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64화 (64/444)

제64화. 입학식 (3)

팽무혁이 휘둘러 오는 흑도를 정신없이 상대할 때는 말 그대로 나 살기 바빠서 별 감흥이 없었다.

“후.”

한데 난입한 공손무결 덕분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몇 걸음 물러나 숨을 돌리고 보니, 마주 선 두 중년인의 모습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팽무혁과 공손무결.’

하북의 대호(大虎)와 백도 무림의 수장(首長).

아, 물론 ‘무림학관의 검술천재’ 속 무림맹은 여타 무협지의 무림맹처럼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이 아니다.

‘의회 형식의 합의체에 가깝지.’

사정이 그러니 무림맹주 또한 그리 대단한 권력자라고는 볼 수 없었다.

‘권력자보다는 조율자라는 표현이 맞아.’

명문대파로 이루어진 상원.

군소 방파들로 이루어진 하원.

강호의 이권과 갈등을 두고 수많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그 아사리판의 장에서 최소한 강호가 멀쩡하게 돌아갈 수는 있도록 조율하는 자.

그게 바로 이 세계관의 무림맹주였다.

‘쉽게 말해 극한 직업이라는 소리지.’

상원이든 하원이든 수틀리면 죽일 놈이니 앞잡이니 몰기가 일쑤고, 천하 무림인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돈이 물처럼 흘러들어와 재산 축재가 가능한 자리도 아니다.

‘그런 주제에 권위도 썩 대단치가 않아.’

그렇다고 부르는 자리가 적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후기지수들 입학식에 다 오셨지 않은가?

즉 다시 말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는 바쁜 자리였다.

하여, 이 세계관 속 무림맹주는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면 어지간하면 기피하는 자리였다.

하나, 그렇다 하여 눈앞의 공손무결이 별 볼 일 없는 사내인 것은 아니었다.

‘무림맹주로 거론될 정도의 사람이면 애초에 출신 문파의 장문인도 가능하다는 소리니까.’

맹주라 불리기 전의 공손무결의 별호는 구패검(求敗劍).

구패란 패배를 하고 싶다는 말, 다시 말해 진적이 없는 검객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공손무결이 세상 모든 무림인과 겨뤄본 것은 아니었다.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려 하는 백도 무림인들의 성향과 선배든 후배든 존중하고 보는 공손무결 본인의 성정이 겹쳐지며 전적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

하지만 일단 걸려온 싸움을 진 적은 없다는 뜻이었고, 그걸 천하의 사람들이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그 공손무결. 그리고 천하 도객들의 수위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도제(刀帝) 팽무혁.’

둘이 저러고 있으니,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내가 일순 머릿속으로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해보는 사이.

“맹주께서도 아시다시피 내 어지간하면 맹에서 나오는 령에는 협조하는 사람일세.”

팽무혁이 쥐고 있던 흑도를 땅에 꽂아 턱을 괴더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맹주의 물음에 답을 드리긴 해야 하는데, 그게 말하기가 좀 그렇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 공손 모, 팽 선배를 언제나 존경해 마지않아 왔는데. 선배께서 제게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하시니 섭섭해지려 합니다.”

“그럴 것 없네. 말하기가 좀 그렇다는 이유는 집안일이기 때문일세. 왜, 율령은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맹주시라도 집안일에 관여하실 수는 없으시네. 무결 동생. 무결하게 돌아가고 싶다면 그쯤 하게.”

…?

무결 동생, 무결하게 돌아가고 싶다면 그쯤 하게?

- …이 와중에 농을 한 것인가? 백보 양보해 농을 할 수 있다 치더라도, …저 팽가 놈은 지금 저걸 웃기다고 한 것이냐?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원작의 팽무혁은 작중에서 숙숙농담이라 표현되는 이른바 아재 개그를 즐겨하는 사내였다.

‘…팽무혁 본인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이시는 게 그런 모양인데요?’

그런데 이때.

공손무결이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역시 팽 선배이십니다. 매번 뵐 때마다 무위만 높아지시는 게 아니라 재치도 늘어 가십니다? 무결 동생. 무결하게 돌아가고 싶으면 그쯤 하게라니요! 크하하하하!”

어찌나 잘 웃는지.

팽무혁은 대놓고 뿌듯해하고 있었고.

나도 순간적으로 정말로 저게 재밌어서 웃는가 싶어서 자세히 봤는데, 자세히 보니 공손무결의 눈매가 어색했다.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이었다.

저게 무림맹주?

진정한 극한직업이었다.

뭐,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웃어 재껴 주위를 환기한 공손무결은 청홍검을 허리춤의 검집에 채워 넣으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하하하. 우스워서 할 말을 다 잊을 뻔했습니다. 아무튼 팽 선배의 말씀은 알아들었습니다. 확실히 무림맹주는 남의 가정사에까지 관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럼 개인으론 어떻습니까? 무림맹주라는 직함을 떼고 팽 선배의 후배인 공손무결 개인으로서는요. 사실 제가 이 친구한테 볼일이 좀 있거든요.”

“억지 부리지 말게.”

“좀 봐주십시오. 따지고 보면 억지를 부리시는 것은 팽 선배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팽가와 언가는 성을 이루는 글자의 획수부터 열두 획과 아홉 획으로 다른데 어찌하여 집안일이라 하십니까?!”

팽무혁과 공손무결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들었을 땐, 공손무결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와 정웅 그리고 팽가와 언가의 관계는 익히 알고 있을 텐데? 무림맹주로서 귀를 열고 살았다면 저 망종이 하북에서 벌인 일도 알 테고?”

“알지요. 두 분이 의형제시라는 것도, 그 의형제 관계가 강호에 널린 명목상의 유명무실한 관계가 아니라 혈족처럼 끈끈하다는 것도. 그리고 여기 이 언용운이라는 친구가 언가의 비전을 탕진하고 심지어 팽가의 이름까지 가져다 도박을 했다는 것도요.”

하지만 여기까지 듣고 나자 내 생각이 바뀌었다.

‘…처맞을 만하잖아?’

자기 가문도 모자라 남의 가문까지 팔아먹었다니.

전(前) 용운이 이놈!

내가 팽무혁이었다면 진작에 뼈도 못 추리게 했을 것이다.

심지어 팽무혁은 훗날 마교의 군세가 하북 전역을 기습했을 때.

팽가보다 언가가 위험하다며 목숨을 걸고 혈혈단신으로 진주로 달려오기까지 하는 위인이었다.

그러니 어째서 팽가를 쓰는 사람들이 나만 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지 알 것도 같았다.

‘진짜 자기 가족처럼 형제고 조카라고 생각하는 거지 뭐.’

아, 물론 일은 전(前)용운이 놈이 벌이고, 벌만 내가 받는 상황인 만큼 매를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이해만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유사시를 대비해 회한을 꽉 움켜쥐었고, 그러는 사이 공손무결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다 압니다. 다 알아요. 한데, 제가 알기로는 언용운 이 친구가 가문에 쫓겨난 지가 제법 되었습니다. 경을 치시려면 쫓겨날 즈음하여 치셨어야지요. 이제 와서 이러시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으신 것 아닙니까?”

“…크흠.”

엥?

다른 이유?

그때였다.

공손무결의 입에서 팽무혁이 이러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 나온 그때.

객잔의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흠흠. 의형께서 용운이 녀석에게 훈육하시는 듯하여 우제가 가만히 있었는데, 그 외에 다른 이유가 더 있으시다면 안으로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맹주께서도 안으로 드시고요. 용운이 너도 의복을 바로 하고 들어오너라.”

* * *

‘원작의 정현에게는 딱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씻고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는 와중에 가만히 공손무결이 나를 찾아온 이유와 팽무혁이 시커멓고 날이 선 회초리로 나를 치는 것 외에 나를 찾은 이유가 무엇일지를 고민해 보았다.

‘모르겠네.’

하지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가서 들으면 될 일이지.’

생각을 마친 나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바로 한 뒤 객잔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공손무결과 팽무혁에게 수결을 받고 있는 주인장이 보였다.

“예. 예. 거기에 잘 먹고 갑니다. 예. 그렇게 써주시고. 그 위에 이제 교차하듯 함자를 써주시면 됩니다.”

그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주인장이 아주 계를 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깨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흠. 이상한데 가져다 쓰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랬다간 이 흑도가 자네를 용서치 않을 걸세?!”

“하, 하이고 그러문입죠! 뵙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이렇게 떨릴 지경인데 언감생심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요?!”

“팽 선배께서도 참, 가위표로 교차해서 이름을 써넣는데 이걸 어디다 가져다 쓴단 말입니까?”

“흠. 그런가?”

“예. 끽해야 앞으로 이곳을 찾을 응시생들의 등이나 좀 처먹을 뿐이겠지요. 아니 그런가 주인장? 하하하.”

“예?! 아, 아닙니다요!”

“거, 의형도 그렇고 맹주께서도 그렇고. 주인장을 놀리는 것은 그쯤 하십시오. 간밤에 겪어보니 인품이 넉넉하신 분이시더이다. 음식에 간도 잘 맞추시고.”

“가, 감사합니다. 가주님.”

“별말씀을. 아무튼 아침부터 술은 좀 그렇고. 주인장. 여기 차를 좀 내어줄 수 있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이제 보니 나쁜 포두, 이상한 포두, 착한 포두가 한자리에 다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저 사이에 들어가 앉아야 했다.

‘환장하겠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 포권을 취했다.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제대로 인사드립니다. 백부님. 맹주님.”

“흥.”

“반갑네.”

그리고 이만 빠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틀었다.

“그럼 좋은 시간들을 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무림 말학인 저는 이만.”

하지만 팽무혁과 공손무결이 동시에 나를 불렀다.

“어디 가느냐. 앉거라.”

“그래. 어차피 자네 이야기니 앉으시게.”

자연스럽게 도망치는 것은 실패했다.

나는 엷은 한숨을 삼킨 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따끈한 차가 날라져 왔고.

그 차로 따끈하게 목을 축인 공손 무결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정무학관의 기수로 보나 연배로 보나 아래이니 양보하겠습니다. 팽 선배께서 먼저 이곳을 찾아오신 진짜 이유를 말씀하시지요.”

“…흠. 그리하지. 험험. 입학식이 있기 전에 재혁이 녀석이 그러더구나. 용운이 네가 하북에선 일부러 망나니 짓을 한 것 같다고. 저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처음에는 뭔 소린가 했다.”

재혁이면 팽재혁.

입관 시험의 무위 관문에서 정급 무사들의 무위 시험을 감독하셨던 교수님이다.

“그런데 네 녀석이 수석을 하더구나. 소진이와 소천이도 남궁가의 아들래미도 간신히 등과를 한 어려운 시험이었고, 그 제갈설지도 차석으로 밀어낼 정도면 하루 이틀에 동안 닦은 공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씩씩거리는 콧김과 쏟아지는 안광에 볼이 따가워 온다.

하여 나는 시선을 일부러 아버지께 돌렸다.

한데 아버지는 입꼬리를 씰룩이고 계셨다.

“……?”

내가 난처해하는 상황이 웃기신 것은 아닌 듯 보였다.

“흐흐. 흠.”

그저 팽무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를 칭찬하는 것처럼 들리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큰 거 온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팽재혁이 쾅! 하고 식탁을 내려쳤고.

그에 찻잔과 주전자가 잠시 허공을 유영하다 딸그락 내려앉았다.

“하여 나는 더욱 화가 났다! 네 아비가 어떤 수모를 감내했는지 아느냐?! 네 어미는 또 어떻고?! 한때는 그저 그릇이 작았던 녀석이 명문 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담지도 못한 물을 담으려다 삐뚤어졌구나 생각하며 측은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한데 그게 아니라면! 그 지력과 용력을 갖추고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고 다닌 것이냐?! 아니 무슨 생각을 했든 상관없다! 세상천지에 아비가 머리 숙여 사과하고 다니게 만들고 어미 가슴에는 멍을 새기며 품는 뜻이 어디 있단 말이냐?!”

금방이라도 다시 흑도가 춤을 출 분위기.

그에 조심스레 우수를 회한 가까이 옮겨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는 이때.

공손무결이 입을 열었다.

“그건 선배께서 화를 내신 이유고. 그거 말고 오신 이유가 따로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 공손무결의 음성에 팽무혁이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재혁이 녀석이 한 말 중엔 그 말 말고 다른 말도 있었느니라. 용운이 너를 가르쳐 보고 싶다고.”

“저를요?”

“오냐.”

“왜요?”

“왜요는 왜구들이 쓰는 담요가 왜요고! 가문에서 쫓겨난 녀석이라 언가의 무공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별수가 있느냐?! 이 백부의 가문으로 와 도법이라도 배워야지! 오늘 네 자질을 보니 나쁘지는 않더구나! 열심히 수련하면 제법 성취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공손무결이 이의가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선배께서 방금 별수가 없으니 팽가의 도를 쥐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별수가 없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도 팽 선배랑 비슷하거든요.”

“?”

“?”

“?”

-?

“뭘들 그렇게 보십니까? 이보게 후배님, 애초에 집을 나와 허리춤을 찬 병기가 검인 것 같은데, 잘했네. 자고로 만병지왕은 검인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내게 헌원검(軒轅劍)을 배워보는 것은 어떤가?”

그 모습들을 보며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 오셨다.

- 흥.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보는 눈들은 있는 모양이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