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형은 나가 (1)
시간을 딱 하루만 거슬러.
언용운은 진경룡에게 청죽관의 입사 지원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세 통의 서신을 작성해 운매관과 향란관 그리고 윤국관의 자치회 앞으로 보냈다.
서신에 적힌 내용은 세 통의 편지 모두 동일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저희에게 입사 제안을 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언용운 외 사인은 심사숙고를 해본 결과 귀관이 아닌 청죽관에 입사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아쉽고도 죄송하지만, 귀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함과 동시에 앞으로 있을 선의의 경쟁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언용운, 은하연, 정현, 은하성, 우소릉 드림.』
하지만 서신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들은 동일하지 않았다.
언용운 영입 건을 사실상 단독 입찰이라 보았던 운매관의 경우는 일단 아쉬워했다.
“허. 언용운이 이 녀석 청죽관으로 간다는데?”
“예?! 청죽이요? 뭐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이거 읽어봐.”
“어… 음…. 정말이네요?!”
“윤국관을 골랐으면 좋은 시설을 쓰고 싶었나 했을 거고, 향란관을 골랐으면 내심으론 가문이 자신을 복권해주는 것을 열렬히 원하는 녀석이었구나 했겠는데, 청죽관이라….”
하지만 그 아쉬움의 끝은 흥미였다.
“…거 낭만이 있는 녀석이구만.”
“낭만이요?”
“왜 우리도 신입생 때는 운매관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기숙사로 만들자 뭐 그런 생각을 했었잖아. 비슷한 맥락이겠지.”
“아, 그러니까 언용운은 만년 꼴찌인 청죽관의 위상을 본인이 끌어올려 보겠다는 생각으로 청죽관에 갔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흠.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 그래서 더 아깝군. 우리 운매관이야말로 그런 낭만을 펼치기에 딱인 곳인데.”
“그러게요.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낭만은 있네요. 근데 달랑 신입생 한 명이 더해진다고 청죽관의 굼벵이들을 끌어올린다는 게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뭐,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근데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 솔직히 말해 청죽관 그놈들 푹 삼긴 청경채처럼 매가리가 없으니 그 친구들이랑 붙을 때는 항상 재미가 없었잖나.”
반면에 향란관은 입사 제안을 하러 나갔던 운혁이 언용운이 향란관에 오지는 않을 것 같다는 보고를 미리 해두었던 터라, 다른 두 기숙사와는 반응의 결이 달랐다.
“음? 그리로 갔다고?”
“예. 천한 자들과 어울리더니 근본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그 망나니 자식은 향란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뭐, 잘된 일이로군.”
굳이 그 반응을 분류를 해보자면,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까?
“후. 그럼 재고해 보시겠다고 하신 건은 충분히 만회가 된 겁니까?”
“음? 운혁 자네를 향란관의 차기 수장으로 밀어달라는 건을 말하는 건가?”
“예.”
“그건 아니지.”
“…예? 하지만 잘된 일이라고 하셨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잘된 일이라고 한 것은 언용운이 운매관이나 윤국관으로 간 것보다는 낫다는 이야기였네. 그쪽으로 들어갔으면, 신입생 전력이 크게 밀릴 가능성이 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의 실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언용운이 고작 청죽관을 가겠다고 우리를 깐 꼴이 됐잖은가. 쯧.”
“…….”
“너무 섭해는 말게. 나니까 이렇게 혀라도 차주는 걸세. 자치 회장님께서는 향란관의 위신이 떨어졌다고 심기가 크게 불편하시다니 당분간은 어디 가서 그 이야기 꺼내지 말게.”
“…예.”
“어차피 자치회장 선거는 가을 학기 말 아닌가. 천천히 만회하면 되네. 천천히.”
언용운이 있었다면 정신 승리들을 잘도 하고 계신다고 한마디를 했겠지만.
아무튼 향란관은 언용운 개인의 품성이 천하다 폄하함과 동시에 신입생 영입을 담당했던 공보부장 운혁 개인의 함량 미달을 탓하며, 운매관과 윤국관으로 간 것보다는 낫다는 것으로 언용운 영입에 관한 건의 결론을 내렸다.
다음은 윤국관.
윤국관의 자치회실에서는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언용운 생도가 청죽관으로 갔다?”
“예. 그럴 확률도 있다고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맞네. 입관 시험 당시 언용운 생도와 같이 다니는 무리 중에 우소릉이라는 자가 합격 점수에 딱 오 점이 부족했지. 언용운 생도는 본인이 탈락할 위험이 있는데도 마지막 관문에서 오 점짜리 과제를 택했고, 그런 언용운의 성정이라면 청죽관으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 청죽관 쪽에서 무엇을 제시했는지는 알아봤나?”
“확실한 것은 언용운이 실질적인 입사를 마쳐야 확인이 될 것 같습니다만, 듣기로는 진경룡 자치 회장이 노삼 교수님을 모시고 가서 자치 부회장을 맡긴다는 제안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입맛을 다셨다.
“자치 부회장 자리를 맡기고 노삼 교수님이 가셨다? 흠. 이건 어느 정도 하극상을 허락하겠다는 건데? 이거 청죽관의 기질이 바뀔 수도 있겠는데?”
“역으로 언용운 생도가 몰릴 수도 있을 겁니다. 차곡차곡 이어져 내려온 패배감으로 인해 형성된 청죽관의 기질이 쉽게 바뀌겠습니까? 제아무리 당금수석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존의 청죽관 재학생들이 협조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수석 입학자에 일학년생 자치 부회장이라. 하긴 빛이 안 들던 곳에 갑자기 너무 밝은 빛이 들어오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법이지.”
“예. 분명 재학생 쪽에서 반발이 있을 겁니다.”
“그걸 언용운이 감당해 낸다면 청죽관의 기질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몰리겠군.”
“몰리게 된다면. 저희 쪽에도 다시 기회가 있을 겁니다. 전관(轉館)이라는 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저쪽에서 노삼 교수님을 동원한 이상, 언용운 생도가 원하기만 한다면 제갈민 교수님의 동의를 얻기는 어렵지 않을 거고요.”
“언용운 생도쯤 되는 화제성을 가진 친구면 교수님께서도 전관 승인을 해주시겠지. 입관 시험에서 예쁘게 보시기도 했으니.”
“예. 교수님이 과제를 잘 풀었다고 공개적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시니까요.”
“하지만 불확실한 쪽에 너무 기대는 하지 말자고. 우선 제갈설지 생도를 비롯해 입사 의사를 밝혀온 생도들 위주로 자치회는 편성하고. 그쪽은 주시만 좀 하고 있는 것으로 하세.”
“예.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 * *
청죽관.
이 만년꼴찌 기숙사에도 언용운이 입사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로 인해 이 기숙사에 처음 퍼졌던 감정은 분명 기쁨이었다.
“당금수석이 입사할 기숙사로 우리 청죽관을 택했다고 하네!”
“그, 그 말이 참인가?!”
“참이지 그럼! 참이니까 내가 이렇게 달려왔지! 누구도 안 믿을 이 말이 거짓이라면 굳이 내가 이렇게 달려왔겠는가?!”
“허, 제갈가의 소무후와 천하제일후기지수 남궁윤등 역대 최고의 기수라 불린다는 기라성 같은 동기생들을 누르고 수석을 차지한 그 친구가 우리 청죽관으로 온다고?!”
“그래! 그것도 정급 무사로 출발해서 감점을 가지고 시작하고도 그랬지! 그 언용운이 우리 청죽관을 입사할 기숙사로 정했다고 하네! 내가 방금 자치 회장님께 직접 듣고 오는 길이야!”
“하하하! 드디어 남개(南丐)의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청죽관의 진가를 알아준 수석이 나왔구만!”
“심지어 운매, 향란, 윤국. 평소 우리를 무시하던 녀석들이 모두 입사 제안을 했는데 그중에 우리 청죽을 선택했다 하네!”
“하하하! 그놈들의 콧대가 납작해졌겠는데?! 기특한 녀석이 선배들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입사를 하기도 전에 해주는구만!”
“같이 조별 과제를 치렀던 당금수석의 동무들과 문과의 수위까지 함께 오기로 했다 하니 올해는 다를 거야! 매년 기숙사에 내걸리는 탈꼴찌라는 표어가 실현되는 것도 꿈이 아닐지 몰라!”
하지만 모두가 마냥 기뻐했던 것은 아니었다.
청죽관에 내려앉아 있던 오랜 패배감에 찌든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 대단한 친구가 우리 기숙사로 온다고? 왜?”
“…그, 그야 우리 청죽관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런 것이겠지.”
“자네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건가? 정말로?”
“나도 좀 이상한 것 같네. 당금수석이 왜 청죽관에 온다는 말인가? 진경룡 회장이 뭔가 내준 게 아닐까?”
“…으음? 자치 부회장 자리를 약속했다고는 하시던데?”
그리고 그런 자들의 의문에 불을 붙이고자 하는 자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양금표라는 자였다.
“하. 진 회장이 그런 거래를 하셨구만. 언용운이 우리 청죽관에 온다고 그것도 자치 부회장으로? 듣자 하니, 그 녀석 하북에서 알아주는 망나니였다던데? 그 자식이 자치 부회장이면 이제부터 완장을 차고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하겠네? 고작 일학년짜리가?!”
양금표는 제법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로는 언변이 좋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론 친구든 후배든 아무튼 벗을 사귈 때, 술값이든 밥값이든 아낌없이 돈을 썼기에 주변인들이 양금표에겐 대인의 풍모가 있다고 느끼고 있어서 그랬다.
“금표의 말이 맞아! 얼마나 위아래가 없으면 가문에서 쫓겨났겠어! 우리가 아무리 정무학관의 하류라 불린다지만! 우리 중에 천하의 망나니 소리 듣고 집에서 쫓겨난 사람 있어?! 가문에서도 그 정돈데 생판 남인 우리를 사람 취급이나 하겠어?!”
“맞아요. 금표 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게다가 언용운 그 친구 알고 보면 진주언가 출신입니다. 명문가 중의 명문가의 도련님이라구요. 아마 속으로는 우리를 무시할걸요?”
그런데 재밌는 건 그 돈이 사실 청죽관에 내려오는 쥐꼬리 같은 지원금을 착복해서 나온 돈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로 인해 양금표는 정학까지 당했다.
하지만 청죽관의 학우들은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른 기숙사 놈들이 우리를 무시한다고 해서 진 회장까지 우리를 무시하면 안 되지! 일학년 자치 부회장이라니?! 우리가 실력이 없지 자존심이 없나?! 이보게들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본때를 보여줘야 해!”
첫째로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학관 차원에서 쉬쉬하며 덮었고.
양금표가 특유의 언변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다마다. 다른 기숙사들은 다 면신례를 제법 혹독하게 치르는데, 우리가 사람이 좋아서 안 했을 뿐이잖나? 누구도 뭐라 못 할 거야. 그리고 알아보니 그 언용운의 무리는 전부 검수(劍手)라고 하더군. 무기 소지가 금지된 동윤관으로 부르면 돼. 검 없는 검수가 뭘 어쩌겠나?!”
그런 양금표의 언변에.
“확실히 좋은 생각이군! 우리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좋겠어!”
청죽관의 생도들이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양금표는 비릿하게 웃었다.
‘진경룡. 그러게 내가 같이 자치회의 공금을 나눠 먹자고 할 때 나눠 먹고, 회장 자리는 나한테 물려줬으면 좋았잖아.’
* * *
동윤관 앞에 도착하자, 병장기를 걸어두게끔 만들어둔 고리들이 잔뜩 있는 벽이 나왔다.
이른바 해검소(解劍所)라는 곳이었다.
이 법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법칙이었기에 나는 허리춤에서 회한을 풀어 걸려 했는데. 머릿속에 사부님의 음성이 울렸다.
- 여기는 안의 사정이 안 보이지 않느냐? 여기 말고 창가에 올려놓거라.
어려운 부탁은 아니였기에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근처에 달린 봉창(封窓) 위에 회한을 올려놓은 뒤 창살 사이에 덧대어진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시야도 확보해 드렸다.
‘어떻게 잘 보이십니까?’
- 오냐. 어중이떠중이들이 아주 노기등등하게 모여들 있구나. 목을 축일 잘 익은 술에다가 안줏거리까지 있으면 딱 좋은 구경이겠는데. 내 손이 이래서… 에이잉!
뭐, 아무튼.
사부님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다른 청죽관 생도들과 대치 중이던 진경룡 자치 회장이 황급하게 내 쪽으로 달려오며 입을 열었다.
“…자치 부회장. 이건 절대로 청죽관 전체의 뜻이 아닐세!”
“압니다.”
“아, 이해를 해주는 건가? 다행이군. 아니 고맙네. 아무튼 자네는 나가 있게! 내가 어떻게든 해결을 보겠네! 지금 나는 자네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예견했음에도 차라리 그런 반응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당시의 내 입을 치고 싶은 심정일세! 아무튼 간과한 내 잘못이야! 내가 해결하겠네!”
“됐습니다.”
“돼, 됐다고? 그게 무슨 소린가?”
“어차피 한 번은 일어날 일었습니다. 사실 이런 푸닥거리는 초장에 하면 할수록 좋아요.”
“…푸닥. 이보게 근데 자네 지금 검도 없지 않나?! 교수님께 장법을 얼마나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수 배운 걸로는 어림도 없네! 저 친구들도 나름 바늘구멍이라는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을 뚫고 들어온 친구들이야 우습게 보면 안 되네!”
참 걱정도 팔자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노삼에게 내가 항룡장을 몇 초식이나 뜯어갔는지 아마 못 들었겠지.
어쨌거나 나쁘지는 않았다.
내 걱정을 하는 것이었고, 나름대로 자신이 간과한 일을 수습해보려고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와중에 저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 하나가 내 속을 긁었다.
“우리 후배님은 자치 부회장 자리를 덥석 물었을 때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예상을 못 했나? 겁먹은 닭 새끼처럼 도망을 치려는 건가?! 그래! 도망을 치게! 자네는 여기 아니라도 불러 주는 곳 많잖아?! 남들 잘 사는 곳에 기어들어 와서 괜히 물 흐리지 말란 말이야!”
그 사내의 음성은 내 결단을 앞당겨 주었다.
나는 우둑 우둑 주먹을 풀며 진경룡을 향해 입을 열었다.
“경룡이 형.”
“……?”
“형은 나가… 뒈지기, 아니 다치기 싫으면. 하성아, 소릉아. 문 잠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