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수치, 쭉정이, 도둑놈 그리고 망나니 (4)
“같이. 예. 형님. 꼭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는 생각이 짧았습니다.”
음?
용명이 녀석이 한 말 중에 생각이 짧은 부분이 있었나?
“제가 너무 제 마음만 앞세웠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형님께서 가문을 다시 돌아오시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고, 또 형님께서 이런 저력을 갖추시고도 망나니를 자처하신 사정도 있으셨을 텐데요.”
…음.
오해를 좀 이래저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형님 말씀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드네요. 저희 형제가 같이 정무학관에 입학하는 것 그게 첫걸음이겠습니다. 형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저 오해를 풀어 줄 방법도 없고, 어쨌거나 언용명은 내가 한 말들을 가슴에 새긴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조로 돌아가서 과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때 이 순간을 떠올려주겠지.’
하여 나는 피식 웃어 보이며 용명이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알면 됐다. 뭐, 그런 이야기는 이쯤 하고. 아침은 먹었냐?”
“아뇨. 아직입니다.”
“음? 조원들이랑 먹기로 한 거야?”
“아, 제가 형님을 기다리는 동안 제갈 소저와 당 소저 그리고 천 소협은 먼저 식사를 하고 갔습니다.”
반쯤은 밥은 먹었냐는 의례적인 물음이었지만,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보니 마침 그래도 정현과 언용명을 이쯤에서 면은 터놔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잘됐다 싶었다.
“그럼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 속이 든든해야 시험도 치는 거 아니겠냐.”
“예. 형님.”
그렇게 나는 용명이 녀석을 데리고 배식을 받으러 갔다가 주사 고고를 만났다.
“학생 왔구나?! 자자 받아.”
그리고 용명이 녀석의 오해거리가 한 개 더 추가됐다.
“…학관생 식당은 또 언제 어떻게 장악을 해놓으신 겁니까 형님?”
* * *
원작에서 용명이 녀석이 가져갔던 사건을 내 쪽에서 가져왔다.
게다가 용명이 녀석이 코빼기도 안 보이던 요 며칠 부쩍 정현과 내 관계가 돈독해져 버린 느낌이 들어서 괜찮을까 했는데.
“…와. 그래도 사람이 나름 세 명이라 볶은 장어가 세 접시는 되니, 열두 마리 정도는 배급을 받은 건데, 어찌 된 게 꼬리가 하나도 없나 했더니… 용운 형님 식판에 들어가려고 다 숨어 있었나 보네요.”
“확실히 꼬리들이 그렇게까지 없는 건 육식을 한 지 얼마 안 된 제가 보기에도 좀 이질적이긴 했었습니다. 저렇게까지 한 식판에 몰려 있는 것도 좀 이질적이긴 하군요.”
“…음. 그런데 뭐 나쁠 건 없지 않나요? 오늘 장어 요리가 나온 게, 마지막 과제를 앞두고 응시생들은 없는 힘도 끌어다 좋은 성적을 내라는 뜻이라던데 언 형은 저희 조장이시니까?”
“소릉 동생 말도 맞긴 하는데, 나는 맞냐 안 맞냐를 떠나서 원인이 궁금하다는 거야, 진짜 주사 아주머니의 숨겨둔… 이라고 하기에는 또 데리고 오신 친아우분의 식판은 우리 거랑 다름이 없네?”
“더 먹고 싶은 녀석은 나눠 줄 테니까 흰소리들은 그만하고, 이쪽은 아까 말했듯이 내 친아우. 언용명.”
“반갑습니다. 아까는 저희 집안 사정으로 저도 형님을 오랜만에 뵙는지라, 경황이 좀 없어서 제가 먼저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빈도는 정현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작은 언 소협.”
“우, 우소릉이라고 합니다.”
“은하성입니다. 용운 형님과는 거의 의형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형제의 형제니까 형제처럼 대해주시면 되겠는데. 그전에 서열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원작 소설의 인물 간에 인력(引力)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사 고고가 오늘도 한 건을 해주신 덕인가?
아무튼 왁자한 와중에 첫인사를 트게 된 덕분에, 언용명은 우리 무리에 적당히 녹아들 수 있었고.
“형님 말씀대로 실제로 접해보니 유쾌한 분들이시네요. 형님이 이끄시는 조의 건승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용명이 너도 열심히 하고 나중에 또 보자.”
좋은 느낌으로 안면을 튼 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렇게 언용명과 헤어진 뒤, 우리 조도 잠시 흩어져서 개인 정비 시간을 가졌는데, 그러고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앵~!! 하고 쇠 북이 울렸으니.
곧 시험이 시작된다는 알림이었다.
그 소리에 의관을 바르게 하고 숙소 밖으로 걸음을 옮기니, 도우미 역을 맡은 선배가 내공을 실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집결지에 관한 안내를 해왔다.
“마지막 과제의 출발지는 사대 기숙사 정 가운데에 위치한 학관생 광장이다. 그곳에 가 대기하고 있으면 곧 교수님들께서 오셔서 마지막 과제를 공개하시고 시험을 주관하실 것이다. 다시 한번 알린다….”
그 말에 따라 우리는 학관생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그렇게 학관생 광장에 도착해보니, 거대한 족자가 걸린 장대가 네 개나 세워져 있는 가운데, 구석에 마련된 접수처에서 조를 접수하고 있었다.
간밤의 석식 시간에 공지된 조원의 명수인 네 명으로 한 줄을 이룬 사열 종대로 응시생들.
나도 화상들과 열을 맞춰 그 줄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때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가만 보니 창구를 하나만 더 늘려 줘도 될 텐데 아주 사람을 가는구나 갈아.
‘…누구요? 저 비색(翡色) 무복을 입은 조교 선생님들이요?’
- 그래. 내 첫날부터 보아하니 묵, 금, 홍, 청. 네 개의 기숙사를 상징하는 색의 의복을 입은 녀석들은 좀 돌아가면서 쉬기라도 하는 것 같던데, 저 비색 무복을 입은 녀석들은 늘 부족한 머릿수로 퀭한 얼굴을 하고서 교수 옆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던데….
앞선 관문들로 인해 응시생의 인원이 줄었다 하나, 그에 맞추어 배치되는 인력도 줄었다.
하여 오늘도 조교 역을 맡은 도우미 선배님은 피곤해 보였다.
오죽하면 사부님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정도.
- 저놈들은 정무학관에서 부리는 노예냐?
‘노예는 아니고 대학원생들입니다….’
어?
그게 그건가…?
- 대학원생?
대학원.
대학이라는 말이 애초에 사서삼경의 대학(大學)에서 비롯된 말이라 원작의 작가가 차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림학관의 검술천재’ 속에도 대학원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뭐, 실정이나 처우는 이곳의 대학원도 미래의 그것과 비슷하기는 했다.
…아무튼 여기선 원론으로
‘예. 정무학관에 대학원이라는 조직이 있고 거기서 수학하는 선배님들을 대학원생이라고 합니다. 학관보다 좀 더 상위 교육 기관인데, 졸업생 중에 장차 교편을 잡겠다는 생각이 있거나, 학관에 남아 자신의 무학이나 학문을 연구하겠다는 뜻이 있어 교수님들을 돕고 있는 분들이죠.’
그렇게 사부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찾아온 우리 차례.
“그렇게 넷이 한 조인가?”
“예. 선배님.”
“번호와 이름만 간략하게 말하라. 조장은 맨 마지막에 답하고.”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조교님의 눈매가 한층 더 퀭해 보이기에, 나는 그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나는 화상들에게 턱짓으로 빨리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에 은하성이 우렁차게 입을 열었다.
“팔십 번 응시생. 이름은 은하성입니다.”
“은하성. 알았고, 다음.”
소릉이 녀석도 제법 자신감 있게 제 이름을 말했다.
“구십구 번 응시생 우소릉이에요.”
“우소릉.”
정현이야 뭐.
“이백구십팔 번 응시생 정현이라합니다.”
“정자 배면 무당의 삼대 제자인가 보구만, 알았고. 다음.”
흠잡을 데가 없고.
그리고 찾아온 내 차례를 맞아, 나도 빠르고 정확하게 번호와 이름을 말했다.
“칠십구 번 응시생 언용운입니다.”
“…음. 언용운?”
그런데 내 차례에서 조교 선생이 놀리던 붓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예. 맞습니다.”
“그.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그 친구?”
그에 나는 뭔 일이 있나 싶어 잠시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황보준과 아이들이 간밤의 사태를 떠벌렸을 연유는 없고.’
향란관 선배들과 얽힌 일도 애초에 선을 넘은 쪽은 선배들이었기에 그 문제가 지금 불거질 이유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하여, 나는 이런 의문을 들게 한 조교 선생 본인에게 답을 얻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언용운 맞습니다.”
“…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있지. 문제. 자네가 정말로 대력궁을 부러뜨리고, 도화진을 파훼했으며, 한영 교수님의 입에서 자신의 수업을 들어 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은 게 맞다면.”
엥?
이게 무슨 소리지?
“혹시 내가 열거한 사실들 사실과 다른 게 있나?”
“다 사실입니다.”
“큰일이군.”
이 양반 표정을 보니 정말 나를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근데 나로서는 왜 저런 눈빛을 보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근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거고 큰일이라는 거죠?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 내 말이 좀 다르게 들렸나 보군, 입관 시험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닐세,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네가 너무 눈에 띄어서 몇몇 교수님들께서 주목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그게 문제가 됩니까?”
“충분히 되지. 자네도 대학원이라는 조직에 대해 들어 보았을 테지?”
“정무학관의 상위 교육 기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들 알려져 있으나. 그게 다는 아닐세….”
“아….”
어쩐지 분위기가 절로 숙연해지는 가운데.
조교 선생님은 나를 향해 계속해 말을 이었다.
“자네는 모든 분야에서 명문대파의 후기지수를 누를 정도로 빼어난 모습을 보여줬네. 한데 되돌아갈 본가도 없지. 그 말인즉 학관 내 최고의 노예… 아니 일꾼… 아니 대학원생이 될 자질을 갖춘 걸세. 근데 그 사실이 이미 교수님들 사이에 공공연히 퍼졌지, 나 같은 조교 나부랭이도 알고 있을 정도로 말이야.”
“아…. 음. 이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네요.”
“…조심하게. 보아하니 합격은 따놓은 당상으로 보이네만, 합격이 끝이 아닐세. 장차 여러 교수님들께서 자네에게 제안을 빙자한 유혹을 해오실 테지.”
“……!”
“…한 귀로 흘려 보낸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네만, 진심을 다해 충고하네.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아름다운 미래와 밝은 내일에 속아 나처럼 평생을 저당 잡히지는 말게. 자네가 과거의 나 같아서 하는 말이야….”
조교 선생에게서 전해지는 먹먹한 진심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오백여 명에 달하는 응시생들의 조 등록 절차가 끝나자, 어느덧 익숙해진 초로인 인 입관처장 임태옥을 필두로 낯이 익은 교수님들이 학관생 광장에 당도했다.
- 면면들이 이전 관문들의 감독관들이로구나?
‘그렇네요. 입관의 임태옥, 경신의 한영, 파훼를 담당했던 제갈민, 나머지 네 명의 교수 중엔 팽재혁 한 명만 면이 있긴 한데 남은 셋은 각각 갑 · 을 · 병의 난도를 담당했던 교수들일 겁니다.’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입관처장 임태옥이 앞으로 나서며 마지막 관문의 시작을 알렸다.
“입관처장 임태옥이오이다. 우선 이 관문에 도달한 응시생들과 그런 응시생들을 길러낸 문파, 세가, 기인이사들께 경의를 표하겠소이다.”
그렇게 운을 뗀 입학처장이 좌중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이자, 입관처장 뒤에 서 있던 여섯 명의 교수님들도 동시에 포권을 취했고.
그에 응시생들도 일제히 포권을 취했으니, 나름의 장관이었다.
하나, 그 나름의 장관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마지막 관문의 안내를 시작하겠소이다. 마지막 관문은 무당산에 흩어져 있는 이, 삼, 사, 오 점의 배점이 부여된 구슬 찾아오는 것이오이다.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에 앞서 그 구슬들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는 지도 배부가 있겠소이다. 조교 선생님들과 도우미 역을 맡은 재학생들은 준비된 지도를 각 조의 조장에게 전달해 주시면 되겠소이다.”
그렇게 마지막 관문의 막이 올랐다.
나는 조교에게 지도를 받자마자, 빠르게 훑었다.
‘역시 생각대로네.’
예상대로 오 점이라는 숫자가 적힌 곳은 단 한 곳뿐.
나는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조원들은 아직 모르는 정보, 나는 일단 지도를 조원들에게 넘겼다.
그러자 훗날의 천하제일쾌답게 가장 먼저 번개 같은 독도법으로 가장 먼저 지도 파악을 끝낸 우소릉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 언 형. 아무리 찾아봐도 오 점이라고 쓰인 구슬이 있는 곳은 딱 한 곳밖에 없는데요?”
나는 그런 우소릉의 어깨를 두드림과 동시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한 개뿐인 구슬을 우리가 차지하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