움큼이나 내 식판으로 건너왔다.
“…이거 인당 다섯 개씩 아닙니까? 너무 많은데요?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나요?”
“되고말고. 여기선 내가 왕이야. 무림맹주도 뭐라 못해. 진즉에 발견했으면 계속 챙겨줬을 건데, 원체 학생들이 많고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알아봤네, 미안혀.”
“고고(姑姑)께서 미안하실 일은 아니죠.”
“오홍홍. 말도 이쁘게 하네, 여기 학생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아랫사람 취급하기 일쑨데.”
고고는 나이가 많은 여성을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전생에 이모 찾던 습관이 자연스럽게 나온 건데, 그게 마음에 드신 모양인지 안 그래도 산처럼 쌓인 궁보계정이 몇 개 더 추가됐다.
“동무들이랑 나눠 먹고. 마지막 관문 하나 남았으니 어쩌면 내가 챙겨 줄 수 있는 날이 한 끼밖에 안 남을 수도 있겠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내가 꼭 챙겨줄게. 힘내서 꼭 합격해!”
어떻게 보면 정급 무사 표식을 받은 이래 누리게 된 최초의 이득.
사실 나는 이미 합격 확실권에 들어간 몸인데, 주사 고고는 나를 안타까운 정급 무사라 오해를 하고 계신 듯했다.
하지만, 난 이 이득을 내일 아침까지 누리기 위해 그 오해를 수정하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궁보계정을 거짓말 좀 보태서 산처럼 배식받아와 맡아놓은 자리에 앉으니.
“…형님. 학식 주사 아줌마의 숨겨둔 아들 뭐 그런 겁니까?”
가장 먼저 하성이 녀석이 입을 열었다.
“…하성아?”
“닥칠까요?”
“그래.”
나는 하성이 녀석의 흰소리를 끊어 낸 뒤.
젓가락으로 궁보계정을 집어 내 자리에 붙어 앉은 녀석들에게 재배급을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미운 새끼지만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하성이 녀석에게 한 조각.
“가, 감사합니다. 언 형.”
그리고 비영파천보의 일등 공신인 소릉이 녀석은 세 조각 주려는데.
여기서 하성이 놈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아니, 모신 세월이 얼만데 우 동생이 세 개고 저는 한 개인 거죠?”
“…네가 나를 모신 세월이 정확히 얼만데?”
“저, 정확히요?”
“그래. 정확히.”
“어, 두 달 하고 보름 좀 넘었나요?”
“아니지, 앞의 두 달은 일방적으로 네가 나한테 교육을 받던 시간이었으니까 빼야지. 그러면 그냥 보름 정도지?”
그러자, 소릉이 녀석이 묘한 감탄사를 토해냈다.
“음? 언 형과 은 형이 아신 기간이 생각보다 얼마 안 되는군요?”
“…….”
은가 놈의 난 진압 완료.
그렇게 하성이 녀석의 난을 잠재운 나는 이제 언젠가부터 은근슬쩍 눌러앉은 정현을 응시했다.
무림학관의 검술천재 속 도가 문파는 곤륜, 모산, 무당, 종남, 화산파등이 있는데, 열거한 순서의 역순으로 속세화가 되어 있어서, 곤륜파를 제외한 다른 문파들은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개중에 정현의 사문인 무당파는 도호를 받은 진산제자는 처자식을 보는 것은 금하지만, 육식과 음주, 비린 것을 먹는 행위는 개인에게 맡겼다.
하여 원작의 정현도 이런저런 임무와 과업들을 수행하며 육포를 씹기도 했고, 누군가를 잃어 술이 필요했던 날엔 한두 잔을 걸치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지금도 그랬다.
애초에 정현은 궁보계정을 받아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걸 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데, 정현 쪽에서 먼저 식판을 내밀어 왔다.
“저도 주십시오.”
그 말에 나는 그래라 그럼 하는 심정으로 세 조각을 건네려다, 녀석이 걸어갈 고생길이 훤해서 특별히 두 조각을 더 건넸다.
그러자 녀석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안 줬으면 울었겠는데? 근데 그렇게 먹고 싶었으면 처음 받을 때 받지.”
“속세에선 가족을 다른 말로 식구(食口)라고도 한다죠. 밥을 함께 나눠 먹는다고요. 채식을 하던 게 버릇이 돼 놔서 안 받았는데, 언 소협과 은 소협, 우 소협을 보고 있자니 부러워져서요.”
크.
여윽시 주인공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만.
하성아. 새끼야 좀 보고 배워라.
옜다 두 개 추가.
그렇게 어찌저찌 패를 이루게 된 녀석들과 한 끼를 같이하고 귤도 몇 개 까먹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주목. 주목.”
교직원들과 도우미 선배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학관생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가 싶더니, 개중에 입관 절차를 진행했던 중늙은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첫날에 인사를 드렸지만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리겠소이다. 본인은 정무학관의 입관처장을 맡고 있는 임태옥이라 하외다. 사흘간의 피 말리는 시험에 참여하느라 응시생 여러분들의 심신이 고단할 것은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여러분의 발걸음을 잡아둔 것은, 내일 있을 관문에 관하여 공지할 사항이 있기 때문이오이다.”
그렇게 운을 뗀 입관처장은 좌중을 골고루 훑어 살피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아는 응시생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정무학관의 마지막 관문은 대대로 응시생들이 조를 이루어 치러야 하는 조별 과제를 부여해 왔소이다. 자세한 과제의 내용은 내일 공개될 예정이나, 조의 구성은 응시생들에게 시간이 필요할 터, 하여 이렇게 부득불 공지를 하는 것이오이다. 그러니 응시생들은 내일 오전 중으로 사 인 일 조의 조를 구성해 놓기를 바라오이다. 질문이 있으신 응시생은 기탄없이 손을 들어 주시겠소이까? 음 거기 계신 여협.”
“결원이 있는 조나 조를 구하지 못한 응시생은 어떻게 됩니까?”
“좋은 질문이오이다. 우선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를 구하지 못한 응시생들은, 같은 처지의 응시생들이 충분히 남아 있다면 거기서 조를 꾸릴 기회를 받게 될 것이나, 그 과정에서 일 점의 감점들을 받게 될 것이오이다.”
“충분히 남아 있지 않는다면요?”
“탈락이오이다. 물론, 그 시점에 결원이 있는 조도 같소이다.”
제법 냉정하게 맺어진 임태옥의 음성.
질문을 던졌던 여협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이건 비명문 출신에게 너무….”
“가혹하다? 글쎄올시다 응시생 여러분들은 임시긴 하지만 합숙 생활의 맛 들을 보셨을 텐데 그 과정에서 보여준 행실이 바르고 시험을 치르며 보여준 행보가 대단하다면 그럴 일이 없을 것이오이다. 특히나 이번 기수에는 정급 무사가 전체 석차 이 위를 기록 중인 것으로 아는데 그 응시생이 조를 구하지 못할 것 같소이까?”
“…….”
“더 이상의 질문은 필요가 없을 듯하니, 남은 공지를 마저 하도록 하겠소이다. 추가로 드릴 말씀은 일, 이, 삼, 오 점의 배점이었던 지금까지의 관문과 달리 마지막 관문은 이, 삼, 사, 오 점의 배점으로 시행될 예정이라는 것이오이다. 그러니 응시생 여러분들은 각자 뜻과 목표와 필요한 배점을 잘 고려하여 조원들을 구성하길 바라겠소이다.”
공지를 마친 입관처장은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인 뒤, 빠르게 학관생 식당을 벗어났다.
그러자, 이내 곧 좌중이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작을 읽은 나와 다르게 대부분의 응시생은 조별 과제가 마지막 관문에 배치되리라는 것을 알아도 그 인원수가 몇 명인지는 알지 못했을 테니까.
하여, 삼삼오오 갈려 있는 응시생 중 셋이 앉아 있던 곳은 급히 누군가를 데려와야 하고.
“삼 점짜리 배점의 시험에 도전할 용자를 찾고 있소이다!”
다섯이 앉아 있던 곳은 누군가를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안하게 됐네.”
“…너무하십니다! 쌓아놓은 점수는 제가 더 높은데 어째서 제가 나가야 합니까?!”
“가문의 일이 엮여 있어 어쩔 수가 없네, 자네가 이해를 좀 해주게. 그 성적이면 다른 조를 쉬이 구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나는 궁보계정 결의를 한 화상들이 ‘공교롭게’도 딱 넷이었다.
- 개판이로고. 개판인 와중에 네 식구는 어떻게 딱 네 명인건 또 신기하구나.
‘사부님?’
- ……?
‘접니다.’
- …….
하여, 그런 광경들을 ‘역시 인간은 재밌어!’하는 심정으로 사부님과 지켜보고 있는 이때.
앞선 관문에서 내게 전 재산을 내놓기로 약조를 한 단목원과 녀석의 옆에서 변죽을 울려대던 녀석, 그리고 기골이 떡 벌어진 처음 보는 녀석 이렇게 셋이 걸어와 내 앞에서 포권을 취하더니.
- 뭐냐 이놈들은?
‘그러게요?’
개중에 기골이 떡 벌어진 새 얼굴이 입을 열었다.
“황보준이라 한다.”
황보세가면 ‘무림학관의 검술천재’ 세계관에 정말로 천하 무림에서 방귀 좀 끼는 가문 중 하나다.
다섯 손가락에는 못 들어가도 열 손가락으로 손가락 수를 늘리면 가볍게 들어간다고나 할까?
가문의 위세와 가솔들의 쪽수만 두고 보면, 가세가 기울어 가는 내 본가 진주언가도 누를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황보준의 태도는 은근히 고압적이었다.
“듣자 하니 여기 내 벗들이 그쪽에게 무례를 좀 범했다던데, 내가 대신 사과하지. 그리고 그런 사과의 뜻으로 그쪽을 우리 패에 끼워주고자 한다.”
음, 내뱉는 말에 제대로 된 말이 하나도 없어서 어디서부터 걸고넘어져야 할지 참으로 다채로웠지만, 나는 개중에 가장 근본적인 선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걸고넘어져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이쪽은 이미 넷인데? 혹시 숫자를 헤아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나?”
그런 내 말에, 황보준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더니.
“그 넷이 옳게 된 넷이 아니니 하는 말 아니겠나?”
손가락으로 정현, 은하성, 우소릉을 차례대로 가리켜가며 말을 이었다.
“무당의 수치, 은가의 쭉정이, 족보도 없는 도둑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