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수치, 쭉정이, 도둑놈 그리고 망나니 (5)
내 말에 우소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정현과 은하성도 입을 열었다.
“우 소협. 본디 일의 성사는 하늘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정현 도장, 하늘이 달린 게 아니라 용운 형님이 된다면 되는 겁니다.”
뭐, 보기 나쁘지 않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검지를 세워 입술 앞에 가져다 놓으며 조용히들 하라는 태도를 취해 보였다.
“쉿쉿. 이거 단순하게 구슬만 찾으면 되는 시험이 아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입관 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조별 과제 관문은 단순히 구슬만 가져오면 되는 보물찾기류의 시험이 아니었다.
‘부여되는 시제와 추가되는 과제가 있지.’
원작을 읽었기에 아는 사실이었지만 둘러댈 말은 있었다.
“단순히 숨겨져 있는 보물만 찾는 시험이면 이렇게 지도를 나눠주지도 않았을 거다. 우선 입관처장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듣자.”
그러자 화상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입관처장 임태옥의 입이 재차 열렸다.
“응시생 중엔 나이가 제법 찬 협객도 있을 것이고,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소년 장사도 있을 것이니, 직접 겪어본 사람도 있을 테고 들어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텐데. 강호 무림에서 백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곤혹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놓이곤 하오이다. 하여 본 학관에서는 그런 선택의 기로 중 극단적인 예 하나를 시제로 마련해 보았소이다.”
그렇게 입관처장이 운을 떼자, 학관생 광장의 중심에 마련되어 있던 장대에 걸린 거대한 족자들이 촤르륵 펼쳐지며 안에 들어 있던 시제가 공개됐고.
그에, 화상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구세(救世), 활인(活人), 협력(協力), 마지막 하나는 나누어준 지도를 크게 그려 놓은 것이로군요. 언 소협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통찰력이세요.”
“그니까 용운 형님만 믿으면 된다니까 그러네.”
나는 다시 한번 검지를 입가에 세워 그런 녀석들을 다시 한번 가라앉혔다.
“우선은 구세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소이다. 응시생 여러분들이 찾아와야 할 구슬. 본 학관은 그 구슬을 마인(魔人)들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위태롭게 만드는 어떤 물건이라 가정했소이다. 응시생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면 저들이 천마(天魔)라 떠받드는 마교의 교주를 이롭게 할 영약이라 본다 이 말이외다.”
그러는 사이 입관처장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물건이니 당연히 그것을 지키고 있는 마인들이 있소이다. 지도에 적혀 있는 이, 삼, 사, 오 점의 배점은 구슬을 지키고 있는 마인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고. 만고의 영약이 천마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되찾아온다. 이것이 구세이올시다. 여기까지 중에 이해가 되지 않아 질문이 필요한 부분이 있소이까? 음, 거기 계신 소저.”
“지도에 나와 있는 배점이 곧 그곳을 지키고 있는 분의 수준이라고 하셨으면 사람이라는 이야기고 그 말인즉 대련을 해야 한다는 이야긴데 쓰러뜨려야 하는 것인지요?”
“음. 사실 응시생들의 수준으론 쓰러뜨리기는 힘들 것이오이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만 오 점짜리 구슬은 단 하나 이곳에는 작풍월개라 불리시는 노삼 선배께서 담당을 하고 계시오이다. 사 점은 여기 계신 교수님 중 무위 시험을 담당했던 네 분이, 삼 점과 이 점은 평소 학관의 방호를 책임지는 수위부의 조장과 조원들이 담당할 텐데 그들 모두가 여러분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수학을 마친 선배들이니 쓰러뜨리기는 어려울 것이오이다.”
“…그럼?”
“쓰러뜨릴 수 있으면 쓰러뜨려도 좋으나, 나름의 수를 강구해서 인정을 받아내면 담당관들이 구슬을 내주실 것이오이다. 또 다른 질문이 있는 응시생? 없다면 다음 시제로 넘어가겠소이다.”
그렇게 첫 번째 시제의 설명을 마친 입관처장은 걸음을 첫 번째 족자에서 곧바로 네 번째 족자로 옮겼다.
그리고 조교에게 지휘봉을 하나 건네받아 지도상의 우측 하단을 가리키더니.
“다음은 활인. 대부분의 응시생은 지도를 받고 좌측에 그려져 있는 무당산(武當山)에 적혀 있는 구슬의 위치만 신경을 썼을 것이오이다. 하지만 여기 우측을 보면 융중산(隆中山) 아래 제갈가(諸葛家)에 의원(醫院)이라는 표식을 해두었소이다.”
이어서 지도상의 좌측 하단을 가리켰고.
“무당산의 초입에 들어서면 마인들의 독에 당한 환자(患者) 역을 맡은 도우미 선배들이 있을 것이오이다. 그 환자를 융중산의 제갈가에 데려다주고 확인표를 받아오는 것. 이것이 활인이올시다.”
다시 지도의 상단에 있는 정무학관의 표식을 가리켰다.
“종합하면 각 조별로 구슬 한 개와 환자 한 명을 구해 확인표를 받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면 되겠소이다. 이 과정에 네 명의 조원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불가할 테니 그것이 협력이오이다. 이것으로 시제 발표가 끝났소이다. 혹, 질문이 있는 응시생 계시오이까? 음, 거기 있는 공자?!”
“남궁가의 윤이라 합니다. 무림 말학이 대선배님께 몇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질문하시오.”
“우선 환자들의 상태도 저희가 가늠을 해야 하는지요? 만약에 조원 중에 의학이나 본초학에 능한 자가 있다면 자체적으로 해독을 해도 되는지 그리고 다 해서 얼마만큼의 시간이 주어지는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환자의 상태는 응시생들이 가늠을 해야 하오이다. 하나 응급조치는 필요치 않소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실전과 달리 시험을 위해 마련한 연습 상황인 만큼 인체에 유해한 독을 사용한 게 아니기 때문이오이다. 마비산(痲痹散)이라고 약왕(藥王)께서 사용하시는 가루약을 사용한 것이라 무해한 것이니 별도의 응급조치는 필요치 않소이다. 이해가 가시오이까?”
“예. 그 부분은 이해했습니다.”
“남은 부분은 시각에 관한 부분이시겠구려. 좋은 질문이오이다. 총 시험 시각은 한 시진이오이다. 단, 앞서 말한 마비산을 들이킨 환자들이 때가 되면 알아서들 눈을 뜰 것인데, 그 시점을 제대로 가늠치 못하여 환자들이 눈을 떴을 때 제갈세가에게 만들어 놓은 의원에 도착해 있지 않으면 낙제(落第)가 되겠소이다.”
“말학의 우문에 답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자, 그럼 마지막으로 탈락 사유를 종합하면 구슬을 획득하지 못해도 탈락, 환자의 가늠을 제대로 하지 못해 도중에 환자가 눈을 떠도 탈락, 제한 시간 안에 여기 학관생 광장으로 돌아오지 못해도 탈락. 시험 시작은 일 다경 후에 쇠 북이 울리는 때. 그럼 이 늙은이는 응시생들의 건승을 빌며 물러나겠소이다.”
* * *
시제 발표가 끝났다.
“낙제 요소가 이렇게 많고 시간 제한도 이중으로 있는데, 구슬은 단 하나고 지키고 있는 사람은 작풍월개라고? 이거 오 점짜리에는 응시하지 말라는 거구만.”
“오 점이 뭔가, 작풍월개 교수님이 오 점이면 사 점에도 사감급 교수님이 있을 수 있다는 소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꿈도 꾸지 말아야겠어.”
주어진 일 다경의 시간 동안 응시생들은 열띤 전략 회의들을 벌였다.
“이거 상정한 것보다 난도를 낮춰야겠소이다. 약학이나 본초학에 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운에 맡겼다가 환자가 눈이라도 뜨면 그대로 탈락이잖소? 가장 걸리는 시간이 짧은 동선으로 구슬을 획득하고 환자를 구하는 것으로 수정합시다.”
“끙. 그렇게 되면 형장의 점수가 간당간당해질 텐데 그래도 좋겠소이까?”
“어쩌겠소, 여기까지 왔는데 낙제 탈락을 할 수는 없지. 쓱 둘러보니까 다른 조들도 대부분 난도를 하향하는 분위기더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럽시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아직 덜 영근 후기지수.
다방면에 뛰어난 인재 자체가 드물고, 낙제 탈락을 당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두루두루 벗을 사귀어 조를 구성한 자들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네 명 중에 지도를 볼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 이거 실화요?”
“너무 그러지 마시오. 조장도 마찬가지면서.”
“아니 뭐라 하는 게 아니고 나도 당황을 해서 그렇소. 마차나 타고 끽해야 말 타고 관도나 다닌 게 단데. 독도법을 알아야 하다니 이런 건 아랫것이나 돈 만지는 노랭이들이나 배우는 게 아닌가.”
물론, 그런 응시생 중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발언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 쯧쯧. 평소에 저런 생각이나 하고 사니까 곤혹스러운 광경에 빠지는 게지.
녀석들을 보며 사부님께서 혀를 차며 한마디를 하셨다.
그런 사부님의 음성에 나는 피식 웃으며 사부님께 생각을 전했다.
‘거쳐온 관문 중에 인성을 가늠하는 관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죠. 아니다, 이번 관문에서 저러다 떨어지면 이번 관문이 또 그런 부분을 확인한 게 되겠네요? 생각보다 치밀하네 정무학관. 아무튼 저런 걸 보면 꼭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건 아닌가 봅니다. 명문가 녀석 중에 저런 놈들이 은근히 많네요.’
- 한데 제자야.
‘예?’
- 그런데 너희는 저런 회의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다들 심각해 보이는데 너희 조만 놀고 있구나.
‘에이, 놀고 있다뇨. 저 녀석들과 저희를 한번 번갈아 보십시오. 뭐가 느껴지십니까?’
- 수치, 쭉정이, 도둑놈, 망나니?
‘…….’
- 농담이니라.
‘저놈들이 아무리 입이 부르트도록 해봐야 고작 뱁새들입니다. 반면 저희는 봉황이죠. 일 다경쯤 쉬더라도 우월한 차이로 따돌릴 수 있는 아예 종자가 다른 놈들이라 이겁니다. 파천검문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와 그 제자가 선택한 녀석들 아닙니까’
- 흥. 말은 잘하는구나.
‘예. 다 생각이 있습니다. 근데 그 생각을 떠벌렸다간 귀 밝은 녀석들이 주워 먹을지도 몰라요. 사부님은 그 꼴 참으실 수 있으십니까? 일단 저는 못 참습니다.’
- 나도 못 참느니라.
‘사전제전(師傳弟傳)이군요.’
- …에이. 아무리 그래도 용운이 너랑 닮았다는 것은 좀.
‘……?’
- ……?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때.
징~~~
마지막 시험을 알리는 쇠 북이 울렸다.
그에 사 인 일 조를 이룬 응시생들이 앞을 다투며 득달같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 나는 그들과 섞여 달리는 대신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귀 밝은 녀석들이 있을까 봐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내심 의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기다려줘서 고맙다.”
“형님이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죠.”
“…하성아. 너는 가끔 보면 뇌를 나한테 맡겨놓은 것 같다?”
“헤헤. 앞으론 제 것도 좀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차피 형님 말 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
그렇긴 하네?
“…잘했다.”
“헤헤.”
“근데 언형 저희 완전 뒤처진 것 같은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요?”
“저도 그 부분은 의아합니다. 언 소협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의아한데 연유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우소릉, 정현. 쟤들이 왜 저렇게 달려가는 줄 알아?”
“…글쎄요?”
“음, 시간이 촉박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단강구에서 무당산, 무당산에서 다시 융중산, 거기서 다시 단강구, 가장 작은 크기의 삼각형을 그려도 시간이 많이 소모되고 배점이 높은 구슬일수록 고지에 있으니 그 삼각형의 크기가 커지니까요?”
“소릉이 너도 자신의 뇌를 쓰는 연습을 하기로 하고 정현은 절반만 맞았다.”
“음. 다른 이유가 더 있습니까?”
“어. 못 믿어서.”
그런 내 말에 정현이 골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못 믿어서요?”
“그래 서로 못 믿어서 시간이 부족한 거야. 애초에 저렇게 넷이서 몰려다닐 필요가 없어. 환자를 의원에 데려가는 과정에는 방해 요소가 없다 했으니 조를 나눠서 한 조는 구슬을 구하고 다른 조는 그러는 동안 환자를 의원에 맡기고 표를 받아 복귀해 있으면 돼.”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조를 짜는 것부터 해서 일련의 시험 과정에 몰입해 있어서 사고가 완전히 갇혀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크. 역시 용운 형님이십니다!”
“대단하세요.”
“대단한 게 아냐. 이 생각엔 서로 신뢰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만 해도 각자 기록하고 있는 점수가 다르잖아? 그렇게 나눠진 조 중 한 명이라도 반대편을 믿지 못하거나 억하심정을 품어버리면 남은 모두가 낙제를 받을 수가 있어.”
여기까지 말을 잇자.
정현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근데 저희는 가능하겠군요?! 서로 간에 신뢰가 있으니까요?!”
정현이 제법 기특한 소리를 하기에 나는 그렇다는 말을 돌려주려 했다.
- 큭큭큭.
그런데 이 타이밍에 스승님께서 갑작스레 웃으셨다.
웃음이 나올 순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기에 연유를 여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 웃으십니까?’
- 거, 서로 간에 신뢰가 있다는 말이 재미있지 않느냐.
‘뭐가 말입니까?’
- 아니, 내 눈엔 서로 신뢰하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네 녀석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녀석들은 서로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모두 나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 큭큭. 꼭 어미를 보는 병아리들 같지 않느냐?
아니, 뭐 그런 종류의 신뢰도 있는 거죠.
뭘 모르시네!
그리고….
‘꺼병이로 가시죠. 저 화상들이 병아리면 제가 닭이라는 소린데. 꿩 정도는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