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나한테는 중요해
누가 그랬다.
피는 못 속인다고.
‘저놈도 강남 상왕의 핏줄이긴 한가 보네.’
하성이 녀석은 은가의 피가 흐르는 녀석답게 쏟아지는 금은보화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더니, 어림짐작으로 내가 가져온 금은보화의 값어치를 산정했다.
“…오다 주우셨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데요? 둘넷여섯여덟… 어림잡아도 천팔백? 천천히 제값에 팔면 이천 냥 정도는 나오겠는데요?”
그리고 여기 피를 못 속이는 녀석이 하나 더 있었다.
당옥기.
“큼.”
사천당가의 피가 흐르는 녀석이라 이건지, 녀석은 내게 코를 가까이 대보더니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언용운 너. 옷에 독기가 좀 묻어 있는 것 같은데?”
“오면서 날린다고 날린 거 같은데 좀 남았나?”
“남았어. 이 정도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가볍게 담마진(蕁麻疹)이 올라오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확실히 남아 있어 새큼한 독기가. 해금방 놈들이 독공까지 사용했어?!”
그런 당옥기의 음성에 하성이 녀석이 눈을 키우며 입을 열었는데.
“독공이요? 형님! 괜찮으신 겁니까?! 아니 그러고 보니 피투성이신데?!”
“호들갑 떨지 마. 피는 남의 피고 어지간한 독공은 나한테 영향을 못 끼친… 야. 내가 아니라 네가 문젠 거 같은데?”
“예? 저요?”
“그래. 너 얼굴에 지금 뭐가 울긋불긋 올라왔어 인마.”
“예에?!”
이 순간.
당옥기가 예견한 증상이 하성이 녀석에게 일어났다.
“어, 어쩐지, 좀 전부터 목이 따끔따끔하더라니?”
조금 전 내게 와락 안겨들 때 의복에 묻어 있던 독기를 들이마신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하성이 녀석은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형님? 저 이렇게 죽는 겁니까?! 형님께 더할 나위 없었다 소리 한번 못 들어보고 만날 못난 모습만 보이다 이렇게 가는군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누님께 죄송했다고 전해주십쇼! 그리고 묘비에는 형님께서 제일 아꼈던 동생이라고….”
처음에는 울상이 된 하성이 녀석이 우스워서 가만히 들어줬는데.
계속 들어주고 있다가는 아주 대서사시를 써 내려갈 분위기가 되어가서 나는 일단 녀석의 말을 끊었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마지막 가는 길까지 타박을 하시네요. 그래도 형님을 의형으로 모시게 되어….”
그리고 녀석의 입에 해금방주의 마차에서 주워온 피독주를 꺼내 물렸다.
“우웁?! 익에 뭡미까? 형임?”
“피독주다.”
“히독후요?”
“그래. 물고서 입으로 한 번 코로 한 번 번갈아 호흡하면 머지않아 독기가 가실 거다.”
“저흘 위해… 이륵헤 긔한 거슬 주히다히 평행 충헝하겎음미다 형임!”
그런 하성이 녀석의 음성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안쓰럽다는 듯이 혀를 차셨다.
- …저를 위해 이렇게 귀한 것을 주시다니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형님? 저놈이 지금 해금방주 그 숭악한 놈과 간접적으로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세상엔 모르는 게 약인 것이 있는 법이죠.
‘아무튼 어떻습니까 사부님?’
- …뭐가?
‘사부님께서는 저 피독주 버리라고 하지 않으셨는지요? 보십쇼. 주워두니까 이렇게 다 쓸모가 있지 않습니까?’
- 그래. 이번에는 네 지독함이 옳았다. 한 번 빨아낸 순간부터 효력이 날아가기 시작하는 게 피독주인지라 저딴 걸 주워 어디다 쓸까 싶었는데, 이렇게 써먹는구나. 네가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쳐주마.
‘판정승이라뇨. 사내답게 제자야 네가 옳았다 시원을 해주셔야죠.’
- 그리는 못 하지! 은가 놈의 중독이 그리 심한 것이 아니고. 경매장에서 사들인 이런저런 약재도 있으니 기실 당가의 아해에게 치료를 해달라 해도 됐을 것 아니더냐?!
‘…쳇. 은근 예리하시다니까.’
- …스승님. 제 사부까지 찜을 쪄 먹으려고 드는 이 고얀 놈을 어쩌면 좋습니까.
뭐, 아무튼.
호들갑을 떠는 하성이 녀석의 입에 피독주를 채우며 주위가 좀 조용해진다 싶었는데.
그 대신 당옥기의 시선이 닿는 옆통수가 따가워 왔는데.
‘…이거는 독기를 눈으로 마셨나.’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당옥기는 제 입으로 나를 친구라 말했다.
한데, 원작의 당옥기는 빈말로라도 친구라는 말을 쉬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따지고 보면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었으니 섭섭했을 것이다.
‘몰리면 몰릴수록 마음속의 동굴로 숨어드는 당옥기의 성정.’
친구와 원수를 두고 도망치지 않는 사천당가인들의 기질.
그 모든 것을 고려하면 단순한 섭섭이 아니라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음. 진짜로 때려서 기절시켰으니, 따지고 보면 이란 말은 안 맞나?’
뭐, 그 점이 미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해금방주를 맞닥뜨린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그 상황에서 당옥기를 기절시키지 않고 녀석을 현장에서 이탈시킬 수 있는 다른 수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당옥기의 성정상 그런 자괴감은 원작에서도 어차피 겪는 마음고생이기도 하고.’
뭐, 아무튼.
당옥기는 내가 미워서 저러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을 했기에 저러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팔 내봐. 진맥하게.”
당옥기가 나를 향해 희고 긴 손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멀쩡하다는 사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사부님도 아셨다.
하지만 진맥을 해보면 금방 끝날 것을 괜히 안 해도 되니 마니 실랑이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냥 녀석에게 팔을 내주었고.
당옥기는 내 맥을 살펴보는가 싶더니 흥 소리와 함께 내 팔을 밀쳤다.
“멀쩡하네.”
“그럼. 멀쩡하지. 걱정했냐?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천하에서 가장 누울 자리를 잘 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나일 거다.”
“…걱정? 내가? 전혀 안 했거든?”
“그런 거치고는 너무 째려보던데, 홍옥이나 석류처럼 눈이 벌게져서는?”
“그건. 혀, 혈수만독주를 하마터면 잃어버릴까 봐 그런 거고!”
“챙겨 왔으니까 됐네 그럼.”
“…아오.”
“뭐, 본인이 걱정을 안 했다니까 사족이긴 한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과도 좋았고. 따지고 보면 당옥기 너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지. 생각해봐라. 괜히 휘말렸다가 너희 기숙사 그 꽉 막힌 향란관엔 뭐라고 보고할래?”
“듣던 중 제일 열받는 소리네, 향란관? 그거 나한테 별로 안 중요하거든? 막말로 때려치면 그만이야. 아버지한테 꾸중은 좀 들을 뿐이지.”
그야 그럴 것이다.
정무학관 졸업장이 없다고 해서 사천당가의 적녀가 어디 가서 꿀릴 리도 없고, 따돌림을 받는 향란관 생활도 진절머리가 날 테니.
하지만 당옥기는 정무학관 생활에 정을 붙여줘야 했다.
“나한테는 중요해. 니들이랑 학관 생활 하고 싶으니까.”
“…….”
진심이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며 원작을 읽었기에 언용운의 몸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고.
닥쳐올 위기와 재난을 대처하려면 더더욱 녀석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때.
당옥기가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더니 대뜸 자리를 이탈했다.
“어디 가냐?!”
“옷 갈아입으러 간다 왜!”
“대화 중에 갑자기?”
“학관으로 돌아가려면 관복으로 갈아입어야 할 거 아냐?!”
음.
얼결에 섞인 내 진심이 적절히 통한 모양이었다.
* * *
하성이 녀석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동안, 나는 우물가에서 피를 뒤집어쓴 것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당옥기는 혈수만독주를 옮겼다.
“홍옥이랑 석류. 다 옮겼어.”
“그렇게 꽉 막힌 목함에 넣어 가도 괜찮은 거 맞냐?”
“응. 굴로 삼을 만한 썩은 나무랑 적절한 양의 이끼만 깔아주고 먹이만 제때 주면 되는 녀석들이니까.”
“먹이는 아까 경매장에서 나오면서 줬다며?”
“응. 그러니까 괜찮다고. 벽도 기는 녀석이라 목함이 튼튼하기만 하면 달리면서 발생하는 충격도 상관없어.”
내가 깔끔하게 뒷정리를 해놓고 오긴 했지만, 되도록 이 근처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는데 그러려면 혈수만독주가 든 목함을 바꿔야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해금방주에게 뒤를 잡힌 이유가 목함의 일부가 충격에 약한 유리로 되어 있어서였지.’
그래서 달릴 수가 없었고.
결국 뒤를 잡힌 것이었다.
그걸 해결했으니 그런 식으로 뒤를 잡힐 일은 이제 없었다.
“형힘! 저 해혹 다댕거 같흔해효?”
“…침 좀 닦고 말해. 진짜 더러워 죽겠네. 얘 해독 다 된 거 같다는데 당옥기 네가 한번 봐줘라.”
“알겠어.”
“그래. 쏟아진 금은보화는 내가 갈무리할 테니까 당옥기가 괜찮다고 하면 너도 빨리 옷 갈아입어.”
“에! 형힘!”
그렇게 하성이와 해금방주에게 뜯어낸 금은보화까지 단단히 챙긴 우리는 각자 등짐을 하나씩 짊어지고 바람처럼 로하구의 경계를 벗어났다.
그렇게 날들이 달려 어느새 도착한 정무학관.
문을 지키고 선 수위부 선배님에게 시각을 물어보니 막 해시가 된 참이었다.
“너 외박증을 끊은 것은 아니었지?”
“일 학년한테 그런 거 안 끊어줘 향란관은.”
“하기는. 뭐, 그럼 아슬아슬했네? 다들 수고했다. 노파심에 말하는데 이번 외출 기간에 있었던 일들은 일단 우리만 알고 있는 걸로 하자.”
은밀하게 투서를 넣는 일이나, 돈 쓰러 갔다가 오히려 불어난 금자의 관리를 맡겨야 하니 은하연한테는 이야기를 해야할 것이다.
하나 그녀를 제외한 남들에겐 굳이 떠벌리고 다녀서 득이 될 게 없었다.
‘이 시기에 정무학관의 학생이 해금방주를 제거하는 일은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예. 형님.”
“알았어.”
다행이 두 녀석 모두 별다른 첨언 없이 내 뜻에 동의를 해주었다.
그렇게 해금방주에 관한 단속을 한 나는 계속해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혈수만독주는 청죽관에서 키우는 걸로 하자.”
지금은 당옥기가 친구로 생각하는 범위가 나랑 제갈설지 정도뿐일 것이다.
‘자꾸 보면 정든다 그랬어.’
혈수만독주 때문에 청죽관에 들락날락거리다 보면 원작에서 친구가 되었던 은하연과 정현은 물론이고 하성이나 소릉이 경룡이 형 같은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될 것이고.
나아가 다른 기숙사에 적을 두고 있는 주요 인물과도 관계를 쌓게 도와줄 수도 있었다.
‘용명이랑 천장호는 동생과 그 친우이니 마음만 먹으면 초대할 수 있고, 팽가의 쌍둥이는 윗대의 인연이랑 나름대로 어린 시절의 인연도 있고 하니 이쪽도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부대끼다 보면 옥기 녀석도 학관에 정을 붙이겠지.
‘그리고 당장에 저걸 들고 향란관에 들어가면 당옥기는 당장에 난처한 상황에 처할 테니 이게 최선이지.’
그런 생각에 말을 꺼낸 것이고, 왜 그래야 하냐고 되물으면 뒤의 이유를 들려주려 했는데, 의외로 당옥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미리 얘기해 두는데 사주기로 해놓고 딴소리하는 게 아니다, 그거 지금 향란관에 들고 들어가면….”
“알았다니까! 이해했다고! 나 바보 아니거든?!”
“…이해를 했는데 이렇게 순순히 따라준다고? 내가 아는 당옥기가 아닌데? 누구냐 너?”
“캬아아악!”
“그래. 이래야 당옥기답지.”
“진짜! 따라줘도 난리야!”
“아무튼 고생했고. 들어가라 점호 늦겠다. 내일 보자.”
“너도 고생했어. 그리고 고….”
“그리고 뭐?”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당옥기는 뭐가 그리 바쁜지 도망치듯 사라졌다.
뭔 말을 하려고 그리 뜸을 들이나 했네.
고맙긴, 내가 고맙지.
천독단 성능 확실하더라.
* * *
그렇게 당옥기와 학관생 광장에서 헤어진 우리는 청죽관의 자치회실로 향했다.
“누님! 앞으로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음?! 예 또 왜 이래요 언 공자? 오랜만에 따로 ‘교육’을하신 건가요?”
“……? 거 사람을 뭐로 보는 거요?”
- 잘 보고 있구만 뭘.
“언 공자로 보죠.”
“……?”
“아무튼 늦으셨네요? 아닌가? 외박을 하실 수도 있다고 하면서 가셨으니 빨리 오신 걸까요?”
“뭐,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그리되었소. 한데 혼자요?”
“네. 다들 점호 준비하러 생활관에 건너갔어요.”
오는 중에 보니 생활관은 점호가 한창인 듯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치회실엔 은하연 혼자뿐이었다.
잘됐다 싶어서 나는 약령시에서 있었던 일을 시체 지배술 같이 적당히 뺄 건 뺀 뒤 털어놓았다.
“…그렇게 된 거요.”
“어, 엄청난 일들이 있었네요.”
그런 내 말을 들은 은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절더니.
바쁘게 내 이모저모를 살피며 말했다.
“어디 다치시거나 한 곳은 없으신 거죠?”
“보시다시피 심신 모두 멀쩡하오. 당호로는 못 사왔지만.”
“이 와중에 농담이 잘도 나오시네요. 혼자만의 몸이 아니시니까 조심하세요. 언 공자가 안 계시면 청죽관은 바로 망할 거예요. 그럼 공자만 믿고 여기에 투신하고 자금도 붓고 있는 저도 바로 망하겠죠.”
“…주의하지. 그래서 그 해금방의 본거지가 있는 곳을 투서를 넣는 거랑 자금 관리는 맡기면 되겠소?”
상상치 못한 큰 사건이 내 입에서 나오자 놀란 은하연이었지만, 돈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했다.
“예. 상단의 하부 조직을 이용해서 몇 다리 건너는 식으로 소식을 전하면 되니 익명 투서는 어렵지 않죠. 그나저나, 돈을 쓰러 가신다더니. 흐흫. 오히려 돈을 벌어 오셨네요?! 자금 관리는 어떻게 생각해 놓은 용처가 있으실까요? 아니면 하던 대로 제가 알아서?”
음식 이야기는 당호로 못 사왔다는 이야기밖에 없는데.
입맛은 왜 다시는 건지….
아무튼 생각한 용처가 있긴 했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약간 정도는 기숙사 대항전 준비를 위해 투자를 했으면 싶소만?”
“기숙사 대항전 중에 금력으로 전력 강화를 꾀할 수 있는 용처라면 체육부겠군요?”
“그렇소.”
“근데 체육부는 부장님부터 모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진행한 재학생 기량 점검 결과가 나왔는데 보시겠어요? 여기, 이게 상위권을 기록한 분들 이셔요.”
말과 함께 은하연은 서류 하나를 내밀었는데, 그 서류를 쭉 훑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장 윗열에 내가 일찍이 체육부장으로 점찍은 인물의 이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