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언가에서 수석이 나왔답니다 (5)
박수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비색 의복을 입은 조교 선생님들과 사색 무복의 도우미 선배들이 실격 판정을 받은 녀석들을 학관생 광장에서 몰아냈다.
“험험. 총감독관께서 이번 기수의 수석 선정 이유에 대한 설명은 잘해주신 듯하니, 더 이상 그 사안에 대해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다 보겠소이다.”
가히 오물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녀석들이 그렇게 쫓겨나 좌중이 한껏 산뜻해진 상황에서 입관처장 임태옥이 입을 열었다.
“언용운 후보생. 조금 전엔 총장님을 대신하여 학생패를 전달한 것이니, 이번에는 이 사람. 임태옥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하드리오이다.”
그에 나는 스리슬쩍 사탕 발린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다 처장님께서 늘 명확하게 시험 과제를 안내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런 내 말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툴툴대셨다.
- …제 사부에게는 틈만 보이면 까불어대는 녀석이, 면식만 좀 있을 뿐인 늙은이에게는 예의를 잘도 차리는구나. 에이잉!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이건 그냥 의례적인 거죠, 조금 더 나아가봐야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그런 마음가짐이고요. 어찌 제가 사부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비하겠습니까.’
- …두 번만 내 생각을 더 해줬다간 아주 머리 꼭대기에 앉겠구나.
‘참내. 그럼 지금부터는 극존칭으로 갈까요? 기체후일향만강 하시었습니까. 사부님? 검집의 온도는 어떠신지요?’
- …원래대로 하거라. 원래대로.
그런 사부님과 몇 마디 생각을 나누는 사이, 입관처장 임태옥이 입을 열었다.
“허허. 별말씀을. 자 이만 우리 당금수석 후보생께서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남은 공지 사항을 경청해 주시면 되겠소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듣기 좋은 말을 싫어하는 법은 없는 법.
임태옥도 허허로이 웃었다.
나는 그런 임태옥을 향해 꾸벅 포권을 취해 보인 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화상들이 한마디씩을 토해냈는데.
“완벽한 풀이였다. 크. 그 제갈민 교수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하시다니 역시 용운 형님이십니다!”
“동감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언 소협.”
“언 형. 수석의 학생패는 이름이 금색으로 쓰여 있다던데 정말인가요?”
나는 녀석들의 호들갑에 어울려주는 대신 검지를 입 앞으로 가져가 일단 조용히들 하라는 의사를 전했다.
“험험. 그럼 남은 공지 사항을 전하도록 하겠소이다. 아시다시피 여기 이 흑판에는 금번 입관 시험에 응시한 응시생 중 상위 백육십 명의 석차가 기록되게 되어 있고, 그 백육십 명이 바로 올해의 입관 정원이었소이다. 하나, 이번 기수에는 십일 점을 기록한 백육십 위의 학생이 세 명이었고, 세 명 모두 미래를 기대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모두 합격시키기로 정하여 총원을 백육십이 명으로 정하였소이다.”
그러는 사이 임태옥의 입이 다시 열렸다.
“흑판에 이름을 올린 육백육십육 번 응시생 무길. 칠백십이 번 응시생 석호열. 구십구 번 응시생 우소릉, 세 사람과 흑판에 이름을 올린 다른 모든 응시생의 신분이 후보생으로 전환됨을 알려 드리오이다.”
아무리 입관처장 입에서 공지 사항이 줄줄이 나오는 상황이라지만, 이런 소식을 넘어갈 수는 없지.
나는 입가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 소릉이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축하한다.”
“우 소협!”
“소릉 동생!”
“언 형 그리고 모두들 덕분입니다!”
* * *
하북에서 요동으로 넘어가려면 동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름도 유명한 산해관을 거쳐야 한다.
반면, 남쪽.
그중에서도 호북성을 가기 위해 하남성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일단 석가장으로 가야 한다.
석가장에서 일단 관도가 한번 모여지기 때문이다.
석가장(石家庄).
이름만 들어서는 어디 석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 혹은 장원같이 들리지만, 관도들이 모이는 도시로 실제로는 하북에서 북경과 천진 다음가는 큰 도시였고, 사실 도시 이름에 석가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 석씨가 기여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 석가장에는 석씨세가(石氏世家)가 있긴 했는데.
그 석씨세가엔 지금 사사로이는 천하 도객 중 일절(一絶)을 논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인물인 도제(刀帝)이자, 공적으로는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무혁이 석씨세가의 가주 석금필과 누군가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하하. 이거 참 석가장에 와서 석씨세가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이거 그야말로 석가장의 석가장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으하하핫!”
“…아하하하. 팽 가주님은 언제 봐도 한결같으십니다.”
“무인더러 한결같다고 그러면 욕을 하는 겐가?”
“그럴 리가요. 입담이 여전하시다 뭐 그런 말이었습니다.”
“아하핫. 농담일세 농담. 아. 그래서 내가 방금 어디까지 했더라?”
“가주님께서 강아지와 젖소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에 관해 말씀하셨고. 제가 젖소가 이기지 않을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 그랬지. 석 동생이 틀렸네, 그 둘이 붙으면 강아지가 이긴다네. 왜냐하면 강아지가 내가 더 강하지! 하면 젖소는 내가 졌소이다! 하기 때문일세! 으하하핫!”
“…아, 아하하하.”
그때였다.
그렇게 석금필이 태산 같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팽무혁의 숙숙농담(叔叔弄談)에 어울려주느라 입가의 근육이 슬슬 저려오기 시작한 이때.
“가주님. 진주언가의 가주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어서 뫼시게! 어서! 나만 당할 수는 없…”
팽무혁과 석금필이 기다리던 사람.
언정웅이 도착했다.
“의형. 그간 격조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나야 늘 시간이 넘치는데 정웅이 자네가 늘상 바쁘다고 내빼니 그리되었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실제로 바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석 가주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가주님. 호북에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오던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좋은 소식이요? 금시초문입니다만?”
“오늘 이렇게 제 집에 귀한 손님들께서 찾아주신 연유를 말하는 겁니다. 아드님이 정무학관에 합격하셨지 않습니까?!”
언정웅, 팽무혁, 석금필.
젊은 시절 하북 삼협이라 불렸던 세 사람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긴 했으나, 나이가 들고 가문들을 이끌다 보니 정기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모일일이 없었다.
“팽 형의 자녀들과 석 가주님의 아드님도 합격을 하셨거늘 그게 무에 그리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은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에서 세 가문의 자녀가 나란히 합격하여 입학식에 초대를 받게 되었는데.
그렇게 된 김에 오랜만에 옛 벗들이 함께 시간을 가진 뒤 호북으로 가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가세가 기울었음에도 강호 무림의 명숙들이 저희 진주 언가가가 과거 마교에 대항했던 공덕을 높이 사 용명이 녀석에게 갑급 배정을 해주셨으니, 실상 제 아들놈은 땅을 짚고 헤엄을 친 꼴입니다. 오히려 병급으로 시작해서 학생패를 쟁취해낸 석 가주님의 아드님이 더 대단하지요.”
“허허이. 겸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저도 젊었을 적에 두 분과 정무학관에서 수학했기에 입관 시험을 치러 봐서 알고 있지만, 갑급 무사들이 크게 유리하다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설령 땅을 짚고 헤엄을 쳤다 치더라도 꼭대기에 닿았으면 칭찬을 해주어야죠.”
그런데 석금필의 입에서 머릿속을 의문 부호로 가득 채워지는 말이 나왔다.
그에, 언정웅과 팽무혁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음? 방금 꼭대기라고 하셨습니까?”
“분명 꼭대기라고 했네. 석 동생 당최 그게 무슨 말인가?!”
“허. 두 분 모두 자세한 소식에는 어두우신 모양이시군요?! 하기야, 자녀분들이 떨어질 리가 없으니 귀를 덮어두기는 하셨겠습니다. 위치도 제 쪽이 정무학관이 있는 호북과 훨씬 가깝고요.”
“아니 그래서 꼭대기가 무슨 뜻이냐니까?!”
“아시다시피 응시생들에게는 비밀을 엄수하도록 하기 때문에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팽가주님. 다만, 그것만은 확실하답니다.”
“그니까 그게 뭐냐니까?! 궁금한 거 못 참는 내 성질 알면서 일부러 그러지 자네?!”
“예. 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아까 젖소의 복수랄까요?”
“…?”
“흠흠.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호북에서부터 어떤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는데, 그 내용이 글쎄, 언가에서 수석이 나왔답니다!”
* * *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이 끝났다.
응시생들중 합격권에 있었던 이들의 신분은 모두 후보생으로 전환됐다.
합격생이면 그저 신입생이라 부르면 될 것을 구태여 후보생이라 지칭하는 이유는?
신입생들을 입학시키기 전에 정무학관은 보름 그러니까 십오 일 동안 봄 방학을 하기 때문이다.
- 뭔 놈의 학관이 학생이 들어가기도 전에 방학? 그런 것을 한단 말이냐?!
‘…뭐, 시험장으로 쓴다고 여기저기 지어놓은 가건물들 치우고, 이런저런 시설과 교보재 정비도 하고, 기숙사 단장도 새로 하고, 생도들은 생도들대로 옷을 지어 입어야 하고 뭐 그런 거죠. 거기다 입학식에 참석할 내외빈들이 올 시간도 필요하고요.’
입학식을 보기 위해 멀리는 청해의 곤륜, 깊이는 사천과 그 아래 운남에서 이른바 무림명숙이라는 양반들이 오실 테니까.
뭐, 그런 고로.
우리는 시험을 마치자마자. 비밀 엄수에 관한 서약과 품위 유지에 대한 당부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명심들 하셔야 할 것을 알려 드리겠소이다. 여러분의 신분은 아직 학관생이 아닌 후보생이오이다. 학관생은 어떠한 일에 휘말렸을 시, 학생회의 비호 아래 정해진 징계 절차를 밟게 되지만, 후보생 신분은 언제든지 합격이 취소될 수 있는 신분이오이다. 하여 두 가지 당부를 드리겠소이다. 첫째론 이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밖에서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아니 되오이다. 둘째론 정무학관의 학관생은 백도 무림의 얼굴임을 명심하여 그 품위를 잃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되오이다.”
그리고 각각 상아로 된 신분패를 부여받고는 일시적으로 학관 밖으로 내쫓겼다.
하여, 입관 관문이 치르기 위해 줄을 섰던 정문께에 서서 한 보름간을 묵어야 할 곳을 수배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는 찰나.
제법 낯이 익은 노인이 우릴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남신협의 친우분들 아니십니까?!”
얼굴을 자세히 보니 입관 시험을 치르기 전에 묵었던 객잔 주인이 있었다.
“오 주인장이 아니십니까? 객잔에 자리가 좀 있겠소? 한 보름쯤 더 묵어야 할 것 같은데?! 내 값은 후하게 치르리다.”
“그런데 친우분이 두 분 더 느셨습니다?!”
“그렇게 됐소. 총 네 명, 아니지. 하연 소저도 방을 못 구했을 수도 있으니 다섯인데 괜찮겠소?”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질문에 답을 안 드렸네! 당연히 됩니다! 안 그래도 객실을 싹 비워두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그 하연 소저라는 분은 벌써 와계시고요!”
“하연 소저가? 하긴 소저라면 우릴 어렵지 않게 찾았겠지, 뭐 소저야 그렇다 치고. 우리가 다시 올 줄은 어찌 아시고?”
“아이고 저희가 여기서 장사가 몇 년인데 빠꼼합니다요. 강남신협과 그 친우분이시면 분명히 당당하게 합격을 하시고 금의환향을 하실 것이라 보고 준비를 해놓고 있었습죠. 아 그리고 비용은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음? 근데 우리 때문에 객잔을 비워둬 버리면 잘못하면 큰 손해가 나는 것 아니오? 비용은 왜 안 받고?!”
“당장은 그렇습죠. 하지만 내년에 합격자가 묵었다 뭐 그런 걸 써 붙여 두면 다음 해에 숙식 비용을 두어 배쯤 올려도 다들 기 받겠다고 난리가 납니다요. 그래서 말입니다요….”
“말씀하시오.”
“나중에 입학하실 때. ‘잘 쉬다 갑니다.’ 혹은 ‘잘 먹고 갑니다.’ 하는 수결들을 좀 남겨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쩐지 객잔 벽에 빛바랜 수결들이 걸려 있다 싶더라니.
수완이 보통은 아니시네.
뭐, 아무튼 주어와 목적어를 정확히 써놓은 수결은 악용의 여지가 없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려울 건 없지. 해드리겠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행입니다. 꼭 합격하시기를 천존께 기도드렸었는데, 짐 싸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너무 어려웠다 죽상을 하며 나오길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오신 소저도 그렇고, 다들 용케들 어떻게든 붙어 내신 듯하여 마음이 참 뿌듯합니다.”
수석을 한 나를 바로 앞에 두고, 어떻게든 붙어 내서 다행이다 어쩐다 하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까?
이 순간.
주인장의 말에 내 주변의 녀석들이 모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녀석들의 반응에 눈치 빠른 주인 영감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제가 여아홍(女兒紅)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일까요?”
여아홍은 술이다.
쌀을 빚어 만드는 황주인데, 그중에 특히 명주로 이름난 술.
아이가 태어나면 묻고 그 아이가 성공하거나 혼인을 할 때 그 뚜껑을 개봉한다는 전통이 있어 장원주(壯元酒) 혹은 급제주(及第酒)라고도 부른다.
그러니 주인 영감이 맞추기는 바로 맞춘 것이었다.
“…역시 강남신협께서?! 아이고 내 목소리 좀 봐…. 그 수, 수석을 하셨군요?! 믿고 있었습니다 하성 공자!”
하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하성이 녀석의 손을 부여잡고 눈빛을 반짝이는 주인 영감의 모습에, 모두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끌끌끌. 저 영감쟁이가 눈치가 제법이구나 했는데, 결정적일 때 헛다리를 짚는구나.
그러게요.
“크하하하.”
“언 형. 그렇게 크게 웃어 버리시면 저도 웃음을 못 참겠는데옼. 큽. 크흐흐.”
“큽. 이런 우스운 등하불명은 도호를 받고 처음입니닿.”
“…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입니까요?”
“주인장… 때가 되면 진실을 알게 될걸세. 그때 이거 하나만 알아주게. 호랑이는 중요할 때를 위해 발톱을 숨기는 법이라는 것을….”
하성이는 작게 중얼거렸고, 우린 그렇게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뭐, 오늘 정도는, 쉬어도 되겠지?
그날 밤, 우린 여아홍을 기울이며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