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50화 (50/444)

제50화. 나갈 때는 아니란다 (2)

조심조심 거리를 좁혀 들어오기 시작한 자칭 와룡 · 봉추 · 관중 · 악의….

- …사활(死活)의 각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들이 뭔 놈의 와룡 · 봉추 · 관중 · 악의란 말이냐. 내가 다시 세상에 나와 들은 이야기 중에 제일 우스운 이야기로다.

‘그러게요.’

저놈들 입에서 함부로 나올 분들이 아니신데 저기에 가서 붙으니 진짜 좁밥 같네요.

아무튼 녀석들이 거리를 좁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 소협.”

“언 형.”

그에 정현과 우소릉이 각자의 검을 스릉- 뽑고는 명령을 내려달라는 듯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놈들이 다가 아니다. 정현 지도를 한번 펼쳐봐라. 거기 있는 진들이 어떻게 보이지?”

“음. 아!”

“내가 혼자만 알지 말고 옆 사람도 챙기라고 했을 텐데?”

“예. 꼭 저희를 둘러싸고 있는 망의 형태로 보입니다.”

“그래. 저런 놈들이 더 있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좌편의 숲이 부스럭거리더니,

또 한 무리의 조가 튀어나왔다.

그에 정현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런 놈이 계속해서 나올지 모른다는 언 소협의 생각은 알겠습니다.”

“계속 말해봐.”

“예.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눈앞의 치들을 제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병법에서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각개 격파를 하라 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뭐, 정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적의 규모가 적을 때 쳐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원작의 정현은 실제로 같은 상황에서 그 각개 격파를 해내지.’

하지만 지금 우리 조는 원작의 정현이 꾸렸던 조와 사정이 좀 달랐다.

‘우리에겐 만만여개(慢慢驢丐) 천장호가 없다.’

훗날 천하제일쾌로 거듭나는 소릉이 녀석에게 대협의 자질이 있긴 하지만 지금 당장의 무력은 개방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꼽힌다고 묘사되는 천장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불리하기만은 한 것은 아니었다.

‘자화자찬의 심정으로 지금의 내가 용명이 녀석보다 높은 수준이라 치고.’

원작의 전개와 달리 노삼과의 싸움에서 내력 소모를 훨씬 덜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작의 정현이 이 대목을 돌파하는 과정은 너무 처절했어.’

어찌나 처절했는지, 그 과정에서 내력을 바닥까지 긁어 쓰다 진원진기까지 가져다 쓰는 바람에 수석으로 합격을 하여 받은 영단이 그 진원 진기를 회복하는 데 다 들어간다.

어 잠깐만?

그럼 이 대목에서 정현이 진원진기를 끌어 쓰지 않도록 이끌어낸다면?

‘수석이 되면 정현에게 주려고 했던 몫까지 내가 꿀꺽해도 되는 거네?’

안 그래도 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대목을 돌파할 생각이었는데, 그래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추가됐다.

나는 안 그래도 비틀려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한번 더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반적으로는 적의 무리가 불어나기 전에 각개 격파를 하는 게 맞지.”

“그럼 지금은 아니시라는 말씀이신가요?”

“당연하지. 정현. 서편에서 나온 놈들과 동편에서 나온 놈들 재들이 우리 입장에서는 똑같은 적이지만 정말로 ‘같은’ 적이라고 할 수 있냐?”

“아! 아아!! 어차피 오 점짜리 구슬은 한 개. 그렇다면 저 친구들끼리도 적이 되는군요. 그러고 보니 확실히 한 조가 더 튀어나오자 먼저 온 조도 걸음을 멈췄습니다. 역시 언 소협께서는 판국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시는군요?!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세요!”

“우소릉. 너는 사실 이해도 안 됐는데 대단하다고 하는 거지?”

“…….”

그때였다.

그렇게 정현 그리고 소릉이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때.

이번에는 앞으로 놓인 산로에서 한 무리의 조가 달려왔다.

심지어 이번에는 아는 얼굴들이었다.

“허어. 이게 누구야? 보준이랑 아이들 아니냐? 단목 머시기랑 하가도 있고? 음. 한 분은 처음 뵙고. 뭐 아무튼. 뛰어 올라온 것 보니, 길을 잘못 든 건 아닌 것 같고. 딱 우리 구슬을 빼앗으려는 심보로 온 것 같은데 맞냐?”

“오냐. 떨거지 중에 도둑놈이 점수가 간당해 보이더니, 어떻게 오 점짜리 구슬을 잘도 따냈구나. 그날은 내가 방심했다. 오늘 그 치욕을 갚음과 동시에 그 오 점짜리 구슬도 빼앗아 이 시험을 상위권으로 마칠 것이다.”

“…보준아. 치욕을 갚기 전에 돈이나 갚아라. 내 옛정도 있고 앞으로 받아내야 할 누런 정도 있으니, 네 녀석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죄송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오늘은 용서해주마.”

“…그놈의 보준이! 보준이! 내 이름은 준이다! 황보가 성이고! 네 녀석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지만 남의 이름을 그따위로 부르는 게 제일 마음에 안 든다! 네 네놈을 허리를 접어서 치욕을 갚을 것이다! 뭣들 하나?! 치세!”

어휴.

저 머리통까지 근육만 찬 놈.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만 번 양보해 구슬을 우리한테서 가져갔다 치더라도 뒤는 생각도 안 하네.

아닌가?

가문빨로 뒤는 어떻게 뭉개겠다는 건가?

뭐, 아무튼 앞의 두 조와 다르게 곧바로 짓쳐 들기 시작한 황보준의 조.

나는 빠르게 정현과 우소릉에게 작전을 하달했다.

“정현.”

“예! 언 소협!”

“늙은 거지 상대했을 때처럼 네가 동쪽 맡아! 내가 서쪽 맡는다!”

“예!”

“우소릉!”

“넵?!”

“너는 나랑 정현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쟤들 구슬 훔쳐버려.”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럼 괜찮지. 아군들이 마인에게 힘들게 구슬을 빼앗아 왔더니 제 욕심에 눈이 돌아가 아군을 치는 친마파(親魔派) 그러니까 옛날로 치면 부원배(附元輩) 같은 호서배(狐鼠輩)들 아니냐?!”

“…어. 그렇네요?!”

“그래. 그러니까 마음껏 훔쳐. 아니 훔치면서 겸사겸사 바지춤도 내려버려. 이 자식들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 버려야지. 어디 주제도 모르고! 아무튼 소릉아 이 형이 또 한번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하마.”

긴 머리들은 이미 높이 묶고 있는 것 같으니.

요술검 휘두르며 빨주노초파남보 동그라미 구슬들.

모아와라.

* * *

정무학관 입학 시험의 조별 과제 관문에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중요 지점은 학생 광장에 마련돼 있는 본진(本陣).

무당산 초입에 마련되어 있는 환자(患者).

무당산의 여러 봉우리와 중턱들에 찍혀 있는 요점(要點),

그리고 제갈세가에 마련되어 있는 의원(醫院).

합하여 총 네 곳.

언용운의 조는 가장 늦게 본진을 나섰기에 환자가 있는 지점에 가장 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조를 나누었기에, 은하성은 가장 먼저 의원(醫院)이라는 깃발이 세워져 있는 제갈세가에는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버, 벌써 환자를 데리고 왔다고?”

“예. 조교수님. 저는 팔십 번 응시생 은하성입니다. 조번은 구십이 번.”

“어디 보자… 환자 역의 도우미도 제대로 데려왔고, 달고 있는 배번도 팔십 번이 맞고, 구십이 번 조의 구성원이 어떻게 되지?”

“예. 나머지 조원 둘의 도호와 이름은 정현과 우소릉. 조장은 언용운입니다.”

“은하성, 정현, 우소릉…. 음? 언용운?! 그 화제의 정급 무사 언용운의 조였군?!”

“예. 맞습니다!”

“배부받은 조별 관문 명부와 정확히 일치하는군. 확인이 완료되었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응시생 신분을 확인하고 환자를 의원에 인계하였다는 확인증을 받는 과정에서, 조교수가 은하성을 향해 한가지 질문을 던져왔다.

“한데, 다른 조원들은 어쩌고 혼자 왔는가?”

“아. 저희 조는 조를 나눠서 과제를 수행하기로 해서요. 제가 확인증을 받고 나머지 조원들은 구슬을 확보하기로 했습니다.”

“…오호? 발상이 참 참신하군. 확실히 그렇게 하면 시간이 단축되겠어, 나 때도 조별 과제 시험 내용이 비슷했는데,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그 생각도 언용운 그 친구의 머리에서 나온 건가?”

“예. 맞습니다.”

“단순히 정급 무사로 고득점을 하고 있어서 화제인 줄 알았는데, 확실히 번뜩임이 있는 친구구만.”

“…훗. 저희 형님이 좀 그러신 구석이 있죠.”

“…? 자네가 왜 뿌듯해하지?”

“그야 저희 형님이시니까요. 조교수님은 형제나 자매가 협행으로 이름이 높아지거나 학문을 개척하거나 하면 뿌듯하지 않으신가요?”

“그렇긴 하네만. 자네는 은씨고 자네 조장은 언씨 아닌가?”

“어허. 유비 관우 장비는 성이 같아서 세상에 이름을 남겼습니까?”

“…뭐 그렇게 말을 하면 할 말은 없군. 근데 개인적으로는 참신한 발상이긴 한데, 이 과제를 그렇게 풀어도 될까?”

한데, 그렇게 던져진 질문이 끝에서 이 과제를 그런 식으로 돌파해도 되냐는 물음으로 바뀌었다.

그에 아차 하는 생각에 은하성의 입이 바로 열렸다.

“어, 안 됩니까?”

“아니, 나는 가타부타할 직급이 아닐세. 응시생들이 환자를 업고 오면 확인증을 내주는 것까지가 내가 맡은 바니까. 그냥 나도 궁금해서 나온 말이야, 아무튼 자 여기 확인증일세, 그런 식으로 이번 관문을 풀어도 되는지 어떤지는 본진에 가면 교수님들이 알려 주실 걸세.”

하지만 곧바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용운 형님. 저희 작전 괜찮은 거겠죠?’

그에 은하성은 일말의 초조한 마음을 품고 본진으로 출발했다.

“호오? 벌써 도착한 응시생이 있다고?”

“예. 교수님. 여기 이 친구입니다. 교수님께 인사드리게.”

그리고 본진을 총괄하고 있던 제갈민의 막사 안에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팔십 번 응시생 은하성입니다!”

“아이고. 귀청이야. 나 귀 안 먹었네 이 사람아. 당연히 안녕도 하고 아까 쇠 북을 울릴 때 한자리에 있었지 않은가?”

“…죄, 죄송합니다.”

“죄송은 됐고. 의원에서 받아온 확인증이나 이리 내시게, 조교 선생은 오는 길에 명부 챙겨 왔지?”

“여, 여깄습니다.”

“예. 교수님. 여기 이번 관문에 응시한 조들이 기록된 확인 명부입니다.”

“의원에서 받아온 확인표는 틀림이 없군. 고맙네. 조교 선생은 가서 하던 일마저 보시게.”

“예. 교수님.”

그렇게 제갈민과 막사에 단둘이 남게 된 은하성은 그야말로 냉탕에라도 들어간 듯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혀야 했다.

“뭘, 그렇게 떨고 있나?”

“아닙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제갈민이 ‘이건 편법일세. 인정할 수 없어.’ 한마디만 해버리면 며칠간의 고생이 자칫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아씨. 만약에 불가 소리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대로 끝인가? 산으로 뛰어 올라가서 알려야 하나? 나는 괜찮은데 형님은 안 될 텐데?’

하여 은하성의 머릿속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치는 그때.

제갈민이 명부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은하성이라는 이름은 대략 구십 번 줄에 있었던 기억인데… 어디 보자, 구십이 번 역시 이즈음에 있었군. 호오. 언용운 그 친구의 조로구만? 자네가 홀로 확인증을 받아 온 것을 보면 조를 나눴다는 거겠고, 조를 나눴다는 이야기는 오 점짜리 구슬을 찾으러 갔다는 거겠지?”

“…어.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척 보면 척이지. 목 위에 달린 게 장식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추론 아닌가?”

이 순간.

은하성의 뇌리엔 어째선지 저 제갈민이라는 교수 밑에서 구를 대학원생 조교수님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는데.

그러는 사이 제갈민이 재차 입을 열었다.

“노삼 선배. 그리고 언용운과 정현. 우소릉 이 친구는 잠재력을 아직 모르겠지만 어째 대충 그림이 나올 것도 같은데…. 흠. 이거 학관 설립이래 처음으로 조별 과제 관문의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는 조가 나올지도 모르겠군?”

“…어. 그 말씀은 이런 식으로 돌파해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된다. 정도가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네. 구세, 활인, 협력. 매번 출제 형태는 달라도 문제 안에 담긴 정신은 같았는데 이걸 이렇게까지 풀어낸 자는 없는 걸로 아는데.”

“!”

“뭐, 여기까지 오 점짜리 구슬을 가져왔을 때 이야기지만…. 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설지 그 아이와 동점이 되는 건데, 그렇게 되면 오랜만에 수석 결정전이 열릴 수도 있겠구만. 설지 녀석 세가에서 콧대가 너무 높아졌던데. 이번에 임자를 제대로 만나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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