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74화 (74/444)

제74화. 당가의 친구 (1)

천독단.

천독불침을 가능케 하는 사천당가의 영단.

그것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려면 장학 제도의 부상으로 지급받은 영단들은 지금 시점에선 아껴 둬야 했다.

내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천독단을 손에 넣을 계획의 초안을 그려보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내 말을 자신의 호법이 필요 없다는 소리로 알아들은 노삼 교수가 슬슬 부어오르기 시작한 본인의 오른뺨을 쓰다듬으며 은하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뭐, 네 녀석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 아무튼 내 호법이 필요 없다면 나도 여기에 더 죽치고 있을 필요가 없지. 은가야, 너는 나를 따르거라. 검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노삼의 음성에.

은하연이 우선 진경룡을 향해 꾸벅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회장님.”

“검후 교수님이라… 청죽관의 회장직을 수행하며 몇 번 뵌 일이 있지, 차가워 보이는 외향이나 세간에 퍼져 있는 이야기들과 달리, 고작 생도 신분인 내게도 깍듯이 예를 표해주실 정도로 담박한 성품이셨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 뵙고 오게.”

“진가 이놈아. 그런 식으로 검후를 치켜세우면 네놈들에게 이놈 저놈 하면 내가 뭐가 되느냐?”

“거지 같은 교수님이 되는 거죠. 뭐.”

음.

생각만 한다는 게 입으로 나왔다.

“……?”

하지만 경룡이 형이 재치 있게 상황을 무마하고 나섰다.

“하, 하하하. 노삼 교수님께서는 질박한 성품이시지요. 그에 이렇게 용운 동생이나 제가 교수님을 친근하게 여길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런가 용운 동생?”

“예. 뭐.”

“험험. 그런가?”

“물론입니다 교수님. 험험 아무튼 원래 하던 말로 돌아가서, 잘 다녀오게. 용운 동생의 판단이니 틀릴 리야 있겠는가. 내 편한 마음으로 우리 청죽관에서 검후 교수님의 수제자가 나왔다는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네. 은 후배. 아니 우리 총무부장.”

“예.”

그렇게 진경룡의 덕담이 끝나자 은하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녀오시오. 청죽관의 장부는 내가 건드려봤자, 소저 성정으론 결국 다시 할 테니, 이 수첩에 적힌 것만 내가 정리를 해 놓으리다. 저번에 하류박 사건 때와 같은 양식으로 해 놓으면 되겠소?”

“예. 그래 주시면 됩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언 공자.”

그렇게 노삼과 은하연이 동윤관을 떠나갔고.

내 말에 따라 정현, 은하성, 우소릉은 각기 부상으로 받은 영단을 삼킨 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나와 진경룡은 그런 녀석의 호법을 자처함과 동시에 자치회 인선에 관한 의논을 시작했다.

“가장 시급한 총무부의 인선은 은 후배로 하면 되겠고, 차장도 총무부장이 알아서 가려 뽑도록 하면 되겠고.”

“예. 회장… 아니, 경룡이 형.”

“하하. 그래 용운 동생, 기숙사를 받치는 왼쪽 기둥이 총무부라면 오른 기둥은 선도부라는 거 자네도 알고 있겠지?”

“예.”

“오늘 일도 그렇고 계속해서 내 면이 깎이고 있긴 한데, 재학생 중엔 마땅한 깜냥이 없네. 작년에 선도부장을 역임했던 친구는 좀 전에 양금표와 함께 양호실에 실려 갔고, 오늘 일어난 면신례 사태에 불참한 친구들이 있긴 하네만 그 친구들도 본인의 몸만 뺐을 뿐 적극적으로 막아선 사람은 없으니까.”

이것만 해도 진경룡은 괜찮은 자였다.

권력욕을 숨기고 나를 사냥개처럼 부리고자 하는 자였다면?

기숙사의 살림을 받치는 두 기둥 중 돈줄을 틀어쥐는 자리를 내 사람인 은하연이 꿰찼으니, 생도들을 틀어쥐는 선도부장 자리는 반드시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려고 했을 것이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용운 동생 자네 무리들 외에 대어급 신입생이 청죽관에 와줄 것 같지도 않고. 여기 이 친구들 중엔 선도부장을 맡길 깜냥을 가진 친구가 있거나, 없으면 자네가 그냥 겸임을 하는 것도 괜찮다 생각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하지만 진경룡은 그러지 않았다.

진정으로 청죽관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나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도부장은 정현이 제격이지 않을까 합니다.”

게다가 모든 판단을 떠밀 듯 내게 넘기고 자기는 편하고자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음? 정현 후배님은 너무 선한 것 같던데? 아, 그렇다고 자네가 악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닐세. 주, 주먹 쥐지 말게.”

“주먹은 아까부터 쥐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러고 있었어요.”

“아, 그런가? 자라보고 놀란 내가 솥뚜껑보고 놀란 꼴이군.”

“……?”

“…아무튼 내 말은 일학년이 선도부장을 맡게 되면 이래저래 선배 생도들이랑 부딪힐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맞는 말이었다.

당장이야 내가 찍어 눌러놨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긴장들이 풀리기 마련이고, 불만을 표하는 선배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 수 있었다.

“내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딱 보기에도 정현 후배가 선배들을 휘어잡을 성정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확실히 정현이 녀석이 선배들을 휘어잡을 성격은 아니지요.”

“한데?”

“하지만 남이 굽어지는 꼴도 못 보는 녀석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아닌 건 아니라 말하는 녀석이고, 옳지 못한 일이 있으면 주저 없이 막아서는 녀석입니다. 누구든 얕보고 덤벼들었다간 큰코를 다치게 만들어줄 실력도 있고요. 선도(善導). 저 친구야말로 청죽관을 바른길로 인도할 녀석이 아닐까 합니다.”

* * *

- 정현이 저놈 저거 요즘 왜 저러냐? 기합이 진짜 바짝 들어간 것 같구나?

‘그러게요?’

내가 청죽관에 입사한 지 대략 오 일이 지났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니, 선배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동윤관의 일이 있은 뒤로 선배들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나를 자치 부회장으로 인정했다.

그렇게 부회장직을 수행하게 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늘 해오던 아침 수련을 청죽관의 구성원 전체에게 적용한 것이었는데.

오 일간의 아침 수련 시간 내내 정현은 저렇게 나보다 반 시진 이상 먼저 나와 검을 휘둘러서 무복을 땀으로 온전히 적신 상태로 나를 맞고 있었다.

‘아니. 천재가 노력까지 저렇게 해버리면 범재들은 서러워서 어떻게 살라는 걸까요?’

언제 어디서 저렇게 불이 붙은 건지 원.

- 퍽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한데, 일단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제자야? 정현이 놈과 네 녀석이 경쟁하듯 일찍 일어나는 탓에, 덩달아 이끌려 나온 청죽관의 불쌍한 인생들 좀 보거라. 내 어지간하면 불쌍하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데, 근육통과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모습들이 꼭 되살아난 시체 같은 게 영 불쌍하구나.

‘제가 되살아난 시체에 대해서 좀 아는데, 선배님들과 동기들은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 ……?

백도무림의 후기지수 중에 가려 뽑혔다는 분들이 얼마나 수련을 등한시했으면 단련을 조금 했기로서니 저런답니까?

‘생각난 김에 내일 수련부터는 발목과 손목에 모래주머니도 채워야겠습니다.’

- 쯧쯧. 불쌍한 놈들 같으니, 다음 생엔 내 제자 놈과 다른 기숙사생으로 태어나거라.

뭐, 아무튼.

아침 수련을 기숙사의 사칙으로 삼은 것을 시작으로 나는 두 가지 공적인 일을 더 처리했다.

공적인 일 중 첫 번째는 삼십칠 명의 신입 입사생, 그러니까 입사 동기생들을 맞아 청죽관의 일학년생도를 총원 사십이 명으로 확정 지은 것이었다.

‘청죽관의 입지가 입지이다 보니, 툭 까놓고 말해 삼십칠 명 전원이 다른 기숙사에서 튕겨져 나온 녀석들이었지.’

그래서 인원도 많은 것이었다.

‘다른 기숙사는 딱 마흔 명씩만 받았지.’

하지만 패배감에 익숙해진 기존의 선배들과는 달리, 신입생들에겐 역대급으로 힘들었다 평가받는 입관 시험의 생존자들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나를 알아보지 못한 다른 기숙사들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욕들이 있었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당금수석인 내가 함께한다는 사실이 녀석들의 의욕을 강화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의욕 있는 신입생들이 들어오니, 이제 선배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나랑 정현이 녀석이 불이 붙는 바람에 그렇다 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정현을 비롯한 언 동생들과 나를 제외하더라도, 신입생들에게 뒤질 수 없다는 심리도 어느정도 작용을 일으키는 듯 보였다.

청죽관의 분위기가 그렇게 조금이지만 선순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청죽관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첫 번째 승리만 있으면 지금의 선순환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겠지.’

그 첫 번째 승리를 함께 기획해 나갈 자치회의 인선도 굵은 것은 일단 마무리했다.

총무부장은 예정대로 은하연에게 맡겼고.

차장은 그녀더러 알아서 뽑으라 하니, 한 명은 선배 중에서 다른 한 명은 동기생 중에서 셈에 밝고 정직한 사람들을 가려 뽑아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다음으로 선도부장.

선도부장은 내 의도대로 정현으로 결정됐다.

‘아, 정현 이 자식 선도부장 됐다고 저렇게 열심인 건가?’

음 그러고 보니 경룡이 형한테 선도부장으로 정현을 추천하는 자리에 정현이 있긴 했구나?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여튼 선도부는 정현에게 맡겼다.

일학년 자치 부회장만큼이나 일학년 선도부장도 이례적인 인선이었고, 부서의 특성상 정현보다 높은 학년을 차장으로 두기도 그렇고, 전원을 일학년으로 구성하기도 그래서 여기는 별도의 차장 없이 정현 혼자 굴리도록 했는데.

“용운 동생? 저번에 이야기했던 선도부장이 남이 굽어지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라는 말 있잖은가?”

“예.”

“…무슨 말인지 이제는 알겠네.”

“…? 정현과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경룡이 형?”

“솔직히 요즘 우리 자치회가 이래저래 일이 좀 많은가? 무인으로서 부끄러운 말이긴 한데. 거기다 아침 수련 일정이 추가되면서 본래 하던 수련량보다 수련량도 많아지니까 내가 없던 근육통도 좀 생기고 그랬거든.”

“그런데요?”

“아니 선도부장이랑 오늘 점심을 같이했는데, 내가 좀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입맛이 없길래 밥을 좀 남겼더니.”

“…아.”

“그 꼿꼿한 표정으로. 농민이 이 쌀 한 톨을 키워내는 데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는지 아느냐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서삼경과 도경 불경들을 다 대가며 잔소리를 해대는데….”

“회장님! 회장님 어디 계십니까?!”

“……! 부회장, 아니 용운 동생! 부탁이니 나 여기 없다고 좀 해주게.”

“정현!”

“예?!”

“경룡이 형 여기 있다!”

혼자서도 잘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공보부.

공보부는 자치회의 결정 사항을 소속 생도들에게 알리고, 이런저런 간행물 등을 만드는 부서로 기숙사의 입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었는데.

부장 자리를 맡길 만한 사람이 현재 무림맹에 파견 실습을 신청해 나가 있는 상황이라, 부장은 공석으로 두고 하성이 놈과 소릉이 녀석에게 차장 자리를 맡긴 뒤.

진경룡과 내가 처리한 일을 알리는 역할들만 담당하게 했다.

알아서 무언가를 처리할 일머리는 좀 없는 녀석들이었지만 시키는 일은 잘하는 녀석들이었고, 하성이 녀석은 넉살과 입담이 있는 편이고, 소릉이 녀석은 발이 빨라서 자치회의 결정을 신속하게 전달하는데 제격이었다.

마지막은 체육부장.

경룡이형은 총무부장과 선도부장이 자치회의 양대 기둥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자치회의 운영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런 것이고, 청죽관에 확실한 승리를 안기려면 머지않아 다가올 기숙사 대항전을 준비할 체육부장도 중요했다.

하나, 이 중요한 자리는 우선 공석으로 두기로 했다.

체육부장 역시 딱 정해놓은 인물이 있는데 당장에 접근하기가 좀 애매했다.

‘원작을 읽어서 아는데 당신이 참 체육부장에 어울립디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하여 그 양반과 접촉할 공식적인 건수를 만들기 전까진 소릉이 녀석에게 틈틈이 동향과 일과를 파악해 두라고만 해뒀다.

그렇게 바쁘게 일정들을 소화하다 보니, 어느새 개강 전날에 실시되는 새터 날이 되었다.

* * *

새터.

새내기 배움터의 준말인데, ‘무림학관의 검술천재’ 세계관 속에서는 따지고 보면 그저 밥 한 끼를 함께하는 일정이다.

물론 총장님 그리고 사대 기숙사의 사감 교수님과 자치회 임원들 그리고 기숙사를 정한 일학년생 전원이 참석한다는 점은 ‘그저’라는 말을 붙이기엔 특별하다.

아무튼 이번 기수의 새터 일정이 시작되었고.

일학년생 전원이 각색의 무복을 입고 본관 일 층에 마련된 교직원 식당에 모였다.

그렇게 학생들은 다 모였으나 아직 교수님들은 오지 않았고, 새터의 목적 자체가 사대 기숙사의 생도들이 어울리라는 의미였기에, 입관 시험을 함께했지만 기숙사가 갈린 과거의 동지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대는 윤국관으로 갔구려?”

“예. 운 좋게 합격이 됐습니다. 공자께서도 희망하시던 대로 운매관에 입사를 하셨군요. 아, 근데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당금수석 언용운이 청죽관으로 갔다던데요?!”

“소식이 아니라 공식일세. 저기 청죽관 쪽을 보게, 딱 있지 않은가?”

물론, 나는 당장에 그러지는 못했다.

신입생이기 이전에 자치회의 임원이었기 때문이다.

‘뭐, 나는 과거의 동지들을 다 끌고 청죽관에 오긴 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확인하고 말을 섞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 나는 청죽관의 인원을 파악함과 동시에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용명이랑 천장호는 원작대로 운매관으로 갔군. 그 옆에 팽 백부를 닮은 덩치 좋은 녀석은 팽소천이겠고? 이글이글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제갈설지는 역시 윤국, 그 제갈설지 옆에서 같은 황색 무복을 입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 단발머리는….’

이목구비가 고운 와중에 묘하게 팽가를 탁한 느낌이 나는 것을 보니 팽소진인가?

‘팽소진도 원작대로 윤국으로 갔네.’

한데 이 와중에 향란관 애들은 다른 기숙사랑 안 어울리고 칼같이 착석들을 하고 있었다.

눈썹이고 코고 자를 대고 그어놓은 것 같은 귀공자는 남궁세가의 장남 남궁윤이고, 지금 시점에서 제일 중요한 당옥기는….

‘찾았다.’

원작에 나온 대로 맨 끄트머리에 앉아 있구만?

‘혹시라도 전개가 좀 뒤틀렸을까 봐 살짝 걱정했는데, 기우였네.’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제갈설지와 떨어져 혼자 덩그러니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당옥기.

그 모습이 인간적으로 안쓰럽긴 했다.

하지만 사실 내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당옥기가 저러고 있다는 것은, 원작처럼 그녀가 기숙사 내에서 외톨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은 즉 그녀로부터 ‘천독단을 받을 친구’는 내가 첫 번째가 될 거라는 이야기.

‘조금만 외로워하고 있어라 당옥기, 내 기꺼이 당가의 친구가 되어주마.’

대신에 친구비는 천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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