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58화 (58/444)

제58화. 덜 지어진 매듭 (3)

“언 소협. 그 응시생들은 이쪽에 모아두면 되는 겁니까?”

“어. 허튼짓할 수 있으니까. 기절은 반드시 시키고.”

“예!”

“아. 혹 쌓인 게 있다면 몇 대쯤 쥐어박아도 된다. 야밤에 살수들이 들이닥쳤는데 타박상 정도야 우연히 일어날 수 있잖아?”

“…아. …음. 예. 알겠습니다.”

내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인 정현이었으나, 녀석의 몸 안에 흐르는 도기(道氣) 탓인지, 넌지시 귀띔해준 우연한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녀석이 거들어주니 땅에 다리를 붙이고 서 있던 야밤의 손님들이 빠르게 줄어 어느 순간 한 놈도 남지 않게 되었다.

“끝난 것 같습니다.”

“그렇네?”

위험한 순간은 없었지만, 두 개의 중형 저주진에 내력을 공급하며 비영파천보를 운용했더니 숨이 좀 가빴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뒤.

뒤늦게 합류해서 쌩쌩해 보이는 정현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하달하고자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호흡 좀 고르고 있을 테니까. 여력이 있으면 은 소저 좀 도울래?”

“…음. 혹시 모르니까 일단 언 소협의 호법을 좀 선 뒤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게 순리에 맞습니다.”

“그래라 그럼.”

듣고 보니 정현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네 생각대로 하라는 말을 돌려준 나는 곧바로 뒷마당에 깔아 두었던 저주진을 해제한 뒤, 가벼운 운기조식에 들어갔다가….

“어디의 누구시라고요?”

“…네년이 알 것 없잖느냐?!”

“…안 되겠다 하성아. 이분께 존댓말 주입 좀 해주련?”

“알겠습니다 누님. 조금 전처럼 여기를 누르면 되는 거죠?”

“거기는 사혈(死穴)이고. 거기보다 조금 위에. 응. 거기.”

“옙. 갑니다!”

꾸욱-

“끄! 끄아악!!”

“잘 들으세요. 저희가 언 공자님의 명을 따르는 것을 보고 하인 같아 보이셨나 본데, 저희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닙니다. 당신은 언 공자님이 아니고요. 그리고 저 어기 황보 공자 보이시죠?”

“끄아아악!”

“대답 안 하시네요?”

“끄윽! 보, 보입니다!”

“저분은 언 공자님께서 직접 손을 쓰셨는데 글쎄 사내 구실을 못 하게 되었다네요?”

“……?!”

…들려오는 소란에 슬쩍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밧줄을 양팔과 목에 둘둘 맨 은하성과 붓과 책을 든 은하연이 실격자 중에 한 놈을 취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협조하시는 게 좋으세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어디의 누구시라고요?”

“야, 서량(西凉)의 마가장(馬家莊)! 마가장의 마원(馬鴛)입니다!”

“서량이면 감숙성을 말하시는군요? 감숙성의 마가면 천수창걸(天水槍傑) 마인산(馬仁山) 대협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사, 삼남이요. 아니, 삼남입니다.”

“어휴. 호부견자가 따로 없으시네요. 자, 여기 증서에 쓰인 글귀를 확인하시고 수결하세요.”

“…그 금액에 여, 영(零)이 하나 더 붙은 것 아닙니까?”

“확인하시고 수결하라고 한 건. 말 그대로 확인만 하시라는 거에요. 반박은 안 받습니다. 수결하세요. 아니면 언 공자님 부를까요? 저는 상관없는데?”

“하, 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하셨고.

-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나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하연이 저 아해의 붓은 확실히 그래 보이는구나.

‘은 소저가 그런 면모가 좀 있죠. 오죽하면 별호가 천금매소겠습니까?’

- 네 녀석 앞에서는 어리바리하길래 비꼬는 말인 줄 알았지. 한데 남 앞에서는 여봉선(呂奉先)이 따로 없구나.

‘저야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또 처음 사귄 친구기도 해서 그런 거고요. 저쪽이 본모습에 가까울 겁니다.’

은하연의 진면목을 처음 보는 정현도 한마디를 해왔다.

“눈을 뜨셨군요. 언 소협. 그 운기조식을 하고 계시는 사이 은 소저께서 소협이 맡기신 일을 하시기 시작했는데, 화가 나셨는지 방법이 좀 많이 거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리긴 왜 말려? 도와도 모자랄 판국에. 네 눈에는 아직도 쟤들이 사람 같아 보이지?”

“…예? 아, 예.”

“그렇겠지. 그렇지 않으면 정현이 아니지. 나는 그런 네 성정이 싫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내 말이 맞고.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곧 있으면 소릉이가 학관 직원들 몰고 올 텐데 그 전에 끝내야 해. 은 소저가 들고 있는 책 절반 정도 나눠달라고 해서 받아와. 그리고 교직원들 오면 하류박이 뭐 하는 곳인지, 저놈들이 어떤 놈들을 이곳에 끌어들인 건지 꼭 물어보고. 그럼 내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예.”

* * *

은하연에게 얻어 온 종이를 보니 어디 사는 누군지를 적고 손도장만 찍게 하면 완성이 되도록 양식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은하연은 은하연이네.’

하여 수금 명부는 금세 완성됐다.

그리고 그 명부를 이루는 종이에 베인 먹들이 채 마르기 전에, 내 예상대로 소릉이 녀석이 돌아왔는데.

“언 형!!”

그와 동시에 사방팔방에서 날아든 옥색 무복을 입은 수위부(守衛部)의 무인들이 채채챙! 병장기를 뽑으며 뛰어들었고.

개중에 조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일사불란하게 지휘를 시작했다.

“일호부터 십이호까지는 후보생과 양민들을 보호하라! 그리고 괴한들은 꼼짝마라! 감히 백도 무림의 요람에 발을 딛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느….”

아니, 정확히는 지휘를 하려다 말문을 잃고 눈만 껌뻑였다.

“…냐?”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살수들이 단강구에서 묵고 있는 후보생들을 급습했다. 그런데 그 살수들이 하류박에서 일거리를 구하는 놈들이라더라.’

정무학관의 교직원이라면, 더욱이 정무학관의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수위부의 무인들이라면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는 신고 내용.

그런 신고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와 보니.

하얀 무복을 입은 후보생들은 뭔 종이나 말리고 있고.

살수라는 녀석들은 죽어 있거나 뻗어 있거나 묶여 있다?

나라도 말문이 막히지.

“…우소릉 후보생이라고 했나?”

“…예. 그런데요?”

“…뭘 잘못 알고 신고를 한 것 아닌가?”

그러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잘 믿기지가 않겠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였다.

“뭘 잘못 안 거 같은데? 자네를 빼면, 둘 넷. 후보생은 달랑 네 명인 것 같구만. 둘넷여섯여덟열 둘넷여섯여덟… 대충 세도 쉰 가까이 되는 하류박의 살인귀들을 도륙을 냈다고…?”

“실은 넷이 아니라 용운 형님 혼자 다하신…. 읍읍.”

이 와중에 제 놈 생각에 잘못됐다는 바로잡으려고 나서는 하성이 녀석의 입을 봉한 나는 조장으로 보이는 사내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후보생. 언용운입니다. 쉰 명 전원이 하류박의 살인귀들인 건 아닙니다.”

“언용운? 아, 당금수석?! 그러고 보니 안면이 있군! 그 수석 발표하는 자리에 나도 있었네, 감독관으로 뽑혀서 구슬이 있는 요소 중에 하나를 담당했었거든. 음, 이제 보니 뒤쪽에 소저는 문과의 수위를 한 후보생이군, 그 옆의 소도장은 삼석을 차지한 정현 도장인 것 같고. 아, 소개가 늦었네. 나는 정무학관 수위부의 십일조장 조학수(趙鶴洙)일세.”

“아, 그럼 교수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교수님은 무슨, 우리는 그렇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닐세. 그냥 선배라고 부르게. 그나저나 전원이 하류박의 살인귀인 것은 아니라고?”

“예. 선배님. 정확히 좌측의 서른일곱 명은 하류박에서 일거리를 받은 살인귀나 색귀들이고, 우측의 열여섯 명은 이번 입관 시험에서 실격을 당해 제게 앙심을 품은 녀석들입니다.”

“…허. 그러니까 저 천치 같은 녀석들이 하류박의 잡귀들을 끌어들였다 뭐 그런 이야긴가?”

“예. 그렇습니다.”

“…고얀 놈들. 저 묶여 있는 녀석들은 별도의 조사를 거쳐 자네의 말이 진실로 확인되면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야. 그리고 자네의 공은 내 상세히 써서 보고를 할 것이고, 아, 현상금을 빼놓으면 안 되지. 저 살인귀들에게 달려 있는 현상금은 자네들에게 돌아가게 해주겠네.”

조학수의 음성에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

“어휴 뭘 그렇게까지.”

그런 내 모습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급히 한마디를 전해 오셨다.

- 인석아. 손. 손은 왜 비비느냐.

아. 제가 손을 비비고 있었습니까?

사는 나도 모르게 비비고 있던 손을 스리슬쩍 포권으로 바꿨다.

그러는 사이.

조학수가 꾸벅 묵례를 표함과 동시에 닫혀 있던 재차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감사하겠네. 위에 보고를 올리면 따로 말씀들이 있으시겠지만, 우선은 내가 이곳에 나온 사람 중에 가장 선임자니,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겠네. 자네들이 없었다면 큰일로 번졌을 것이야. 초반에 이렇게 완벽하게 제압을 해준 덕분에 정말 큰 위기를 넘겼네.”

할 만해서 한 것이고, 이래저래 실익도 있을 것 같아서 나선 건데, 너무 정식으로 감사를 표해 오시니까.

거, 좀 쑥스럽네.

“아닙니다. 누구라도 했을 일입니다.”

“아닐세. 불안전한 후보생 신분으로 이렇게 나선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리고 설령 다른 누가 나섰다 하더라도 이렇게 완벽하게 제압을 했을 리도 없고. 입관 시험의 최종 관문까지 갔던 후기지수들이 하류박의 살인귀들을 단강구로 끌어들이다니. 백도 무림 전체에 똥칠이 되는 일이고, 그로 말미암아 사마외도가 준동할 계기가 될 뻔한 사건을 자네가 막은 걸세. 학관이, 아니 백도 무림 전체가 큰 빚을 졌네.”

* * *

한편, 제갈세가의 후원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별채.

별채를 감싸고 있는 화원에서 귀뚜리가 또록또록 울고, 반딧불들이 유영하는 가운데, 제갈설지와 당옥기가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두 미녀가 그리 다과를 나누고 있으니 멀리서 보기엔 마치 월하미인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그림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옥기야.”

특히나 당옥기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않았다.

“…으, 응?”

“네가 생각해도 내가 진 것 같아?”

“그, 글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뭘 모르는 사람은 소무후니, 제갈가의 홍복이니 다음 대의 천하제일미니 하는 수식어 때문에 간과하는데, 제갈설지는 사실 그렇게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선하고 악하다는 게 이야기가 아니라 지독했다.

지독할 정도로 지고는 못 사는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제갈설지였다.

어린 시절의 제갈설지는 절맥을 앓아 몸이 약해 제갈가의 사천 분가와 사천당가를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하여 당옥기는 그런 제갈설지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잘 가누지도 못하는 몸으로 당옥기 본인에게 지식이 밀린다고 서고에 틀어박혀 열이 펄펄 끓는 것도 모르고 책을 모조리 독파했던 제갈설지였고.

당옥기의 오라버니들에게 검이 밀리자 그 몸으로 검까지 배우겠다고 생난리를 쳤던 게 바로 제갈설지였다.

‘…그 지독함과 절맥이 낫는 시기가 겹쳐 결국 이기고야 말았지.’

뭐, 그렇게 제갈설지는 절맥을 고쳐 사천을 떠났다.

‘못 본 사이 그 지독한 성정도 다 고쳐진 줄 알았는데.’

입관 시험을 앞두고 오랜만에 만난 제갈설지에게선 예전의 그 지독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 당옥기는 설지도 이제 철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세가에서 적수를 만나지 못해 발동이 걸릴 대상이 없었을 뿐인 모양이었다.

“나도 용운 님과 똑같이 과제를 받아들였어. 이해했고, 파훼했지. 너도 알잖아?”

“어? 알지. 알지.”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은 수석 결정전에서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고, 내 등위가 계속해서 일 위였기 때문이야. 일 위에게는 일 위의 싸움 방식이 있고, 나는 그 방식을 행했을 뿐이라고. 이건 뭔가 잘못됐어. 그렇지?”

이 순간.

당옥기는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르다.’라 하면 저 광기에 불이 붙을 것 같았고, ‘그렇다.’라 하면 그건 그거대로 그럼 언용운과 결착을 짓겠다며 불이 붙을 것 같았다.

하여, 당옥기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쩍-

제갈설지가 쥐고 있던 찻잔에 금이 가며 빠그적- 흩어졌다.

“야! 손! 너 손에 피 나!”

“지금 그게 중요하니?!”

“중요하지 그럼!”

“…용운 님 그때 단상에서 분명히 수석 결정전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으로 보였어. 그리고 나를 봤지. 그 순간 나는 잠깐이지만 동류를 만난 느낌이 들었어.”

“…동류?”

“응. 그 사람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일 게 분명해. 그런 찝찝한 승리 바라지 않았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나 용운 님이랑 결착을 봐야겠어.”

하지만 당옥기가 대답을 하든 하지 않든 불은 붙고 말았다.

그에, 당옥기는 마른침을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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