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80화 (80/444)

제80화. 시장에 가면 (1)

이튿날 아침.

나는 언제나처럼 연무장에 나와 아침 수련을 시작했다.

아, 물론 이제 아침 수련은 이제 나와 언 동생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제안하고 사감 교수님인 노삼과 자치 회장인 경룡이 형이 동의했기에 아침 수련은 이제 청죽관 생도들의 일과가 되었다.

“청룡. 의무실 신세를 지고 있는 양금표 외 다섯 말고는 열외자 없습니다.”

“청봉. 무림맹에 파견 실습을 나가 있는 예해수 외엔 열외자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오금희부터 시작하죠. 선도부장.”

“예. 언 소협.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주욱! 오금희 시작!”

단상 위에서 솔선하여 동물의 모습을 딴 체조를 하며 백육십여 명의 청죽관 생도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으로 이 시간에 참여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일학년생들.’

그러니까 내 동기들은 정무학관 생활 자체가 처음이라 별 이견 없이 원래 해야 하는가 보다 하고 묵묵히 따랐다.

‘경룡이 형, 은 소저.’

타도 꼴찌를 온몸으로 외치고 있거나 청죽관을 바꿔 보겠다는 의지가 눈에서 불타는, 내심에서 우러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왜 이런 것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마지못해 이 자리에 나온 것 같은 사람도 있었다.

“내일모레 졸업할 내가 동물보나 하고 있어야 하나? 이 시각에 차라리 잠을 푹 자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끄응. 그러게 말이야, 동물보 잘한다고 학점을 잘 받는 것도 아니고, 무림맹이나 세가 쪽에 소개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앞의 두 집단은 논외로 하고.

불만을 가진 마지막 집단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혀를 차셨다.

- 진가 녀석부터 너까지 누구도 열외 없이 하고 있거늘. 동물보에서 사지 육신이 후들거릴 정도로 근골 단련이 부실하고, 오금희의 선이 지저분할 정도로 유연성이 부족한 녀석들이 잔말들이 많구나,

‘뭐, 몇 년 동안 습관이 되어버린 나태가 며칠 사이 씻겨 나갈 수는 없겠죠. 저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나왔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나는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을 떠올렸다.

‘근데 조치가 좀 필요해 보이기는 하네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벌써 보충 수업(물리)이 필요해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썩은 귤이나 사과가 상자 속에 들어 있으면 금세 옆의 것도 멍이 들어 썩어지고 만다.

청죽관이 한 상자의 귤이나 사과라면 저 선배들은 개중에 멍들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아직 내 주먹에 묻은 양금표의 피도 덜 식었거늘.’

아무튼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서 내 몸이 움직이려는 이때.

정현이 녀석이 조치가 필요해 보이는 양반들이 계신 곳으로 향하더니,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작고 사소한 것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정성이 되고 그 정성이 현저해져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그 감동은 변화를 만든다 했습니다.”

“…어. 선도부장? 드, 들렸나?”

“예. 잘 들렸습니다. 작은 일에도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스스로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용운 부회장부터가 솔선하여 그 말씀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데, 선배님들께서는 어찌 후배의 정성을 보시고도 그런 참담한 생각을 하셨고, 하시는 것으로 모자라 입 밖으로 내셨단 말입니까?”

“…그. 내가 실언을 했네.”

“예. 실언을 하셨습니다. 정성을 다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실언이 나오신 것이겠지요. 그렇게 지금의 다리 굽힘 정도는 전혀 최선이 아니십니다. 더 굽히실 수 있습니다. 더 굽히십시오.”

“이, 이렇게 말인가?”

“더. 더더더더더.”

“흐허어어억!”

“하시면서 따라 하십시오. 기차치곡 곡능유성(其次致曲 曲能有誠).”

“기, 기차치곡 곡능유성.”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자.”

“자,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자앜.”

음.

누가 선도부장을 시켰는지 참 잘 시켰군.

일 잘하네.

뭐,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아침 수련 시간은 구보를 거쳐 운기조식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다들 기혈을 다스려 내신 듯하니 금일 아침 수련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침 식사들 맛있게 하시고, 금일 미시(未時)에 가벼운 기량 점검이 있겠으니 외출계나 외박계를 낸 생도가 아니라면 필히 참석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훈련이 끝이 나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다가온 은하연이 한쪽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내게 말을 건넸다.

“어제 수련 끝나고 바로 나가신다고 하셨는데 아침 식사 안 하시고 나가시는 거죠?”

“그렇긴 한데. 거 입은 왜 가리고 말하는 거요?”

“다, 단내가 날까 봐서요.”

“상관없는데? 수련을 열심히 한다면 단내야 당연히 날 수도 있는 거지.”

“제가 안 괜찮아요! 아무튼 이거 받으세요.”

말과 함께 은하연은 돌돌 말린 양피지 하나와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양피지를 펴보면 이걸 왜 주는지 알 수 있겠지만, 당사자가 앞에 있으니 입으로 묻는 게 더 확인이 빨랐다.

“이게 뭐요?”

“어제 제가 전표만 딸랑 드렸던 것 같은데, 우선 양피지는 지도예요.”

말을 들어보며 지도를 펼쳐보니 제일 위에 쓰여 있는 로하약령시(老河藥令市)라는 이름 아래 각종 점포들과 경매장 그리고 한쪽 아래 안(安)이라는 표식이 되어 있는 점 하나가 보였다.

“오. 고맙소. 이 정도는 가서 알아보면 되겠다 생각을 했는데, 지도가 있으면 그러지 않아도 되니 훨씬 일이 수월해지겠소. 근데 여기 ‘안’ 자가 쓰인 지점은 뭐요?”

“로하구의 약재 시장은 장강 이북이라 저희 상단의 점포가 없긴 한데, 앞으로 세력을 넓히려고 눈여겨 봐둔 곳이라 제가 마련해둔 안가(安家)가 있어요.”

그렇다면 열쇠는 그 안가의 자물쇠를 여는 용인 모양이었다.

“안가면 변복이나 역용에 필요한 물품 같은 것도 있겠구려?”

“예. 의복이랑 이것저것 있을 거예요. 신분을 숨기시고 경매에 참여하실 생각이시면 사용하시고, 안채에 서랍을 열어보면 철전이든 전낭도 있을 텐데 자잘한 셈을 치를 때 쓰세요.”

정무학관의 생도 신분으로 이곳저곳 휘젓고 다니면 눈에 너무 띌 것이다.

안 그래도 나가는 길에 단강제일객잔에 들러서 변복을 할 생각이었는데, 은하연도 내가 내다본 수를 나름대로 엿본 모양이었다.

“요긴하게 쓰도록 하지. 더 필요한 것은 없나? 당호로만 사다 주면 되겠소?”

“음. 그럼 하성이도 데려가시는 김에 청죽관의 양호실에서 사용할 금창약도 조금 구해다 주실 수 있을까요?”

“재고가 없소?”

“조금 있긴 한데, 앞으로를 생각하면 좀 간당간당하네요?”

“내가 살펴본 장부에는 넉넉하던데?”

“양금표 그 인간이 알뜰히도 해 먹었더라고요, 서류상으로는 있다고 돼 있는데 실제로는 없어요. 행정처에 주문을 넣어놨는데 절차가 있어서 시일이 좀 걸린다고 하네요. 금창약이랑 공자의 안목이야 믿을 만하니 보시다 앞으로 필요해 보이는 물품이 보이면 겸사겸사 사 오세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금창약이라고 해봐야 가루약이라 부피도 근수도 얼마 나가지 않았고, 사실상 꼭 구해야 하는 물건은 혈수만독주 한 쌍뿐이니 하성이 녀석이 짊어져야 할 등짐에 그거 추가할 공간이 없지는 않았다.

“근데, 나는 학관생 신분을 감추고 약재 시장에 다녀올 것이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소?”

“예. 청죽관의 공금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지요. 제 사재에서 나가는 것으로 할 거예요.”

단지 우려되는 것은 은하연의 태도였다.

‘은하연이 사재를 턴다. 라.’

원작의 은하연은 쉬이 사재를 터는 녀석이 아니었다.

작중에서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귀신같이 나타나 큰손 인증을 하긴 했지만, 그 행동들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음? 너무 어려운 부탁이었을까요?”

“아니, 부탁이 어려운 게 아니라. 철전 한 푼도 철저하게 쓴다는 휘상의 천금매소 은하연이 사재를 너무 쉽게 여는 것 같아서.”

“공자의 입에서 나오는 천금매소 소리는 진짜 부끄럽네요. 근데 제가 주머니를 헤프게 여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소?”

“예. 또 이건 투자니까요. 지금 천하에서 가장 저평가된 투자처가 바로 청죽관이에요. 언 공자가 계시는 이상 청죽은 반드시 비상할 테죠. 언 공자께서 멱을 틀어쥐고서라도 청죽을 반석 위로 끌어다 놓으실 테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언 공자를 믿고 청죽관에 하는 투자인 거죠.”

* * *

은하연에게서 지도와 열쇠를 받은 나는 등목을 하며 소릉이 녀석에게 해야 할 일을 마지막으로 주지시켰다.

“소릉아. 오늘 점심 먹고 나서 기량 점검 있다는 거 각층 돌면서 선배님들이랑 동기들한테 마지막으로 한 번 공지해라.”

“예! 언 형과 은형도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래.”

그렇게 자치 부회장으로서의 업무를 끝낸 나는 서둘러 환복을 마친 뒤, 하성이 녀석과 함께 정무학관의 정문으로 향했다.

이쪽은 이래저래 할 일이 있었기에 시간을 딱 맞춰 도착한 꼴이 되었는데.

“오. 당 소저 요즘 자주 뵙습니다? 당 소저도 함께 가십니까?”

“그, 은 소협. 근데 존댓말 안 하면 안 되나… 요? 저번에 밥 먹던 자리에서 내가, 아니 제가 다음에 볼 때는 편하게 하자고 했던 거 같은데… 요?”

“용운 형님과 말을 터놓고 하는 사이이신데 제가 반말을 하면 족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이도 위이신 것으로 알고요.”

“예의 바른 척하기는. 하성이 너 친누나한테도 반말하던 시절이 있었잖아? 반말만 했냐 아주 담그려고….”

“에헤이. 형님도 참. 그런 시절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이죠. 그, 당 소저 방금도 말씀하셨듯 저번에 뵈었을 때 편하게 하자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이게 편합니다. 소저 소리만 누님으로 바꾸겠습니다. 저는 저 편한 대로 할 테니 누님은 누님이 편하실 대로 될 것 같은데요?”

“그, 그래. 그럼 나 정말로 말 편하게 한다?”

그렇게 은하성과 호칭 정리를 끝낸 당옥기는 먼저 나온 것도 벼슬이라고 우쭐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니들 늦었다?!”

“늦게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오래 기다렸나?”

“…오,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는데?”

“오래 기다리지를 않았으면 늦었다는 말이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때였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 입 밖으로 나온 이때.

정문을 지키고 있던 수위부의 무관 선배님이 나를 알아보고 알은체를 해 오셨다.

“당금수석이시구만?”

그에 얼굴을 유심히 보니 이름은 몰라도 면식은 있는 선배님이셨다.

“저번에 하류박 놈들이 객잔 거리에 들었을 때 신고를 받고 나와주셨던 선배님이시군요?”

“허허. 통성명도 안 한 사이인데 기억력도 좋군. 그러니까 수석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 외출을 나가나 보지?”

“과찬이십니다. 예. 바깥 구경 좀 하고 오려고 합니다.”

“잘 다녀오게, 근데 친구가 좀 오래 기다리던데? 어디 보자, 내가 교대할 때 왔으니까 묘시 중반쯤….”

“서, 선배님?!”

“음? 아, 내가 쓸데없는 잡소리가 길었군. 미안하네. 반갑다 보니. 그럼 수고들 하게.”

“선배님께서도 수고해 주십시오.”

“수고하십쇼!”

그것으로 의문은 해소되었다.

묘시 중반쯤에 당옥기가 나와 있었으면 대략 한 시간을 기다린 것이었다.

“원래 나도 약속 시간보다 여유 있게 나오는 사람인데, 이것저것 처리할 일도 있고 하다 보니, 너무 딱 맞춰서 왔다. 다음부터는 그거까지 고려해서 약속 시간을 정하든 하마.”

“향란관에 남아 있으면 귀찮게 구는 사람이 생길 것 같아서 통금 시간 풀리자마자 바로 나왔는데, 괜히 길이 엇갈릴까 봐 여기 있었을 뿐이야.”

그렇게 당옥기가 주절주절 물어보지도 않은 일찍 나와 있던 연유를 늘어놓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일순 마음의 여유를 찾았는지.

당옥기가 홀로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석류랑 홍옥이를 사줄 돈은 충분하겠지?”

그런 당옥기의 음성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의아함을 던져오셨다.

- 석류? 홍옥? 제자야 네가 사주기로 했던 것 독거미 아니더냐?

‘맞습니다.’

- …그럼 석류니 홍옥이니 하는걸 독거미 이름이라고 붙인 게냐?

‘…그런가 본데요?’

- 유유상종이라더니, 참 네 주변엔 희한한 녀석들만 모이는구나.

‘……?’

뭐, 아무튼.

“그새 이름까지 붙였냐?”

“응. 설레서 잠도 못 잤어. 거짓말로 속인 거면 너는 오늘부터 당문의 원수다?!”

독거미한테 석류니, 홍옥이니 이름까지 붙여가며 잠까지 설쳤다는 당옥기에게, 나는 천 냥짜리 전표 뭉치를 꺼내 부채처럼 펼쳐 보여주었다.

“……?!”

당옥기가 팔짱을 유지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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