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형은 나가 (2)
동윤관의 출입문은 하나였다.
나가라는 말을 들은 진경룡은 잠시 내가 뿜어낸 기세에 흠칫하며 마른침을 삼키더니,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동윤관 사태에서 벌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고려해보는 모양이었는데, 그 고려는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았다.
“…고맙다.”
그렇게 진경룡이 주춤주춤 걸음을 옮겨 출입문 밖으로 나갔고.
그러고 나자, 문을 잠그라는 내 말을 받들기 위해 은하성과 우소릉이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나는 녀석들을 향해 노파심을 담아 한마디를 덧붙였다.
“은 소저가 노삼 교수님 뫼셔오기 전에 여기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된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언 형!”
“맡겨 주십쇼 형님! 한 놈도 못 새어 나가게 하겠습니다.”
“…얌마. 그래도 슨배님들이신데 놈이 뭐냐 놈이. 하여간에 우아한 새끼.”
“아! 그럼 한 분도 못 새어 나가게 하겠습니다.!”
이제 내 곁에 남은 사람은 정현뿐.
나는 주먹과 목 근육을 우둑우둑 풀며 녀석을 향해 물었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지금부터 선후배 간의 예절에 대해 몸의 대화를 좀 나눌 생각이야. 너는 어쩔래? 내키지 않으면 하성이랑 소릉이 쪽으로 가 있어도 된다.”
“뒤를 받치겠습니다.”
소매를 걷어붙이는 것을 보니 단순히 뒤에서 구경하겠다는 말은 아니었고, 함께 싸우겠다는 말이었다.
‘…흠.’
원작의 정현에게도 이런 비슷한 사건이 있긴 했다.
하지만 양상이 좀 많이 달랐다.
당시의 정현은 자치 부회장 자리를 약속받지도 않았고, 장소 자체도 운매관이었기에 달랐지만, 가장 달랐던 것은 정현이 저렇게 바로 소매를 바로 걷어붙이는 게 아니라 참다 참다 검을 뽑았다는 게 달랐다.
지금처럼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나는 이래도 되나 싶어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이게 피치 못 할 일이긴 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학년이 자치 부회장이 된 이상 불만들은 언제고 나왔을 테지요. 아까 언 공자께서 진 회장님께 말씀하셨던 말 그대로 이런 일은 초장에 벌어지는 게 좋다는 말씀에도 조금은 공감합니다.”
“…어. 그래? 뭐, 아무튼. 교수님이나 자치 회장님이 나서면 생도기록부상으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될 거야. 그치만 소문은 돌 거다.”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지요?”
“음. 하극상을 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그 소문은 언 소협께도 붙는 소문 아닙니까?”
“나야 어차피 망나니라고 알려져 있는데, 망나니가 망나니짓했다고 하겠지, 장강에 술 한 잔 더 붓는다고 티나 나겠어?”
“저도 어차피 무당의 수치입니다. 무당산에 흙 한 줌 더한다고 티가 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
…가 아니고.
‘쓰흡. 이놈이 원래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어디서 이렇게 시커먼 물이 들었지?’
뭐,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리 봐도 정현은 선도부랑 잘 맞았다.
‘원작에서도 운매관의 선도부 차장으로 자치회 간부 일을 시작했지.’
그처럼 차장으로 경험과 인망 그리고 권위를 쌓고 부장으로 넘어가는 게 왕도였으나, 문제는 청죽관의 인재 사정이 내가 바로 자치 부회장이 될 정도로 여의치 않다는 것이었다.
‘바로 부장을 시켜야겠지.’
한데, 눈 앞에 펼쳐진 개판을 보면 알 수 있듯.
현재의 청죽관은 기본적으로 기강이 개판이었다.
그 말은 즉 일학년 선도부장은 일학년 자치 부회장만큼이나 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그 도전의 횟수를 줄이려면 지금 같은 순간에 정현의 실력을 보여줘 놓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
뭐 무당파는 검을 쥐기 전에 태극권과 팔괘권부터 익히게 하니 실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잘 받쳐보던지.”
* * *
나는 정현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선배님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저쪽도 인지했는지, 일순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끼걱-
그런 가운데 하성이 놈과 소릉이 녀석이 문을 닫아걸기 시작했다.
그에 출입문의 나무 걸쇠가 쇠 홈을 찾아 끼워져 들어가는 소리가 덜크덕- 덜크덕- 울리기 시작했다.
“예의가.”
나는 그 덜크덕 소리를 벗 삼아 걸음을 옮겼는데.
“사람을 만든다.”
그렇게 걸음을 옮겨 이 사태의 원흉으로 짐작되는 사내 앞에 도달해 남은 말을 마저 이었다.
“이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어쩌다 휩쓸린 것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개중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싼 선배들이 제법 흉흉한 기세를 내뿜어왔다.
“좋은 말로 할 때 눈 깔아라 신입생.”
“그래. 선배를 향한 존중을 보여!”
“자치 부회장이 되었다고 네놈이 집구석에서 종복들 괴롭히듯 우리 위에서 우쭐댈 심산이었으면 이 자리에서 마음을 고쳐먹게 될 거다.”
나는 일단 뭐라고들 지껄이는지를 가만히 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그 면면들을 확실하게 눈에 담았다.
‘딱 봐나쓰.’
그런 내 태도가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조금 전 내게 겁먹은 닭 새끼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던 사내가 주위를 향해 나서지 말아보라는 손동작을 취해 보이더니 풉- 하고 비웃음을 터트리며 혀를 굴리기 시작했다.
“푸흡. 겁먹은 닭 새끼 소리가 귀에 거슬렸나 본데, 그래서 뭐 어쩔 테냐?! 앞날이 창창한 당금 수석께서 하극상이라도 하실 건가? 막상 열불이 나서 여기까지 왔는데 막막하지? 하필이면 검도 놓고 왔고 말이야?”
“…….”
“푸흐흐. 창창한 미래에 스스로 먹칠을 하고 싶다면 어디 한번 쳐보거라. 이 양금표는 진경룡의 모함에 정학을 당한 몸인 데다 어차피 학관 내 공직 진출도 막힌 몸이라 잃을 게 하나도 없다.”
아, 이놈이 양금표였구만?
활약이 미미한 청죽관 인물 중에서 제법 굵은 인상을 남긴 악역이었기에 기억이 났다.
‘매국노. 아니 이 경우엔 매관노라고 해야 하나?’
기숙사 대항전에서 한 경기라도 이겨보자고 청죽관이 한 종목에 한 학기 전체를 걸었고, 그에 인재와 전략이 갖춰지며 실제로 가능성도 있었는데.
이 양금표라는 놈이 내기에서 당시 정현의 소속 기숙사였던 운매관에 돈을 걸고 중심 선수였던 청죽관의 생도의 다리를 부러뜨렸다가, 운매관이 몰수패를 당하니 어쩌니 난리가 났던 사건이 있었다.
‘그 양금표가 이 사건의 주모자였어?’
노삼 교수와 경룡이 형이 있으니 뒷감당 걱정할 필요 없고.
정현이 있으니 등 뒤도 든든하고.
상대가 양금표라면 일말의 자비도 베풀 필요가 없다.
‘우리 금표 형 내가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불쌍해서 어떡하냐?’
사실은 안 불쌍하다.
불쌍하긴 개뿔 그야말로 주먹이 운다.
나는 울어대는 양 주먹 중 왼손을 쭉 편 뒤 양금표의 오른 어깨에 올렸다.
“양금표. 내가 보기엔 아직 너도 잃을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내 말에 양금표가 이 자식이 미쳤냐는 듯 내 팔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내 동작이 훨씬 빨랐다.
나는 양금표의 왼 어깨에 올려둔 손을 쓸 듯이 내려 녀석의 무복 멱을 꽈악- 틀어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손을 펼쳐 항룡장의 제일초인 항룡유회를 시전했다.
꽈릉!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서 시전한 초식에, 찰나도 되지 않는 순간 만에 양금표의 갈빗대에서 북 터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뻥!!!!
“컥?!”
원래라면 이 거리에서 또 이런 자세로 사용해선 제 위력이 나오지 않는 초식이니, 사실 이 초식은 항룡유회라고 하기엔 좀 그랬다.
‘아무리 봐도 하늘 꼭대기에 오른 용은 아니지 이건.’
그러니 이름을 붙이자면 반룡유회 혹은 중턱룡유회라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 모든 게 내가 의도한 바였다.
나는 앞날이 창창한 내가 덤벼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장력을 맞고 ‘컥.’하고 입을 벌린 양금표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거봐. 여기 잃을 거 잔뜩 있잖아.”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반룡유회를 먹이는 데 사용했던 오른손을 빠르게 거둬들인 다음 그대로 팔을 접어 팔꿈치를 세웠다.
그리고 틀어쥔 양금표의 멱을 내 쪽으로 강하게 당김과 동시에 세운 팔꿈치로 녀석의 턱을 후렸다.
빠악!!!!!!!
그러자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양금표의 입에서 하얀 강냉이들이 우수수 털려 나갔다.
그렇게 털려나가는 양금표의 강냉이들이 동윤관에 모인 선배들의 눈엔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로 보인 것일까?
“금표 형!”
“이, 이 자식이?!”
“다들 공격해!!”
조금 전 내게 흉흉한 기세를 보였다가 양금표의 손짓에 걸음을 물렸던 선배들이 득달같이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쥐고 있던 양금표의 멱을 미련 없이 놓아 밀어 치운 뒤.
짓쳐드는 다른 선배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휘리릭!!
퍽!!
“컥?!”
한데, 솔직히 해볼 만했다.
꽈릉!!
뻥!!
“크헉?!!”
아니, 툭 까놓고 말해 쉬웠다.
무림인에게 일 년이란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꽈르릉!
빡!!
“켁?!”
정무학관은 대학원을 제외하면 유급, 정학, 휴학등의 사정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수학 기간이 사 년이니, 여기 있는 선배들은 나보다 최소 일 년에서 최대 삼 년까지의 시간을 부여받았던 양반들일 것이다.
한데 선배들은 하나같이 그 기간을 짧게들 쓰신 듯했다.
꽈릉!!!
빠아악!
“꺾!”
물론 나야 위철진이라는 기연도 있었고 전생의 짬도 있으니, 고작 몇 년 정무학관에 다닌 후기지수 나를 웃도는 실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겠지.
그것도 다른 기숙사에 떨어진 자들이 모이는 곳이 된 작금의 청죽관이니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처럼 내 옷깃 하나 제대로 스치지 못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어휴!”
“억!”
합격진만 제대로 익혔어도 이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저잣거리의 흑도패들도 이것보다는 합이 맞을 테니까.
마음만 앞서서 본인들끼리 투로가 겹치는데….
“아앜! 왜 나를 쳐? 눈이 삐었어?!”
“니가 거기서 몸을 틀어 놓고 왜 나한테 왜 지랄이야?!”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이 형님들을!”
“끄악!!”
“진짜!”
“컥!”
방학도 있고, 학기 중에도 파견 실습 같은 경로로 신청만 하면 이곳저곳 경험을 쌓을 기회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기간을 살려 표행이든 무림맹이나 다른 대파로 단기 파견을 나가든, 구하고자 하면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그 기회를 통해 실전 경험만 쌓았어도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며.
“어떡하지?!”
“꺽?!”
하다못해 대련이라도 많이 했으면 저렇게 비급에 나와 있는 그대로인 틀에 박힌 초식들로 적에게 ‘제발 맞아주시면 안 될까요?’하고 사정하는 권각법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감들이라도 좀 있던지.’
내지르는 주먹에 확신들이 없었다. 본인도 확신을 못하는 주먹에 누가 맞겠나?
‘어휴, 그럴 거면 애초에 내지르지나 말지.’
아무튼 그 덕에 생각보다 여유가 있어 힐끔 뒤를 보니.
정현도 완전 가지고 놀듯 선배들을 두들기고 있었다.
‘쟤는 주먹질도 유려하네.’
쨌든, 양금표를 시작으로 처음 몇 놈을 쥐어 팰 때는 속이 시원했는데, 이거 다 언제 사람 만들지 생각하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어쩐지 멀찍이 봉창 밖에 계시는 사부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 킬킬킬. 네놈이 선택한 청죽관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여튼 그렇게 동윤관 곳곳이 청죽관 생도들이 뻗어 눕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후.”
잠시 숨을 돌리는데, 문득 내 뇌리에 잠시 잊고 있던 한 사람이 스쳤다.
‘어. 잠깐만.’
양금표!
양금표 이 새끼 근데 어디 갔지?!
‘분명 여기 어디 던져놨는데?’
그에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를 살펴보니, 출입구를 향해 열심히 기어가고 있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다 젖혀두고 그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것일까?
열심히 기고 있던 양금표가 힐끔 고개를 돌리더니, 화들짝 놀라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번개처럼 기기 시작했다.
“마! 망하이가! 사람히네!!!”
나는 그런 양금표를 기어이 따라잡은 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망나니가 사람 친다고? 망나니는 원래 사람을 쳐. 그것도 모르고 까불었어?!”
빠악!!!!
그리고 몸을 돌리니.
딱 기억을 해뒀던 선배들이 모조리 떡이 돼 있는 가운데.
뒷열의 선배님들이 소리 없는 만세를 부르며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무고를 주장했다.
“항복! 항복!!! 우, 우리가 잘못했다! 아니! 잘못했습니다!!!”
“저희는 그냥 휩쓸리듯 딸려온 겁니다!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고요! 그냥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길 거라고 그래서 온 겁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말렸어야 했는데! 살려 주십시오! 후배님! 아니 자치 부회장님!!”
안 되겠다.
자치회 구성이고 나발이고 은 소저 오면 새 빨간 모자부터 준비해 달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