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8화 (48/444)

제48화. 광풍투개 (3)

나와 정현의 합격이 슬슬 맞아 나가자, 언젠가부터 노삼 교수님이 슬슬 빈도를 높이기 시작하시더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좌수에서부터 끝도 없이 펼쳐져 나오기 시작한 장법.

‘항룡십팔장!’

용도 무릎을 꿇린다는 그 이름답게.

꽈릉!!!!

우릉거리는 용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어마무시한 장력이 쏟아져 나온다.

일말의 방심 혹은 한 걸음의 부주의라도 범했다간, 머리 혹은 팔다리 그러니까 오체(五體) 중 어느 한 곳은 분명히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해볼 만은 해.’

그도 그럴 게.

노삼 교수님은 좌수만 사용하고 계셨기에 지금의 내 수준으로도 아슬아슬하게 쳐낼 수 있었다.

팡!!!!

게다가 본디 권법과 장법이라는 것은 양손을 사용해야 변초와 허초 그리고 진초를 쉬이 섞을 수 있는 것인데, 한 손만 사용하고 계시다 보니 사각과 빈틈이 드문드문 발생했다.

‘조금 전에 그 빈틈을 치고 들어갔다가 호되게 혼이 나긴 했지만.’

물론, 노삼 교수님은 그 빈틈들을 오히려 허초로 삼는 신기를 보여주시고 있긴 했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 순간을 그저 호흡을 돌릴 순간으로 삼으면 위기에 빠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거기다 정현도 있고.’

반대편에서 끊임없이 무당의 검초를 이어내고 있는 정현.

녀석은 세 명이 맞붙기에 정신없이 초식이 맞붙었다 떨어지고 서로 간의 보법이 사방에 발자국을 찍어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정동(正東)의 방위를 점하며 푸른 검기를 흩뿌렸다.

그러니까 노삼 교수님의 권장이 폭풍우라면 정현은 등대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물론 등대가 아무리 밝다 해도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배를 띄우는 일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노삼 교수님의 뒤를 찌르러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그 폭풍을 베어 버릴 수 있는 길을 엿본 것 같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그 길만 온전히 이어낸다면.’

굳이 우소릉이라는 비장의 수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 푸른 등불을 벗 삼아, 우수에 쥔 회한을 삿대 삼아 이 폭풍을 충분히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사지임을 느껴 살고자 쳤던 발버둥이었지.’

그로 인해 제한될 수밖에 없던 보법에서 펼쳐진 검식은 파천검법 특유의 강맹함이 크게 떨어졌었다.

‘하지만 유연했고 빨랐다.’

그 순간 나는 왜 내 검은 정현의 것처럼 물 흐르듯 이어지지 않는지에 관한 해답을 조금 엿봤었다.

나는 그 순간에 엿보았던 묘리를 떠올리며 다시금 파천의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쌔액!!!

사실 지금의 나는 절대로 파천검결에 무언가를 더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 덜어내는 것은 가능했다.

‘한 보를 밟던 것을 반 보로.’

사부님이 알려주신 파천검결의 선삼초.

그 초식의 형식에 사로잡혀 무의식중에 행했던 동작들.

그 동작들 중 강맹함을 더하기 위해 존재하는 내딛음과 뻗음을 조금씩 덜어내 본다.

‘한 치를 뻗던 것을 반 치로.’

그러자 회한에서부터 맹렬하게 휘갈겨지던 초식들에서 강(强)과 맹(猛)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런 내 검초에 노삼 교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

“언가야! 기운을 차려 보아라! 슬슬 힘이 빠지는 게냐?!”

하지만, 그 자리를 유(柔)와 연(軟)이 더해지며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로로 내려 베는 초식인 파천낙뢰(破天落雷).

가로로 그어 베는 초식인 파천선풍(破天漩風).

직선으로 찔러 들어가는 초식인 파천맹진(破天猛進).

이른바 파천 검법의 선삼초를 묶어내는 선명한 길이.

그 길을 보고 나니 내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거 애초에 새로운 초식 같은 게 아니구나?’

강맹함을 덜어낸 선삼초가 맞물리며 만들어지는 초식이 파천검법에 애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로 잰 듯 맞물릴 리가 없었다.

그에 확신을 얻게 된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그 길을 잇기 시작했다.

“힘이 빠지긴요. 지금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나는 그 길을 잇고, 잇고, 또 이었다.

처음 몇 초는 내가 보기에도 서툴고 투박했다.

하지만 그렇게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 회한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는 사이, 어느새 완벽하게 이어지고 연결된 초식은 곤곤히 흐르는 장강처럼 끝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쌔애액!

정현이 펼치는 무당의 검을 보고 던진 물음 끝에 도달한 초식이었지만, 무당의 검과는 그 결이 완연히 달랐다.

녀석의 검이 태극의 묘리를 담고 면면부절 이어지는 녀석의 검이 본류(本流)라면.

내 검은 파천의 묘리를 품고 굽이쳐 흐르는 격류(激流).

쌔애액! 쌔애액! 쌔애애액!!

그렇게 내가 펼쳐내기 시작한 검초에 사부님께서 낯간지러운 소리를 전해 오셨다.

- 킬킬킬. 길이 보인다 어쩐다 할 때부터 감을 잡았나 싶더니만, 여기서 계단 하나를 오르는구나! 그것이 바로 파천검법의 본사초 중 하나인 파천격류(破天激流)다!

‘…역시. 이거 원래 있는 초식이었군요?!’

- 오냐! 어미새가 알을 품어 줄 수도 있어도, 껍질은 스스로 깨야 하는 법. 내가 새겨준 선삼초의 식을 완전히 익히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고, 그 과정에서 너무 사로잡혀 버리면 발견할 수 없는 계단! 그 계단을 스스로 올랐구나!! 네 성취가 젊은 날의 나보다 족히 두 달은 빠르니, 하늘에 계신 네 조사님께서도 함박웃음을 지으실 것이다! 하하하!!

그렇게 손에 들린 사부님께서 껄껄 웃으시는 이때.

노삼 교수님의 낯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그야 그럴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이, 이놈이 갑자기 만년설삼이라도 주워 먹었나?!”

“이제 시작이라고 했잖습니까?”

쌔액! 쌔애애액!

꽝!! 콰아앙!!!

항룡십팔장이 하늘을 나는 용이라면, 파천의 검결은 그 하늘을 찢어발기는 검.

곤곤히 쏟아지는 내 검격이 용이 뛰노는 하늘을 흔들었고.

면면부절 이어지는 정현의 검이 하늘을 빼앗긴 용이 내려앉고자 하는 대지를 장악했으니까.

쌔애애액! 쌔애애애액!!

팡! 팡!! 팡!!!!

“이, 이런 육시럴 놈들을 보게?!”

그에 지친 외팔이 용은 결국 양방을 향해 쌍장을 날렸고.

“네놈들은 어른 공경이라는 게 없느냐?! 숨 좀 쉬자 이놈들아아아!!!!!”

나는 그런 용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 양손 사용하셨습니다.”

* * *

양손을 썼다는 칠십구 번 응시생 언용운의 말.

그 말을 들은 노삼은 망연자실하게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염병. 그렇네?’

자존심이 상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오랜만에 재미 좀 보나 했는데 이렇게 끝이라고?’

노삼은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작풍월개라는 별호가 붙은 뒤로 천하의 사람들은 노삼을 너무도 게을러 빌어먹는 것조차 포기한 거지 취급을 했고, 학관생들도 수업 편하기로 유명한 교수 중 하나로 취급했다.

하지만 사실 노삼은 거지 중에 가장 부지런한 축에 속했다.

그럴게 작풍월개라는 별호가 붙기 전에 노삼에게 붙어 있던 별호는 광풍투개, 그러니까 싸움에 미친 거지였다.

거지가 싸움에 미치려면 엄청나게 부지런해야 했고 가슴에 품은 뜻이 분명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시절 호승심에 취해 품었던 뜻보다 후학 양성이 중요하겠다는 깨달음을 얻고 새로이 뜻을 세워 교편을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백도 천하가 너무도 공고하여 그런 것일까?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교편을 잡고 보니, 후학이라고 들어오는 후기지수들은 협이나 무를 쫓는다기보다는 학관을 졸업했다는 지위만을 탐내는 듯했다.

‘기본기는 소홀히 하고 뭐든지 적당히 하려는 녀석들이 줄을 이었지.’

하여, 노삼은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한데, 입관을 희망하는 눈앞의 두 응시생은 지금까지 받아온 후기지수들과 그 결이 좀 달라 보였다.

‘기본기가 아주 탄탄해.’

정현이라는 녀석은 무당의 어린 도사로 보이는데, 근래의 무당의 검수들이 태청검(太淸劍) 계열의 화려한 검술에 눈을 돌리니 어린 제자들도 소청검(小淸劍)으로 검공을 시작한다.

‘한데 저 녀석은 태극검(太極劍)을 익혔더란 말이지?’

그것도 아주 진득하게 태극검만 후벼 판 게 분명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놈은 그 옆의 언용운이라는 녀석이었다.

‘강맹하기 그지없는 처음 보는 검초에 처음에는 마공을 익힌 줄 알았지.’

하지만 마공 특유의 사특한 기운이 없었고, 자세히 뜯어보니 그 초식은 결국 가로 베고 세로 베고 찌르는 초식.

그러니까 저잣거리에서 닷 푼이면 배운다는 삼재검법에 독특한 보법과 심법이 더해진 것이었다.

‘삼재검법을 저 정도로 후벼 팠다고?!’

이 무슨 달마대사도 울고 갈 끈기란 말인가?!

그런데 끈기만 있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이 짧은 순간에 성장했다.’

붙느냐 떨어지느냐가 갈리는 살 떨리는 고비에서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을 두고 성장을 해내는 엄청난 재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저 실력들로 오 점짜리를 치러왔다는 말이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저만한 녀석들이 다른 관문에서 점수가 구릴 리가 없었다.

그 말인즉 호승심이 있다거나 조원 중에 점수가 부족한 자가 있다는 결론이었다.

전자는 무(武)였고 후자는 협(俠)이었다.

무당의 제자를 빼앗을 수는 없으니 어린 도사 놈은 그렇다 치고, 언가 녀석은 수제자로 삼고 싶을 정도의 인재였다.

하지만 아직 저 녀석의 오성과 심지에 대한 확신이 선 단계는 아니었다.

‘씁. 조금만 더 어울려보면 알 수 있을 성싶은데?!’

이 순간 권태가 차지하고 있던 노삼의 가슴속에 있던 아궁이에 오랜만에 불이 지펴졌다.

찾고자 했던 후학을 만났다는 열망이라는 불과 과거 광풍투개라 불리던 시절에 갖고 있던 열정이라는 불이.

그에, 평소에 잘 쓰지 않던 노삼의 머리가 오랜만에 굴러가기 시작했다.

‘임 처장이 총 시험 시간이 한 시진이라 그랬고, 환자가 깨어나는 시각이 그 절반쯤이라고 그랬지? 이거 조금은 더 어울려봐도 괜찮은 거 아닌가?’

* * *

양손을 썼다는 내 말에, 내놓으셔야 할 구슬은 내놓지 않으시고, 턱을 싸쥐고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시는 듯한 노삼 교수님.

그런 노삼 교수님의 모습에 사부님께서 혀를 차고 나서셨다.

- 저, 저, 거지새끼 눈알 굴리는 것 좀 보거라. 필시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라. 에이이잉!

‘에이, 설마요.’

- 어허!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오죽하면 ‘거지 같은 새끼’ 그리고 ‘거지 같은 말’이라는 말이 있겠느냐?

그런데 그 설마가 맞았다.

“험험. 시험을 조금 더 연장하겠다. 다시 들어들 와 보거라. 이번에는 양손을 쓸 것이다.”

“……?”

그에 정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거지 같은 소리십니까?!”

“크흠. 나는 거지가 맞느니라.”

“아니 거지가 맞고 자시고 시험 감독관이시면 뱉은 말에 책임을 지셔야죠.”

“…음. 그게 그렇긴 한데. 이게 네게도 이로운 제안일 수가 있느니라.”

“이롭고 자시고 구슬이나 내놓으세요.”

“…음. 거. 뭐시냐. 아! 그래! 네 녀석이 처음 나를 깨울 때 뭐라고 했더냐?! 마인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마교 새끼들은 정신들이 오락가락해서 이딴 식으로 굴곤 한다. 내가 봐서 잘 알아!”

그림처럼 펼쳐진 상황에 손에 들린 사부님께서 헛웃음을 지으셨고.

- 하. 거 보거라. 이런 상황이 바로 거지발싸개 같은 상황이니라.

‘그러게요. 진짜 별 거지 같은 양반을 다 보겠네요. 이제 저 중늙은이한테 존칭은 없습니다.’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에 이어 이대 째 거지 혐오가 연성되려 하는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눕혀놓은 소릉이 녀석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정현!”

“예! 언 소협!”

“네가 펼칠 수 있는 절초를 펼쳐! 이렇게 된 이상 비장의 수로 간다!”

나는 재빨리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던진 뒤.

검초를 펼치며 노삼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그러자, 어느새 동편을 차지한 정현이 푸른 검기를 흩뿌리기 시작했고, 노삼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지화자 소리를 외치더니 금빛 장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좋구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좋긴 뭐가 좋습니까? 누가 원하시는 방식으로 붙어 드린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검초를 펼쳐 삼색의 기운들이 어지러이 얽히기 시작한 이때.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소릉!

우리 소릉이가 제 그림자도 버거워할 정도로 빠르게 쇄도해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노삼의 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

그에 노삼의 얼굴에 가득 차오른 당혹.

나는 그런 노삼 교수를 향해 비틀린 입꼬리를 선사해 드렸다.

“본인 입으로 마인이라 하셨으니, 이것도 합당한 겁니다? 천마에게 넘어갈 영약을 백도의 후기지수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빼앗은 거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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