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60화 (60/444)

제60화. 일종일금 (1)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그렇게 운을 뗀 나는 제갈설지와 당옥기 그리고 언 동생들을 차례차례 지나쳐 단강제일객잔 안으로 들어간 뒤.

“따라들 오시오.”

의자 하나를 챙겨 뒷마당으로 향했다.

앞마당에서 싸움을 벌였다간 이래저래 소문도 날 수 있고 하니 뒷마당에서 조촐하게 대련을 주최할 생각이었는데.

언 동생들은 그런 내 행동을 군말 없이 따랐고.

제갈설지도 콧김을 씩씩거리며 따랐다.

“…….”

당옥기는 좀 주저하는 모양새였는데, 제갈설지가 움직이니 마지못해 따라오는가 싶더니….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뒷마당에 이르자마자, 왼손으로 제갈설지를 잡아채 자신의 뒤로 숨기고, 우수를 뻗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 물론 사천당가의 가훈 중 하나가 ‘공격은 최선의 방어.’인 만큼 당옥기가 취한 방어 자세라는 것은 암기를 빼 들어 보여주는 것이었다.

팟! 팟! 팟!

쥐고 있던 부채의 살에서 세워져 나온 비수들은 날이 시퍼런 건 둘째치고 색들이 찬란한 게 각종 독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고.

픽! 픽!

그 부채를 쥔 손목에 감겨 있는 가죽띠에 파져 있는 홈에서도 여차하면 영 좋지 않은 독무(毒霧)가 분사될 것 같았다.

소매 안쪽에서도 일순 무언가가 반짝하고 스치는 것이 여차하면 적지 않은 침들이 저 소매 속에서 뿌려져 나올 것 같았다.

- …예나 지금이나 당가 놈들이란. 고슴도치도 아니고. 뭔 놈의 독침을 저렇게 많이 휘감고 다니는지, 제 놈들은 안 찔리나? 옷 입고 벗다가 한 번은 찔릴 것 같은데?

그런 당옥기의 모습에 사부님께서 쯧쯧 하고 혀를 차셨고.

언 동생들은 검을 뽑았다.

스렁! 스르렁!

뭐, 양쪽 모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사이에 서서 양쪽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였다.

“워워.”

우리 쪽은 간밤에 살수가 다녀간 상황인데, 그 짓을 주도한 녀석들이 입관 시험에 불만을 가진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이 시점에 내가 수석이 된 게 대놓고 불만이라는 제갈설지가 나타났으니 언 동생들이 꼬리를 세우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서로 간에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물론 원작을 읽은 나로선 당옥기도 이해가 갔다.

‘당옥기가 조심성이 좀 많은 녀석이었지.’

기실 당옥기뿐만 아니라 사천당가 사람 모두가 좀 저렇다.

독공에 조예가 깊은 가문이라 백도 무림 내에서 은근히 멸시하는 풍토가 있는데, 또 약을 다루는 가문이라 당가의 영단이나 의술을 탐내는 자들이 당가의 가솔들을 납치하거나 유괴하는 일이 이따금 생기곤 했다.

‘사천당가는 그런 사례들을 미리 막고자, 당가를 건드리면 주옥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지.’

그러기 위해 누군가 당가인을 건드리면 철저하게 보복을 하는 것을 가훈 중에 하나로 삼았다.

천하 사람들은 그런 당가를 향해 지독하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면 사천당가는 더더욱 철저하게 보복했다.

‘그런 악순환 속에 피나 혼인으로 맺어진 가문 사람이 아니면 어지간해선 믿지 않는 가풍이 생겨버린 거지.’

그런 당옥기의 성정을 이미 알고 있는 나였기에,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혈향이 좀 남아 있네.’

수위부의 무인들이 간밤에 뒷정리를 도와주었고, 그들과 함께 우리도 열심히 물도 뿌리고 비질도 했긴 했다.

하지만 하류박의 잡귀들이 흘린 피가 적지가 않아서 뒷마당엔 아직 비릿한 혈향이 감돌고 있었다.

‘망나니로 널리 알려진 내 평판.’

내 말 한마디에 척척 움직이는 언 동생들 거기에 비릿한 혈향.

모르긴 몰라도 당옥기의 머릿속에선 아마 섬찟한 음모가 깃든 함정 하나가 뚝딱 펼쳐졌을 것이다.

‘이래저래 참 공교롭게 됐다.’

하지만 이 상황이 나쁘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일단 정현의 눈빛이 좀 달라졌고?’

조금 전만 해도 제가요? 제갈설지랑요? 하는 생각이 눈빛에서 언뜻언뜻 묻어났는데, 당옥기가 저렇게 나와 준 덕분에 그런 일말의 주저가 걷혔다.

지금이라면 물어! 하면 물 것 같은 분위기가 됐다.

‘그리고 당옥기는….’

당옥기의 경우엔 좀 다른 이유로 좋았다.

‘안 그래도 녀석한테 마음의 짐을 달아놓을 방법이 뭐 없을까를 예전부터 내심 고민 중이었는데, 알아서 무례를 범해줬네?!’

무림을 살아가며 조심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 가장 대처가 어려운 것을 하나 꼽아보라면 단연 독이 아닐까?

제아무리 고수라도 기연이 닿아 만독불침(萬毒不侵)을 이루지 못하면 대처가 안 되는 게 독이다.

한순간에 훅 가기도 하고.

조금씩 중독되어 시름시름 가기도 하고.

중독된 상태에서 급습을 받아 제 실력을 못 내 어처구니없이 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독만 어떻게 해도 강호인의 기대 수명은 최소 삼십 년이 늘어나는 것이다.

‘당옥기는 바로 그 독에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열쇠지.’

당옥기는 당가의 숙원인 만독단(萬毒丹)을 만들어 내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사천당가의 가훈은 대개 살벌한데 그 살벌한 가훈 중엔 ‘은원은 열 배로 갚는다.’라는 항목이 있었다.

아, 물론.

당장이야 작은 오해를 했을 뿐이고, 그마저도 위협만 했을 뿐이지 출수를 한 것도 아니니 그리 큰 빚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하지만 첫 단추를 유리하게 끼울 지금의 기회를 잘 이용하면 머지않은 미래에 천독, 그리고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를 때 도움을 받을 날이 있겠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어.”

짐짓 매섭게 눈을 떠 보이는 당옥기도 그저 자라 보고 놀란 가슴으로 솥뚜껑을 마주한 고양이 정도로 보일 따름이었다.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은 뒤.

일부러 긴 한숨을 내쉬며 당옥기의 질문에 답했다.

“…하아. 뭐 하는 짓이긴, 남의 숙소에 찾아와서 내가 수석이 된 걸 인정하지 못한다고 생떼들을 쓰시길래, 기회를 드리기로 했고. 앞마당에서 다퉜다간 남들 보는 눈도 있고 해서 뒷마당으로 왔소만? 지금 우리 후보생 신분이라는 거 잊은 거요?”

그런 내 답에 당옥기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이 피 냄새가 뭔지를 묻는 거지.”

“어제도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왔었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요. 더 궁금한 게 있다면 학관 측에 문의하도록 하시오. 근데 왜 갑자기 반말이오?”

“그, 그건 갑자기 피 냄새가 나고 하니까 쎄한 느낌이 들어서…. 근데 어차피 동기인데 문제 있어? 너도 반말하던지?!”

“싫소.”

“…….”

“싫다고.”

“…그, 그래서 학관이랑 이야기가 됐다고…요?”

그때였다.

당옥기의 기세가 한풀 꺾인 그때.

당옥기의 뒤에서 주변을 살펴보던 제갈설지가 입을 열었다.

“옥기야. 한바탕 싸움이 있은 뒤에 땅을 골라 놓은 모양이야. 이만한 싸움이 단강구에서 일어났는데 학관에서 모를 리가 없고, 용운 님의 의관도 그 일로 학관에 다녀오신 것으로 보이네? 이건 네가 너무 과민했어.”

그런 제갈설지의 음성에 기세가 두 풀 꺾인 당옥기는 곧바로 입을 열어 내게 사과를 하려 했다.

“미, 미ㅇ….”

하지만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사과도 필요 없소. 아마 망나니라는 내 평판을 토대로 선입견에 빠져 이런저런 상상을 하신 모양인데.”

한마디 말로 때우시려 하면 수지가 안 맞지.

“나는 내 배려를 그대가 무례로 갚은 걸 잊지 않을 거요.”

너와 나의 빚결 고리는 차차 정산을 하도록 하자 당옥기.

* * *

“그래서. 어쩔 거요? 할 거요 말 거요?! 애초에 두 사람을 내가 초대한 일이 없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에 관한 의문이 드오만? 돌아가시려면 가시오. 이쪽도 그게 편하고.”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 가고, 당옥기는 돌아가고 싶은 눈치가 역력했다.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내 태도와 제갈설지의 예측을 토대로 자신이 억측을 한 사실을 깨닫게 되어 양심이 찔려 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갈설지가 하겠다고 나서 버렸다.

“안 돌아갑니다. 정현님을 꺾어 보이겠어요. 아까 하셨던 약속 잊지 마세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제갈설지와 정현이 맞붙을 여건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여건이라 하여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진검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오.”

그저 소릉이 녀석을 시켜 철심 박힌 목검을 무기점에서 구해오게 했고,

하성이 녀석과 함께 물을 길어와 동그랗게 뿌려 대련장의 규격을 확립했다.

“경기장의 넓이는 이 정도로 하겠소. 스스로 졌다는 의사를 표하거나, 지쳐서 대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거나, 이 원을 나가면 패배로 하겠소. 불만 있는 사람?”

“불만 없습니다.”

“저도 좋아요.”

그렇게 모든 여건을 마련됐구나 싶어 대련을 붙이려는 이때.

은하연이 녀석이 잠시만요를 외치더니 종이와 세필 붓을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멍하니 보는 것보다 뭐가 좀 걸리면 재미지 않을까요?”

그런 은하연의 음성에 당옥기가 미간을 좁혔다.

“내기?”

하지만 그에 지지 않고 은하연도 입을 열었다.

“문제가 있나요? 정무학관에서도 춘계 추계 대항전을 할 때면 학관측에서 내기를 주관하는 걸로 아는데요?”

맞는 말이었다.

강호인들 자체가 남녀노소 내기를 즐겨 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정무학관에서 개최하는 기숙사 대항전에서는 학관 주도하에 믿을만한 상단을 거간꾼으로 두고 공식적으로 내기를 열었다.

그에 내가 입을 열었다.

“안 될 이유가 없지. 나는 정현에 금자 한 냥. 쫄리면 뒤지셔도 좋소 당 소저.”

“…쪼, 쫄? 제갈설지에 금자 한 냥!”

그런데 여기서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영역에 은하연이 걸음을 내디뎠다.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 당 소저와 제갈 소저께서 언 공자님과 저희의 시간을 앗고 계시는데 이에 관한 적절한 보상이 필요할 듯하네요. 대진료라고 들어 보셨나요?”

그 말에 눈만 깜빡이는 당옥기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은하연의 하산을 허락했다.

* * *

그렇게 모든 여건이 마련되었다.

나는 내가 그려 놓은 원의 끝 선에 맞추어 선 정현과 제갈설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시작!”

그러자, 각자의 보법을 밟으며 달려와 종심에서 맞붙은 정현과 제갈설지가 목검 부닥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딱!!!

대련의 초반 기세를 잡은 쪽은 제갈설지였다.

딱! 딱! 따악!!!!

학을 연상케 하는 유려한 보법으로 정현의 범위 안에 접어든 제갈설지는 와룡검(臥龍劍)이라 이름 붙은 제갈가 특유의 검을 휘둘렀다.

와룡검.

설정상 제갈설지의 시조가 되시는 계한의 승상 제갈량이 궁지에 몰린 나라를 구하고자 당시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검법들을 신산(神算)의 지력으로 다시금 벼려내 물려주었다 전해지는 비전.

그 이름에 걸맞게 제갈설지의 검은 수려했다.

딱! 딱!!! 딱딱딱!!!

이미 파천의 검의 끝을 보신 사부님의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모르지만, 내 눈엔 와룡검도 충분히 대단해 보였다.

‘왜 제갈세가가 천하제일검수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는지 알겠다.’

무림학관의 검술천재의 제갈세가는 숱한 무협지의 제갈세가들이 그러하듯 대대로 대군사와 정무학관의 총장을 배출해낸 명가로 묘사되지만, 천하제일을 노려볼만한 검수가 출현한 건 제갈설지가 처음이라 묘사된다.

그저 원작을 읽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봤는데, 내가 검수가 되어 눈으로 직접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때를 기다리는 용이라는 검법의 이름처럼 지금껏 ‘때’를 만나지 못한 건가?’

저 검은 아무나 휘두를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현란한 공수의 전환 속에 공과 방의 묘리가 절묘하게 펼쳐지는데, 일반적인 검초와는 결이 달랐다.

일반적인 검초가 수천수만 번 정제된 초식을 휘둘러 내는 느낌이라면, 제갈설지가 펼치는 검은 사람이 낼 수 있는 모든 검로를 익힌 뒤, 그냥 상황에 알맞게 검을 뻗는 느낌이랄까?

저런 검을 펼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내력과 함께 엄청난 연산력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그걸 제갈설지가 해내고 있었다.

‘천재는 천재네.’

제갈설지는 자신이 그때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물 만난 고기처럼 검을 쏟아내고 있었다.

딱!

하지만 정현 또한 천재였다.

뭐, 제갈설지는 저 연산력을 검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학관이라는 궤에 정현과 제갈설지 둘만 던져 놓는다면 몇 년을 수학하든 정현이 제갈설지를 성적으로 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검.

딱 검술 하나로 국한한다면 정현은 제갈설지가 범접할 수 없는 천재였다.

‘흐르는 시간이 다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내 오성이 정말이긴 한 모양인지, 관전 중에 갑자기 찰나가 억겁처럼 흘렀다.

그리고 이 순간.

나는 정현 또한 이 시간을 누리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생각만으로 저 둘 사이에서 내 검을 펼쳐 보았다.

무언가가 보일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