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입학식 (2)
언정웅의 질문에 언용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
근래 이런저런 위기와 관문들을 언용운과 함께 돌파해온 언 동생들이었다면 ‘형님께서 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구만?’ 하며 그 고민이 얼마나 계속되든 간에 언용운이 입을 열기를 가만히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언정웅은 이런 식으로 언용운을 마주하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아니, 오랜만인 정도가 아니라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하여 초조한 마음으로 언정웅은 미간을 좁혔다.
‘끙.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거늘.’
이제 와 돌이켜 보건대, 언정웅은 예닐곱 무렵이 지난 이후의 언용운에겐 늘상 엄히 대했던 기억밖에 없었다.
‘부인의 말이 맞긴 한 것이지.’
그런 언정웅에게 부인인 이화 부인은 매정하다 하였다.
잘못은 크게 혼내고 잘함은 칭찬치 않으시니 언용운이 겉도는 것이라 하였다.
당시에도 부인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정웅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언정웅은 한 사내아이의 아비이기 전에 진주언가에 의탁한 모든 식솔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가주였다.
그리고 언용운은 평범한 가정의 사내아이가 아니라 진주언가의 후계자였다.
게다가 작금의 진주언가는 여러 위기와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세인들은 그래도 천하의 무가들을 줄을 세우면 족히 열 손가락 안에 드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들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실 하북권웅이라는 명성을 쌓아 올린 언정웅 본인과 산서상방의 금지옥엽이었던 이화 부인 덕에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다음 대를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심적인 여유도, 시간적인 여유도 충분치 못했다.
한데 언용운이 치는 사고는 그나마 있던 여유를 차곡차곡 줄여가니 엄히 혼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어느 순간 가문의 비급을 팔아먹고 말았으니, 언가에서 나가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 준다 해도 언정웅은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주이니.’
하나, 언정웅은 지금 진주언가의 가주로 단강제일객잔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언용운은 이제 진주언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객잔은 오롯이 언용운 그리고 언용운이 거둔 이른바 언 동생들이 전세를 낸 공간이었다.
언정웅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언용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후. 이런 날, 이런 자리에서까지 내게 진주언가 가주의 얼굴을 강요하는 사람은 없겠지.”
역설적이게도 언용운을 쫓아냈기에, 이 순간만큼은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갈 수 있었던 언정웅.
그가 씰룩이는 입꼬리를 굳이 참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하나만 확실히 하자꾸나. 용운이 네가 정말로 수석을 차지한 게 맞느냐?”
그런 언정웅의 음성에.
언용운이 고개를 갸웃하면 꾹 닫혀 있던 입을 드디어 열었다.
“……?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있었다.
정무학관의 총장인 경혜사태가 처음 언용운의 이름을 불렀을 적엔, 언용명을 잘못 말한 줄 알고 이름이 잘못되었다 건의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고.
쫓아냈던 큰아들이 단상 앞으로 걸어 나올 때는 눈을 비볐으며.
언용운이 대표로 선서를 할 때는 그 망나니 녀석이 어찌 저러고 있나 하는 의아가 머릿속을 채우는 와중, 한편으론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 자리에 무림의 명숙들과 숱한 후기지수들이 없었다면 어깨춤을 췄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니 머릿속에 남은 것은 의아였다.
“내. 믿기지가 않아 그런다. 용운이 네가 내로라하는 기재들을 누르고 정무학관의 수석을 차지한 것도 그렇고, 아까 그 언 동생인가 하는 친구들이 너로 인해 다시 태어났다, 목숨을 구했다, 덕을 보았다, 많이 배우고 있다 뭐 그런 말들을 하는 것도 그렇고.”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이 순간 수많은 생각이 언정웅의 머릿속을 스쳤다.
‘뭔가 성적 산출 과정에서 오류라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당장에라도 저 객잔의 문이 열리어 착오가 있었다며 정무학관의 교직원들이 들이닥치는 게 아닐까?
심지어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짜고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꿈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
언정웅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이 스치는 이때.
아버지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언용명이 엷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입관 시험을 치르는 모습은 제가 거의 다 지켜봤습니다. 마지막엔 제갈민 교수님께서 완벽한 풀이였다 극찬까지 하셨지요.”
“제갈민. 그 친구가?!”
“예. 형님의 친우분들의 말씀도 다 맞을 겁니다. 은가의 이야기는 저번에 언가장에 형님 소식이 올 때 확인했었고, 정현 도장과 우 소협은 제가 실제로 보았지요. 입관 시험 과정에서 정현 도장의 옛일이나 우 소협의 출신을 두고 괄시를 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는데, 형님께서 울타리가 되어 주신 걸로 압니다.”
“…그랬단 말이지. 허. 그렇다 하더라도 정무학관의 시험이라는 게 단기간에 될 일이 아닌데…. 그렇다면 용운이 네가 힘과 뜻을 숨겨왔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느냐?! 대체 무엇을 언제부터 숨기고 있었던 것이야? 대관절 아비 어미 동생에게 말하지 못할 사정이 무엇이냐?!”
언정웅의 질문에 언용운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빙의되기 전 일이니, 원작이니 하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쯤 하여 언용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 형님께서 때가 되면 어련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장에 형님을 가문에서 내보내시던 날의 결정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제가 일전에 여쭈었는데 형님께서도 ‘당장은’ 가문에 돌아오시겠다는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저 축하만 해주시는 게 어떨런지요.”
언용명의 말은 언정웅의 폐부를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돌려 말하고 있었으나, 언용명의 말은 결국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안 되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맞았다.
언정웅의 이름에서 진주언가의 가주라는 직함을 빼면 남는 것은 평범한 아비가 아니라 미안한 아비일 테니까.
“험. 험. 그렇구나. 알았다. 내, 그리하마.”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당장은’ 아니라는 말은 ‘언젠가는’이 동반되는 말이었으니까.
“후.”
그에 짧고도 깊은숨을 토해낸 언정웅이 아픈 손가락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용운아.”
“예. 아버님.”
“너를 쫓아내던 날 나는 네게 더 할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하나,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말을 할 때 내 마음속엔 네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었구나. 사정을 모르니 내 일단 덮어놓고 사과하마. 내, 네가 속내를 털어놓을 날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예?”
“…애썼다.”
* * *
꼬끼오-
이튿날 아침.
나는 언제나처럼 아침 수련을 시작했다.
몸을 풀고, 내력을 운용하며 힘껏 달리고, 운기조식을 통해 기를 정련하고, 그 과정들을 차례차례 마치고 이제 시원하게 등목 한판만 때리면 되겠네 하는 생각에 우물가로 걸음을 옮기는 이때.
나를 향해 사부님께서 한마디 말을 전해 오셨다.
- 근데 오늘은 아침 수련을 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더냐?
‘…제가 언제요?’
- 분명히 그런 말을 했느니라. 네 녀석의 동생들도 그 말을 믿고 나오지 않은 것이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제가 하기는 했죠.’
원체 좋은 날이기도 했고, 또 언정웅이 주는 술들을 다들 사양하지 않고 꿀꺽꿀꺽들 받아 마시길래, 다들 너무도 달리는 것 같아서 뭐 그런 취지의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수련이 아예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이라면 기억을 한번 잘 되새겨 보십쇼 사부님. 저는 수련을 하지 않는다고는 안 했습니다. 정확히 쉴 사람은 쉬어도 좋다고 했지요.’
- …그게 그거 아니더냐?
‘전혀 다르죠. 와 그러고 보니 이 자식들 한 명도 안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허. 안 되겠네, 이 자식들 정신 무장들을 새로들 좀 시켜야겠네!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아니 쉬란다고 진짜 쉬어? 입학만 하면 학관 생활 끝나나?! 허, 라떼는 진짜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에이잉!!’
- …쉬란다면 진짜 쉬어야지. 나 때도 사부님께서 쉬라시면 쉬었거늘 대체 네 녀석이 말하는 나 때가 언제냐?! 어제 보니 가문에 있을 적엔 천하의 망종이었던 모양이던데?!
그런 사부님의 말에 나는 문득 언씨 삼부자만 오롯이 남아 술잔을 기울였던 간밤을 떠올려 보았다.
‘…….’
오랜만에 마주한 언정웅, 그리고 용명이.
솔직히 어색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좀 간지럽긴 했지만.’
가족과의 유대라는 건, 지난 생을 통틀어 나와는 큰 연이 없던 것이었으니까.
망나니였던 과거 덕분에 부자지간 사이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기에 보기에도 이상하지 않았을뿐더러, 가족이라는 고리 하나만으로 나를 믿어주는 언정웅과 언용명.
그런 감정들이 오롯이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언젠가, 언정웅 아니 아버지… 와도 좀 더 터놓고 이야기할 날이 있겠지.’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용운이라는 인물로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간다면, 나는 그를, 그는 나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아무튼 지나간 밤은 지나간 밤이고.
이젠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어느 기숙사를 들어갈지 본격적으로 고민에 들어가야지.’
그때였다.
그렇게 아침 수련을 마친 내가, 땀을 닦고 등목 한판 때리고 본격적으로 미래에 관한 고민을 해보려는 이때.
예고 없이 찾아온 과거가 나를 향해 짓쳐 들었다.
“용운이! 네 이노오오옴!!!”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버지 곁에서 입학식을 관람하고 계시던 양반이시라는 점과 팽재혁 교수와 닮은 얼굴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시커먼 대도를 빼 들고 물소처럼 짓쳐 드는 저 중년인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북팽가의 가주 팽무혁.’
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팽무혁의 도가 다짜고짜 휘둘러졌으니까.
쌔액!!!
팽무혁은 도의 날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도록 쥐고 있긴 했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때는 꼭 크게 베였을 때만 있는 게 아니다. 잊혀졌을 때도 있고, 독도 있고 또 맞아 죽기도 한다.
팽무혁의 일도는 그중 마지막 예에 해당되기에 충분했다.
‘저건 넋 놓고 맞으면 그대로 다진고기 꼴이 난다.’
스렁!
나는 바쁘게 회한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번개같이 파천선풍의 초식을 비스듬히 쳐올려 내려찍는 팽무혁의 일도를 막아냈다.
쩌엉-!!!!!!
제대로 막았음에도 뼈마디에 울리는 위력.
그 위력에 절로 감탄이 나오긴 했지만, 감탄을 하고 있을 새는 없었다.
- 맹호출림(猛虎出林). 팽가의 오호단문도로구나.
‘크으런 것 같으네요?!’
나는 모든 생각을 멈추고 오롯이 팽무혁의 도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바쁘게 검초를 전개하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챙채챙!!
그 덕에 팽무혁이 질러대는 투로를 아슬아슬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도기조차 두르지 않은 도에 뼈와 관절들이 비명을 터트린다.’
눈앞의 도객은 지금의 내가 넘기에는 좀 많이 벅찬 상대였다.
‘진정을 좀 하셨으면 좋겠는데.’
내 검은 아직 팽무혁을 진정시킬 물리적인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이때.
채앵!!!!
날은 시퍼렇고 면은 검붉은 이른바 청홍검(靑紅劍)이 나와 팽무혁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엄청난 물리력으로 팽무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채챙! 채채채챙!!
청홍검의 주인이면 확실히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공손무결?’
이번 입학식에서 정현에게 무림맹주 장학 증서를 수여했던 사람.
그러니까 무림맹주였다.
“맹주께서. 여긴 어쩐 일인가?”
“그러는 팽 선배께서는 어찌하여 백도 무림의 싹을 괴롭히고 계십니까?”
내 말이!
거 팽씨 아저씨는 왜 그러시고!
공손씨 아저씨는 거기서 왜 나오시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