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시장에 가면 (2)
그렇게 정무학관의 정문을 통과한 우리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늦은 꼴이다.’
혈수만독주가 이 시기에 매물로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매물이 거래되는 시각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서 혈수만독주를 구하는 경매가 열렸던 시점은 지긋한 오후이긴 했지만.’
하나 그건 지금 기준으로 일 년 뒤에 열릴 약재 시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은 당옥기가 돈이 없어 매물이 있는데도 못 샀다던 시점이니까.’
그러니 최대한 빨리 가서 탐문을 해보는 게 옳았다.
‘좀 전에 당옥기가 통금 시간이 풀리자마자 향란관을 뛰쳐나왔다고 했지.’
원작의 당옥기도 향란관에 정을 붙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니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의 행보보다 한 식경 정도 행보가 늦은 꼴이었다.
그 한 식경을 따라잡기 위해 나는 그야말로 날 듯이 걸음을 옮겼다.
‘곧잘들 따라오네.’
당옥기는 원작 소설의 독자들에게 ‘주인공 세대’라 불리는 녀석이자, 지금도 사천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 중 하나인 만큼 여유 있게 내 뒤를 따라왔다.
‘의외는 하성이 녀석이네.’
사실 당옥기는 애초에 무리 없이 따라붙을 것이라 봤고, 하성이 녀석이 너무 힘들어하면 속도를 좀 늦출 생각이었는데.
숨이 좀 쌕쌕거리고 입가에 거품이 생기고 있긴 했지만 아주 처지지는 않았다.
‘하긴, 내 밑에서 구르면서 약했던 기본 근골도 제법 다졌고. 정진 장학생에 선정되면서 받은 영단도 꿀꺽한 녀석이 이 정도는 따라와 줘야지.’
이 속도로 달리는 게 너무 오래 지속되면 분명히 퍼질 듯했지만, 하성이 녀석이 눈을 까뒤집기 전에 다행히 우리는 로하구에 닿을 수 있었다.
“…흠. 이 집인 거 같은데,”
한데 이 시대의 지도라는 것이 세세한 구석이 떨어지는지라, 약재 시장의 구획은 대충 알아볼 수 있었지만, 안가의 위치가 좀 애매했다.
그럴 게 안가라는 것은 진법의 묘리를 섞어 마련하는 게 보통인데, 이 경우엔 시장 곁에 자리 잡은 민가들 사이에 교묘하게 안가를 숨겨 놨기에 더욱 그랬다.
하여 잠시 지도를 해독하고 있는데, 당옥기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뭐 찾는데? 약재 시장은 저 언덕 너머 아냐?”
“안가(安家).”
“안가?”
“어, 은 소저 기억하지?”
“흐억. 학. 크허억. 카아악 퉤!”
“쟤네 누나.”
“기억하지! 누굴 붕어로 아나?! 저기 헉헉거리고 있는 하성이네 누나잖아!”
“사용하라고 일러 주더라고, 필요한 물건도 여기에 이미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따로 구하지 않았으니까 여기부터 들려야 해.”
“돈 있고, 사람 있으면 된 거 아냐? 또 필요한 게 있어?”
“그건 들어가서 말해줄게.”
그렇게 당옥기의 궁금증을 일축한 나는 곧바로 하성이 녀석을 불렀다.
“하성아.”
“예?!”
“숨 다 돌렸으면 여기 와서 지도 좀 봐봐. 너도 따지고 보면 은휘상단의 용혈 아니냐.”
“따지고 보면이라뇨. 용혈 그 자체인데요?!”
구시렁거리는 녀석에 나는 우둑우둑 목을 풀었다.
그러자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달려온 녀석이 내게서 지도를 받아 들었다.
“내가 보기엔 이 집 같은데 남의 집에 잘못 들어가면 안 되니까 네가 마지막으로 한번 봐봐.”
“음. 바로 보신 것 맞습니다. 가리키신 집 맞아요. 와, 근데 누님도 이 지도에 주석을 안 달아 놓으셨네, 용운 형님이라면 알아서 판단하실 거라고 본 걸까요? 아니 실제로 알아보시기는 했는데, 참 형님도 대단하지만, 누님도 누님이네요.”
우리는 그렇게 찾은 자그마한 민가의 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갔다.
한데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만한 규모의 집에는 잘 없는 뒷문이 보였다.
‘앞마당도 없는 집에 뒷마당이 있을 리는 없고 저기가 진짜 안가로 통하는 문이구만?’
여(呂) 자형 구조로 돼 있는 집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 하나를 더 열고 들어가니 우물이 있는 조그마한 정원까지 딸린 제법 큼지막한 안가가 나왔다.
나는 곧바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낯을 씻으며 하성이 녀석에게 할 일을 내렸다.
“하성아. 은 소저가 역용이랑 변복할 때 쓰는 물품이 어디 있다던데 그것 좀 찾아놔라.”
“뭐 좀 먹고 하면 안 됩니까? 공복에 개처럼 뛰어왔더니 배가 등가죽이랑 붙을 것 같습니다.”
“안 돼. 시간 없어.”
“…네.”
그때였다.
바빠 죽겠는데 밥 타령을 하는 하성이 녀석의 주장을 내가 단박에 거절한 이때.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혀를 차시며 입을 여셨다.
- 악덕이로다. 악덕이야. 악덕 업주 아니 악덕 의형을 만나 저 녀석도 고생이 참 많구나. 소도 밥은 먹여가며 일을 시키거늘…. 그러고 보니 내가 거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차라리 입관 시험에서 탈락을 했다면 휘주에서 밥은 먹고 살았을 것을 미안하구나 은가의 아해야….
‘…….’
그러고 보니 밥도 안 먹이긴 했다.
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사부님 주장에 오롯이 동의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성이 녀석은 제 기량을 십분 발휘해서 우리를 쫓아오느라 무리의 정도가 다를 터였다.
하여 나는 녀석의 기운을 북돋고자 입을 열었다.
“시장 가서 먹자. 거기 가면 맛있는 거 많이 팔 텐데 이런 데 있는 거라고 해봐야 쟁여놓은 육포 정도 아니냐?”
“오. 사주십니까?”
“사줄 것이다. 당 소저가.”
“내, 내가?”
- 그 정도는 네 녀석이 좀 내거라!
사부님도 참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옥기 너도 눈을 왜 그렇게 떠?
“내가 홍염이랑 석류도 사주고, 은가에서는 안가도 빌려주고, 또 짐꾼도 저렇게 데려와 줬으면 밥 정도는 당옥기 네가 사야지.”
“그, 그래. 내가 살게.”
* * *
역용과 변복을 위한 도구들이 준비된 곳은 아예 한 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변복을 하기 위해 옷을 고르는 나를 보며 하성이 녀석은 그러시는가 보다 하며 가만히 있었지만, 당옥기가 의문을 던졌다.
“아까 필요한 물건이라는 게 변복할 도구야? 근데 변복은 왜?”
“유비무환(有備無患) 아니냐. 혹시 모르잖아. 홍염이나 석류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탐을 내는 녀석이 붙을 수도 있고.”
“아까부터 홍염이라고 하는데 홍옥이야, 홍옥이랑 석류.”
“아무튼. 혹시라도 이런저런 시비가 붙을 일이 생기면 실력으로 해결하든 내빼든 정무학관의 생도라는 우리 신분은 감추는 게 좋지 않겠냐?”
그런 내 말에 당옥기의 아미가 잠시 좁혀졌다.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좁혀졌던 아미가 펴지는 데는 잠깐이면 충분했다.
“특히나 너희 기숙사의 풍을 생각해 봐라. 괜히 애먼 일에 엮였다간 벌점 오지게 먹을걸?”
“으. 인정. 이해했어. 그러면 지금 네가 쥐고 있는 묵색 장포 옆에 있는 남자색(藍紫色) 겉옷 좀 건네주라, 내가 좋아하는 색이야.”
“?”
“왜? 마음에 드는 색 입으면 안 돼?”
“아예 비단옷을 입으면 안 돼.”
“……? 어째서? 그러는 너는 비단옷을 고르고 있잖아?”
“생각을 해봐라. 홍염, 아니 홍옥이랑 석류를 살 정도의 재력에 우리 나이면 부잣집 자제라는 설정으로 가야 할 거 아니냐?”
“그건 그렇긴 하네….”
“그런 부잣집 자제가 이런 데 혼자 오겠냐고. 호위 무사 하나에 하인 하나는 기본으로 달고 오겠지.”
“알겠는데 왜 네가 부잣집 자제 역을 해야 하는데? 나도 그거 잘할 수 있어.”
퍽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당옥기 또한 명문가인 사천당가의 여식이니.
그녀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나는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꺼내 부채처럼 펼쳐 보여주었다.
그리고 때를 맞춰 하성이 녀석의 입도 열렸다.
“상계에선 돈 많은 사람이 형이고 누나고 오라버니고 하여간에 갑인 법이죠.”
“캬아아악!”
당옥기의 항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순순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씩씩거리며 비단옷이 있는 자리에서 물러난 그녀는 하성이 녀석에게 가서 ‘석두전도보’, 그러니까 ‘가위바위보’를 시도했다.
“석두, 전도, 보!”
“석두, 전도, 보!”
“!”
“?!”
“좋아쓰!”
그리고 졌다.
하녀 역 당첨이었다.
“느, 늦게 냈어! 은하성이 늦게 냈어!”
그에 떡락한 신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시합을 요청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옥하다 추기야.”
* * *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역할에 맞추어 변복과 간단한 역용을 했다.
역용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모습을 완벽하게 복제하기도 한다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저 학관생 신분을 숨기기 위함이라 간단했다.
그저 나는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하고 당옥기와 은하성은 흐리게 하면 됐으니까.
“오. 형님은 무복이 참 잘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인물이 훤칠하셔서 그런가 그렇게 각 잡고 꾸며 입으시니까 진짜 귀공자 같으시네요.”
“아부한다고 돌아가는 거 없다 하성아.”
“아부가 아닙니다. 당 소저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가 아니고. 아! 몰라! 왜 내가 제일 구린 역을 해야 하는 건데에?!”
“그만 받아들여라 당옥기. 네가 전주(錢主)였으면 내가 너를 아가씨로 모셨겠지. 그리고 석두전도보도 네가 먼저 하자고 한 거 아니냐?”
“씽.”
“근데 생각해 보니 이름을 안정했네, 기껏 변복을 해놓고. 당옥기, 언용운, 이래서야 말짱 꽝이지. 하성아.”
“예 형님.”
“너는 너희 집에서도 둘째고 맡은 역할도 두 번째니, 둘째 천간인 을에 둘째 지간인 축을 합쳐서 을축이라고 하자.”
“옙!”
“당옥기 너는 그냥 당이랑 비슷한 어감으로 단단이 어떠냐.”
“을긌쓰.”
“거, 이 악문 것 좀 풀고. 홍옥이랑 석류 생각해.”
“아까부터 두 분이서 홍옥 석류 이야기를 하시던데, 과일은 아닐 거고, 약재나 영단도 아닌 것 같고. 영물 같은 건가 보죠? 이름을 그렇게 붙인 거 보니 엄청 예쁘고 귀엽고 그런 녀석인가 봅니다?”
그때였다.
잘 나가다가 헛다리를 짚은 하성이 녀석의 오해를 잡아주려는 이때.
하녀역에 당첨된 뒤로 뭐 씹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당옥기가 생각만 해도 좋은지 피식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엄청. 예쁘지. 눈은 진짜 홍옥이나 석류석처럼 영롱한 붉은빛으로 빛나고, 털이 나 있는 등은 연한 매화 색인데, 쭉 빠진 다리는 진홍색이라 진짜 예뻐.”
“……? 그런 동물이 있습니까? 눈이 빨갛고 예쁘면 뭐, 토끼인가?”
당옥기는 상상 속의 혈수만독주를 만나러 가버리고, 하성이 녀석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것 같았다.
하나, 괜히 거미라고 알려줬다간 저 새는 바가지가 간신히 누그러뜨린 당옥기 앞에서 징그럽니 어쩌니 초를 칠 거 같았다.
나는 그냥 모르는 척을 하는 길을 택했다.
- 동상이몽. 아니 동보이몽이로구나.
뭐, 아무튼.
그렇게 새로운 차림으로 안가에서 나온 우리는 약재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지도에 나와 있는 경매장이었다.
자고로 이쪽에서 여럿이 가면 저쪽에서도 무슨 일이 생겼나 여럿이 나와보는 법.
나는 단단이가 된 당옥기와 을축이 된 하성이 녀석을 경매장에서 조금 떨어진 시장 골목에 떼어놓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풍류공자가 길을 잘못 든 척을 하며 경매장의 문지기에게 은근슬쩍 다가갔다.
그리고 혈수만독주의 매물이 있는지에 관해 물음을 던졌다.
“경매물품 중에 살아 있는 혈수만독주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왔는데, 있나?”
매물이 없다면 다음 주에 열리는 십언의 약재 시장에 매물이 있다는 소리니 여기서 오래 있을 필요가 없었다.
금창약만 사서 돌아가면 된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먼저 경매장에 들린 것이었는데.
“매물이 있고 없고는 제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공자님.”
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의 입에서 불가하단 말이 나왔다.
‘없다는 게 아니라 불가라고?’
시장 바닥에서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안 된다, 불가하다, 할 수 없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실 충분한 돈을 쥐여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은자 석 냥을 전낭에서 끄집어내 경매장의 입구를 지키고 선 지기에게 은근슬쩍 건넸다.
“에헤이, 이러시면 제가 곤란해지는데요 공자님.”
“자네가 곤란할 게 뭐 있나, 그저 지나가던 돈 많은 공자가 하루종일 다리도 못 굽히고 서 있는 자네 같은 사람의 노고를 알아봐서 나중에 곡차라도 한잔하라고 성의를 표한 것일 뿐인데. 나는 이제 저리로 갈 것일세.”
“어험. 으허험. 그럼 제가 입을 싹 닦아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요?”
“상관없네. 다만….”
“다만?”
“자네가 우연히 오늘 들어온 상품 중에 신기한 놈이 있어서 고놈 참 신기하더라 혼잣말을 할 수 있지는 않을까?”
“!”
“그럼 종복들을 떼놓고 혼자 싸돌아다니던 돈 많은 공자가 칠칠치 못하게 실수로 은자 두어 냥쯤 땅에 더 흘릴 수도 있고 말일세.”
“허험. 흐허험. 그러고 보니 시체를 파먹고 사는 것처럼 다리가 시뻘건 거미 두 마리가 아까 보니 있었지이? 그런 영약이나 영물 같은 것들이 본격적으로 거래되는 시각은 아마 유시 이후였나아아?!”
- 거 사람 구워삶는 솜씨가 닳고 닳은 장돌뱅이도 울고 가겠구나. 이러니 솜털도 덜 가신 동기생들이 당해낼 턱이 있나?!
나는 칭찬인지 아닌지 의도가 헷갈리는 사부님의 말씀을 들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무튼 확인 끝.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 말이 나한테는 적용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매물 있고, 돈도 있고, 얼마쯤에 거래되는지 아니까 경매장에서 우위를 점할 계획도 있다.
맡겨 놓은 혈수만독주를 유시에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혈수만독주는 머지않은 미래에 만독단으로 돌아오겠지.’
쓰흡.
거참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