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82화 (82/444)

제82화. 경매장의 큰손 (1)

‘유시면 시간이 제법 남았네.’

유시면 해가 슬슬 저물 시각인데, 지금은 해가 아직 중천까지도 가지 못한 오전이었다.

‘좋지 뭐.’

시간이 지나 버렸다면 모를까 남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성이 녀석 원대로 배도 좀 채우고, 은 소저가 부탁한 금창약도 미리 구매를 좀 하고 해도 시간은 넉넉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단단이가 된 당옥기와 을축으로 거듭난 하성이 녀석을 세워둔 시장 골목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있대?!”

그러자 당옥기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키웠는데, 무사 을축이라는 역할에 심각하게 몰입한 하성이 녀석이 그런 당옥기에게 꿀밤을 먹이며 입을 열었다.

“쓰흡. 단단아.”

“……?”

“도련님께 그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이냐?!”

“…하. 근데요 을. 축. 무사님은 분명 반말을 하면 족보가 어지러워진다 어쩐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잘만 하시네요?”

“그때랑 지금이랑 같으냐?! 혼이 나는 자리에서도 따지고 들다니 오늘 경을 한번 크게 쳐야겠구나!”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 생각을 전해오셨다.

- 으, 은가 놈 저거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저러는 것이냐? 저 녀석은 당가의 아해가 짓고 있는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면 하성이가 아니지 않을까요?

- 그건 또 그렇구나.

뭐, 아무튼.

적절한 개입이 필요했다.

“그쯤 해라.”

“도련님께서 그렇게 오냐오냐 하시니까 단단이 이것이 이렇게 버릇이 없는 것입니다. 도련님께서 제게 늘 하시던 말씀이 뭐셨습니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중요한 순간에 단단이가 실수하면 어찌합니까?”

그런데 듣고 보니 하성이 녀석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 중요한 순간이 없을 수도 있잖아… 요! 경매장에 매물이 없다면 다 헛짓이니까… 요! 십언시장에 가야 하는 거면 역할 새로 뽑자… 요!”

물론 당옥기의 생각도 이해는 됐다.

‘말 자체는 맞아.’

이곳에 혈수만독주의 매물이 없었다면 다음 주에 십언에서 열리는 시장에 가봐야 했을 테니, 변복이고 뭐고 다 헛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있지.’

때문에 교통정리는 어렵지 않았다.

“우선, 홍옥과 석류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

“오!”

“그러니까 단단이도 이제 역할에 충실하자.”

“마, 맡겨주세요. 도련님!”

“그리고 을축아.”

“예. 도련님!”

“…너는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냐?”

“…예?”

“강호에 나가선 당문과 척을 지지 말라는 오래된 말도 모르냐?”

“…그 말이야 알기는 하죠.”

“단단이가 저래 보여도 사천당문의 장중보옥 소리를 듣던 앤데, 그걸 꿀밤을 먹여버리네.”

“에이, 이거는 제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그런 건데요. 역할에 충실했던 이유는 그 석류랑….”

“홍옥이.”

“예. 홍옥이를 꼭 구하자는 뜻에서였고요. 단단이도 다 이해할 겁니다. 안 그러냐 단단아?”

“…….”

“…다, 단단아?”

그렇게 교통정리는 끝났다.

우쭐하며 나대던 하성이 녀석의 태도가 얌전해지며 겉으로 보기엔 묵직한 호위 무사의 태가 났고.

혈수만독주의 매물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나자, 당옥기의 태도도 분명해졌다.

“도련님. 이 집의 금창약은 값만 비싸고 질이 좋지 않네요. 두 번째 봤던 집으로 가시는 게 좋겠어요.”

“어디 웃사람들 말씀하는데 네깟 게 뭘 안다고 나서느냐?! 공자님! 아닙니다! 비싼 것은 다 그런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설마 하인에게 휘둘리시는 그런 주인은 아니시겠죠?”

“…….”

“…단단아. 화내면 안 된다? 홍옥이랑 석류 생각하거라.”

“…홍옥. 석류.”

“거, 주인장은 장사를 좀 양심적으로 하시오. 그 금창약은 안 살 거니까 원래 처박아놨던 곳에 다시 처박아 두시오. 운 좋은 줄 아시고.”

“참내! 그 종에 그 주인이로구만! 나도 안 팔아!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에라이 퉤퉤퉤!”

“…도련님. 주인장의 운은 안 좋은 걸로 해요. 단단이는 이 일을 잊지 않을래요.”

“…맘대로 해라.”

그런 녀석들을 이끌고 은하연이 부탁한 금창약도 구했고.

여기저기 벌여놓은 좌판 중 하나에서 적당히 소면을 시켜 배도 채웠다.

“그러고 보니 당호로도 사다 달라는 부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네. 아까 국수집 들어오다 보니까 모퉁이 너머에서 팔더만, 몇 개 사 와 봐.”

“옙. 도련님.”

그러다 문득 당호로를 사다 주기로 했던 약속이 기억나서 몇 개를 샀는데, 이걸 들고 경매장에 들어가는 건 모양이 심하게 빠지는 것 같았다.

“이건 그냥 우리 후식으로 하고, 자치회실에 넣어줄 거는 경매 끝나고 새로 사든지 하자.”

“예. 도련님”

“넵.”

“음. 맛은 좋네.”

그러고도 시간은 남았다.

우리는 당호로에 꽂혀 있는 설당발린 산사나무 열매를 하나씩 빼먹어 가며 시장 구경을 시작했다.

구경거리야 널려 있었다.

값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그럭저럭 볼만했고, 장이 들어서면 꼭 한편에 있는 차력사로 분한 하급 무사들.

“이 환단이 보이십니까 여러분?! 무당산에서 오 년 숭산에서 오 년 아미산에서 오 년 저 멀리 보타산에서 오 년 그 고된 시간 끝에 깨달음을 얻어 빚어낸 이 환단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코 흘리는 아이가 먹으면 근골이 장사가 되고, 배가 아픈 부인이 먹으면 씻은 듯이 낫고, 살갗이 모래처럼 변하는 자는 펴 발라도 좋고, 열이 올라 오늘내일하는 노인도 기운을 차리는 용봉대붕기린단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만병통치약을 단돈 철전 석 냥에 드리겠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날이 아닙니다!”

그리고 약장수 같은 자들도 있었다.

“…도련님 저거 완전 사기꾼 아닙니까? 제 놈이 무당이랑 숭산은 그래 어떻게 들어갔다 쳐도, 금남의 구역인 아미랑 보타산은 어떻게 들어갔단 말입니까? 완전 혹세무민하는 사기꾼 같습니다. 그냥 둬도 됩니까?”

“되는 대로 사람들의 귀에 익은 명산들을 읊은 거겠지. 일단 약부터 보고, 단단아 환약은 어때.”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게 어성초(魚腥草)를 비롯해서 해독 작용과 진통 작용을 하는 흔한 약초들을 잘 섞었네요. 평범한 아이가 이걸 먹는다고 근골이 장사가 되지는 않겠지만. 다른 약효는 놀랍게도 영 틀린 말은 아닌데요?”

“그럼 내버려 두자, 약효가 거짓이 아니라면 앞의 호들갑은 손님을 끄는 방식이겠지.”

뭐, 그렇게 시장 구경을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많이 기울었고.

그에 장터 곳곳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놓여 있는 해시계의 그림자가 유시를 가리켜 갔다.

맡겨 놓은 혈수만독주를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슬슬 경매장에 들어가 있자.”

* * *

미리 문지기에 약을 쳐놨기에 경매장에 입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헤헤. 오셨습니까 도련님.”

“수고가 많네.”

“울타리 안쪽에 있는 천막 중 가장 큰 놈으로 가보시면 됩니다요. 한데….”

“한데?”

“동반할 수행원은 한 명까지만 허락됩니다요.”

“한 명?”

“예. 장내에 수용 인원 자체에 제한이 있기도 하고, 또 제한을 두지 않았던 시절에 패거리를 잔뜩 이끌고 온 자들이 패를 믿고 개판을 벌이기도 했어서 규칙이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그랬다.

다만 제갈설지가 간단한 꾀를 내서 주인공 세대가 두 명씩 패를 갈라 이인 일조로 들어갔다.

‘경매가가 생각 외로 치솟자 은하연의 조가 해결하게 됐었고.’

뭐, 누굴 데려갈지를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혈수만독주가 싱싱한지, 음 먹을 것도 아닌데 싱싱은 아닌가? 건강도 좀 뭔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건강이든 싱싱이든 혈수만독주의 상태를 확인하려면 당옥기를 데려가는 게 맞았다.

복장은 하성이 녀석이 호위 무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일신에 지닌 무위도 당옥기 쪽이 위였다.

결정은 바로 이루어졌다.

“단단이가 따라오너라.”

“예. 도련님.”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눈이 보석같이 빛난다는 홍옥과 석류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 단단아 도련님 잘 모셔라.”

“…예.”

그렇게 경매장의 장내에 입장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경매장을 관리하는 자들 중 가장 끗발이 후달려 보이는 자가 바쁘게 움직이며 새롭게 자리를 채운 사람들에게 입찰에 사용하는 번호가 쓰인 하얀 푯말을 나눠주는가 싶더니.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로하구 약령시의 경매의 꽃인 금본 경매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물품들의 진위 여부를 상인회에서 보증하고 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매물만을 소개하는 자리인 만큼, 앞서 있던 경매와는 달리 화폐의 기준은 통용되는 정량의 금자를 기본으로 할 것이니 이점 반드시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 서글서글하게 생긴 중년인이 걸어 나와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이더니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첫 번째 상품입니다.”

“오오오오.”

“푸르스름한 환단의 색을 보고 한눈에 알아보시는 분도 계시는군요. 이 환단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황보세가의 천왕오행단입니다. 무림인이 섭취하면 이십 년 내력을 얻을 수 있고, 평범한 사람이 섭취하면 무병장수를 한다고 알려진, 저 경매장 밖의 떠돌이 약장수가 팔아 재끼는 싸구려 약초 뭉치와는 격이 다른 진짜배기 영단이지요. 자 그럼 천 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명문세가의 이름이 붙은 영단이라 하면 보통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하나,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입찰 의사를 밝히는 푯말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게 왜 여기에 나와 있냐 싶은 거지.’

나도 같은 생각이고.

“왜 저게 밖으로 나돌고 있는 걸까요? 도련님?”

“글쎄다.”

당옥기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장내의 분위기를 읽은 것일까?

“허허. 이 물건의 진위가 의심스러우신 모양이군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떠돌이 상행단이 아닙니다. 가품을 내놓았을 경우엔 저를 비롯한 책임자가 손목을 내놓음과 동시에 세 배의 값을 물어드릴 것입니다.”

반응이 이럴 줄 몰랐던 진행자의 입이 바쁘게 열렸다.

“또 저희 상인회는 근처에 있는 제갈세가와 정무학관 나아가 무림맹과 이런저런 약재를 공급하며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천왕오행단은 그런 관계 속에 입찰을 받은 것으로,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만 황보세가의 아드님이 어떠한 사고를 치셨고, 그 과정에서 몹쓸 병에 걸리셔서 수습비나 치료비가 필요하여 황보가문의 안주인께서 내놓으셨다 들었습니다.”

진행자의 설명에 머릿속엔 바로 황보준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푯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금시초문이라 이거지.’

기준으로 삼은 화폐가 금자인 만큼 이곳에 모인 자들은 대부분 상인 혹은 부호 혹은 각 지역에서 방귀깨나 뀌는 명가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보통 세상 돌아가는 일에 밝다 자부하는 자들이었다.

‘귀를 열고 산다는 그 자부심이 역으로 작용하는 거지.’

저런 사건은 들은 바가 없으니 신뢰할 수 없다는 태도들인데.

황보준 사건은 애초에 들을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무림맹과 정무학관이 기를 쓰고 덮었고, 사건에 자식이 연루된 가문들도 기를 쓰고 덮은 사건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오직 나만 아는 사건이었다.

“그, 그럼 구백 냥으로 값을 내리겠습니다.”

나는 비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참지 않고 있다가.

최초에 천 냥이었던 가격이.

“팔백! 팔백 냥입니다! 팔백 냥 없으십니까?!”

내리고 내려.

더 내렸다간 위험을 감수하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기 바로 직전이 됐을 때.

“육백 냥! 육백 냥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털어놓겠습니다. 저희가 이걸 매입할 때 지출한 대금이 육백오십 냥이었습니다!”

은근슬쩍 푯말을 들어 올렸다.

내 푯말을 보자마자 몸이 달아 있던 진행자는 급히 입을 열었다.

“이백십사 번 공자님! 낙찰! 낙찰입니다!!!”

문득 보준이는 사실 움직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아름다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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