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오랜만이네 (1)
암전되며 허물어졌던 당옥기의 의식이 어느 순간 헉! 하고 되돌아왔다.
“으.”
강제로 허물어졌던 의식이 돌아온 찰나인지라 관자놀이가 깨질 듯이 아파왔는데.
그 와중에도 언용운이 했던 ‘일단 신분은 숨긴다.’는 말은 뇌리에 깊이 남아 있어 팔자에 없던 도련님 소리가 가장 먼저 나왔다.
“…도련.”
하지만 당옥기는 도련님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음과 동시에 더는 이 얄궂은 역할극은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게 그녀가 눈을 붙이고 있던 장소가 이제 보니 은하연이 마련해준 안가였던 것이다.
방의 구조, 가구의 배치 상태 모든 것이 약령시에 들어가기 전 변복과 역용을 할 때 눈에 담은 안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문밖에 있는 우물가에서 언용운이 배고프다는 은하성을 타박했었지?’
잠깐만.
언용운…?
머리가 지끈거려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는 당옥기였지만.
언용운의 이름을 떠올리니 어째선지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아차하는 마음은 의식과 함께 깨어졌던 당옥기의 기억을 되살렸다.
“해금방주!”
거리를 좁혀오던 그 돼지 새끼의 수하들.
의식이 날아가기 전 잠시 마주쳤던 언용운의 단호한 표정.
그렇게 돌아온 기억은 당옥기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어 문을 열게 만들었다.
덜컥-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녀가 처음 눈에 담았던 안가의 우물가 풍경은 타박을 하는 사람과 타박을 듣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타박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한 명이 부족했다.
그에, 당옥기가 ‘어.’ 하는 사이 우물가에 있던 은하성이 입을 열었고.
“오, 일어나셨습니까? 누님.”
그런 은하성의 모습에, 당옥기의 입이 더듬더듬 다시 열렸다.
“…뭐야 이거? 나 왜 여깄어? 아니 너는 왜 여깄어? 아니아니….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거는 언용운은?!”
한데 은하성이 백지장처럼 가볍던 평소와 달리 너무 담담했다.
“일단 물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런 은하성의 모습이 당옥기를 더욱 겁먹게 했다.
겁먹은 짐승은 성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의 당옥기도 그랬는지, 그녀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지금 물이 넘어가니? 언용운 그 자식은 갑자기 나한테 왜 그런 건데?! 왜 너랑 나랑만 여기 이러고 있는 거고 그 자식은 어쩌려고 그런 건데?”
“모릅니다.”
“몰라? 왜 몰라?! 너랑 나랑 도망치라고 시간 벌겠다고 그런 거잖아?!”
“…….”
“그리고 모르면 끝이야? 형님 형님 잘도 따르더만 니들 먼저 가란다고 진짜 여기로 왔어?! 해금방이라는 이름을 오늘 처음 들었는데 너는 이미 알고 있더만, 아니 몰랐다손 치더라도 그 미친놈들이 하는 소리 너도 다 들었잖아? 토막을 내니 어쩌니 하는 그 소리를 듣고도 가란다고 왔어?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게 형제고 친구 아냐?”
하나 그런 당옥기의 몰아붙임에도 은하성은 굴하지 않았다.
“그건 당문 이야기고요.”
“…뭐?”
“언용운의 동생들은 형님이 하라고 하면 합니다. 그게 저희 규칙입니다.”
“…….”
“가끔 형님의 생각을 모르겠어서 답답하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용운 형님의 생각 속에서 빠지는 게 낫다는 판정을 받는 제 스스로가 한심합니다. 근데 용운 형님이 그러라고 하시면 뭐가 됐든 그렇게 할 겁니다. 그게 저희입니다.”
은하성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당옥기는 아차했다.
그저 사지를 빠져나왔다고 담담히 안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은하성 역시 속을 끓이고 있었다.
“…….”
하나 미안하다는 말이 당장에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원래 성정이 그러한 편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황까지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이러고 있을 새가 없었다.
언용운한테 가봐야 했다.
‘가서 한 팔을 거들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진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혹시라도 불상사가 생겼다면 사천당문의 이름을 걸고 복수를 해야 했다.
당옥기는 고개를 털어 정신줄을 완전히 잡은 뒤.
변복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끌러놓았던 일부 암기들을 모조리 다시 채비했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런 당옥기의 앞을 은하성이 막아섰다.
“비켜.”
“못 비킵니다.”
“언용운의 동생들의 규칙은 알겠어, 존중할게. 하지만 나는 사천당문의 사람이야. 나는 내 식대로 할 테니까 너도 존중해 줘.”
“못 비킵니다. 용운 형님께서는 정확히 단단이 데리고 안가로 가 있으라고 하셨으니까요. 저랑 누님은 여기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형님께서 이리로 오실 겁니다.”
“…비켜. 마지막 경고야. 면 좀 튼 사이라도 안 봐줄 거다.”
“용운 형님의 생각. 아까 모른다고 했는데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네요.”
“……?”
“누님께서 이렇게 나오실 걸 예상하고 그러신 거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왜 두 사람 중에 본인 쪽을 기절시켰단 말인가?
자신이 이런 식으로 행동할 줄 언용운은 내다본 모양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은하성이 입으로 토해냈던 말들이 당옥기의 속에도 똑같이 자리 잡았다.
‘…씨.’
천독단을 주겠다는 말은 당옥기 본인이 제일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놓고 집안사람들한테 할 말이 없다고 억지를 부린 것도 당옥기 본인이었다.
이 일은 언용운이 그 억지에 어울려 혈수만독주를 구해주려다 일어난 일이었다.
하여 미안했고. 미안한 와중에 언용운의 심중에서 빠지는 게 낫다는 판정을 받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에 당옥기가 입술을 터져라 깨무는데.
“용운 형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 한 몸을 건사해 내실 분입니다. 여기서 기다리는 게 맞습니다.”
이 순간 은하성이 재차 입을 열었다.
“…….”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아까 형님 말씀이 옥기 누님이 형님한테 뭐 소원? 면죄부? 같은 거 들어주기로 약속하신 거 쓰신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이 유효하다면 누님도 언용운의 동생들에 한시적으로 포함되시는 겁니다. 약속 지키십쇼.”
“…니들 진짜 싫어.”
“동의한 걸로 알겠습니다. 진정하시고. 여기 물 드십쇼.”
* * *
“일어나라.”
상단전에 흘려보낸 내력이 언령으로 화하며 시체 지배술이 발현됐다.
그에 식어가던 네 구의 시체가 즉시 몸을 일으켰다.
크어!!!
두 놈은 목이 날아갔고.
다른 두 놈은 심장이 꿰뚫렸던 녀석들이었는 데.
분명히 죽어 나자빠졌던 시체가 아무런 처치나 조치 없이 몸을 일으키자 우수에 들린 사부님께서 감탄을 하셨다.
- 허. 진짜 네 녀석의 방술은 봐도 봐도 놀랍구나. 일종의 강시술 같은데 뭔 놈의 강시술이 부적도 주문도 방울도 없이 이루어진단 말이냐?!
그런 사부님의 음성에 문득 내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모산파 출신 교수님이 진행하는 강시학개론이 있던데, 수강 정정 기간이기도 하니 그거 시간표에 넣어 놓아야겠네.’
강시학 계통의 수업을 좀 듣고 나서면 몰라도 당장에 이걸 하성이 녀석이나 당옥기한테 보여주기는 좀 그랬다.
사부님이야 애초에 만나기를 진법 속에서 뵈었고, 사부님의 시절의 진주언가는 강시종이 멀쩡했기에 대충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여 주시지만.
은하성과 당옥기가 이게 뭐냐고 물어오면 당장에는 둘러댈 말이 마땅치가 않은 것이다.
‘수업 생각은 학관 돌아가서 하자고,’
지금은 무엇보다도 이 자식들 염라대왕님 앞으로 보내는 게 먼저였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싸우는 거.
아니지 이 세상에 와서는 사실상 처음인가?
저주나 암흑 동화 같은 다른 흑마법은 요긴하게 써먹었지만 시체 지배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러고 보니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흑마법 중에 사용되는 내력대비 가장 효율이 좋은 게 바로 시체 지배술인데.’
한데 상황이 허락지 않았다.
사부님이 잠들어 계시던 고분을 파헤칠 당시에는 일신에 지닌 내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여 영혼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협상을 하는 식으로 간신히 부렸었다.
‘유가, 도가, 불가가 주축인 백도 무림 내에서 굳이 내보여서 환영받을 능력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박보심단과 천독단의 내력을 오롯이 흡수한 지금의 나는 내 검을 펼치면서 한꺼번에 스무 구 정도의 시체는 능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길 포기한 해금방 녀석들을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이 없으니 이 능력을 내보여도 상관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나는 몸을 일으킨 네 구의 시체들에게 곧바로 다음 명을 내렸다.
“가자.”
그런 내 명령에 네 구의 시체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크어!!
그런 네 구의 시체에 해금방주의 명령에 서슴없이 짓쳐들어오던 해금방의 흑의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아니 몇 걸음씩을 뒤로 물렸다.
“씨, 씻팔. 저게 뭐야?! 모가지가 없는데 움직이잖아!!”
“가, 강시인가?!”
“강시가 저렇게 움직이는 강시가 어디 있냐!!”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낸들 알아?!”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에 대한 공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해금방 녀석들의 머릿속에 든 관념과 상식으로는 나 같은 상대는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일 것이다.
아, 물론 이해가 간다는 말이 자비를 베풀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 놈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짓밟는 것으로 모자라, 그렇게 짓밟아낸 사람들을 파는 것을 업으로 삼은 녀석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어서 와라. 아무리 개차반처럼 살아온 너희라도 이런 밤은 처음일 거다.”
나는 그 말과 함께 네 구의 시체에게 눈앞의 해금방도 놈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내달리기 시작하는 네 구의 시체와 함께 나도 그 틈바구니로 짓쳐 들었다.
“희한한 놈이구나! 저놈은 일단 생포해서 데려와 봐라!”
그런데 이 순간 해금방도 놈들 너머로 해금방주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쫄지 마 이 새끼들아. 무슨 수를 썼는지는 잡아다 알아봐야 하겠지만 끽해야 다섯이다! 이쪽이 열 배가 넘는데 겁을 집어먹어?! 네놈들이 그러고도 남해안을 벌벌떨게 만드는 해금방의 일원이냐?! 어물쩍거리는 새끼가 있으면 내가 직접 배를 따서 다음 흑시에 내보낼 상품으로 만들어주지!”
해금방주 정봉진의 말은 주춤주춤하던 해금방도들의 걸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딱 움직이는 것까지만 이었다.
생포를 하라는 말은 살초를 배제하라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개인 기량이 내 쪽이 월등한데 저쪽은 살초를 배제하고 나는 다 죽여버릴 생각인데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썅! 죽어!!”
아, 물론 생채기 없이 잡아오라는 뜻은 아닌 듯했고.
근본이 흑도라 방주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도 아닌 듯했지만.
“애석하지만 네 실력으로는 무리다.”
나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매섭게 파천의 검을 휘둘렀고.
촤악!!!
“컥. 이걸 어ㄸ케 생포하라는….”
그렇게 내가 회한을 휘두를 때마다 반드시 하나 이상의 주검이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생겨난 주검을 또다시 일으켰다.
크어어어어!!
그렇게, 해금방주 정봉진이 장담한 수적 우위는 순식간에 뒤집히기 시작했다.
당황한 정봉진은 빠르게 말을 바꿨다.
“그냥 죽여! 죽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라!!”
우선 사로잡으라는 말을 철회했고.
“해아(海哦) 그리고 해훔(海吽) 너희들이 나가라! 독소금을 뿌려! 저놈을 죽이는 게 호위다!”
이어서 마부의 행색으로 정봉진이 탄 마차를 지키고 있던 수하들에게 독을 쓰라는 명령을 내리더니, 제 놈은 품에서 피독주로 추측되는 물건을 하나 빼 물었다.
그에 등이 굽은 두 마부 놈이 팔뚝에 매고 있던 시커먼 천 조각으로 제 놈들 코를 싸며 마차에서 내리더니, 손톱 밑이 시커먼 손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자루에서 독소금을 끄집어내 마구잡이로 뿌리기 시작했다.
하나, 나로서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어후. 짜. 아무리 단짠단짠이라지만 당호로 한 개 먹고 소금을 이렇게 많이 먹으니까 간이 전혀 안 맞네.”
천독불침을 이룬 나로서는 말 그대로 조금 간지럽기만 한 공격이었는데.
“케흑! 케흐흐흑!”
두 마부 놈의 민첩한 독공에 채 대비를 하지 못한 해금방도들이 중독이 되어 핏물을 쏟으면서 죽어 나자빠지거나.
“컥?!”
황급히 코와 입을 가리려다 시체 병사들이 휘두르는 검에 찔려 죽고 말았으니까.
“고맙다. 하나하나 죽이려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는데,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너스레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독이 통하지 않자 당황한 두 마부 놈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든 뒤, 일검에 한 놈씩 베어 넘겼다.
쿵!
쿵!!
그렇게 두 마부 놈이 주검이 되어 넘어가고 나자, 어느덧 이 고개에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해금방주 정봉진 단둘뿐이게 되었다.
언덕 위에 퍼진 독 때문에 마차에 묶여 있던 말들도 다 죽어버린 상황이라, 정봉진은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
아니 독 안에 든 돼지였다.
나는 놈이 든 마차를 향해 회한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나와. 나와서 꿇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