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당가의 친구 (2)
오랜만에 한데 모인 신입생들이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비색 무복을 입은 대학원생 한 명이 퀭한 얼굴로 연회장에 나타나 입을 열었다.
“교수님들께서 오십니다.”
그 말에 각 기숙사의 자치회 임원들이 흩어져 있던 학생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운매관 생도들은 이곳에 줄지어 앉으라!”
“윤국관 생도들. 담소들은 그쯤 하시고 미리 알려드렸던 자리에 와 앉으십시오. 총장님의 격려 말씀이 있는 후에 다시 생도들끼리 어울릴 시간이 있을 겁니다.”
아, 물론 가장 먼저 모여 앉은 기숙사는 처음부터 소속 생도들의 개인행동을 불허했던 향란관이었다.
“향란관 생도들은 정좌를 하라.”
애초에 자리에 앉아있던 그들은 그저 어깨만 의젓하게 펼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향란관 다음으로 질서정연하게 착석을 마친 기숙사는 청죽관이었다.
“청죽관! 집합!!”
한마디 말과 함께 흘러나온 휘파람 소리.
휘-이익!!
그 휘파람 소리에 청죽관 생도들이 마치 귀신을 만나기로 한 것처럼 긴장을 하더니, 일순 정예 관군이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모여들어 착석을 마쳤다.
만년 꼴찌, 만사 꼴찌, 정무학관의 굼벵이, 하여간에 안 좋은 별칭은 다 붙어 있던 청죽관이 처음 보이는 일사불란한 모습.
사실 그들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지만, 다른 생도들이 보기에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아무튼.
청죽의 모습에 타 기숙사의 생도들부터 연회장에 음식을 나르던 일하는 사람들까지 어지간한 사람 모두가 ‘허?!’ 하고 입을 벌렸는데.
그 어지간한 사람 중엔 때마침 연회장에 들어오다 그 모습을 목격한 정무학관의 총장 경혜사태도 있었다.
물론, 그녀는 곧바로 그 감탄을 호호하는 웃음으로 바꾼 뒤.
곁에 있는 청죽관의 사감 교수 노삼에게 말을 건넸다.
“노삼 교수님께서 의욕을 찾으셔서 그런가요. 금년의 청죽은 아주 기운이 넘치는군요? 일학년생들만 모인 것이긴 하지만, 이런 청죽의 모습은 처음 보는 거 같습니다.”
“못난 거지가 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 녀석들이 알아서 저리 하는 것입니다. 숭어가 뛰면 망둥어도 뛴다고 언가놈 아니 언용운이라는 녀석이 펄떡거리니 다들 펄떡거리고는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언용운 그 아이가 청죽의 자치 부회장을 맡았다지요?”
한데, 여기서 향란관의 사감을 담당하고 있는 창량이 혀를 차고 나섰다.
“쯧.”
그에 노삼이 눈썹을 뒤틀며 입을 열었다.
“뭐지 그 쯧은?”
“펄떡이는 숭어가 아니라, 강바닥을 엉망으로 만드는 가물치겠지요. 듣자 하니 선배들과 주먹다짐을 했다 하던데, 그야말로 안하무인인 녀석 아닙니까? 그런 놈에게 자치 부회장이라는 감투까지 씌워놨으니, 쯧쯧. 청죽관의 앞날이 걱정이고 그로 인해 망종(亡種)의 기질이 다른 기숙사에도 역병처럼 옮겨붙을까 걱정입니다.”
“거 모가지는 뻣뻣한 놈이 말은 참 삐뚤게 하는구나?”
“하. 제 말의 어디가 삐뚤단 말씀입니까?”
“교묘하게 말장난을 하고 있지 않느냐. 창량 네 녀석이 말하는 사건의 순서는 언가 녀석이 자치 부회장이 된 것이 먼저다. 그러니 선배들과 주먹다짐을 한 게 아니라 하극상을 제압한 것이라고 해야지. 그리고 가물치니 그런 놈이니 망종이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지만 내심은 언가 녀석이 탐이 나는 게지?”
“하.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습니다. 천하의 망종을 제가 왜 탐을 낸단 말입니까?”
“근데 왜 그런 천하의 망종 놈에게 향란관 입사를 허락을 해줬을까? 내 언가 녀석에게 듣자 하니 향란관에서도 입사 제의가 왔었다던데?”
“흥.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똥간 청소도 아래로는 자치회의 차장부터 위로는 사감 교수까지 줄줄이 허락을 맡고 나야 시작하는 향란관이 입사 제안을 사감 교수 허락도 없이 했다고? 예끼 이 사람아. 그냥 언가 녀석이 탐이 나면 탐이 난다고 근데 빼앗겨서 천불이 난다고 솔직히 말해.”
“…또, 똥간? 유치하기 그지없군요. 체통을 좀 지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 선배?”
“그래, 나 유치하다. 그지 새끼 유치한 게 어제오늘 일이냐? 에베베베! 느그 기숙사에 언용운 없제?”
그때였다.
약발을 올려대는 노삼에 자기도 모르게 이를 까득 문 창량이 한마디를 뱉으려는 이때.
경혜사태가 입을 열었다.
“두 분 모두 그쯤 하세요. 생도들이 듣겠습니다. 각 기숙사의 명예를 걸고 경쟁하나 모두가 정무학관 생도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치르는 행사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총장님.”
“흠흠. 주의하겠습니다.”
“아무튼 청죽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노삼 교수께서는 계속 힘을 내서 신경을 써주세요.”
한데, 경혜 사태가 아까 하려다 창량과 노삼이 투닥이는 바람에 하지 못한 말로 그 끝을 맺으니, 어째 상황이 묘하게 노삼이 판정승을 거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예이. 그리하겠습니다.”
그에 노삼이 경혜사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 창량을 향해 빼꼼 혀를 내밀었고.
“……!”
창량의 어금니는 또 한번 갈려 나갔다.
* * *
“장차 백도무림을 이끌어나갈 젊은 영웅들의 헌앙한 모습을 보니 빈니의 마음이 든든하네요. 이제 내일 개강을 하게 되면 각자의 명예 그리고 각 기숙사의 명예를 걸고 경쟁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사대 기숙사의 생도 모두가 정무학관의 이름 아래에선 같은 동기생임을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명목상 연회의 개최자인 총장님의 훈화 말씀이 끝났다.
이어서 사대 기숙사의 사감 교수님들도 한 말씀씩을 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싸우지들 말고 재밌게들 놀아라’는 뜻을 담은 짤막한 말들이었고.
말을 마치자마자 각자 준비해온 술동이들을 내주시고는 교수님들은 자리들을 뜨셨다.
그렇게 교수님들이 자리를 비우시자, 연회 음식들이 날라져 들어왔는데.
그에 맞추어 네 기숙사의 자치회는 각자의 교수님들께 받은 술동이를 개봉했다.
- 흐음. 너희는 예상대로 죽엽청주로구나.
‘…참나. 그런 걸 예상을 해보고 계셨습니까?’
- 네 녀석이 기숙사마다 빚는 술이 다르다고만 하고 무엇이라 알려 주지는 않으니,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해본 것인데 무슨 사람을 술꾼 취급을 하는구나?! 내 재미로 삼을 게, 네놈 구경하는 것과 한 번씩 술맛을 조금 보는 것 정도거늘 그걸 타박을 하느냐?!
‘아니 제가 언제 타박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그러고 계셨냐 여쭌 건데요?’
- 어투가 그랬다! 분명히 그런 어투였느니라!
뭐, 아무튼.
이러고 있을 새가 없었다.
당옥기를 좀 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치회로서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나는 투덜거리시는 사부님을 뒤로하고 진경룡과 업무 분담을 시작했다.
“이거, 우리 애들한테 풀고 한 동이씩은 다른 기숙사에 선물하는 게 관례라면서요?”
“맞네. 근데 다른 기숙 관에 우리 술을 한 동이씩 가져다주고 그 친구들 거 받아와서 나눠주는 일은 내가 할 테니, 자치 부회장은 노삼 교수님이 주신 죽엽청주 우리 생도들에게 나눠주는 일만 좀 해주게 그것만 하고 자네도 좀 쉬어. 일학년한테 큰 짐을 맡겨서 미안했는데 너무 잘해줘서 감사하네.”
“별말씀을요. 뭐, 그렇게 할 일은 나누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럼.”
“그래그래.”
업무 분담은 금방 이루어졌다.
나는 언 동생들을 불러 모아 일거리를 배분했다.
“은 소저는 검후께 심결을 전수받고 있는 중이라 음주를 안 하시는 걸로 아는데.”
“맞아요.”
“미안하지만 기왕 그런 김에 생도들 좀 살펴주시오. 살피다가 과음하는 친구가 있으면 적절하게 제지해 주시고. 정현 너는 어때? 곡차 한잔하고 싶어?”
“저도 괜찮습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괜찮은 건 뭐야. 안 마신다는 걸로 해석할 테니까 너도 은 소저 옆에서 도와. 행사 마치고 나서 우리끼리 따로 한잔하던지.”
“예.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은하연과 정현에겐 최소한의 질서 유지를 맡겼고.
“소릉이랑 하성이는 노삼 교수님이 주신 술 애들 나눠줘. 그것만 하고 너네도 어울려서 쉬어.”
“넵! 명을 받들어 확실하게 아니 끝내주게 쉬도록 하겠습니다 용운 형님!”
“근데 저희만 그래도 되는 건가요?”
“…니네 둘이 반씩 섞였으면 좋겠다 진짜.”
“…….”
“…….”
“하성아 너무 신나지 마라. 그러다 사고 칠라.”
“…넵.”
“소릉아 니네 부서는 다른 생도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일이야. 다 떠나서 니들도 고생 많았는데 하루 정돈 쉬어야지.”
“아. 예!”
“아무튼 알아들었으면 각자 맡은 바 수행 시작.”
“넵!”
“옙!”
그렇게 교통정리를 마무리한 나는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다는 말을 은하연과 정현에게 남긴 뒤.
주사 고고에게 미리 부탁해둔 사천식 회과육 한 접시와 죽엽청주 한 병을 챙겨 향란관 생도들이 모여 앉아 있는 식탁으로 향했다.
* * *
맛 좋은 요리에 술까지 돌기 시작하니 회장의 분위기가 극도로 얼큰해져 갔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향란관 녀석들은 거무죽죽하게 각을 잡고 있었다.
‘진짜 얘네는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말 외에는 따로 할 말이 없다.’
당옥기는 그런 향란관 생도들과 똑같은 묵색 무복을 입고 있었지만, 끄트머리에 앉아 이질적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저럴 수밖에 없지.’
당옥기는 사실상 처음 보는 내게 같이 반말을 하자고 했을 정도로 나름 활달한 녀석이다.
‘당시에 당옥기가 경황이 없긴 했지만,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 제갈설지는 거머리같이 구는 와중에 예의만큼은 잘 지켰고.’
격식, 예의, 이런 것이 사실 썩 몸에 맞는 녀석이 아닌 것이다.
그런 녀석이 왜 향란관에 기어들어 갔냐면, 그건 당옥기의 아버지인 사천당가의 가주가 대대로 그래 왔듯 그녀도 향란관에 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당옥기의 오빠도 재학 중이고.’
당옥기도 내심 향란관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당가인들에게 당가주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하여 결국 당옥기는 향란관으로 가게 되었고.
본인의 성정과 사천당가라 하면 덮어놓고 겁을 집어먹는 강호인들의 풍토가 맞물리며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의 오라버니는 큰 도움이 안 된다.
‘원작에서는 그러는 중에 주인공인 정현과 접점이 생기지.’
물론, 원작의 정현이 걸은 길과 내가 걸어온 길은 모양이 전혀 다른 만큼 같은 방식으로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당옥기 사이에는 이미 ‘빚’이라는 접점이 있었고, 내겐 그 접점을 활용해 녀석을 혹하게 할 계획도 있었다.
‘그치만 내심으론 천독단을 바라고 있으니, 사실 순수한 우정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세상천지에 어떤 우정이 순수하기만 하겠나?
세상 자체에 때가 끼어 있으니 우정이라는 관계도 들여다보면 각자 바라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은하연과 나만 해도 친구비로 맺어진 우정이지만 잘만 돌아가잖아.’
나는 당옥기에게 내가 바라는 것을 받을 것이고, 당옥기가 바라는 것을 내가 줄 것이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닐까?
다 떠나서 향란관에 입사를 시켜놓고 저렇게 애가 혼자 겉돌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있는 향란관 녀석들보다는 적절한 친구비만 내면 진심으로 어울려주는 내가 나을 것이다.
그때였다.
내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당옥기가 앉아 있는 향란관의 식탁 끄트머리로 향해 가는 그때.
향란관의 일학년 생도들보다 확연히 진한 묵색 무복을 입은 사람 하나가 내 앞을 막아섰으니.
“자리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사사로이는 정현의 사숙이자, 향란관의 공보부장이며, 나와는 오가는 감정이 썩 곱지 않은 사내 운혁이었다.
“제대로 찾아온 것 맞습니다. 향란관 생도 중에 볼일이 있는 친구가 있거든요.”
“향란관 생도들과 외부인의 면회는 자치회나 층장들을 통해 면회 신청서를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야 이루어진다. 그런 보고는 받은 바 없고, 설령 제출했다 하더라도 너 같은 망나니가 향란관에 얼쩡거리는 것을 승인했을 임원도 없다.”
나름대로 향란관의 관칙을 읊고 있는 운혁이었으나, 나는 면회 신청서 어쩌고 할 때부터 그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아니.
아예 접시를 들고 있던 오른 손에 죽엽청주까지 옮겨 쥐곤 빈손이 된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펴 귀까지 후볐다.
그런 내 모습에 운혁이 미간을 극도로 좁히며 입을 열었다.
“뭐냐 그 태도는? 불학무식하여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냐?”
“애초에 질문이 불학무식하여 알아듣고 말고 할 소리가 아니던데요?”
“뭐라?”
“누군 학칙이랑 다른 기숙사 관칙들 안 훑어본 줄 아시나, 방금 하신 말씀은 당신네 기숙사 내에서 이루어지는 면회에 한하는 규정일 텐데요? 모든 곳에 적용되면 향란관 생도들은 수업 시간에도 마주칠 다른 기숙사 생도들에게 날마다 면회 신청서 써달라고 해야 되게요?”
“…지금과 수업은 사정이 다르다. 지금은 생도들이 자치회의 통제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니까.”
“아니 총장님께서 다들 잘 어울리라고 격려도 해주시고, 사감 교수님들도 술까지 내주셨는데 왜 새터라는 전통을 당신 마음대로 해석합니까?”
“…다, 당신?”
“그래요. 당신. 내내 존댓말을 해드리니까 아래로 보이나 본데, 나는 청죽관의 자치 부회장입니다. 어디서 공보부장 따리가.”
“…따, 따리?”
“비켜. 항의할 일 있으면 급 맞춰서 그쪽 자치 부회장이나 회장님 모시고 오던지, 그때 가서 대화할라니까!”
그렇게 운혁을 비켜 세운 나는 곧바로 당옥기 앞에 선 뒤.
가져온 사천식 회과육과 죽엽청주를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좀 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