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73화 (73/444)

제73화. 남개를 기리는 이 동윤관에서!

떡이 된 양금표를 질질 끌고 와 쿵하고 던져놓자, 항복과 무고함을 선언한 선배들이 두어 발을 뒤로 물림과 동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동윤관엔 일단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후.”

더 덤벼들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숨을 한번 몰아낸 뒤.

정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현. 기혈을 정리할 시간 필요하냐?”

“권장(拳掌)을 사용한 건 오랜만이라 해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언 소협은 어떠십니까?”

“나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하긴 확실히 물 만난 고기 같으시긴 했습니다. 한 발 다가서면 두 발을 더 나아가서 장법과 권각을 내지르고 계시더군요. 사실 제가 뒤를 받칠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 말. 사람 패는 게 잘 어울린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내 앞으로 와서 운기조식해 호법 서줄 테니까.”

“예.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정현이 운기조식을 시작한 가운데.

출입구 쪽에서 하성이 녀석이 어깨에 무언가를 칭칭 감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에 저놈이 어깨에 뭘 감은 것인가 유심히 봤더니 다름 아닌 밧줄이었다.

“…그거 뭐냐?”

“밧줄입니다 형님. 출입구 옆에 달린 창고 안에 있던데요?”

“아니 밧줄이야 우리가 가져온 게 아니니까 당연히 창고에서 가지고 왔겠지, 내 말은 갑자기 밧줄은 왜 들고 왔냐고.”

“……? 묶을 때 쓰려고 가져왔죠. 저번에 하류박 놈들이랑 황보준 일당 묶을 때는 한 명 한 명 묶었더니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이렇게 나비 모양의 고리를 여러 개 만들어 놓은 다음에 손들을 끼우게 하고 이렇게 당기기만 하면… 오늘은 안 묶습니까?”

“하성아. 그때랑 지금이랑 네 눈에는 상황이 같아 보이냐?”

“생각해보니 다르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도 말씀으로 아무리 그래도 선배님들이라고 하셨었네요.”

“그럼 그 밧줄이 쓰일까 안 쓰일까?”

“…안 쓰이겠지요?”

“맞아야겠지?”

“…….”

“언제!”

“앜!”

“언제! 사람 될래?!”

“앜!!”

그때였다.

하성이 놈이 가져온 밧줄의 끄트머리로 녀석의 머리를 치고 있는데, 앞쪽에서 흠칫거리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배님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 후배님. 아니 부회장님? 저, 저쪽에서 부르는 것 같은데요?”

그에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소릉이 녀석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언 형!”

“너는 또 왜?!”

“은 누님이 오셨는데요?! 열어 드릴까요?”

뭐, 그런 것까지 물어보고 있냐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어쩐지 소릉이 녀석에게는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덜크덕-

내 말에 채워져 있던 나무 걸쇠가 치워짐과 동시에 출입문이 활짝 열리며 일남일녀가 동윤관 안으로 들어왔는데.

조심조심 고개를 들이미는 남자는 진경룡이었고, 연청색 무복 자락을 휘날리며 바쁘게 걸어 들어오는 여인은 은하연이었다.

‘사람이 하나 부족한데?’

모셔오라는 노삼 교수님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은하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노삼 교수님은 어쩌고 소저 혼자 오시오?”

“직접 뵙고 상황과 언 공자의 의중을 말씀드렸는데, 일단 알았다고 하셨어요. 교수님들끼리 회의가 있으시다고 시간이 조금 걸리실 것 같으시대요. 일단 전부 동윤관에 모여 있으라시네요?”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곧바로 답을 하더니.

틀어 올린 머리에서 옥잠(玉簪)을 뽑고 소매에선 수첩을 꺼냈다.

“잠시만 들고 있어 주세요.”

그러더니 옥잠을 뽑아 산발이 된 머리를 손에 감고 있던 끈을 풀러 질끈 묶고는 소매를 걷어붙였고, 그렇게 머리를 질끈 동여맨 후에는 맡겼던 물건을 달라 나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제 돌려주세요.”

그 모습에서 나는 어떠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성이라던가, 소릉이라던가.

‘…이 옥잠. 머리 부분을 돌리면 목탄이 나오는 일종의 연필이지?’

그에 나는 은 소저가 맡긴 물건을 바로 돌려주지 않고 입부터 열었다.

“무얼 하시려고 그렇게 혼자 바쁜 거요?”

“일해야죠.”

“그리니까 무슨 일.”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키웠다.

“보상금 받아야죠. 이번에는 마음의 상처가 없으신가요? 누렇고 하얗고 딱딱하고 묵직한 금창약이 필요하실 듯한데요? 혹 없으시다 하더라도 있다고 해주세요.”

이거 봐라.

내 기시감이 딱 맞았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뱉은 뒤 은하연을 향해 천천히 내 생각을 말했다.

“따지고 보면 있긴 하지. 근데 앞으로 청죽관을 굴려야 할 텐데 선후배 사이에 그래도 되나 싶어서, 아. 따로 이야기를 안 했는데 소저에게 총무부장을 부탁할 생각이오.”

한데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의 눈빛이 더욱 거세졌다.

“그럼 더더욱 받아야겠네요.”

“……?”

“청죽관의 자금 사정이 상당이 열악하다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아직 장부를 본 건 아니지만 아마 그럴 거요.”

“그러니까요. 안 그래도 쪼들리는 살림인데, 개강하자마자 동윤관 수리비와 학우들 치료비로 공금을 사용할 수는 없죠. 심지어 다 자업자득들이신데요. 앞으로는 돈이 무서워서라도 이런 짓을 못 하게 해드려야죠.”

음.

듣고 보니 제법 논리가 정연했다.

나는 은하연에게 수첩과 옥잠을 돌려준 뒤.

진경룡을 불러 은하연에 대한 내 생각을 말했다.

“진 회장님?!”

“…응?”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작년에 총무부를 어떻게 꾸리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여기 계신 은 소저에게 총무부장을 맡길까 합니다.”

내 말에 진경룡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작년의 총무부는 저기 있는 양금표란 친구가 이끌었었네. 내 나중에 이야기 해주겠지만 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 천금매소 혹은 휘상의 미래라 불리는 은 후배가 맡아준다면 나로서도 더할 나위가 없지. 애초에 입사 지원서를 받았을 때 나도 내심 바라고 있었네.”

서류상의 작업은 남아 있겠지만, 진경룡의 뜻과 내 뜻이 같다면 거리낄 게 없었다.

“예. 은 소저한테 오늘 일어난 사태로 야기된 금전적 손실과 피해 보상에 관한 건을 맡기려 하는데, 신원 확인이랑 뭐 그런 것 좀 도와주십시오. 이따가 여기 정리되고 나면 장부랑 열쇠 같은 거 인수인계도 좀 도와주시고요.”

“그렇게 하겠네. 아, 근데 나도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어떤?”

그런데 이때 진경룡이 쭈뼛거리며 내게 부탁을 하나 해왔다.

“음. 회장단 회의나 노삼 교수님 외에 다른 교수님들을 뵙는 자리 같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는 아까처럼 경룡이 형이라고 불러 주게.”

“……? 아까는 제가 잠시 화가 나서 꼭지가 도는 바람에 얼결에 결례를 범한 건데 계속 그렇게 불러 달라고요?”

“그편이 친근감도 느껴지고 또….”

“또?”

“…혹여라도 자네가 오늘처럼 또 꼭지가 돌더라도 나는 봐줄 것 같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달까?”

“……?”

뒷말이 좀 그렇긴 했지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그렇게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있으니, 여기저기를 기운 무복을 입은 노삼 교수님께서 동윤관에 찾아오셨다.

그렇게 찾아온 노삼이 처음 한 일은 동윤관이 떠나가라 일갈을 하시는 것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

그 일갈에 모여 있던 선배님들 중 대부분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노삼의 일갈에는 딱히 주어가 없었다.

그에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양금표 일당은 그게 나를 꾸짖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인지 떡이 된 얼굴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교후힘! 저놈임히다! 저놈히! 제 이흘 다 부숴 놨흠히다!!”

“맞습니다! 저 언용운이라는 놈이 하극상을 일으켰습니다!”

“예! 저 망나니 놈이 하극상을 일으켜서 저희를 이 꼴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청죽관의 창립자이신 남개를 기리는 이 동윤관에서!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놈을 쫓아내 주십시오!”

하지만 양금표 일당의 아우성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에라이 한심한 놈들아. 후배를 집단 구타를 하려다가 제 놈들이 오히려 털렸으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정무학관의 생도라면 아니 무인이라면, 최소한 그 정도 양심은 있어야지!”

득달같이 달려온 노삼이 양금표 일당의 뺨을 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짝!

“그리고. 어떻게 이게 하극상이냐?! 언용운이 저놈은 교수 회의에서 승인된 자치 부회장이고 네놈들은 그냥 생돈데, 네놈들이 한 짓이 하극상이지!”

짝!!

“교, 교후가 학행히네!!”

“이 새끼는 아까부터 뭐라는 거냐 언가야? 근데 이놈 이거 이빨 다 어디 갔어?!”

“음. 일단 하는 말은 교수가 학생 친다는데요?”

“뭐라?! 이놈 이거 다시 보니까 작년에 청죽관의 공금을 닦아썼던 그놈이로구나?!”

짝! 짝!!

“이빨은 제가 좀 꺼내 갔는데, 그래도 어금니는 고기 맛은 보라고 남겨 놨습….”

짜악!!!!

“…어이고 그것도 날아갔네.”

그렇게 양금표 일당은 정리되었고.

노삼이 탈탈 손을 털며 남은 말을 뱉었다.

“이 쪽지를 보아하니 면신례를 하겠다 적어놨던데, 근래에는 신입생을 골려주는 행동을 면신례라 부르다지? 진가야 대저 면신(免新)이란 말의 본래 뜻이 무엇이냐?”

“새로움을 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 오늘은 단순히 신입생 중 자원하여 입학한 다섯을 만나는 날이 아니다. 오늘부로 청죽관 전체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청죽관이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만든 자부터 혼을 내야겠지.”

여기까지 말한 노삼은 양금표 일당을 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힘으로 자신의 따귀를 스스로 후려쳤다.

짜아아악!!!!

“그건 바로 지금껏 가만히 뒷짐만 지고 있던 나다.”

그에 좌중에 경악이 들어찬 가운데, 노삼이 퉤 하고 피가 섞인 이 하나를 뱉어내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남개께서 청죽관을 세우며 품으신 뜻은 평등, 자유, 성실이셨다. 나도 너희들도 그 뜻을 스스로의 나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아왔다. 하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는 방종이 아닌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는 자유를 가르칠 것이다! 그저 자리를 지키는 개근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성실을 가르칠 것이다! 여기 있는 언용운은 남개의 정신 그 자체인 녀석이다!”

예?

제가요?

“흥. 이 중에 몇 놈쯤은 사대 기숙사 중 만년 꼴찌를 자랑하는 우리지만 집에서 쫒겨난 망나니는 없는데, 저놈이 무슨 남개의 화신이냐 그런 생각들을 하겠지.”

객관적으로는 맞지 않나요?

“시시콜콜한 사정들이야 이 말 다르고 저 말 다르니, 단순하게 제쳐놓고 있는 사실만 보아라. 언용운은 하북에서 유명한 망나니였다. 그리고 가문에서 나왔다. 그것은 어쨌거나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진 것이다. 누린 자유에 대가를 치른 것이지. 그렇게 가문을 나온 이 놈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당금수석 자리를 쟁취해냈다. 이것은 성실이다. 나는 여기 이 언가 녀석에게서 남개께서 키워내고자 하셨던 후기지수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은 일종의 꾸짖음이 되어 내 뇌리에 울렸다.”

음, 소소한 오류가 있었고, 그로 인해 내 그릇을 너무 크게 보고 계신 게 아닌가 했는데.

노삼 교수가 내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근데 저놈들은 왜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려?’

아무튼 그렇게 언 동생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노삼이 마지막 말을 뱉었다.

“늙은 거지의 잔소리가 길었다. 내 잔소리에 깨닫는 바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치 회장과 자치 부회장의 뜻과 계획에 적극 협조하기를 바란다.”

* * *

그렇게 뜻밖의 면신례가 끝이 났다.

선배들이 자리를 떠난 동윤관에서 노삼이 내게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아이구 볼따구야. 좀 말려줄 것이지 그걸 그러고 보고만 있느냐.”

“제가요?”

“오냐. 교수님 그러시지 마십시오. 하고 말려줬으면 보기도 좋고 내 볼과 이가 멀쩡했지 않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도저히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거니와, 아무리 나라도 그 짧은 순간에 노삼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저 늙은 거지가 멋쩍어서 하는 말이었다.

그에 내가 콧방귀를 끼자.

“나 원 참.”

노삼이 험험 하고 목을 고르더니 은하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아무튼 대충 정리가 됐구나, 은가야. 너는 나를 좀 따르거라.”

하지만 정작 은하연은 암산을 하는지 수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오물거리며 영혼 없이 답했다.

“교수님 죄송한데요. 오늘 일로 동윤관에 바닥재 몇 줄은 갈아야 할 것 같아서 견적도 내야 하고, 수첩에 적은 명단이랑 청죽관 회계 장부도 새로 정리해야 해서 제가 좀 많이 바쁠 것 같은데. 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일이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모용린. 아니 검후가 좀 보자는구나.”

오.

지금 저거보다 바쁜 일은 없었다.

나는 은하연에게서 수첩을 빼앗은 뒤 입을 열었다.

“저 일이 제일 급하니 저것부터 합시다. 그 장학생 선정되면서 받은 영단도 꼭 챙겨가고.”

“알겠어요.”

그리고 남은 언 동생들에게도 말했다.

“내일부터 엄청 바빠질 것 같은데, 너희들도 휴약기에 놓인 거 아니면 장학생 되면서 받은 영단들 지금 섭취해. 내가 호법을 서줄 테니까. 그런 거는 아끼면 보통 똥 된다.”

“또, 똥…. 음. 예. 말씀은 알겠습니다.”

“옙!”

“넵! 근데 형님은 안 드시는 말투시네요? 아닌가 벌써 드신 건가?”

“나도 아직 안 먹었어, 그럴 새나 있었냐? 보준이 그 자식에, 아버지에 맹주님에 여기 노삼 교수님도 오셨고.”

“그럼 형님 먼저 드시죠.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저희가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호법을 제대로 설 줄이나 아느냐? 험험. 그런고로 지금 영약들을 먹겠다면 다들 내가 봐주도록 하마. 언가 네놈부터 하든지?”

“감사한 말씀인데 저는 따로 쓸데가 좀 있습니다 교수님.”

“엥? 제 놈 입으로 아끼면 똥이 된다더니?”

아, 그게.

제 경우엔 아끼면 독이 되거든요.

그냥 독도 아니고 다른 독이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 천독불침의 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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