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바늘과 실 (2)
언용운의 말에.
묵색 무복을 입은 세 사람 운혁, 운진, 조철성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그럴 게 그들의 상식으론 언용운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향란관의 상식으론 사과란 서로 격이 맞는 상대끼리 품위를 지키며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저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요구해서는 될 게 아니었다.
더욱이 지금의 경우 향란관의 세 사람 쪽이 학관의 체계로 보나, 강호에서의 배분으로 보나 선배였다.
강호의 연은 계속해서 이어질 테니, 이런 경우 미미한 허물은 덮어주는 것이 애초에 미덕이었다.
설령 사과를 하게 되더라도 선배 되는 쪽에서 베풀 듯이 하고 후배 되는 쪽은 감사하게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서로 간에 괜한 앙금이 남지 않고, 전통과 근본이 공고하게 이어지는 것이니까.
그런 생각을 토대로 미간을 좁힌 운진이 입을 열었다.
“엎드려 받는 절도 의미가 없다 하거늘, 그런 노골적인 요구를 통해 받는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적절히 돌려 이야기를 했건만, 언용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전 선배님이라고 하셨었죠?”
심지어 도호까지 이상하게 부르며.
당금수석 자리를 꿰찬 녀석이 기억력이 나쁠 리는 없고 일부러 저러는 것이었다.
그에 운진이 입술을 짓씹었다.
“…운진이다.”
“아무튼요. 의미가 없긴 왜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말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어이 사과를 받겠다는 건가?”
“예. 운진 선배님께서는 경공 시험을 빌미로 이 후배를 천 길 낭떠러지로 보내버리려 하셨고, 조 선배는 아주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셨고, 운혁 선배님께서는 여기 있는 정현에게 입관 시험을 포기하라 종용하셨고요.”
“…….”
“뭐 그런 일들을 행하셨던 분들이시니, 세 분의 양심에 털이 수북하여 전혀 찔리시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미안하다 소리가 일단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의식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자 더 참지 못하고 조철성이 앞으로 나섰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놈의 보자 보자는, 조 선배가 언제 우리를 봐주셨다고. 방금 말한 입관 절차에서 불가촉천민 취급하실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현 이 친구 괴롭히시던 날엔 분명 제게 주먹을 날려오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아닙니까? 그리고 봐 드리고 있는 건 제 쪽입니다.”
“뭐라?!”
“아니면 그날처럼 형씨라고 불러 드릴까요?!”
시시각각 파국을 향해 치달아가는 상황에, 향란관 측의 인솔자인 운혁이 잠시 눈을 감았다.
‘…망나니 자식 같으니.’
다른 향란관 생도들도 다르지 않겠지만, 향란관 생도들에게 언용운은 말 그대로 상극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게 만드는 걸어 다니는 심마라고나 할까?
마주한 적이 이제 고작 몇 번 되지 않음에도 운혁은 그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하여 심마의 원인인 언용운을 향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싶었다.
하나 그런 마음과 달리, 운혁의 머릿속에선 향란관의 자치 부회장 소선창이 했던 당부가 맴돌고 있었다.
‘자 여기. 관칙의 해석이 좀 필요해서 시간이 좀 걸렸군. 아무튼 윗선의 검토가 끝났으니 이 명단에 기록된 상위권 신입생들에게 입사 제안을 하고 오면 되겠네.’
‘해석이라시면…? 혹 언용운 그 신입생을 받아주기로 한 것입니까?’
‘그렇네. 정확히는 언용운과 정현 두 명에 관한 해석을 사감 교수님께 받아오는 참일세.’
‘그 자식들을 말입니까?’
‘그래,’
‘정현이야 무당의 제자인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사실상 태영자께서 책임을 지시고 면벽을 하시고 계시니, 관칙에 벗어나는 일이 아니다라 하셨고. 언용운의 경우는 가문에서 쫓겨난 자라 애매하긴 한데, 혈통 자체는 명문의 자제임이 분명하고 당금수석으로 화려하게 강호에 이름을 알린 이상 진주언가로의 복귀는 시간문제일 것이라 하셨네.’
‘그런 절차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 눈으로 본 두 녀석은! 특히나 언용운은 향란관의 정신과 절대로 맞는 녀석이 아니었습니다! 향란관을 개판으로 만들 녀석이고 그로 말미암아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이봐 운혁. 우리는 지난 몇 년 연속해서 운매관에게 일 위 자리를 내줬어. 이 이야기가 무슨 소린지 자네는 모르나?’
‘…올해는 절대로 밀려선 안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래. 한데 벌써 밀리고 있어, 제갈설지는 윤국으로 갈 것이 자명하고, 팽가도 운매관이 유력하지.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서 용운과 정현 데려오도록 하게.’
‘예.’
‘다른 기숙사들에 비해 늦긴 했겠지만, 입관 시험의 마지막 관문에서 오 점을 획득할 정도의 머리가 있는 녀석이라면 아직 결정은 안 했을 거야. 또 보통 그렇게 가문이나 문파에서 쫓겨난 녀석들은 향란관에 대한 동경이 있기 마련이지.’
당사자인 언용운이 듣는다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제 놈들끼리 향란관이 오라면 와야지! 하고 자빠졌네 하며 코웃음을 쳤을 테지만.
아무튼 향란관의 자치 부회장 소선창은 대화 끝에 향란관에서 손을 내밀면 언용운과 정현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언용운은 보시다시피 절대로 그럴 녀석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는 괜찮은데 뒷마당에 가서 몸의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할까요?”
이 순간 운혁은 생각했다.
‘사과를 하자.’
무인 운혁으로서는 체면과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향란관의 공보부장으로서는 사과를 하는 것으로 언용운과 정현을 데려올 수 있다면 나쁠 게 없었다.
‘천하의 한신도 젊어서 다리 사이를 기었다지.’
초한 쟁패기에 한고제 유방을 도와 항우의 초나라를 멸했다는 그 명장 한신도 젊어서는 그런 굴욕을 견뎠다 했다.
‘언용운의 버르장머리야 입사를 시키고 나서 고쳐주면 될 일이지.’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한 운혁이 떨어지려 하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미안하네.”
그런 운혁의 음성에 조철성과 운진이 황망한 듯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부, 부장님?!”
“사형?!”
하나 정작 중요한 언용운이 귀를 파며 시큰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옆에 두 분이 갑자기 소리를 치셔서 잘 안 들었는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에 운혁이 까득 이를 깨물었다.
하지만 기왕 뱉은 사과 이미 버린 입이었기에 두 번째는 좀 더 수월하게 나왔다.
“미안하다고 했네.”
“뭐, 알겠습니다.”
그제야 언용운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남몰래 깊은 숨을 삼켜낸 운혁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된 것이지? 자, 여기 입사 지원서에 이름을 써넣고 수결을 하도록 하게.”
“엥? 갑자기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십니까?”
“……? 내가 사과했잖는가? 자네가 그리해야 향란관에 오겠다는 식으로 말을 했고?”
“아니죠. 저는 분명히 저희와 대화를 하시려면 제대로 된 사과부터 먼저 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충 사과를 하시긴 하셨으니 이제부터 대화를 해봐야죠.”
그러고 보니 그랬다.
언용운의 말 어디에도 사과를 하면 향란관에 입사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누구 원망할 곳도 없는 순수한 자신의 착각으로 인해 발생한 수치심에 운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언용운의 음성.
“그래서 향란관의 제안은 뭡니까? 그나저나 우리 선배님은 진심에서 우러나지도 않은 사과로 너무 날로 드시려고 하시네.”
저놈이 향란관에 올 리가 없었다.
콧방귀가 섞인 언용운의 음성에 운혁은 기혈이 거꾸로 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지만, 간신히 그런 기운을 누르며 정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꿩이 아니라면 닭이라도 데려가야 했다.
“정현 너라도 수결해라.”
하나 이마저도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운혁 사숙. 이곳은 정무학관이지 무당산이 아닙니다. 저는 그 사실을 언 소협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뭐라?!”
“그리고 언 소협이 바늘이라면 여기 이 사질은 실입니다. 향란관의 제안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제안을 들어보고 고민해 본 뒤에 추후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운혁의 어금니가 까드득- 하고 속절없이 갈려 나가는 순간이었다.
* * *
향란관 선배들이 돌아갔다.
“소릉아.”
“예. 언 형.”
“주인장한테 가서 소금 좀 얻어다가 입구에 좀 뿌려라.”
“옙!”
향란관의 제안은 삼인방과의 악연을 배제하더라도 냉정하게 별 볼 일이 없었다.
다른 기숙사들은 나름의 특실 제공과 자치회 차장 자리를 주겠다는 말을 기본으로 깔았던 데 반해.
향란관의 제안은 나와 정현이 동시에 입사한다면 은씨 남매까지는 확정적으로 받아주겠다는 것 외에는 신입생에게는 그런 혜택을 약속할 수 없다는 게 기본적인 골자였으니까.
‘하기야, 다른 기숙사들은 자치 부회장급 인사를 보냈는데, 그 밑에 공보부장을 보낸 것부터가….’
이 자식들.
지들이 불러 주면 당연히 입사할 거라는 전제로 온 건가?’
‘웃기는 인간들이네.’
뭐, 향란관은 통산 가장 많은 종업 합계 우승을 차지한 기숙사고, 숱한 무림맹주와 장문인 그리고 대군사를 배출해냈으며, 정무학관을 더러 명문대파만의 학관이라 하는 말들이 나돌 정도로 한때 공고한 지위를 차지했던 기숙사인 만큼.
저런 향란관의 정신이 끌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꾸준히 대항전이나 합계 성적에서 상위권을 차지해온 것이고.
‘근데 나는 아냐.’
뭐, 아무튼.
그렇게 향란관 선배님들이 돌아갔다.
“크. 그 자리에서 제가 처음 말한 실과 바늘 이야기를 거론하실 줄이야. 사숙! 이곳은 정무학관이지 무당산이 아닙니다. 언 소협이 바늘이라면 저는 실입니다! 크으으! 정현 도장. 지렸습니다. 아까 뒷마당에서 구르면서 수분을 배출하지 않았으면 진짜 속곳 다 버릴 뻔했습니다!”
“저도요!”
“그, 그만들 하십시오.”
“뭘 그만해. 이번만큼은 하성이 녀석 말이 맞아. 와. 그 학관생 식당 앞에서 무복을 쥐어 뜯기는데도 가만히 있던 찐따 같던 정현이 맞냐?!”
“저는 그 광경을 보진 못했지만, 그 광경과 오늘의 광경을 보신 분들은 확실히 가슴이 웅장해지기는 했겠네요.”
“…언 소협과 은 소저까지!”
“큭큭큭.”
“흐흫.”
“하하하!”
“흐히히!”
우리는 방금 전을 회상하며 잠시 웃음보를 터트렸는데, 그렇게 킬킬거리고 있으니,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대뜸 물음을 던져오셨다.
- 그래서 어느 기숙사를 들어갈 참이더냐?!
‘글쎄요?’
- 글쎄요? 항상 계획이 있는 녀석이 이번에는 글쎄요 소리가 나오는구나?
‘그야 아직 제안을 다 들어보지 못 했지 않습니까? 청죽관이 안 왔잖아요.’
- 청죽관은 쓰레기통 같은 곳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 입학식에서 주변에서 나오던 소리도 그렇고, 네 녀석의 동생을 자처하는 녀석들도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던데?!
‘그렇긴 하죠. 한데 청죽관도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 장점이 있다고?
‘예.’
- 어떤 장점이 있길래?
‘절박합니다.’
윤국관이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똘똘이들, 운매관은 몸이 뜨거운 열혈들, 향란관이 혈통을 따지는 고인 놈들이라면 청죽관은 정무학관의 하류들이다.
하류라는 말을 면전에서 하면 청죽관의 선배들이나, 출신자들이 얼굴을 붉혀 오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얼굴이라도 붉혀 오면 다행이지.’
만년 꼴찌 청죽관.
그로 인해 줄어들 대로 줄어든 학관의 지원금과 외부의 후원금.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학생들의 기피 현상.
자잘한 문제가 더 많지만, 열거한 세 가지 문제가 끊임없이 악순환을 만들어 학년을 막론하고 소속 기숙사생 대부분이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는 것으로 원작에선 묘사됐다.
‘오죽하면 정무학관의 꽃이라 불리는 자치회에 들어가는 것마저 소속 생도들이 기피해서, 매년 새 얼굴이 뽑히는 다른 기숙사와 달리 청죽관은 진경룡이라는 양반이 자치회장을 연임하고 있었지.’
하지만.
진경룡 그 사람만큼은 진심으로 청죽관을 살려보려 했고, 해서 남들은 부회장이나 부장을 보낼 때.
회장인 본인이 직접 와서 가장 좋은 제안을 정현에게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작의 정현은 결국 운매관으로 가지만, 기숙사가 갈렸음에도 작중 내내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는 의리도 있었지.’
뭐, 아무튼.
원작의 청죽관 사람 중 내 기억에 진한 족적을 남긴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진경룡을 떠올리고 있는 이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진경룡이 나타났다.
“나는 청죽관의 자치회장을 맡고 있는 진경룡이라고 하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가도 되겠는가?”
“잠긴 문이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방금 말했다시피 나는 청죽관의 자치 회장을 맡고 있는 진경룡일세. 내 홀몸으로 왔으면 그리하겠는데, 객을 한 분 뫼시고 왔네. 해서 말인데 좀 나와서 맞아 줄 수 있겠는가?”
그 소리에 뭔가 싶어 문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낯이 익은 늙은 거지가 멋쩍은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험험.”
“……? 노삼 교수님이 아니십니까?!”
작풍월개, 아니 광풍투개 노삼.
우리가 오 점짜리 구슬을 간신히 획득했던 그 양반이었다.
아니, 내가 원작의 정현보다 수석의 입지가 단단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치회장 본인이 온 것으로 모자라 사감 교수를 직접 데리고 온다고?
“…어.”
“뭘 그렇게 보고만 섰느냐?! 쫓아낼 게 아니라면 차라도 한잔 권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