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바늘과 실 (1)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한데 저희가 보시다시피 수련 중이었어서요.”
“아, 미안하네. 안에서 기다리면 되겠나? 아니면 시간을 정해주는 것도 괜찮네, 그러면 때를 맞추어 다시 찾도록 하겠네.”
“아닙니다. 슬슬 마무리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내가 그렇게 곽우명과 일행들을 객잔 안으로 돌려보내자.
원보(猿步)와 압보(鴨步) 그러니까 주먹 쥐고 엎드려 걷기와 오리걸음을 내력을 운용하지 않고 하는 것으로 신체와 정신을 똑바로 세우고 있던 언 동생들이 부리나케 몸을 일으키며 모여들었다.
“용운 형님! 영입 제안이면 그 신입생 중 최상위권만 받는다는 그거 아닙니까?!”
그런 은하성의 말에, 우소릉이 눈을 키우며 입을 열었다.
“오. 저는 신입생이 입사 지원서를 넣고 각 기숙사의 자치회에서 심사를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요? 최상위권의 학생들에게는 그런 제안이 가는 거였군요? 선배님들이 갑자기 왜 오셨나 했는데!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언 형!”
정무학관에 입관한 신입생이라면 반드시 사대 기숙사 중 어느 한 곳을 정해 입사해야 했다.
입사의 방식은 보통 신입생 쪽에서 입사 원서를 넣으면 그 원서를 해당 기숙사의 자치회가 검토한다.
그 검토 과정에서 지원자의 입관 시험 성적과, 가문, 인성, 내부 추천 등이 이루어지고 최종적으로 ‘정원(定員)’이라는 틀에 의해 허(許)와 불허(不許)가 갈리게 된다.
‘대개 기숙사 쪽이 갑. 신입생 쪽이 을인 거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예.
나나 정현 그리고 은하연 같은 입관시험 상위권자의 경우 갑을 관계가 뒤바뀐다.
‘정무학관의 사대 기숙사는 각각 치열하게 경쟁하는 관계.’
공통된 적이나 이익 앞에선 ‘우리는 정무학관의 생도’라는 말 아래 단결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운매, 향란, 윤국, 청죽 네 개의 기숙사가 견원지간처럼 다투는 사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정무학관의 설립 취지 중 하나가 백도의 후기지수들이 건전한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대를 이어 역사가 되고, 그 역사 속에서 감정의 골이 깊어지니 이제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백도 무림과 자존심은 보통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지.’
거기다 학기마다 펼쳐지는 대항전과 소속 기숙사생들 학과 성적의 합계로 각 기숙사에 돌아가는 지원금이 달라지는 현실적인 이유까지 더해졌다.
그러니 각 기숙사가 말 그대로 개와 원숭이처럼 다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 학기 기숙사 대항전을 치르는 시기가 되면 죽이니 살리니 하는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부상자가 나올 정도로 과열된 경기가 나오기도 한다고 원작에서 묘사됐었지.’
그렇기에 양질의 신입생을 확보하는 것은 각 기숙사의 자치회가 가장 먼저 심혈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하여 상위권 학생을 두고는 오히려 영입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뭐, 아무튼.
소릉이 녀석이 축하를 입에 담자 다른 녀석들도 입을 모아 축하를 말했다.
나는 녀석들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축하는 무슨. 아직 제안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리고 나만 상위권인 것도 아니고, 정현이랑 은 소저도 상위권이고, 하성이랑 소릉이도 일단 정진 장학생들이니까 제안이 올 수 있다. 그래서, 다들 가고 싶은 기숙사는 정했냐? 막 입관 시험이 끝났을 때 살짝 이야기를 나눴을 때 은 소저는 윤국관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그랬고.”
“예. 그랬었죠.”
“나머지는 못 들은 것 같은데?”
그런 내 말에, 가장 먼저 하성이 녀석이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별생각 없었습니다.”
“……?”
“헤헤.”
“하성아?”
“…예?”
“내가 뇌를 좀 쓰라고 누누이 말했던 것 같은데? 물리적으로라도 쓸 수 있도록 휘주에서처럼 대가리 좀 박을까?!”
“나, 나름 쓴다고 썼습니다!”
그게?
어딜 봐서?
“용운 형님께서 어딜 가시겠다 하시면 저야 뭐 따라가는 거죠.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요. 형님이 택하신 기숙사에 원서를 넣을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이번 경우엔 자치회에서 저 같은 실은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붙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떨어지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거죠. 뭐, 떨어져 봐야 청죽관밖에 더 가겠습니까?”
이 새끼를 진짜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처음에는 했는데, 듣고 보니 원서를 넣는 입장인 하성이 녀석으로서는 일리가 있기는 했고.
이어서 소릉이 녀석도 그에 맞장구를 치길래.
“오. 좋은데요? 우소릉 실도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려니 했다.
마지막은 정현이었다.
“단호하게 정한 바는 없으나, 기숙사의 정신은 운매관이나 청죽관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의문을 표해오셨다.
- 정신? 그저 편의나 파벌에 따라 아이들을 갈라놓은 게 아니라 운영 철학들이 다르단 말이냐? 매난국죽을 따와 되는 대로 나눈 게 아니고?
‘최근 들어서는 좀 퇴색이 된 감이 있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런 사부님의 말에 나는 사대 기숙사의 설립 취지와 특색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운매, 향란, 윤국, 청죽.’
사부님의 말처럼 이른바 사군자라 부르는 매난국죽에서 되는 대로 이름을 붙인 것 같아도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매난국죽이 각각 협객과 닮은 바가 있다 했지. 먼저 홍색을 상징으로 삼는 운매관(韻梅館).’
운매관은 이름처럼 매화(梅花)의 운치(韻致)가 협객과 닮았으니, 매화 같은 협객들을 길러내겠다는 취지로 설립된 기숙사였다.
하면 대저 매화 같은 협객이란 무엇인가?
원작에서 이르기를 매화는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가 녹기 전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용기를 갖춘 녀석이니, 운매관은 협을 위해서라면 섶에 불을 지고 가장 먼저 뛰어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용기를 갖춘 후기지수들을 받아 길러낸다 했다.
‘다음은 묵색을 상징으로 삼는 향란관(香蘭館).’
난초란 깊은 산중에 숨어 있어도 그 향기가 멀리까지 퍼져나오는 근본을 갖춘 녀석이니, 향란관은 역사와 전통을 중히 여기는 근본을 갖춘 후기지수들을 받아 길러낸다 했다.
‘세 번째론 황색을 상징으로 삼는 윤국관(潤菊館).’
국화란 윤택함을 갖추어 늦가을에 찾아오는 첫 추위에도 꽃을 피워내는 녀석이니, 윤국관은 지혜와 현명함으로 시련을 능히 이겨낼 자질을 갖춘 후기지수들을 받아 길러낸다 했다.
‘마지막으론 청색을 상징으로 삼는 청죽관(淸竹館).’
대나무란 모든 식물이 잎을 떨어뜨린 겨울날에도 푸르름을 간직하는 성실함을 지닌 녀석이니, 청죽관은 진실로 협을 마주할 마음가짐을 먹은 후기지수라면 누구든 받아 길러낸다 했다.
그런 내 생각을 전해 들은 사부님께서는 콧방귀를 끼셨다.
- 썩은 동태눈을 하고 있는 녀석들이 천지던데, 거 거창들도 하구나!
‘어디까지나 설립 취지가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뭐, 아무튼 정현이 녀석의 생각은 원작을 읽었기에 알고는 있긴 했지만, 직접 들으니 새삼 신기했다.
설립 취지만 보면 사대 기숙사가 모두 쟁쟁해 보인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각 기숙사들 사이에 어느 정도 급이 나뉘어 있었다.
‘하성이 녀석이 떨어지면 청죽관밖에 더 가겠냐라는 말을 할 정도니까.’
청죽이 최하위, 윤국은 중위권, 운매관과 향란관이 주로 종업 합계 일, 이 위를 다투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정현은 역대 대항전 그리고 통산 성적 일, 이 위를 다투는 기숙사인 운매관과 만년 꼴찌이자, 최근 들어서는 학관의 쓰레기통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접이 박한 청죽관을 고민하고 있었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입지가 벌어진 두 기숙사를 오직 품고 있는 정신만으로 고민하고 있는 녀석이라니.’
정현은 정현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언 동생들의 생각들은 확인했다.
이젠 각 기숙사의 자치회가 해올 제안을 들어봐야 했다.
“들어가자 그럼.”
* * *
국화의 윤택함이니 어쩌니 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윤국관은 후기지수 중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녀석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었다.
설립자가 제갈세가의 선조였고, 대대로 무림맹의 군사부에 많은 인재를 공급해왔다고나 할까?
“언용운 생도 그리고 은하연 생도. 두 후배님들을 우리 기숙사로 데려오고 싶네.”
그런 윤국관에서 나온 선배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자치 부회장 곽우명을 필두로 한 세 명의 선배들의 태도에는 예의가 있었고, 그 제안은 깔끔했다.
“툭 까놓고 말하겠네. 우리는 윤국관의 설립자의 후예인 제갈설지 소저보다 언용운 자네에게 먼저 왔네.”
“퍽 듣기 좋긴 합니다만, 말씀에 어폐가 있으십니다. 제갈 소저를 제쳐두고 이곳으로 왔다기보다는 제갈 소저는 어차피 윤국관에 입사할 테니 이리로 오신 것 아닙니까?”
“실은 그렇네.”
“부정은 안 하시네요?”
“우선 말하고 싶은 건 그 사실을 이렇게 금세 짚어낸 것만 해도 자네는 우리 윤국관에 어울리는 인재라는 것일세. 그리고 아무리 잡아 놓은 고기라 하여도 윤국관의 자치회는 제갈설지 생도 본인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을 고려해 주면 좋겠네.”
하긴.
제갈설지 그 녀석이 징하긴 하지.
“솔직히 말해서 최근의 윤국관은 매년 종업식 합계 성적에서 운매관과 향란관을 오롯이 제친 적이 없네. 하지만 학과성적에서는 늘 일등이었다네. 여기서 언용운 생도 자네와 은하연 생도가 합류해주고 제갈설지 생도까지 거들어준다면 금년부터는 대항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고, 하면 일 위 자리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네.”
“음. 그렇군요.”
“그렇다네, 덧붙여 사대 기숙사를 통틀어서 시설은 우리가 최고일세. 신입생들에게도 일인실을 제공하는 기숙사는 우리뿐일 걸세. 자체 장학 제도도 풍성하고. 두 생도는 이미 두 개 이상의 장학 제도의 수혜자임을 알고 있지만. 아무튼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일세. 귀한 시간을 내주어 감사하고, 두 생도의 자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비워둘 것이니 충분히 고민해 보고 가부에 관한 연락을 주시게.”
“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고민을 해보고 가겠다 아니다 결심이 서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윤국관의 선배들을 돌려보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점심을 먹고 차로 입가심을 하려는데, 이번엔 홍색 무복을 입은 운매관의 선배님들이 찾아왔다.
윤국관이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는 양반들이라면, 운매관은 주로 머리보단 몸이 앞서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는데.
“아마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온 것 같은데. 우리는 이처럼 선두. 수석. 일등. 이런 것과 아주 궁합이 좋은 기숙사일세.”
“…두 번째인데요?”
“…? 어디가 먼저 왔지?”
“윤국관에서 다녀가셨습니다.”
“제갈설지는 어쩌고 여기에 먼저 왔다던가?”
“그걸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거 좀 물을 수도 있지.”
“…제갈 소저는 어차피 윤국관에 갈 테니 저한테 먼저 온 거겠죠.”
“그렇군. 하여간에 잔대가리들 굴리는 데는 선수라니까! 뭐 또 자기네 시설 자랑이나 하다 갔겠지?! 아무튼! 우리는 재작년과 작년 연이어 일등을 한 기숙사일세, 자네를 충분히 끌어줄 선배들이 모여 있지. 뭐, 시설은 윤국 놈들에 비해 솔직히 좀 구리긴 한데,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자네가 입사한다면 바로 자치회의 부서중 원하는 곳의 차장 자리를 줄 것일세. 그럼 특실인 이인실을 사용할 수 있다네.”
운매관의 제안은 오직 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원작에선 정현에게 제의를 하는데 내가 수석이라 그런가?’
뭐, 무조건 언 동생들과 한 기숙사를 써야 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정보 전달이 필연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는 이 세계관에서 기숙사마다 내 사람이 퍼져 있는 것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아직 다른 기숙사의 제안도 들어 봐야 했기에 나는 운매관 선배들도 나중에 답을 드리겠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운매관 선배들이 떠났고.
언 동생들은 윤국관과 운매관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래저래 악연이 깊은 향란관과 쓰레기통 취급을 받는 청죽관은 애초에 거르는 분위기였다.
‘하기야, 운혁, 운진, 조철성. 세 사람이 남긴 인상이 강력하긴 하다.’
그때였다.
언 동생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있는 이때.
방금 떠올린 세 사람이 나란히 단강제일객잔을 찾아왔다.
“크흠.”
앞에 찾아온 선배님들처럼 향란관을 한마디로 줄여보자면 근본에 집착하다 혈통만 따지는 인간들이 되어버린 양반들이었는데.
이렇게 내가 자신들을 떠올리자마자 귀신같이 찾아온 것을 보면 사실은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오셨으니 맞아는 드려야지.
열기를 띠고 있던 언 동생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진 가운데, 나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아니! 향란관의 선배님들이 아니십니까?! 이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운혁이다. 향란관의 공보부장을 맡고 있지. 오늘은 자네들 중 일부를 향란관에 입사시키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하여 왔….”
“아니죠. 아니죠.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요, 지금 순서가 잘못되셨습니다, 선배님. 저희와 대화를 하시려면 제대로 된 사과부터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