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경매장의 큰손 (2)
호기롭게 내세웠던 첫 상품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자, 경매의 주최 측에 비상이 걸렸는지, 전반적인 경매의 시작가가 낮춰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번 상품은 북해빙궁을 원산지로 하는 설원천궁(雪原川芎)의 전초 예순 근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황하 이남에서는 취급하기가 극히 어려운 귀한 약초입니다. 시작가는 단돈 서른 냥, 서른 냥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사실 나 혼자 이 경매장을 찾았다면 시작가가 낮춰진 것인지 어떤지 몰랐을 것이다.
원작에 자잘한 영초들의 시세까지 나온 것은 아니고, 그런 가격들까지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을 정도로 내가 한가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도련님 저거 엄청 싼데요?”
“싸다고?”
하지만 내겐 단단이로 분한 당옥기가 있었다.
“예 도련님. 소녀 상계가 돌아가는 사정은 잘 모르지만, 약재 가격은 빠삭해요. 저건 지금 사서 다음 주에 열리는 십언장에서 되팔기만 해도 이익일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에요.”
“흠. 그래?”
“네. 이파리가 싱싱한 게 운송과 보관이 정말 잘됐네요. 되팔아도 충분히 이문이 남을 것이고, 아니면 조제(調劑) 과정을 거쳐서 미리 사셨던 금창약처럼 사용하실 수도 있을걸요.”
“아까 산 금창약처럼?”
“그만한 양의 금창약을 혼자 다 쓰실 리는 없고 청ㅈ… 아니 가솔들을 생각해서 구매하신 거 아닌가요?”
“그야 그렇지.”
“설원천궁으로 조제한 약은 해열 기능이 탁월하고 아직 한서불침에 이르지 못한 자가 여름에 복용하면 더위도 몰아낼 수 있어요.”
약학이나 본초학에 관해선 당옥기의 말이 틀릴 리는 없다.
해열과 피서의 효능을 가진 약초라면 평시는 물론이고 이래저래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단단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곧바로 푯말을 들어 올려 입찰에 들어갔다.
“이백십사 번 공자님께서 서른 냥에서 입찰해 오셨습니다! 서른한 냥. 서른한 냥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이백십사 번 공자님께 낙찰! 낙찰입니다!”
재밌는 건 그렇게 시작가 낮아졌음에도 오히려 경매장의 분위기는 침체가 됐다는 것이었다.
그 역설적인 상황에 장내의 상황을 내 허리춤에서 지켜보고 계시던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저 목청 좋은 진행자 녀석이 로하구 약령시 경매의 꽃인 금본 경매니 어쩌니 소리를 하더니만, 어찌 이리 입찰하는 자가 드문 것이냐? 앉아 있는 놈들이 다 구경하러 온 구경꾼인가?
‘구경꾼은 아닐 겁니다. 애초에 사람 자체를 가려 받고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촉금이라 불리는 고급 비단옷을 입은 데다 은자 다섯 냥쯤은 이야기값으로 베풀 수 있는 귀공자인 척을 해서 들어와 앉아 있는 거고요.’
- 한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침체가 된 것이냐. 당가의 아해가 재잘거리는 말을 들어보니 가격도 헐한 것 같은데?
‘뭐, 의심암귀라고나 할까요?’
평생 검에만 몰두했던 사부님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시는 모양이었지만,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나는 경매장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침체됐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황보세가의 영단에서 비롯된 의심이 상인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어 버린 거지.’
맨 처음 나온 매물부터 의심스럽기 그지없는데, 나오는 물품마다 가격들이 시세보다 저렴하니 되레 더 큰 의심이 드는 것이다.
오늘 나온 물건들 잘못 삼켰다가 탈 나는 거 아닌가?
전반적인 약재들의 가격이 내려갈 사건이 일어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은 금을 쥐고 있다가 다음 주에 열리는 십언의 약령시에서 매입하는 게 나을 것이다.
관심법을 익힌 것도 아니고 사람 속을 정확히 들여다볼 방법은 없지만 아마도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을까?
뭐, 아무튼.
경쟁자들의 마음속에 의심으로 빚어진 귀신들이 들어앉은 현상은 나로서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경쟁자가 없으면 나야 좋지.’
나는 그렇게 침체된 경매장의 분위기 속에서 당옥기의 조언을 들어가며.
“낙찰! 낙찰입니다!”
거의 땅을 짚고 헤엄을 치듯 개꿀 매물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이번에도 이백십사 번 공자님께 낙찰입니다.”
어찌나 푯말을 많이 들어 올렸는지.
오른 어깨 근육이 부드럽게 풀리고, 당옥기가 아미를 좁히며 걱정을 해올 정도.
“…저기 도련님.”
“왜 그러느냐.”
“석류랑 홍옥이는 아직 매물로 나오지 않았다는 거 잊지 않으셨죠…? 돈 다 쓰시면 안 돼요?”
“약재값만 빠삭하지, 융통성이 없구나, 단단아 내가 네게 보여줬던 전표의 액수에서 지금 내가 쓴 돈을 빼보거라.”
“…아?!”
“한참 남았지? 그리고 경매장 분위기를 봐라, 장담하건대 석류랑 홍옥이도 시세보다 싸게 나올 것이다.”
그때였다.
그렇게 좁혀진 당옥기의 아미를 펴고 있는데.
“반 다경만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소피를 보실 분들은 소피를 보고 오시고, 바람을 쐬실 분들은 바람을 좀 쐬고 다시 이 자리에 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경매의 주최 측이 잠시 휴장을 선언하는가 싶더니.
진행을 맡았던 목청 좋은 중년인이 제법 날카로운 기도를 내뿜는 호위 무사를 달고 와 내게 말을 걸었다.
“공자님. 잠시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중년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중했다. 하나 그 의도는 협박에 가까웠다.
‘아, 협박은 통해야 협박이니 협박이라고 하기는 좀 그런가?’
그럴게, 압박하려고 데려온 무사들의 기도가 날카롭긴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내 상대가 아니었다.
‘기도도 못 감추는 녀석들 수준으론 나는커녕 밖에 있을 하성이 녀석의 상대도 되지 않지.’
아무튼 제 놈들이 마련한 진실의 방으로 가자는 의도가 너무 뻔해서 확 엎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일순 머릿속에 스쳤는데, 당옥기도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친 모양인지.
언제 저런 건 챙겼는지 모를 날이 시커먼 단도를 하나 빼 들고 입을 열었다.
“도련님?”
하지만 그녀의 음성에 나는 오히려 마음을 고쳐먹었다.
‘혈수만독주를 아직 손에 넣지 못했어.’
게다가 휴장을 했다 하나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 많았다.
‘변복에 역용까지 하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 일을 크게 벌렸다간 감당하기 피곤한 일이 벌어질 수가 있었다
‘깽판을 쳐도 저놈들이 마련해놓은 진실의 방에서 쳐주는 게 좋겠지.’
하여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럽시다.”
* * *
그렇게 본 경매장으로 사용되는 거대한 천막 한편에 딸려 있는 조그마한 천막으로 자리를 옮기니.
경매의 진행자를 맡았던 중년인의 입이 재차 열렸다.
“송구합니다 공자님. 소인은 허임생이라 합니다.”
나는 귀를 후비며 중년인의 말을 듣다가.
“공자님을 이렇게 누추한 곳으로 뫼신 이유는….”
적절한 순간에 끊고 나섰다.
“내 지불 능력을 의심하는 거겠지.”
“하이고. 송구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저희가 경매에 참여하는 분들의 신원 확인을 철저하게 하는데, 문지기 녀석이 그만 공자님의 행색만 보고 통과시킨 모양입니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낙찰받은 품목이 너무 많으니까.’
금본 경매에서 현재까지 나온 물품 중 삼 할 가까이가 내게 떨어졌는데, 저 양반들 입장에서 만약 내가 그냥 옷만 잘 빼입은 사기꾼이면 안 그래도 침체된 오늘 경매가 완전히 망하는 것이었다.
“저희들의 무례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어느 댁의 누구신지를 여쭙고자 합니다.”
물론, 이해가 간다는 것은 녀석들의 뜻대로 해주겠다는 것도, 이 일을 그냥 넘어가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누군지 말해주면?”
귀를 후비던 손가락을 후- 하고 불어 재낀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당할 수 있나?”
그리고 품 안에서 만금전장의 전표를 천천히 한 장씩 꺼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그렇게 천 냥짜리 전표가 줄줄이 나오자, 허임생이라는 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 표정을 확인한 나는 순식간에 낯빛을 바꾼 뒤.
내보였던 전표를 모조리 품에 갈무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 좋게 돈 쓰러 왔는데 기분 잡쳤군. 가자 단단아.”
내가 이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면, 몸이 달은 허임생이 나를 잡든 우두커니 선 장내 호위 중 하나가 사기로 한 물건값은 놓고 가라 으름장을 놓든 둘 중 하나는 일어나리라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후자의 일이 일어났다.
“멈추시오.”
장내 호위 중 하나가 내 어깨를 틀어쥐려 한 것이다.
하나 녀석의 동작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낙찰받은 물건값은 놓고 가얒… 켘.”
단단이로 분한 당옥기의 손이 매섭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특기인 독은 쓰지도 않았다.
파팍!
합이라고 부르기도 뭣할 정도로 단 두 수만에 정리가 될 실력 차가 나고 있었으니까.
“도련님 몸에 손대지 마라.”
그때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장내 호위 중 하나가 거품을 물고 쓰러진 그때.
허임생이라는 자가 옆에 서 있던 남은 장내 호위의 오금을 걷어차 무릎을 꿇리더니, 황송하다는 듯 자리에 납작 엎드리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따지려고 이리 불러 앉혀 겁박하더니, 이젠 부복을 하는군.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리 부복을 하나?”
“저런 분을 하녀로 부리실 정도면 소인의 짧은 생각으로는 부, 북직예에서 오신 것이 아닐까 사료됩…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북직예면 기실 하북 일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 하북이라 일컫지 않고 콕 집어 북직예를 언급하며 말을 더듬는 것을 보아하니 나를 황가의 일원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북의 진주도 북직예에 속하니 틀린 말은 아니지.’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쪽에서 오해를 하는 거지 내가 황족을 사칭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일말의 가책 없이 비릿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 수 있었다.
“이보게, 죄송하다는 말로 모든 잘못이 무마된다면 세상에 관아는 왜 있고 무림맹은 또 왜 있겠나. 상인이라는 자가 보는 눈만 없는 줄 알았는데 염치도 없군.”
“…사, 살려 주십시오!”
“거, 사람 살벌하기는. 내가 자네를 죽이긴 왜 죽이나. 자네 눈엔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
그러고 있는데 허임생의 답은 들려오지 않고, 사부님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 충분히 그래 보이느니라.
‘?’
- 여즉 몰랐더냐? 면경을 좀 자주 들여다보도록 하거라.
그런 사부님의 음성은 한 귀로 흘리고.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하면, 무례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요?”
“그건 또 다른 문제지. 자네가 내 부탁 몇 가지를 들어주면 자네의 몰염치를 내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 가주도록 하지.”
“소, 소인이 어떻게 하면 염치가 있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입한 물건들 말이야….”
“엇! 무례를 범한 놈이 드릴 청은 아니지만, 청컨대 물건을 그냥 달라는 말씀은 말아 주십시오. 그걸 그냥 드리면 저희 놈들은 어차피 다 죽습니다.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어허.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아, 그냥 달라는 말씀 아니셨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풍기는 기운이 그러셔서 소인 놈이 지레 겁을 먹고 그만.”
허가 녀석의 말이 주절주절 늘어진다 싶었는데, 이쯤 하여 당옥기가 적의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도련님 말 끊지 마라 허임생.”
단단아.
이 도련님은 감동했다.
하기 싫다고 그렇게 입을 댓 발 내밀고 다니더니, 막상 하니까 잘하잖느냐?!
“죄,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런 당옥기의 음성에 허임생이 다시 한번 고개를 땅에 처박았고, 나는 짐짓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고 들어. 내가 무슨 강도도 아니고. 물건값은 그대로 줄 거야. 근데 자네들이 떼가는 수수료. 그거만 절반으로 하자고, 그 정도는 괜찮잖아?”
내 제안에 허임생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가 싶더니,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것만 해드리면 용서를 해주시는 겁니까?”
“한 가지 더, 원래는 물건을 더 사려고 했는데 기분이 완전히 잡쳐서 그럴 기분이 아니야. 그니까 원래 사려고 했던 물품 중에 하나만 이 자리에서 더 사서 떠날까 하는데 괜찮겠나.”
“그거라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수료를 절반으로 해달라고 하신 게 날강ㄷ….”
“강 뭐?”
“아, 아닙니다.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 말씀만 해주시면 여기 이 녀석에게 찾아오라고 하겠습니다.”
“혈수만독주. 살아 있는 혈수만독주 한 쌍.”
가져와.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