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59화 (59/444)

제59화. 덜 지어진 매듭 (4)

제법 다사다난했던 밤이 지났다.

우렁찬 닭 울음소리와 함께 아침이 밝아오려 하는 신새벽.

나는 언제나처럼 벌떡 몸을 일으켜 앞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언제나 이 시각이 되면 경을 읊듯 중얼거리시는 사부님의 음성을 들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 파천의 검의 단계를 높여 나가려면 몸과 마음, 근육과 단전, 정신과 육체가 합일이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내외겸전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담금질을 해야 하느니라. 오금희부터 시작하거라.

“시작은 새.”

오금희(五禽戱).

사부님께 전해 듣기론 과거 화타가 곰, 호랑이, 원숭이, 사슴, 새를 보고 만들었다 전해지는 체조.

“다음은 사슴.”

그 오금희를 요령을 피우지 않고 화수목금토의 성질을 띠는 동물의 순서대로 실행한 뒤.

이어서 마보(馬步)와 압보(鴨步)를 실행하니 어느새 땀방울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달크닥-

그러고 있으니 단강제일객잔의 문이 달칵달칵 열리기 시작했는데, 오늘 나 다음으로 빠르게 얼굴을 내민 녀석은 우소릉이었고.

“헉. 언 형은 피곤하지도 않으신가요? 어제 그 살수들을 사실상 홀로 다 상대하셨으면서 오늘도 가장 먼저 일어나셨네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허.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다.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매일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옛 말씀을 언 소협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되는군요.”

간발의 차로 삼 등을 차지한 녀석은 정현.

“하암.”

사 등을 차지한 주제에 입을 쩍 하고 벌리는 녀석은 은하성이었다.

“제일 늦게 나온 녀석이 팔자가 좋아 보인다?”

“용운 형님. 오늘은 좀 봐주세요. 어제 누님 도와서 그 피해 보상 청구 서류? 그거 정리한다고 한 시진도 못 잤습니다.”

자신을 대견해하라는 듯 눈을 빛내는 은하성을 향해 나는 헛웃음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정리는 잘 끝냈고?”

“예. 깔끔하게 끝냈습니다. 거의 누님이 하시고 저는 옆에서 보조만 했지만요. 그 이번에 입학식으로 아버님이 올라오실 것 같은데, 그때 전해서 휘상 차원에서 철저하게 환수하실 거라 하셨으니 걱정 마시라던데요?”

“그래?”

그런데 이때.

은하성이 짐짓 무게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예. 아 형님 그런데요. 제가 어제 잠시 생각을 해봤는데요.”

그에 나도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어 물었다.

“무슨 생각?”

“저랑 여기 정현 도장이랑 소릉 동생 나아가 누님까지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를 생각해봤거든요?”

“저번에 정현이 좋은 말 해줬잖아. 같이 밥 먹으면 식구라고.”

“그렇긴 한데, 식구는 형님 본가의 식구들이 연상되기도 하고, 또 혹시라도 기숙사가 갈리고 그러면 애매해지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래서?”

“그래서 뭐 없나 생각해봤거든요? 용운 형님을 매개로 모인 거니까 언 동생 어떻습니까?”

“오. 좋은데요?”

“음. 일리가 있습니다?”

우소릉, 정현 너희들은 뭘 또 맞장구를 치고 있어?

“뭐가 좋고. 일리가 있기는 뭐가 일리가 있어?! 뭔 소리를 하나 했네. 다들 경신술이나 일으켜 한 바퀴 돌고 밥이나 먹게.”

“넵! 형님!”

“옙!”

“그러시죠!”

뭐, 아무튼.

나는 화상들, 아니 스스로를 언 동생이라 지칭한 녀석들을 이끌고 언제나처럼 단강구 인근을 달렸다.

그리고 운기조식을 통해 가빠진 호흡과 들뜬 내력을 가라앉힌 뒤.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차례대로 등목을 해 땀을 씻었다.

“소릉 동생. ‘언 동생’ 이거 어감 별로냐?”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근데 언 형이 시큰둥하신 것 같지 않나요?”

“그렇게 시큰둥하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하시는 분 아닙니까? 어. 근데 저기 누가 오는 것 같습니다. 옥색 무복이면 수위부의 선배님인 것 같은데요?”

찾아온 이는 간밤에 안면을 텄던 수위부의 십일조장 조학수였다.

“간밤에 별고들 없었나? 아니지 참. 별고는 있었지, 내가 말주변이 이렇게 엉망일세.”

그에 나는 의복과 머리매무새를 대충 정리한 뒤, 포권을 취했다.

“아닙니다. 알아들었습니다. 잘 잤느냐 그런 말씀이시지요? 잘 잤습니다. 막 아침 수련을 하고 난 차라 행색이 이렇습니다.”

“오면서 슥 보니 다른 객잔에 묵고 있는 후보생들은 아직 다 꿈나라에 있는 것 같던데, 부지런하기도 하군.”

“과찬이십니다. 한데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아, 간밤의 사건에 관한 보고가 완료되었네. 간밤에 학관에서도 나름대로 난리가 났었다네. 아무튼 그래서 총장님이 자네를 좀 보자고 하셨네. 다행히 내가 늦지 않게 도착해서 아침은 아직인 것 같은데, 가서 드는 걸로 하는게 어떻겠나? 총장님께서 초대를 하셨다네.”

“저만요? 아니면 저희 다요?”

“오. 내가 빨리 이 소식을 전한다는 생각만 한다고 그걸 안 물었군. 일단 말씀은 자네를 데리고 오라 하시긴 하셨는데, 내 생각엔 모두 함께해도 상관은 없을 성싶네.”

그 말에 나는 다른 녀석들의 의사를 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어째 하나같이 한 걸음씩을 뒤로 물렸다.

“그. 저는 어제 너무 늦게 자서 그런 자리에 가면 실수를 할 것 같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이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자리 가면 분명히 샐 겁니다. 예.”

“제, 제가 가기에는 너무 부담되는 자리네요.”

“조심스럽게 언감생심이라는 옛말을 떠올려 봅니ㄷ….”

“아 됐어. 됐어. 혼자 간다 혼자 가.”

그런 모습들을 보며 사부님께서 혀를 차셨다.

- …저놈들 저거 꼬리 마는 것 좀 보라지.

그러게요?!

언 동생은 개뿔.

이 시간부로 해체해 자식들아!

* * *

내가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객잔 밖으로 나오자, 조학수가 길 안내를 시작했다.

길 안내라 했지만 사실 안내랄 것도 없었다.

객잔들이 즐비한 단강구의 상인 지구를 벗어나면 바로 나오는 학관의 정문.

그 정문에서 그대로 직진만 하면 나오는 구 층짜리 목조 건물이 이른바 정무학관의 본관(本館)이라는 곳인데, 그중에 일 층을 차지하고 있는 교직원 식당이 오늘의 목적지였으니까.

뭐. 아무튼 그렇게 교직원 식당에 들어가자.

“데려왔습니다. 총장님.”

“후보생. 언용운입니다.”

머리카락을 말아서 모자로 가린 고아한 분위기의 비구니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니.

“고생했어요. 조(趙) 조장.”

“아닙니다. 총장님. 그럼 저는 이만 나가 있겠습니다.”

사사롭게는 아미파의 장문인의 사매이고, 강호에선 멸마사태(滅魔師太)라 불리던 여협이며, 지금은 정무학관의 총장을 맡고 있는 경혜가 바로 그녀였다.

“그래요. 언용운 후보생?”

“예.”

“선뜻 초대에 응해줘서 감사해요. 부담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이래저래 직접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불렀어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우선 감사 인사를 드릴게요. 자칫 끔찍한 사태로 이어질 뻔한 일을 언용운 후보생 덕분에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어요. 이 순간 후보생과 총장의 위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 돌아가 빈니가 감사를 표합니다.”

“…과례이십니다. 이러면 제가 몸둘 바를 찾지 못합니다. 총장님.”

“아니에요. 후보생은 그 급박한 상황에서 완벽한 대처를 해주었어요. 심지어 백도의 후기지수들은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닌가요?”

“…어. 맞기는 맞습니다.”

“젊은 친구가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감탄했답니다. 나는 후보생의 나이 때 그런 인내심을 갖추지 못했었는데 말이죠. 참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대견한데, 어찌 하북에서는 망나니라는 고약한 별명이 붙었는지… 아. 이런, 제가 칭찬을 한다는 게 그만….”

“괜찮습니다. 사실인걸요. 그리고 하북에서는 충분히 그런 소리를 들을 만했습니다.”

“과거의 오명 또한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후보생이야말로 학관이 찾던 인재상 그 자체로군요. 안 그래도 오늘 이렇게 부른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장학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예요.”

그렇게 운을 뗀 경혜사태는 정무학관의 장학 제도와 학칙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꽤 긴 이야기였는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랬다.

너한테 장학금을 주고 싶다.

그런데 너는 이미 정무학관에서 제공하는 최고 등급의 장학생인 사대천장학생(四大天獎學生)과 성적 우수 장학생의 수혜자다.

그런데 간밤의 일로 학관의 수위부에서 매년 자체적으로 선정하는 정진(正眞) 장학생을 나와 언 동생들로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한데, 간밤의 일에 연루된 살인귀들과 후기지수들을 벌하기 위해 무림맹과 접촉하면, 아마 매년 무림맹주께서 선정하는 무림맹 장학생도 언용운 후보생을 지명하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학칙상 한 명의 장학생이 수여받을 수 있는 장학 제도가 최대 세 개 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무림맹주 장학생은 양보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양보를 하고 싶은 다른 후보생이 있을까요?”

정말로 미안한지 당금 무림의 고목 중 하나인 경혜사태가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전해오는데.

‘누구한테 양도할지를 내가 정하게 해주면 나쁠 게 없지. 아니 오히려 좋지!’

나는 사실 속으로 잘됐다를 외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원작과 달리 깔끔하게 ‘당금수석 급습 사건.’을 처리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내가 극의 중심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조금 들었는데.

무림맹주 장학생을 정현에게 양도할 수 있으면?

‘딱이지. 딱.’

그러면 대외적으로는 정현이 이 사건을 정리한 게 된다.

정현은 실제로 좀 거들기도 했으니, 영 없는 말도 아니었다.

‘그럼 이 사건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파는 정현이 맞아주고, 원작의 발자취도 한 걸음 정도는 비슷해지는 거고.’

나는 은하연을 통해 피해 보상비나 받고.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이 된다.

생각을 마친 나는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정현. 정현 후보생으로 하겠습니다.”

* * *

그렇게 간밤의 일의 매듭을 완전하게 지은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단강제일객잔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언 동생들 틈바구니에 못 보던 여인이 둘이 추가되어 있었다.

- 못 보던 아해들이 끼어 있구나.

‘그러게요?’

하지만 내 기척에 돌린 얼굴들을 마주하니, 아주 모르는 녀석들은 아니었다.

청자색(靑紫色) 궁장을 입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건 훗날 독수관음 소리를 듣는 사천당가의 당옥기였고.

새하얀 학창의를 입고 뭐가 그리 당당한지 눈빛을 빛내고 있는 건 소무후 제갈설지였다.

‘뭐지?’

면이야 입관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스치듯 텄고, 원작을 읽었기에 두 녀석 다 잘 알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원작을 떠올려봐도 저 두 사람이 이 시점에 정현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머리를 굴려봐도 떠나가지 않는 의문에 나는 그냥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그런 내 말에, 본인들이 무례를 범하고 있음을 아는 듯한 당옥기가 땀을 삐질거리며 말을 골랐다.

“…그. 그게 그러니까. 일단 저는 사천당가의 옥기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갈가의 설지라 합니다. 아우분이신 용명 님께 말씀을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또 입관 시험의 막바지에서 직접적으로 저와 시선을 마주치시기도 했었지요?”

“그렇긴 한데. 내 질문은 무슨 일로 걸음을 하셨냐는 거였소.”

“물으시니 바로 답하겠습니다. 용운 님께서는 수석이 되신 그날의 결과에 만족하시는지요?”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 교수님들이 나를 수석이라 인정하셨는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남이 인정해주는 것 말고 내심을 묻고 있습니다. 용운 님의 내심은 이 제갈설지를 이기셨다 단언할 수 있으신지요?”

그런 제갈설지의 음성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쓰흡 소리를 내셨다.

- …이 아해는 조금 이상한 아해 같은데? 눈동자가 좀…?

그때였다.

그런 사부님의 음성에 맞장구를 치려는데, 이 순간 문득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학식이 지나고 나서 제갈설지가 본격적으로 정현을 귀찮게 했었지?’

원작에서도 내심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똑같이 하며, 다시 한번 붙어보자며 정현을 귀찮게 했었다.

이제 와서 그 사건을 나름대로 해석해보니….

원작의 정현은 입관 시험의 마지막 관문과 당금수석 습격 사건을 거치며 내상을 입은 상태라, 만전의 상태가 될 때까지 제갈설지가 기다렸는데.

지금은 원작과 달리 마지막 에피소드와 당금수석 습격 사건에서 다친 사람이 없으니 그 사건이 빨리 일어난 모양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제갈설지가 강조하고 있는 내심에서 일말의 욕지기가 차올랐다.

‘젠장! 기껏 정현한테 장학금 중 하나를 양보해서 극의 중심을 밀어냈는데, 제갈설지 저 승부욕 거머리가 나한테 들러붙는다고?!’

아놔.

진짜 사절인데?!

‘어. 잠깐만.’

근데 이거 그냥 정현한테 화살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떠오른 생각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제갈 소저. 거, 마음은 잘 알겠는데. 남의 집에 왔으면 이 집 법도를 따라야지.”

“법도요?”

순간적으로 떠오른 묘안을 상기하니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

그렇게 웃음을 머금은 나는 손가락을 잣대 삼아 정현을 가리켰다.

“그 같이 있던 녀석들이 보이오?”

“네.”

“언 동생이라고 하오. 이 언용운이의 동생들이라는 뜻인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어찌 순서를 건너뛰려 하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소저가 나한테 비빌 급이 아니시라는 이야기요. 나와 붙으려면 동생들부터 넘고 와야지. 내 보니 하성이와 소릉이는 그래도 제갈소저가 충분히 앞설 것 같긴 한데, 아직 저기 정현이 녀석에는 못 미칠 성싶소만?”

“하!”

그렇지.

콧방귀 나와 주시고.

“저 녀석을 이겨보시오. 그러면 내 기꺼이 상대해 드리겠소.”

그런 내 말에 눈을 불태우는 제갈설지.

“두말하기 없기예요?!”

“장부일언중천금. 백 번이든 천 번이든 상대해 드리겠소.”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정현.

“어, 언 소협?”

뭐, 임마.

너 아까 언감생심 어쩌고 하면서 물러나는 거 딱 봐놨어.

이거 원래 니 똥이야.

니가 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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