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덜 지어진 매듭 (2)
갑자기 눈을 뒤집어 까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한 야밤의 살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귀신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으로 허우적거리는 놈들을….
빡!!
이렇게!
슬쩍슬쩍 걷어차 한곳으로 몰아 버리면?
“으으?!”
“으!”
푸슉-!
“커읔?!”
쌔액-!
“컥?!”
제 놈들끼리 씹고, 뜯고, 맛보고…가 아니구나.
쑤시고, 찍고, 베고 하여간에 난리가 나는 것이다.
팟-
그럼 나는 피 웅덩에 미끄러지는 불상사만 피한 뒤, 사부님의 안내에 따라 다음 군집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됐다.
- 이번엔 좌측으로 가자꾸나.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 녀석이 있느니라.
‘고약한 냄새요?’
- 오냐. 피 냄새가 몸에 아주 밴 놈이 있는데, 스산한 음기가 혼백에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니, 부녀자만 골라 죽인 놈이로다.
‘아. 하류박 놈 중엔 그런 놈들이 심심치 않게 끼어 있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죽일 놈 중에 죽일 놈이네요. 그럼 검을 뽑을까요? 사부님? 직접 처단 가나요?’
- 됐느니라.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는 말이 있거늘. 네 녀석이 고작 소 잡는 칼도 아니거니와 저 녀석들은 닭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들이다. 저런 놈들은 평범한 죽음조차 과분하나, 그나마 비슷한 잡놈들끼리 서로 죽을 때까지 아귀다툼을 벌이게 만드는 것이 어울리느니라. 그리고….
‘그리고 뭐요? 왜 말씀을 하다 마십니까?’
- 여아홍의 향을 기분 좋게 취했는데, 저런 잡놈들의 피 맛을 보고 싶지 않구나.
아.
그건 인정이죠.
물론, 중간중간 별도의 조치가 필요한 귀찮은 놈들이 있긴 했다.
“네놈은 하류박 출신이 아니구나?”
정무학관 입관 시험에서 실격을 당한 후기지수들.
이놈들 또한 괘씸하기 그지없는 놈이긴 했다.
애초에 이 상황의 단초를 제공한 놈들이었고, 거기다 내 몸을 토막을 치겠다고 한 놈들이었다.
‘뭐? 내 몸에 칼자국을 낸 놈에겐 은원보를 한 개씩 더 줘?’
고구려 수박도와 진시왕릉 벽화 그리고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와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을 적용하면.
내가 이놈들을 고등어처럼 반 토막을 내든 갈치처럼 다섯 토막을 내든 아니면 저 아귀 지옥 사이에서 눈먼 칼에 맞아 죽게 내버려 두든, 어떤 선택을 하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놈들의 명줄을 붙여 놓기로 마음을 정했다.
“…야.”
“으으?!”
“내 목소리는 들리지? 내가 오늘은 살려준다.”
그러기 위해 후기지수들이 보일 때마다 견정혈을 짚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뒤.
덜미를 잡아채 한곳에 패대기쳐 모았다.
꽝!!
그러는 와중에 내 저주가 안 먹히는 녀석을 맞닥뜨리기도 했다.
“어디 보자, 너도 실격자구나?”
“히익! 다, 다가오지 마라!!”
저주는 본디 성바퀴… 아니, 성기사 녀석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세계관을 감안하면 불가의 심법이나 도가의 심법을 근간으로 한 내력을 몸 안에 쌓아 놨으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제 놈들이 쳐들어 와놓고 다가오지 말라니? 대체 어느 집안에서 자랐기에 셈법이 그따구냐?”
물론, 불가의 심법을 쌓은 후기지수는 진로를 정할 때 정무학관이 아니라 소림의 부속학관을 택했을 테니, 눈앞의 녀석은 도가 방파의 속가제자이거나, 그쪽 계열 속가문의 자제가 아닐까 했는데.
“사람이냐 귀신이냐? 무슨 사술을 부렸기에 사람들을 모조리 미치게 만든 것이냐?! 사람이면 다가오고! 귀신이면 썩 물러가라!”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이 정확하게 맞았다.
“내, 내가 이래 봬도 종남파의 속가문파인 뇌종문의 장남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귀신이라면…!”
“사람이니까 다가갈게?”
“……?”
“그리고 내가 화가 좀 났으니까 때릴게?”
“……?!”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빡! 빡! 빡! 빡!
빠악! 빡!!!
그런 내 모습을 사부님께서는 의아해하셨다.
- 몇 놈쯤 던져 모을 때는 무엇을 하려고 저러나 했는데, 이제 보니 저놈들을 살려주려는 모양이구나?
‘바로 맞히셨습니다.’
- 왜? 그럴 가치가 있는 녀석들이냐? 내 눈에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사부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부님께서는, 검마 위철진은 거리끼는 것이 있다면 베어버리는 것으로 해결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시니까.
하지만 나도 내 방식이 있었다.
‘그럴 가치. 충분히 있죠.’
- 있다고? 그저 백도 무림의 서까래 아래에서 태어났을 뿐. 떡잎부터 썩어빠진 게 저 하류박의 인생들과 그 자질이 하등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
‘뭐, 싹수로 치면 그렇죠. 근데 그렇다고 싹 죽여버리면 제가 피해 보상을 청구할 곳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부님?’
- 피해? 나 모르는 사이 어디 베였느냐? 아니지, 그럴 리가 없는데?!
‘…불초 제자.’
- ?
‘마음이 다쳤습니다.’
- ……?
‘이 다친 마음을 치유하려면 싯누런 금덩이나 허연 은덩이 말고는 안 됩니다. 마침 은소저도 있겠다. 저놈들의 집안에다 정신적 피해 보상에 관한 청구서를 날려서 한몫 두둑하게 뜯어낼… 아니 적절한 치료비를 받아낼 생각입니다.’
-…….
‘그리고 저 싹수 노란 놈들을 꼭 제가 제초 작업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정무학관이 지척인데, 상황이 대충 정리되면 거기다 넘기면 되죠.’
- …흠.
‘백도 무림의 요람에서 백도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저런 잡놈들을 들여왔는데, 이건 가문에 먹칠을 한 수준이 아니라 백도 무림 전체에 똥칠을 한 수준이죠. 백도니 정도니 해도 이런 류의 사건에는 이쪽 업계가 사마외도보다 훨씬 가혹하지 않습니까?’
- 거,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나?
‘그렇죠? 모르긴 몰라도 아마 좋은 꼴은 못 볼 겁니다. 어쩌면 그냥 죽는 게 나았다 싶을 수도 있고요. 흐흐흐.’
- 역시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알아서 하거라. 흐흐흐.
‘안 그래도 알아서 하고 있었습니다. 흐흐흐.’
* * *
그렇게 하류박의 오물들은 아귀 지옥 속으로 차넣고, 백도 무림의 젊은 구정물들은 흠씬 패서 한곳에 모아놓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덜크덕-
상황이 얼추 매조지려는 무렵.
단강제일객잔의 뒷문이 열렸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언 형 안 들어오십니ㄲ….”
비영파천보를 밟아가며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사실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또 발동된 저주 덕에 기척 또한 많이 나지 않았다.
하나 전직이 도둑이라 그런지 기감이 과하게 예민했던 우소릉이 기척을 느끼고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어, 언 형?! 이, 이게 무슨 일이죠?! 정현 도장! 은형! 은 소저!! 나와보세요! 사, 살수들이 들이닥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의 호들갑에 정현과 은씨 남매가 부리나케 뛰어나와 검을 뽑았다.
스렁- 스렁-
스르렁-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언 소협!”
“어떤 새끼들이 우리 형님한테?! 어?! 이 새끼들 이거 탈락한 새끼들 같은데?”
“…탈락한 새끼들? 하성이 네가 조금 전에 말했던 그 언 공자가 수석으로 호명되자 이의를 제기했다던 자들 말하는 거야?”
“예. 누님. 정확히는 조별 과제 관문 내에서도 공격했던 놈들입니다. 아. 저기 있는 황보준은 그 식당에서부터 시비 걸었다던 놈 있죠?”
“그 언 공자께 헛소리하다가 손가락이 부러졌다는?”
“네네. 바로 그 새낍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온 김에 녀석들을 부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약간의 정돈이 필요했다.
“워. 워. 진법 깔아 놨으니까 함부로 끼지 마라.”
저 녀석들은 뒷마당에 저주가 깔려 있다는 사정을 모르니, 자칫하면 불상사가 날 수가 있었다.
“진법 말씀이십니까?”
그런 내 말에 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휘주에서 시험을 치러 올라오는 길에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던 은씨 남매는 버둥거리고 있는 살수들을 보고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각각 정현과 우소릉의 무복 자락을 움켜쥐어 참전을 멈추게 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각자 역할 분담을 시작한다. 우소릉.”
“예, 언 형!”
“너는 지금 즉시 장기인 경신술을 일으켜서 학관의 정문으로 가라.”
“가서요?”
“거기 가면 정문을 담당하는 학관의 수위부 선생님들이 숙직을 하시는 숙직실이 있을 거야. 거기 가서 여기 상황을 알려. 하류박의 살수들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하면 알아들으실 거다.”
내가 그렇게 말을 맺자, 우소릉은 까딱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순식간에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다음은 하성이 놈.
“은하성.”
“예! 용운 형님!”
“너는 안에 가서 주인장한테 밧줄 좀 얻어와.”
“얼마나 얻어 올까요?”
“하성아. 내가 뇌 좀 쓰자고 했지. 내가 지금 왜 밧줄을 얻어 오라고 했을까?”
“…어. 저 새끼들을 묶으려고 그러셨겠죠?”
“그래. 그럼 밧줄이 얼마나 필요할까? 내가 그것까지 정해줘야 하겠니? 네가 은 소저의 자리를 노렸다는 사실에 이따금씩 이 형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단다.”
“많이. 많이. 가져오겠습니다!”
다음은 정현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현 녀석은 무당파의 태극검맥을 계승한 실질적인 적통이었다.
그 말인즉.
녀석은 내 피를 이마에 묻히는 별도의 조치 같은 게 없어도 이 저주 위에서도 마음껏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
“은 소저, 그 정현이 녀석의 옷자락은 놔주셔도 될 것 같소. 정현.”
“예. 언 소협.”
“너는 들어와서 좀 도와. 이놈들 내가 만든 진법에 당해서 눈이랑 입이 막힌 상황이거든?”
“아. 그렇군요?!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습니다! 그런데 진법치고는 기운이 좀 사특한데….”
“쓰흡. 바로 뛰어 들어오려던 녀석이 갑자기 말이 많다?”
“아.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아. 뽑은 칼은 넣고, 베지는 마. 우리 후보생 신분이잖냐.”
“예. 칼집으로 상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은하연.
“은 소저.”
“예. 언 공자 말씀하세요! 저는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하성이가 밧줄 가지러 갈 때 함께 말할 것을 깜빡했는데, 소저는 지필묵을 좀 얻어 오시오.”
“…지필묵을요? 갑자기요…? 이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서요?”
그런 은하연의 반응에 나는 회한을 들어 한쪽에 널어놓은 백도의 구정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서도 돈의 꽃은 피는 법 아니겠소? 내가 이렇게 담담히 말하지만, 그냥 소피나 보려는 심산으로 나왔다가 저 치들이 튀어나와서 여기 이 심장이 심히 놀랐소. 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소?”
“…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셨소?”
“예! 누렇고, 하얗고, 딱딱하고, 묵직한. 그런 금창약이 필요하실 듯하네요?”
“그냥 필요한 게 아니라. 많이. 많이 필요하오.”
“많이. 예.”
“지필묵. 가져오시오.”
“예!”
그렇게 식구들에게 역할 분담을 하고 몸을 돌리니 마침 눈앞에 이 사태의 원흉 중에 가장 죄질이 무거운 녀석이 보였다.
‘황보준!’
나는 녀석을 향해 곧바로 몸을 날렸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황보세가의 자식이라 이건지, 시각을 잃은 상황에서도 황보준은 짓쳐 드는 살기를 느끼고 나를 향해 제법 매서운 일권을 날려왔다.
쌔애액!!!
하지만 ‘제법’ 매서웠다, 딱 그뿐이었다.
눈을 감으면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하는 예가 이런 세계관에선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바였지만, 이 녀석은 아니었다.
하기야, 두 눈을 버젓이 뜨고도 처맞았던 녀석이 시각을 잃은 지금 나를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휘릭-
나는 여유롭게 녀석의 일권을 피한 뒤.
쌔액!
비어 있는 갈빗대에 일검을 갈겨 주었다.
빡!!!!!!
검을 뽑은 상태였다면 이 순간 황보준이 곧바로 ‘황보’와 ‘준’으로 분리되었을 테지만, 회한이 검집 안에 들어 있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으어!”
그 대신 녀석은 입을 뻐금거리며 갈빗대를 부여잡았다.
그 덕에 훤히 드러난 정수리와 어깨 그리고 오금.
“머리! 어깨! 무릎!”
나는 세 부위를 차례대로 있는 힘껏 두들겨 주었다.
빡!
빠악!
빡!!!
그에 눈을 희뜩 뒤집어 까고 앞으로 꼬꾸라진 황보준.
나는 그런 황보준을 보며 잠시 미간을 좁혔다.
- 왜 그러느냐?
‘더 팼다간 보준이가 뒈질 것 같은데. 아직 분이 덜 풀려서요.’
- 흠. 내가 왕년에 애매한 놈들을 처리할 때 쓰던 방식인데, 어찌 보면 사내놈에게는 죽는 것보다 가혹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는 거냐면 소요혈(笑腰穴)과 미룡혈(尾龍穴)을 동시에 짚는데, 이중 소요혈은 그냥 완력만으로 지그시 누르고, 미룡혈은 누르는 순간 파천의 기를 불어넣으면? 소요가 막히고 미룡에서 역천이 발생하니….
파악! 팟!
‘이렇게요? 오. 이 새끼 기절한 채로 거품을 물었는데요? 뭡니까 이거?’
- …아니 이놈아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행동으로 옮겨야지, 뭔 놈의 행동이 그렇게 빠르단 말이냐?!
- 제가 원래 행동이 좀 빠릿빠릿하지 않습니까. 사부님 말씀이니까 그런가 보다 한 것도 있고요. 그래서 일단 했습니다. 뭡니까 이거?
- 이 수법에 당하고 나면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느니라.
‘앉은뱅이가 된다고요?’
- 아니 그런 단순한 수법이면 그냥 발뒤꿈치를 베라고 했겠지, 이건 좀 더 심오한 것이다. 그러니까, 걸을 수도 있고, 뛸 수도 있는데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건데, 남자한테 영 안 좋은데, 허허. 갑자기 이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구나?
‘아. 고자가 된다고요?’
- 아! 그래 고자!!
푸하하.
고자라니!
쟤가 고자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