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오랜만이네 (2)
- 저자가 꿇으란다고 순순히 무릎을 꿇겠느냐? 긴장 놓지 말거라.
‘긴장을 놓긴요.’
이런 식으로 싸워 본 것은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일 뿐입니다.
긴장 안 놓습니다 사부님.
- 오냐. 나도 소싯적에 장강에서 수적질을 하는 놈들깨나 베어 보았는데, 해금방주의 부하들은 투덜거리긴 해도 저 방주 놈의 명을 철석같이 따랐다. 그저 떨어지는 돈만 믿고 저처럼 복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부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었다.
해금방도들은 나라는 미지의 공포를 마주하고 겁에 질렸다.
‘하지만 결국 정봉진의 명에 따라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상대가 흑도인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덤벼드는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의(義)와 충(忠) 혹은 지켜야 할 가족이나 지적 호기심 같은 것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흑도인에게 적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해금방도들이 내게 덤벼든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내게서 느끼는 미지의 공포보다. 해금방주 정봉진을 봐오며 쌓은 확인된 공포가 두려웠던 거지.’
사부님의 말씀대로 정봉진은 녹록한 상대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원작의 정현도 고전했고.’
하지만 해볼 만했다.
그럴게 원작의 정현이 정봉진과의 싸움에서 고전한 이유는 놈과 맞붙는 순간에 다다르는 동안 심신이 지쳤기 때문이었다.
수적 불리함 속에서 숱한 해금방도들을 베어 내느라 몸이 지쳤고.
마지막에 가서는 제 부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마부를 앞세워 독공을 해오는 해금방주의 모습에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착해빠진 마음이 지쳤었다.
‘거기에 거들어줄 동기들도 마인들을 상대하느라 없었고.’
근데 나는 정현이 아니었다.
거들어줄 동기들이 현장에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게는 시체 병사들이 있었다.
하여 수적 불리함을 겪지 않았기에 지치지도 않았고, 지금에 와선 되레 내 쪽이 수적 유리함을 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현이 겪은 심신의 고단함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결정적으로 나는 녀석처럼 착하지는 못해서.’
거기다 정현이 녀석처럼 정도의 방식으로 우직하게 검술로만 싸울 생각도 없었다.
독자로선 정현의 우직한 싸움을 좋아하긴 했지만, 손에 쥔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게 내 방식이었다.
‘해금방주 놈이 마부들이 독을 뿌리기 전에 황급히 피독주를 물던데.’
나처럼 천독불침지체를 이룬 것은 아닌 모양이지?
그렇다면 죽은 마부 놈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독소금을 끌러다 뿌리면서 싸움을 시작해야지.
그리고 시체 병사들도 앞세울 거다.
‘독공과 시체 병사들을 모두 뚫고 나와, 나랑 검을 겨를 실력이 되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그때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내가 독공을 펼쳤던 두 마부 녀석의 허리춤에 달린 독주머니를 끌러내고 있는 이때.
달칵-
호사스런 마차의 문이 달칵 열리더니, 해금방주 정봉진이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나왔다.
- 온다.
‘옙.’
나는 빠르게 끌러내 시체 병사들중 나와 가까이 있던 녀석들에게 던져 넘겼다.
그리고 스스로는 사부님이 들어 계신 회한을 고쳐잡고 기수식을 취했다.
그런데 이때.
해금방주가 사부님과 내 예상을 깨고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거구를 야무지게도 접어 무릎을 꿇은 해금방주 정봉진.
놈은 살려달라는 말과 함께 이마까지 땅에다 붙였다.
그런 정봉진의 모습에 사부님께서는 헛웃음을 지으셨다.
- ……? 배알도 없는 자였나? 아니 그런 자가 어떻게 수하들의 복종을 이끌어 낸 것이냐?
궁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나를 방심시켰다가 기습을 하려는 이른바 추진력을 얻기 위한 자세인가 싶어 놈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이놈이 사람을 잘못 보고 귀인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원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귀인께 드릴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겁니다!!”
면상에서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
갈피를 잃은 동공을 보아하니 진심인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왜 이러지?’
원작의 정봉진은 정현과 치열하게 합을 섞은 끝에 죽음을 맞는다. 하여, 이런 장면은 없었다.
‘사람을 잘못 봤느니, 귀인이니 하는 것을 보니 누구랑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뭐, 왜 저러는지는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시체 병사들이 정봉진을 겹겹이 에워싸게 한 뒤.
정봉진이 두려워하고 있는 ‘누군가’를 짐짓 흉내내며 입을 열었다.
“감히 나를 아는 듯이 구는구나?”
그런 내 물음에 이마를 땅에 붙이고 있던 정봉진이 고개만 바짝 들며 입을 열었다.
“흐, 흑시(黑市)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교….”
“마교?”
“죄, 죄송합니다! 천마신교! 아니 신교! 신교의 대마ㄷ… 아니 호교법왕 님들 중에선 하늘의 순리를 거역하여 죽은 자들을 산 자처럼 부린다는 분이 계시다 하는 소리를 바람결에 들었는데, 이 아둔한 놈이 헛소문이라 생각해서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지금 방금 떠올랐습니다! 귀인께선 혹 역천괴마 어르신의 제자분이 아니십니까?!”
그 입에선 잠시 생각지 않고 있던 세력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 마교면 그 내 종자 노릇을 하던 련금이 녀석이 창시했다는 집단이 아니냐?
‘…어. 맞습니다.’
역천괴마.
그러고 그 제자들.
‘이 몸의 원주인에게서 진주언가의 강시 비급을 가져간 자들이자, 머지않은 미래에 강시 군단을 이끌고 중원 침공의 선봉에 서는 마두들.’
원작의 흐름으로는 놈들과 마주치는 게 그래도 시일이 많이 남은 일이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들이 있었다.
뭐, 아무튼.
정봉진이 대마두 중 하나인 역천괴마를 알고 있다면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놈의 공포를 이용하면 정보든 아니면 다른 뭐든 뜯어낼 수 있을 터였으니까.
그런 생각 하에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그런 내 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일까?
정봉진이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허리를 펴더니 대뜸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끊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돼지 목에 걸린 목걸이란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옵고. 거기 달린 것이 마차에 달린 금고 열쇠입니다. 혈수만독주를 구해서 새로 얻은 애첩에게 가려던 길이 었어서 족히 금자 이천 냥 정도는 되는 금은보화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금자 이천 냥이 생겼다.
돈 쓰러 왔다가 쓴 돈보다 많은 돈이 굴러들어온 상황이었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냥 널 죽였어도 가져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내 성격상 분명히 녀석의 몸을 뒤졌을 거고 이렇게 생긴 목걸이를 발견했다면 이렇게 생긴 구멍을 마차에서 찾아 끼워봤을 거다.
게다가 저놈이 이걸 어떻게 마련했을지를 생각해보면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대저 정봉진이라는 자가 어떤 놈인가?’
남해안의 백성들에게 몰래 만든 소금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그것으로 모자라 어육처럼 도륙하거나 조기처럼 묶어 팔아먹던 놈이었다.
나는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피어나는 차가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근데 이게 네 녀석이 나한테 줄 수 있는 거라고? 실망인데?”
그런 내 말에, 정봉진이 짐짓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본거지에 가면 제 마차에 딸린 저 조그마한 금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창고가 있습니다! 그걸 다! 아니 저와 저희 방도들이 모두 신교에 투신하겠습니다.”
“너희가?”
“예. 기회를 주십시오. 얼마 전 저희 우이도(牛耳島) 본채를 찾아오신 분 중에 동남(童男)과 동녀(童女)들을 미리 묶어 주문하셔서 사가던 분들이 계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교에서 오신 분들 아닌가 싶은데 아닙니까?”
“…계속해봐라.”
“때 묻지 않은 음과 양의 지속적인 공급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맡겠습니다! 앞장을 서겠습니다. 신교의 충실한 개가 되겠습니다!!”
그런 정봉진의 말에 나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
‘얻을 것은 다 얻었나?’
정봉진의 이야기에서 내가 얻은 것은 총 네 가지였다.
첫째 마차에 금고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열쇠도 얻었다.
둘째론 단편적이나마 마교와 관련 된 소식도 얻었다.
‘마교에 관한 건 더 알지는 못할 거다.’
애초에 정봉진은 나를 보고 바로 역천괴마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 말은 저 정도가 최대한 짜낸 것이라는 소리니, 마교에 관한 것은 더 알아낼 수 없으리라.
‘세 번째는 우이도.’
오히려 주목할 것은 정봉진이 허둥거리다 토해낸 해금방의 본거지였다.
‘남해안의 섬 중에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토벌을 못 하고 있었다고 원작에선 묘사됐지.’
관아든 무림맹이든 출처를 숨기고 은밀히 투서를 넣으면 내가 힘쓸 필요 없이 해결이 되리라.
‘마지막 넷째는….’
정봉진이 죽어 마땅한 놈이라는 사실.
나는 상단전으로 내력을 흘려보내 시체 병사들을 움직였다.
푹! 푹! 푹! 푹! 푹! 푹!
그에 시체 병사들이 쥔 날붙이가 일제히 정봉진의 육중한 몸에 틀어박혔다.
“커흑…. 어찌하여…? 모, 모든 것을 다 드리겠다고 했는데?”
정봉진은 초점이 희미해져 가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에 나는 하단전에 있는 내력을 회한에 실으며 입을 열었다.
“뒈질 놈이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촤악-
육중한 몸에서 머리통이 분리되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야밤에 피로 목욕을 했더니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리고 조금 피곤하기도 했다.
‘시체 지배술이 흑마법 중에 가장 효율이 좋은 놈이긴 하지만, 세상 자체가 흑마법의 효율이 좋지 않은데다 파천검법이랑 동시에 사용하니까 진짜 내력이 훅훅 빨리네.’
하지만 피로 목욕을 한 것을 탓하고 있을 새도 몰려드는 피로를 날릴 새도 없었다.
‘해금방 놈들을 마주친 이후로 다른 인기척이 느껴진 적이 없긴 했지만,’
놈들을 상대하다 지체한 시간을 생각하면 슬슬 고개를 넘을 사람들이 나타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래도 챙길 것은 챙겨야지.”
챙겨야 할 것은 물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이 현장을 발견한 사람들이 혹여라도 나나 당옥기 그리고 은하성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뒷정리를 해야 했다.
‘대부분은 그냥 둬도 될 것 같네.’
고개 위에 펼쳐진 현장은 누가 봐도 내분이 나서 서로 찔러 죽인 상황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놈 정도는 흔적도 없이 녹여 없애야 했다.
나는 하성이 녀석이 내려놓고 간 등짐을 뒤져서 경매장에서 낙찰받았던 화골산을 꺼냈다.
치이익-
치익-
그리고 독을 뿌리며 덤벼들었던 두 마부 놈의 시신에 뿌렸다.
그런 내 행동에 허리춤으로 돌아오신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이놈아 그 두 놈의 시체는 왜 녹여 없애는 것이냐? 네 녀석의 장기인 그 괴이한 방술 덕분에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해금방도들끼리 싸운 것으로 보인다만?
‘사부님 눈에도 그렇게 보이시나 보군요? 그럼 누가 봐도 그렇게 보겠네요.’
- 그래. 한데 왜 화골산을 쓰는 것이냐?
‘금고에 든 금은보화 가져가야 할 거 아닙니까.’
-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해금방도의 시신이 다 여기 있는데 금은보화만 사라지면 다른 놈들은 몰라도 해금방도 놈들은 눈치를 채겠죠.’
- …아! 그러니까 그 두 마부 놈의 시체를 없애버려서 저놈이 들고 간 것처럼 꾸민다 이 말이로구나? 하여간에 꼼꼼한 녀석이로다.
‘아, 그러고 보니 당옥기랑 사부님이랑은 백도 무림의 후기지수가 화골산은 왜 사냐면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보십쇼 다 쓸데가 있죠?’
- 지나가며 물은 그 한마디를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하여간에 지독한 놈.
당옥기 그 녀석한테도 증명을 해야 하는데.
‘참, 당옥기랑 하성이 녀석은 잘 있으려나?’
지금쯤이면 슬슬 정신을 차렸을지도…?
당옥기 성격에 정신 들면 바로 뛰어오려 할 터.
‘서둘러야겠네.’
그렇게 두 마부의 시신에 화골산을 넉넉히 뿌린 나는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하성이가 두고 간 등짐을 짊어졌고, 혈수만독주가 든 목함도 챙겼다.
정봉진의 마차 밑에 붙어 있는 금고를 열어보니 금원보와 보석 그리고 비단이 있길래 비단으로 금원보와 보석을 싸서 등짐에 매달았다.
“잊은 거 없고.”
이제 안가로 가면 되겠네.
그때였다.
그렇게 발걸음도 가볍게 안가로 내빼려는 이때.
마차의 한켠에 보랏빛 구슬 같은 것이 보였다.
“음?”
두 마부가 독을 뿌릴 때.
정봉진이 물었던 피독주였다.
“…삼 초는 확실히 지났지만.”
슬쩍 보니 아직 쓸 수 있어 보였다.
나는 피독주를 허벅지에 슥슥 문댄 뒤 소매 안으로 넣어….
- 그런 건 좀 버려라! 이 지독한 놈아!!
* * *
안가의 문가를 은하성과 당옥기가 서성이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
“?!”
멀찍이서 대문 역할을 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안가와 직접적으로 통하는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기다리던 언용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렸냐?”
그런 언용운의 모습에 당옥기와 은하성이 너나없이 달려가 안겼는데.
“거미! 거미!!”
다급한 언용운의 목소리에 은하성 당옥기 두 사람이 서로 각기 다른 이유로 황급히 물러났다.
한데, 이 과정에서 언용운이 등짐에 묶어놓은 비단 자루가 풀리며 그 안에 들어 있던 금은보화가 와르르 쏟아졌다.
“형님?”
“…오다 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