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상대할 수 있겠냐고? (2)
‘저놈이 불쌍하다는 말씀은 제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겠는데요?’
불초 제자 사부님의 말씀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 제자를 생각하셔서 하시는 말씀이시다 생각하기에, 무슨 소리를 하셔도 ‘나 참.’하며 넘기거나 못 들은 척하거나 하는 편인데.
‘해금방주 정봉진.’
저놈이 불쌍하다는 이야기는 빈말 혹은 장난으로라도 동의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사부님.
- …험험. 경매장을 알뜰히 털어먹고 난 이후로 네 녀석의 기분이 참 좋아 보였는데, 저 돼지 같은 놈과 그 떨거지들이 그 기분을 잡쳐놓길래, 곱게 돌아가지는 못하겠구나 싶어 말이 그리 나온 것이다.
‘알죠. 알죠.’
- 알기는 개뿔이! 그걸 아는 녀석이 백 년 만에 세상 구경을 하는 사부한테 면박을 주느냐, 에이이잉! 그래서 저놈들이 뭐 하는 놈이길래? 혼백에 음기가 말라붙어 나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사람깨나 잡은 놈들 같기는 하다만.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때였다.
내가 그렇게 해금방에 관한 설명을 사부님께 해드리려는 이때.
백 년 만에 세상 구경을 하는 사부님만큼은 아니지만, 저 험한 대파산맥 너머의 사천 땅에서 나고 자라 타지의 세세한 사정에 어두운 당가의 장중보옥이 소중하게 들고 있던 목함을 잠시 내려놓고 단도를 빼들며 앞으로 나서더니.
허리춤의 사부님과 꼭 같은 물음을 던졌다.
“해금방이 뭐 하는 놈들인데….”
나는 그런 당옥기와 검을 뽑고 선 하성이 녀석을 향해 빠르게 전음을 날렸다.
[일단 신분은 숨긴다.]
조금 전에 역할극은 그만하자고 말한 사람이 나였지만.
애초에 역할극을 준비한 게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기에,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런 내 말에 다시금 단단이로 돌아간 당옥기가 말미를 존대로 끝맺었다.
“…요?”
이어서 을축으로 돌아간 하성이 녀석도 해금방에 관해 한마디를 늘어놓았다.
“단단이 너는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해금방은 한마디로 말하면… 음. 염적(鹽賊)이다.”
하기야, 하성이 녀석이 저래 봬도 휘상의 우두머리인 은휘상단의 용혈이다.
그리고 휘상의 주력 품목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넷째도 소금이다.
‘다섯 번째가 미곡 여섯 번째가 장강을 통해 실어나르는 사천의 비단 정도 되려나?’
그런 집안의 자제였기에, 하성이 녀석도 해금방에 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염적이면 몰래 소금을 구워 파는 사람들이란 말인가요?”
하지만 하성이 녀석의 설명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사부님과 당옥기에게 이해시켜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소금이란 것이 나라에서 엄히 관리하는 품목이긴 하지만, 본디 백성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 상도가 있어서, 관가의 사람이라면 모를까 우리 같은 강호인들끼리는 몰래 소금을 조금 구워다 파는 정도로는 적(賊)자를 붙이지는 않지.”
“더한 짓도 했다는 말이네요. 도련님?”
“그래. 저놈들은 맑은 날엔 소금을 팔고 흐린 날엔 사람을 판다고 불리는 자들이다.”
“인신매매를 한다고요?”
“그래. 이렇다 할 대파가 없는 광동성과 복건성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놈들로 그 지방의 고아, 과부, 기녀, 그리고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과 노예 중 족히 삼 할은 저자들의 마수가 미친 사람들이라 들었다.”
본디 해적질을 하던 녀석들이라, 남해의 섬 중 어느 한 곳에 본진을 두고 있는데.
관에서는 의지가 없고.
무림맹에게는 대대적으로 남해를 뒤질 수단이 없고.
흑도 내에서는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놈들이라 스멀스멀 세력을 키운 것으로 원작에선 묘사된다.
- 한데 남해 인근에서 활동하는 놈들이 호북까지는 왜 기어 올라온 것이냐?
‘제가 알기론 혈수만독주를 구하러 온 것으로 압니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해금방을 정의하자.
자랑스럽게 자신이 해금방주임을 밝혔던 사내가 누런 이를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킬킬. 호북에선 내 위명을 아는 자가 드물 것이라 보았는데, 어떻게 아는 자가 있구나?! 그래 이 몸이 바로 남해에서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들고 다 큰 사내도 오줌을 지리게 만든다는 그 해금방의 방주 정봉진이다!”
그런 해금방주의 음성에, 하성이 녀석과 당옥기가 각각 검과 단도를 고쳐 잡았다.
그런데 당옥기 쪽은 단도를 든 오른손은 빗겨 세우고 왼손은 소매 자락과 함께 축 내린 특이한 자세였다.
아마도 내리고 있는 왼손의 소매 자락 속엔 독침을 빼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봉진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쯧쯧쯧. 허튼짓하려 하는구나. 아서라 아서. 호북땅이라 내 이름을 정말 듣기만 한 모양이구나. 손에 쥔 날붙이들을 내려놓거라. 네놈들은 안 아파서 좋고 나는 값을 많이 받을 수 있어 좋고. 기왕에 팔려 갈 몸들 생채기가 나지 않는 게 서로 좋지 않겠느냐?!”
그런 정봉진의 음성에 당옥기의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내가 나서 녀석이 몸을 날리는 것을 막았다.
그러자 녀석이 몸을 날리는 대신 입을 열었다.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까부는 것이냐?!”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이 당옥기에게 나름 인상적이었는지, 협박을 해보려는 모양이었는데.
국법과 정도니 하는 것을 밑닦개로 여기는 인간이길 포기한 녀석들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킬킬킬! 내 알 바가 아니니라! 몸에 걸친 비단옷을 벗기고 나면 팔다리 달린 상품이 되는 것이고, 정 걸쩍지근하다 싶으면 토막을 내서 남해 바다에 던져 버리면 출처 모를 고기밥이 되는 것이다!”
시시각각 해금방의 수하들이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나는 잠시 잠깐 생각에 들어갔다.
‘이 사태를 어찌 풀면 좋을까.’
정봉진과 해금방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해금방에 대해 잘 아는 이유는 원작에서도 혈수만독주를 구하러 가는 시점에 놈들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나는 놈들의 수준을 잘 알았다.
‘원작과 비교하면 난이도가 훨씬 낮아.’
물론, 원작과 비교하면 그쪽은 주인공 세대의 주역들이 모두 경매장에 왔었고 게다가 시점도 일 년 뒤라 개개인의 무위도 그쪽이 뛰어났다.
‘하지만 상황을 비교해보면?’
원작의 시점인 일 년 뒤에 혈수만독주를 노렸던 세력은 주인공 세대와 해금방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마교.’
‘마인 언용운’ 사건 이후로 마교가 슬슬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는데, 주인공 세대가 이 학년에 올라간 직후에 벌어지는 혈수만독주 매입 전에 그 마교도 위장한 신분으로 참전한다.
그리고 낙찰에 실패하자 본색을 드러내고 힘으로 빼앗으려 든다.
‘당시 정현과 아이들은 마교와 해금방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지.’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해금방 하나였다.
심지어 이쪽엔 해금방의 천적도 둘이나 있었다.
‘나 그리고 당옥기.’
조금 전에 흑도 내에서는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놈들이라 내버려 둔다고 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해금방 이 염적 놈들이 독염(毒鹽) 그러니까 독소금과 독물을 무기로 삼는 녀석들이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선 일련의 사건 끝에 천독단을 섭취해 천독불침지체를 이룬 정현 선에서 정리가 됐었지.’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었다.
원작의 정현과 누가 길고 누가 짧은지를 대보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선기나 도기와 거리가 먼 악인들이라면, 게다가 독만 믿고 개개인의 무위가 부족한 놈들이라면 나는 그야말로 놈들의 천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고려 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저래 봬도 저놈들이 흑도 내에선 제법 잔뼈가 굵은 방파란 말이지….’
애초에 살려 보내고 싶지도 않지만, 백번 양보해 살려 줄 테니 각자 갈 길 가자는 말을 해도 저쪽에서 코웃음을 칠 것이다.
자리를 피하자니 혈수만독주가 든 목함의 내구도 때문에 제대로 내달릴 수가 없다.
죽일 놈들이니 다 죽여 버리자니, 본거지에 있을 남은 해금방의 잔당들이나 그 이권을 탐내던 세력도 생각해야 했다.
흉수를 찾겠다고 들쑤시고 다니면 피곤해질 터였으니까.
‘어! 잠깐만…?’
그런데 이때.
내 뇌리에 단순하고도 명쾌한 해법이 스쳐 지나갔다.
‘정봉진의 말에 답이 있었네?’
저 자식이 나를 더러 토막을 내서 남해 바다에 던져 버리면 출처 모를 고기밥이 된다고 했지?
‘똑같이 해주면 되겠는데?’
물론 내 식대로.
* * *
내 식대로 해금방 놈들을 묻어 버리는 방법은 별거 아니었다.
‘파천십검의 초반 네 초식은 이 시대 사람들의 눈에 삼재검법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항룡장만 사용하지 않고, 놈들을 해치운 다음 잡기를 적절히 사용해 제 놈들끼리 싸운 것처럼 현장을 꾸며놓으면 됐다.
다만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었다.
‘하성이 녀석과 당옥기를 현장에서 떨어뜨려 놓아야 해.’
하성이 녀석은 남궁가의 분가 사람에서 검술을 배운 놈이라 검상에 뇌기(雷氣)가 남는 녀석이었고, 당옥기는 모든 공격과 방어에 사천당가라는 흔적이 남는 녀석이었다.
그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지만, 아무튼 떨어뜨려 놔야 했다.
뭐,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하성이 녀석이야 내가 죽어 하면 죽는 시늉까지는 하는 녀석이니 안가에 가 있으라 하면 갈 놈이고.’
문제는 당옥기 이 녀석인데….
“단단아.”
“네?”
이 녀석이 내 말을 순순히 들을 리가 없었다.
하녀 역할도 하기 싫다고 한참을 툴툴거린 녀석이었고, 당문의 사람은 은원이 확실하다 어쩐다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녀석이 안가로 가라는 말에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
‘시간만 충분해도 대화를 해보겠는데….’
시간이 없었다.
당장에야 주변에 우리와 해금방 놈들밖에 없었지만, 시간을 지체하면 하다못해 행상이라도 나타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볼 만했다.
당옥기는 나를 완전히 믿고 있기에 나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상황이었고.
마침 내겐 면죄부가 세 장이 있었으니까.
“너 아까 내가 너를 화나게 하더라도 세 번은 봐준다고 그랬지?”
“…그랬죠? 근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그거 지금 한 번 사용하마.”
말과 동시에 나는 당옥기의 뒷목을 내려쳐 제대로 맞으면 기절하는 경혈을 자극했다.
팍-
“?!”
그에 당옥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마지막으로 통나무처럼 넘어갔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받아 든 뒤.
똑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하성이 녀석에게 입을 열었다.
“을축. 짊어진 거 내려놓고 여기 단단이만 데리고 안가로 가 있어라. 시간이 없으니 질문은 받지 않겠다.”
“예. 도련님.”
질문이 많은 눈빛이긴 했지만, 예상대로 하성이 녀석은 군말 없이 내게서 당옥기를 받아 들었고, 그러자마자 몸을 돌려 언덕 위를 향해 내달렸다.
그런 하성이 녀석의 움직임에 곧바로 정봉진의 입에서 노성이 쏟아져 나왔다.
“뭣들 하느냐?! 상품이 두 개나 도망가지 않느냐!”
놈의 노성에 해금방의 흑의인 중 네 놈 정도가 하성이 녀석의 뒤를 쫓으려 땅을 박찼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사부님.’
부드럽게 회한을 잡아 뽑은 나는 비영파천보를 밟으며 하성이를 쫓는 흑의인들의 진로를 차단한 뒤.
푹! 푹!
간결하고 정확한 초식으로.
촥! 촤악!
놈들의 숨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저쪽에서 정봉진이 짝짝 하고 박수를 치고 나왔다.
“와! 거 한가락 하는 놈이구나?! 근데 네놈이 제일 귀한 신분인 줄 알았는데, 호위 무사에게 종년을 들려 보내다니 숨겨둔 애첩이라도 되느냐?! 크으으. 거 보기 드문 순정이로다!”
“대가리에까지 비계가 찼나. 생각하는 수준하고는. 하긴 똥개 눈에는 똥밖에 안 보이는 법이지.”
“주둥아리도 검술만큼 한가락 하는구나, 근데 네놈 혼자 우리 전원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상대할 수 있겠냐고?”
그런 정봉진의 음성에 내 입가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걸렸다.
수준 낮은 녀석과 더 말씨름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식어가는 네 구의 흑의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직이 읊조렸다.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