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일종일금 (2)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엷은 심득의 실마리를 쫓기 위해.
나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심상으로 빚은 내 모습을 실제로 맞붙고 있는 정현과 제갈설지의 모습 위에 겹쳐 보았다.
‘내가 정현이었다면?’
처음에는 정현의 자리에 나를 두고 제갈설지가 펼치는 와룡검을 받아보는 상을 그려보았다.
‘단순히 제갈량이 남겨서 와룡검인 게 아니라 정말로 때를 기다리는 용 같네.’
수세에선 온몸에 용린(龍鱗)을 휘감은 웅크린 용처럼 짓쳐 드는 공격을 빗겨내고, 그러는가 싶다가도 포효하는 용처럼 크게 떨쳐내며 이쪽을 노려온다.
한계를 가늠하기 힘든 지력이 그 과정에 기민함을 더하니, 말 그대로 틈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에 심상 속의 제갈설지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에서 백룡(白龍)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용이라.’
하지만 힘들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는 것이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나라면 지금 파천맹진으로 찌르고 들어갔을 것이다.
제갈설지가 줄곧 해온 대로 빗겨내기엔 지금은 몸이 너무 크게 열렸다.
여기서 각을 잘 좁혀 제대로 일검을 찔러낸다면?
‘제갈설지는 오른 어깨를 접어 팔뚝을 내어주든, 땅을 구르는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수를 쓰든 양자택일을 해야겠지.’
아니나 다를까.
쌔액!!!
정현 또한 나와 같은 길을 보았는지, 내 예상과 한 치의 다름도 없는 검을 뻗어냈다.
“!”
그에 제갈설지가 발작을 하듯 몸을 틀어 땅을 굴렀다.
그 바람에, 제갈설지가 입고 온 하얀 심의(深衣)가 흙과 먼지로 범벅이 되니.
내 심상이 만들어 낸 용의 형상이 고아한 백룡의 모습에서 개천에서 막 올라온 흙투성이 용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그런 제갈설지의 모습에,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입을 벌렸다.
“…어. 이러면 정현 도장이 이긴 거 아닌가요?”
“승부가 갈린 것은 아닐 거예요, 우 소협. 언 공자께서 말씀하신 승패의 조건은 어느 한쪽이 스스로 졌다는 의사를 표하는 것, 또는 지쳐서 대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 그도 아니면 그려 놓은 원을 나가는 것이라고 하셨으니까요.”
“누님의 해석이 맞습니까? 용운 형님?”
“맞다. 땅을 구르면 진다는 말은 안 했어.”
“그, 그래도 제갈 소저가 졌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요? 백도 무림의 사람들은 나려타곤의 수법을 엄청 부끄러운 일로 취급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 상황에서 더 하자는 말을 하는 제갈 소저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안 되는데요…?”
우소릉의 말에 은하성과 은하연이 동시에 고개를 주억였다.
제갈가의 장중보옥이라는 배경.
거기에 덧붙여지는 어린 시절 절맥을 앓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청초하다 못해 현숙해 보이는 외모.
그 세 가지 요소로 인해 겉보기엔 몸에 먼지 한 톨만 튀어도 자신이 진 것으로 하자고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제갈설지다.
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질 것 같으면 저렇게 땅도 구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제갈설지였다.
“아직 안 끝났어요!”
그런 제갈설지의 음성에.
언 동생들이 동시해 헛웃음을 터트렸고.
당옥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저 미ㅊ… 크흠. 흠흠.”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전해 오셨다.
- …거 신기한 녀석이로고. 보통 스스로를 정파(正派)라 자처하는 녀석들은 우가 녀석의 말처럼 저런 일을 수치로 아는데, 첫인상부터 살짝 눈이 돌아 있는 것 같더니만.
뭐, 제갈설지의 상대가 나였다면 아마 여기서 승부가 끝났을 것이다.
‘나라면 제갈설지가 저렇게 나올 줄 예상했을 테니, 그저 찔러 들어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서 파천격류를 사용했겠지.’
내가 제갈설지의 본성을 몰랐다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순간.
심상 속에서 용으로 화한 제갈설지가 휘몰아치는 파천의 격류에 베이고 베이다 결국 때가 아님을 깨닫고 꼬리를 말고 물러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나라면 애초에 완전히 이겼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검을 멈추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정현은 나와 달랐다.
소릉이나 하성이처럼 이만하면 자신이 이긴 것이라 여긴 것인지, 아니면 예의를 지키기 위함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무른 녀석의 성정 때문인지 녀석은 검을 멈췄다.
“다시 갈게요!”
“들어오십시오.”
음.
다 떠나서 나는 저렇게 예의 바르게 들어오세요 하지 않겠지?
* * *
아무튼 그렇게 다음 합이 시작됐다.
따악!!
다시금 맞부딪히기 시작한 정현과 제갈설지의 목검.
그런 두 사람의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고자 고요해지는 좌중.
그리고 다시금 느리게 흐르기 시작하는 시간.
‘이번에는 정현의 검을 상대해보자.’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찰나 속에서, 나는 제갈설지의 자리에 나를 놓고 정현의 검을 상대하는 심상을 그려보았다.
노삼 교수와 싸울 때, 힐끔힐끔 녀석의 검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제대로 보니 받는 느낌이 또 달랐다.
제갈설지가 용이었다면 정현은 태극이었다.
‘역시 쉽지는 않네.’
그럴 게, 양자 간의 목검이 정신없이 맞부딪히는 와중에 정현의 검에만 고요함이 있었다.
그 고요함의 근원은 태극이었고. 능유제강(能柔制强), 그러니까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는 무당 특유의 묘리였다.
남들과 다른 시간을 걷는 검술의 천재가 그 묘리가 담긴 검을 면면부절 끊김 없이 이어내니 어지간한 검격은 힘을 잃고 겉돌고야 마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의 나와는 상성이 좋지는 않다.’
이 마음의 소리를 사부님께서 들으신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경을 치시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모진 바람 앞에 고목은 부러져도 갈대는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내 검을 모진 바람에 비유한다면 제갈설지의 검은 고목이고, 정현의 검은 갈대라 할 수 있었다.
아, 물론.
부드러움이 언제나 강함을 제압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갈대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는 태풍도 있는 것이다.
파천검결은 충분히 태풍에 비유해도 좋을 법한 무공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런 검을 휘두를 날이 오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파천십검의 진면목을 끌어낼 수 있는 성취를 이룬 단계가 아니었다.
초식도 고작 네 개를 익혔을 뿐이고, 그 초식들의 숙련도와 심법도 대성했다 할 수는 없었으며, 일신에 지닌 내력도 정현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다.
‘…새삼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몸이 허한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더 많이 챙겨 먹고, 검도 더 많이 휘둘러야지.
정무학관 다 뒤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심상 속에서 휘두르는 검에 변주를 줘보았다.
쾌(快), 그러니까 빠르게도 휘둘러보고, 상대의 검이 고요한만큼 강(强)과 맹(猛)을 더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어차피 마음으로 휘두르는 검이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파천격류의 초식을 맞춰낼 때 펼쳐 보였던 검에서 더더욱 힘을 덜어 보았다.
그리고 제갈설지가 검을 떨쳐낼 때 보여주었던 검식들도 상기해 보았다.
‘부드럽고. 부드럽게. 정현의 검처럼, 제갈설지가 보여준 움직임처럼.’
정중동(靜中動).
파천의 내력을 품은 채 고요함을 머금고 부딪혀 밀어낸다.
‘!’
그러자 태극으로 화한 심상 속의 정현이 일순 크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보일 것 같았던 기분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니까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이때.
따악!!!! 하고 목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나더니, 동시에 언 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언 공자!”
“언 형!!”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눈을 뜨고 보니 제갈설지의 검이 내 바로 앞에 날아와 꽂혀있었고.
“흐하. 흐하.”
널브러져 헐떡이는 제갈설지의 목에 정현이 목검을 겨누고 있는 가운데.
은하성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목검이 정확히 다리 사이로 날아오는데 왜 꼼짝을 앉고 계십니까 형님! 제가 다 오줌을 지릴 뻔했습니다!”
“…딱 저기에 날아와 꽂히리라고 예상하신 것 아닐까요? 언 형 정도면 가능하실 것 같은데요?”
“아니, 예상하고 자시고의 문제냐 그게? 남자라면 자연스럽게 오므려지는 거 아냐? 아, 용운 형님은 담이 너무 크셔서 그런 건가?”
그렇게 은하성과 우소릉이 실없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은하연은 나름 정확하게 내 변화를 잡아냈다.
“언 공자. 눈이 좀 깊어지신 것 같은데요?”
과연 검후의 수제자로 들어갈 만한 통찰력이었는데.
그런 은하연의 말에 은하성과 우소릉이 동시에 내 눈을 응시하더니.
“…허. 정신없이. 검이 부닥쳤다 떨어졌다 해서, 저는 그냥 저거 뭐야 무서워.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깨달음을 얻으신다고요? 용운 형님 당신은 도대체?”
“…그, 그러게요. 저게 수석의 영역인 걸까요?”
연이어 헛웃음들을 터트렸고, 이어서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해 오셨다.
- 호오. 생각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 같길래 내버려 두었는데, 뭘 건져서 나오긴 한 모양이로구나?
‘깨달음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사부님 말씀대로 뭘 건지긴 한 것 같은데, 좀 뒤죽박죽이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부님의 고견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잠시 뒤에 못난 제자의 이야기를 좀 들어 주시렵니까?’
- 오냐. 그러라고 있는 사부가 아니더냐.
물론 그러려면 저 제갈가의 거머리부터 돌려보내야 했다.
나는 거의 탈진한 것처럼 헐떡이는 제갈설지에게 성큼성큼 다가 물음을 던졌다.
“더 할 수 있겠소?”
그런 내 말에, 제갈설지는 우물우물 한마디 말을 해왔다.
“…하후있허.”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보나마나 할 수 있다 뭐 그런 말이겠지.
의지는 가상하나 누가 봐도 손가락도 까딱하기 힘든 모양새였고.
나는 나대로 얻은 심득이 날아가기 전에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에 나는 제갈설지의 귓가에 한마디 말을 전했다.
“제갈설지. 개같이 패배.”
* * *
뜻밖에 주최하게 된 정현과 제갈설지의 대련 이후.
비 맞은 개꼴을 하고 돌아간 제갈설지는 일단 공식적으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당옥기 이거는 근데 왜 안와? 제갈설지를 그렇다 쳐도 지는 내기에 걸었던 금자. 막상 지고나니 외상을 하겠다던 그 금자 내놓으러 와야지!’
아무튼 하류박 사건 이후 단강구 경계가 강화되었기에 이렇다 할 큰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 나와 언 동생들은 차근차근 입학을 준비할 수 있었다.
뭐, 입학 준비라 하여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언 동생들에게 수위부에서 수여하는 장학생들에 선정되었음을 알려주었고, 입관 시험을 치를 적에 지급 받았던 하얀 무복을 빨고 다렸다.
그 외에 나머지 시간들은 수련이었다.
제갈설지가 찾아왔던 일에 다들 자극을 받았는지.
정현과 은하성, 우소릉은 물론이요, 은하연도 나를 따라 아침 수련에 참가하여 오금희와 각종 동물보 정도는 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나는 제갈설지와 정현 두 천재의 대련을 보며 잡아낸 실마리를 쫓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물론, 그날 엿봤던 거대한 그림이 한순간에 확 그려지지는 않았다.
- 영 옆길로 샌다 싶으면 일러줄 테니, 일단 수련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스스로 겪어 보거라. 그 순간순간들이 훗날 중요한 순간에 필요한 검으로 돌아올 것이니라.
하지만 사부님의 지켜봐 주시는 가운데 나는 긍정적인 시행착오를 해가며 조금씩 조금씩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그러는 동안 남은 봄 방학 기간이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갔고.
마침내 입학식 당일이 되었다.
“사랑하는 재학생 여러분. 존경하는 내외빈 여러분. 학업과 수련 그리고 공사가 다망하신 가운데 빈니의 초대에 이렇듯 응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이렇듯 좋은 날을 잡아 여러분들을 초대한 뜻은 장차 정도의 길을 걸어갈 백육십두 명의 용봉들을 축하하고 또 환영하기 위함이나, 그러기에 앞서 신입생들의 다짐을 듣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신입생 대표. 언용운은 단상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