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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52화 (52/444)

제52화. 언가에서 수석이 나왔답니다 (2)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손에 쥔 회한을 거칠게 가로 휘두르며 땅을 박찼다.

그에 회한에서 뻗어나간 강맹한 기운이 파천선풍의 초식으로 화하며 날카로운 반월을 그렸다.

쌔애애액!!

그런 내 일검에 사부님께서 깜짝 놀라며 생각을 전해 오셨다.

- 아까 목을 따는 건 곤란하다 어쩐다 하더니?! 초식에 살심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 아니냐? 어쭙잖은 자가 막아섰다간 죽겠다 이 녀석아!

‘상관없습니다.’

- ……? 왜 상관이 없느냐?!

사실 사부님의 말씀이 맞기는 했다.

‘내지른 검에 응시생 중 누군가가 정말 맞아 죽는다면?’

이래저래 일이 좀 곤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들을 속이려면 나부터 속여야 하는 법.

나는 이해득실이나 이후의 사정 같은 것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운 뒤.

질러낸 회한에 계속해 살초를 실었다.

쌔액! 쌔애애액!!

‘정면으로 막아설 녀석은 죽든지 말든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를 들이치러 온 것 자체가 그래도 한가락 하는 녀석들이라는 반증.

내가 삼방으로 흩어 버린 구슬은 확실한 활로(活路)고, 회한의 앞은 명백한 사지(死地)였다.

양자의 선택지 중에 사지를 택하는 녀석은 없었다.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휘두르니, 오히려 피를 보는 길을 피한다?! 허. 그 사실을 머리로 깨달았다 하더라도 실제로 실행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거늘,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해내다니. 담이 호랑이 같은 녀석이로고.

그에 사부님께서 허허 웃으시며 한마디를 해오셨는데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좀 멋쩍었다.

하여 잠시 딴청을 부리는 사이 각자의 경신술을 일으키며 달려온 정현과 우소릉이 편대처럼 내 꽁무니에 붙었다.

“적들은 점점 늘고, 종국에는 연계까지 하는 거 같아 내심 언 소협이 이 난국을 어쩌시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그 상황에서 오자의 말씀을 실천하며 길을 여실 줄이야!”

“오자면 그 손자병법을 쓴 손자에 버금간다는 책략가 아닌가요 정현 도장?”

“예. 그 오자께서 이르기를 일인투명 족구천부(一人投命 足懼千夫)라 하였지요. 아.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려울까요? 우 소협?”

“…솔직히 저한텐 어렵게 들리긴 해요.”

“음. 풀어 말하면 한 사람이 목숨을 걸어 천 명의 사람을 두렵게 만들 수 있다는 구절입니다. 그 옛날 장판파에서 장비 익덕이 단기필마로 조조 맹덕의 정예 기병을 멈춰 세웠던 기지의 응용이랄까요?! 언 소협께서 당장에 살길처럼 보이는 구슬을 던져주심과 동시에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시니, 저 친구들이 지레 겁을 먹고 이렇게 길을 튼 것이죠. 아니 그렇습니까 언 소협?”

“…뭐, 의도한 바이긴 한데, 거 오자니 장익덕이니는 너무 간 거 아니냐? 너무 금칠은 하지 말고.”

“전혀요! 이건 금칠이 아닙니다!”

뭐.

아무튼.

그렇게 일부러 포위망이 두터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단박에 벗겨내고 나자, 이후로는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또 막아서는 친구들이 나올까 봐 긴장하고 있었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네요? 아까 그 인원이 전부였을까요?”

그에 소릉이 녀석이 부지런히 다리를 옮기는 와중 입을 열었다.

나는 녀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마디 말을 던졌다.

“아마도? 애초에 남의 구슬을 탐하지 않은 녀석들과 배점이 낮은 구슬을 택한 녀석들은 이미 본진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러면서 보니 소릉이 녀석도 말을 걸어올 만큼 여유가 있어 보였고, 정현도 지친 기색이 거의 없어서, 내 머릿속엔 속력을 좀 더 올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그런 김에 속도 좀 올리자. 아, 근데 내력들은 충분하냐?”

“옙.”

“넵.”

하지만 괜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입관처장이 말해준 제한 시간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다.

하여 나는 한 번 더 조원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시간은 넉넉하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냥 빨리 제출하고 밥 먹으러 가고 싶어서 속력을 올리자 한 거니까. 내력 부족하면 괜히 딸딸 긁지 말고 지금 말하고.”

나중에 영약 나눠 줘야 하는 일 만들지 말라 이거야.

“저야 경신술이랑 손기술만 좀 썼을 뿐인걸요? 정말로 넉넉한데요?”

“저도 넉넉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출출하네요. 학관생 식당의 주사 고고께서 이번엔 무슨 찬거리를 따로 빼두셨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들 하길래 나는 땅을 박차는 다리에 힘을 더 실었다.

그런 나를 따라 정현과 우소릉도 속력을 올렸다.

휙! 휘익! 휙!!!

그렇게 우리는 날 듯이 무당산의 중턱을 넘어, 하성이 녀석과 조를 나눴던 초입에 다다랐고.

탓! 탓!

탓! 탓! 탓!

그곳에서부터 또다시 얼마쯤을 내달려, 마침내 본진에 도착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우리를 향했는데.

“…또 한 조가 도착했군.”

“이대로 마감이 되길 바랐는데! 하, 아슬아슬한데 제발 나보다 점수들이 낮기를!”

개중에는 저주에 가까운 소리를 해대는 녀석들도 있었고.

나를 알아보고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소리를 던져대는 녀석들도 있었다.

“음? 근데 저 친구 배번이 칠십구 번 같은데? 칠십구 번 응시생이면 그 공포의 정급 무사 언용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렇군. 폭죽만 올라갔지 아직까지 오 점짜리 구슬을 제출한 조가 없었는데, 혹시 저 조가 가져온 거 아냐?! 젠장. 언용운이야 애초에 상위권이었지만, 저 친구 조원 중에 두 명은 하위권 응시생이었던 것 같던데, 그 친구들이 오 점씩 올라가면 이거 영락없이 밀리겠는데?!”

“희망을 갖게, 나는 저 치들보다 황보준 공자가 있는 조가 오 점을 따냈다고 보네, 그 조는 조원 넷이 모두 명문가의 후기지수지 않은가? 오 점짜리 구슬이 어디 장난인가?!”

“…후, 제발 삼 점 이하이기를.”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조별 과제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 말인즉.

시험을 마친 조가 도착할 때마다 실시간으로 변동되는 흑판의 점수에 따라 이번 기수의 당락이 결정된다는 이야기.

‘신경들이 곤두설 수밖에 없지.’

뭐, 아무튼.

그렇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며 호흡을 고르고 있으니.

“용운 형님!!”

하성이 녀석이 반가운 얼굴로 튀어나와 의원에서 받아온 확인증을 내밀었다.

- 근데 은가 녀석의 얼굴은 왜 저 모양이냐? 퀭한 게 뭔가 매가리도 없고, 어째 푹 삶은 청경채 같구나. 용운이 네 생각으론 의원으로 향하는 조는 별일이 없을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러게요?’

그런데 사부님의 말마따나 하성이 녀석이 표정은 반가워도, 눈이 한 치는 움푹 들어간 것 같은 게 뭔가 고생을 좀 한 눈치였다.

나는 확인증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 점에 관해 물었다.

“수고했다. 근데 너 뭔 일 있었냐? 잠깐 사이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 의원 쪽에는 뭐 없었을 텐데?”

“아, 용명 형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용명이가 뭐라고 하든?”

“아뇨! 그게 아니라, 그 용명 형님 조의 조장이 제갈설지 소저시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그 제갈 소저랑 면을 텄는데, 소저랑 몇 마디 나누고 나니까 이래저래 걱정이 좀 되길래, 마음을 좀 썼더니 그래 보이나 봅니다.”

아.

제갈설지….

‘걔랑 만났으면 인정이지.’

애가 저렇게 되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어지간한 지력과 심지를 갖추지 않으면 말 그대로 기가 빨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은하성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애썼다.”

* * *

그렇게 하성이 녀석과 잠시간의 회포를 풀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그러니까 아침나절께에 조원 등록을 했던 창구에서 기척이 느껴지길래 나는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그러고 보니 비색 궁장을 입은 조교수님이 하성이 녀석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퀭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퀭한 얼굴에서 피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기. 아직 과제 제출을 하지 않은 조 같은데, 담소는 조금 이따 하고 과제 제출부터 하지? 그대들은 제출하면 끝이지만 나나 여기 도우미 일을 하고있는 그대들의 선배들은 서류에 기입도 해야 하고, 흑판도 고쳐 넣고 할 일이 좀 많거든? 내 입으로 말하니까 진짜 탈주하고 싶네.”

그사이 내게 대학원에는 발을 들이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셨던 선배님은 교대를 한 모양인지, 담당 조교 선생님이 여자분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최소 이틀은 감지 못한 것 같은 떡 진 머리에, 시커먼 눈 밑을 확인한 조교수님의 몰골에 사부님께서 가만히 혀를 차 오셨다.

- …쯧쯧쯧. 비색 복장이면 저 아해도 그 대학원생이라는 것인 모양이지? 어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들 저런 몰골이로구나.

그에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을 토대로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꾸벅 포권을 취해 보임과 동시에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 죄송합니다. 사정이 좀 있었어서 조원들끼리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늦었습니다. 여기 의원에서 받아온 확인증이고요. 구슬은….”

그때였다.

처음 주머니에 넣은 오 점짜리 구슬을 꺼낸다고 허리춤의 주머니 속을 뒤지고 있는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딴지를 걸고 나섰다.

“하. 나눌 이야기는 무슨. 천지 분간을 못 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면서.”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조교 선생님 곁에 서 있는 묵(墨), 황(黃), 홍(紅), 청(靑) 사색 무복의 도우미 중에 시커먼 묵색 무복을 입은 사람이 운혁이었다.

‘운혁.’

무당파의 이대제자 중 행동대장 격의 인물이자, 사대기숙사 중 향란관의 임원으로 입관 시험이 시작된 첫날 조철성과 운진을 데리고 나타나 정현을 쥐 잡듯이 잡은 장본인.

“…ㅆ.”

썩 반갑지 않은 인물의 등장에 입에서 나도 모르게 된소리가 새어 나올 뻔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내가 꿀릴 것은 없었다.

‘정현이랑 엮였던 일도 결국 저쪽의 실책.’

경신 관문에서 저 운혁이라는 녀석의 사제가 벌인 일도 그렇고.

게다가 입관 시험의 모든 과제가 종료된 이 대목에서 도우미 나부랭이가 시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전무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새어 나오려는 된소리를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쓰흡. 운혁 슨배님도 계셨네요?”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비틀며 형식적인 예를 표했다.

“니들 서로 아는 사이니? 음? 근데 이 친구는 무당의 제자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런 나와 운혁의 모습에 창구를 담당하고 있는 조교수님은 잠시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곧 고개를 털었다.

“아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그래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지. 나는 일해야지! 일! 일! 일! 이거 끝나면 또 연구하러 가야하지롱! 헤헤헤! 후우. 응시생아 그런 의미에서 구슬이나 제출하렴.”

그리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구슬이나 보자는 말을 꺼냈다.

그런 조교 선생님의 음성에 운혁도 구슬이나 내놓으라는 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래. 어서 구슬이나 내놔 보거라.”

나는 ‘그럽시다.’ 하는 심정으로 다시 구슬을 뒤적였다.

그런데 이때.

운혁이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날리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다른 게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에 넣어온 데다, 이렇게 늦게 도착한 것을 보니, 기껏해야 이 점짜리 구슬을 빌빌거리면서 간신히 얻어 온 것이겠지만.”

음.

살짝 열받네?

운혁의 예상과 달리 내 주머니 속에는 오 점짜리 구슬이 분명히 들어 있었기에 열이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나를 얕잡아 보고 있다는 대목에서 아주 살짝 열이 받았다.

하여,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운혁을 골려줘야 잘 골려줬다 소문이 날까를 고민하다.

‘그게 좋겠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려냈고.

그러자 억지로 비틀어 올렸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비틀려 올라갔다.

- 그 표정은…?

나는 그렇게 씨익 웃으며 아무렇게나 쥔 이 점짜리 구슬 하나를 꺼내 들어 운혁에게 내미는 척을 했다.

(二)

“풉.”

그러자 운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터트리며 내 손에서 구슬을 낚아채려 했다.

휙-

하지만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휘힉-

유려한 손동작으로 운혁의 손을 피한 나는 이 점짜리 구슬을 운혁의 손이 아닌 땅에다가 버렸다.

툭-

그러자 운혁의 입에서 곧바로 고성이 새어 나왔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나보고 줍기라도 하라는 것이냐?”

“전혀 아닌데요?”

“하. 아니라고?”

“네. 아니에요.”

“그럼 이게 무슨 의미냐? 입이 뚫려 있으면 설명해 보아라.”

“그냥 제가 드리려던 구슬이 아니어서요.”

“…뭐라고?”

그런 운혁의 입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든 구슬을 계속해 꺼내기만 하면 됐다.

“이것도 아니고.”

“……?”

“아놔. 이것도 아니네?”

나는 그렇게 구슬을 하나둘 꺼내며 주화입마라도 오는 듯이 시시각각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운혁의 얼굴을 구경했다.

하지만 계속하다간 조교 선생님도 모욕하는 것이 될 것 같았기에, 이쯤 해서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와륵-

와르륵-

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남은 구슬을 모조리 쏟아 낸 뒤.

(五)

그중에서 가장 씨알이 굵거니와 색 또한 영롱한 녀석을 주워 앞으로 내밀었다.

“아, 한참 찾았네, 제일 밑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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