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89화 (89/444)

제89화. 망나니 놈이 협박을 했다고 하십시오

자치회에서 체육부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소속 기숙사생 전반의 체력과 내력 그리고 건강과 위생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나아가 증진시키는 일.

‘그리고 기숙사 대항전을 준비하는 일.’

청죽관의 자치회장을 이 년째 연임 중인 경룡이 형은 자치회의 양대 기둥이 총무부와 선도부라고 했다.

‘맞는 말이긴 해.’

그 앞에 ‘자치회를 굴린다는 관점에서 보면.’이라는 단서를 단다면.

한데 그건 은하연과 정현이라는 적임자를 선임했으니 양대 기둥은 튼튼한 것으로 세웠다 할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기숙사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청죽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패배감을 날리는 일이었다.

‘은 소저의 말.’

내가 없으면 청죽관이 망할 거라는 그러니 내 몸은 혼자의 것이 아니라는 그 말.

듣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떠올려보니 좀 멋쩍긴 했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문제야.’

내가 당금수석이라 불리든, 여러 교수님께 연구실에 들어오라고 구애를 받든, 내 성취가 청죽의 성취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는 소리였으니까.

‘나 혼자 잘해서는 백날을 잘해도 청죽관 생도들이 패배감을 떨치는 계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지.’

그래서는 곤란했다.

원작을 떠올려 보면 정무학관에서 제공하는 여러 영단과 영물 그리고 신병이기 혹은 귀금속들은 개인적인 성취를 보인 자에게 주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씨알이 굵은 것은 대개 기숙사 단위의 행사에서 승리를 거두어 낸 자치회에게 돌아갔어.’

그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니, 두고 봐서는 안 됐다.

‘홍옥과 석류를 구해오는 길에서 역천괴마의 이름을 들었지.’

풍문을 근거로 한 해금방주의 추측성 발언이긴 했지만, 대저 풍문이란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기에 실려 날아오는 것이었다.

인세의 그림자 속에서 거악이 발톱을 가다듬고 있었다.

‘뭐가 됐든 딸 수 있는 것은 다 따내야 해.’

그래서 나나 언 동생들이 먹는 게 낫다 싶으면 먹고, 원작의 본 주인에게 넘겨주는 게 낫다 싶으면 넘겨주든 해야 했다.

이미 원작과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어쭙잖게 당장의 편안함을 누리려고 태평하게 굴었다간, 훗날 쌩고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언용운이 아니라 청죽으로서의 승리가 필요한 거지.’

정무학관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보상을 수월하게 선점하기 위해서.

훗날 천하에 위난이 찾아왔을 때 분연히 일어날 젊은 무인들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선.’

청죽에게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그런 자신감을 만들어 내려면 다가올 춘계 기숙사 대항전에서 승리를 거둬야 했다.

‘그러니까 체육부장이 중요한 거고.’

뭐, 원작을 읽은 나였기에 체육부장을 맡길 만한 인물은 이미 정해 뒀었다.

“우 소협이나 하성이에게 선배님들 중에 동향을 살펴보라 이르신 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드린 명단에 포함이 되어 계신가요?”

“어디 보자. 여기 제일 위에 계신데요, 누님? 고완산 선배님 이분 아닙니까 용운 형님?”

“아? 이분이신가요 언 공자가 체육부장으로 점찍으신 분이?”

원작에서 청죽관을 배신하고 운매관에 이긴다는 데 돈을 건 양금표에 의해 다리가 부러지는 사내.

하지만 다리가 부러지기 전까지 기숙사 대항전의 체육 부문에서 거의 매번 우승을 차지해온 운매관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사내.

고완산(高完山).

“맞소. 늦게까지 고생했는데 부탁을 하나 더 늘려서 미안한데, 고완산 선배가 수결만 하면 체육부장 자리를 수락하는 것이 되도록 은 소저가 서류 좀 꾸며줄 수 있겠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하연에게 일거리를 하나 더 추가했다.

그런 내 모습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혀를 차셨다.

- …투서니 해금방주에게 뜯어온 재원이니 다른 일거리도 잔뜩 안겨 주었으면서, 한 개를 더 얹는구나.

‘…….’

- 소도 쉬어가며 일을 시키거늘 가만 보면 하연이 저것도 참 불쌍하구나. 지금 점호도 참석 못 하고 저러고 있었던 것 아니냐? 매달 친구빈가 뭔가 하는 것도 내는 녀석이고?

‘아니 사람 미안해지게 갑자기 그렇게 진실로 사람을 후드려 패시기 있습니까 사부님?’

그런 사부님 때문에 일순 은하연을 향한 미안함이 마음속에서 솟았지만, 이건 양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양식의 서류는 은하연이 아니면 빠르게 작성하기가 힘들 테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담아 입을 열었고.

“이런 쪽으로 내가 믿고 맡길 사람이 은 소저밖엔 없어서 그렇소.”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이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 공자는 가만 보면 참 나쁜 사람이세요.”

“…갑자기?”

“맡길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 제가 거절을 할 수가 없잖아요?”

“…….”

“뭐,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투정 한번 부려봤어요. 제 팔자죠 뭐.”

“다음 달 친구비 인하.”

- 인하?! 인하아아아?! 좀 더 써라 이 지독한 놈아!

“…면제.”

“알겠어요. 맡겨주세요. 서류 양식은 대학원생 선배님들이 작성하시는 문서를 참고하면 될까요? 졸업, 퇴관, 자치회의 허락이 없으면 계속해서 연임되도록?”

거 보십쇼. 따로 말도 안 했는데 벌써 제가 원하는 문서를 정확하게 알고 있잖습니까.

* * *

정무학관의 기숙사 대항전은 네 개의 항목을 겨루고 거기에 각 기숙사가 보인 질서와 응원 등을 심사한 태도점수를 더해 우승자가 결정된다.

태도점수는 그렇다 치고.

네 개의 종목은 각각 대련, 위기(圍棋), 체육, 제술.

개중 체육은 기숙사끼리 보행격구(步行擊毬) 시합을 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에서 행해진 실제 격구가 어떠했는지는 안 봐서 나도 모르고.

원작의 격구 시합은 장시(杖匙)라 불리는 격구채와 다리 그리고 머리를 사용해서 공을 과녁처럼 사용되는 큰 항아리에 차 넣으면 득점이 인정되고, 정해진 시간 안에 양자 간에 더 많은 득점을 하는 쪽이 이기는 경기였다.

‘내가 살던 시대로 치면 하키랑 축구가 섞인 느낌?’

물론 무협지인 만큼 공을 때리고 차 넣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도 인정이 되기에, 때때로 격렬한 경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원작에선 묘사됐다.

아무튼 내 계획대로라면 다가올 춘계 기숙사 대항전에서 청죽관의 전망은 상당히 밝았다.

‘내가 이번에 마련해온 돈을 투자하면 일단 장비가 원작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질 테니까.’

격구채와 각종 호구(護具)등의 장구를 사용하기에 은근히 장비빨도 받는 것으로 원작에 나왔다.

한데 자치 부회장이 되고 점검을 해보니 청죽관은 격구 용품은 그야말로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이번에 얻게 된 돈으로 우선 이걸 바꿀 거였다.

‘거기다 양금표도 묵사발을 내놨고.’

원작에서 청죽관이 잘하다 망하는 이유인 고완산의 다리 부상을 야기하는 요인도 제거를 했다.

그러니 이제 사람만 얻으면 되는 것 이었다.

“체육부장? 내가 말인가?”

“예. 선배님밖에 없습니다.”

“자네가 들어오고 나서 청죽관에 전에 없던 묘한 활기가 돌고 있네, 하여 내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네만.”

한데 정작 가장 중요한 체육부장 자리를 맡아 주셔야 할 고완산 선배가 난색을 표해왔다.

“체육부장이면 결국 격구(擊毬)를 해야 하는 자리 아닌가?”

“맞습니다.”

“…자네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은 공놀이에 관해 안 좋은 역사를 갖고 있고 그로인해 달갑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네. 자칫 웃음거리가 되거나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고, 다 떠나서 가문의 어르신들과 부모님들이 반기지 않을걸세.”

그야 원작을 읽었기에 알고는 있었다.

설정상 고완산이라는 인물의 조상은 고구(高俅)라는 인물이었다.

고구는 실존 인물로 송나라 때 사람인데, 수호지라 불리는 고전에도 등장하는 대표적인 악인이었다.

내가 원래부터 고구라는 양반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원작 소설의 댓글창에 ‘와! 작가님 고구 아시는구나! 겁.나.개.객.낍.니.다.’라는 댓글이 가장 많은 좋아요를 해당 회차에 얻었어서 따로 검색을 해봤다.

‘어찌 보면 그 바람에 딱 한 번 나오는 고완산까지 내 기억에 남았네.’

고구를 한마디로 말하면….

‘간신.’

미래로 치면 축구를 잘해서 국방부장관이 된 사람이라고나 할까?

자세히는 모르고 그런 사람이라 여러 실정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따지고 보면 축구 잘한다고 국방부 장관을 시켜준 황제가 제일 문젠 거 같긴 한데….’

아무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런 고구의 후예라 고완산은 공으로 하는 것은 뭐든 잘한다는 설정이었는데.

원작에서는 정현이 운매관을 선택했기에 고완산이 그저 상대편의 난적으로 나오는지라, 그저 맡기면 되겠지 했다가 생각지 못한 고비를 만난 게 문제였다.

‘흠. 가문에서 탐탁지 않아 한다라.’

고완산의 격구 실력을 묘사하기 위한 원작의 문장 뒤에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나?

하지만 해볼 만했다.

‘양금표에게 당해서 그렇지 고완산은 결국 청죽관을 위해 선수로 나서서 엄청난 격구 실력을 보여주지.’

그 말인즉 가문에서 반대하는데도 그 정도 실력을 갖출 정도로 내심 공놀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였고.

‘또 이처럼 난색을 표하면서도 원작에선 결국 선수로 나섰다는 것을 보면.’

청죽관에 애정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 점을 짚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청죽관에 묘한 활기가 돌고 있다고, 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그럼 도와주십시오.”

그런 내 말에 고완산이 난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말했지 않은가 집안 문제로….”

“집안 말고 본인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본인이 마음이 있으시다면 집안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해결을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해주겠다는 건가?”

“선배도 두들겨 패는 망나니 놈이 협박을 했다고 하십시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본인과 청죽관을 강조하며 단호하게 몰아쳤다.

“그건 사실과 다르지 않나…? …어, 아닌가? 그렇게 다르지 않지는 않나? …아니, 확실히 사실과는 다르긴 하잖나? 그건 양 선배 쪽의 잘못이었고 자네가 한 행동은 정당한 방위였네.”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지금 청죽관에서 돌고 있는 활기는 크게 타오를 수도 있고 처참하게 사그라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불씨를 살리려면 청죽관이 단체종목에서 승리를 경험하는 게 중요합니다.”

“…….”

그렇게 몰아치고 몰아쳐 여기까지 이르자, 고완산의 표정에 깊은 번뇌가 들어찼다.

대저 강호인에게 번뇌가 드는 것은 여간해선 반길 일이 아니었지만, 이 경우에 한해서는 반겨도 좋았다.

그만큼 고완산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니까.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본 결과 선배님께서 함께해 주시면 그 승리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당금수석이나 되는 사람이 이러시나.”

나는 뒤틀려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누르며 계속해서 고완산을 향해 청죽의 정신을 말했다.

“같이 먹고 자고 땀 흘리는 청죽관 생도들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과연 청죽관의 정신 중 하나인 성실을 다하고 계시는지 고려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끙.”

그것으로 끝이었다.

“알겠네. 자네는 지긋지긋할 망나니 소리를 자청하며 이렇게 부탁을 해오는데, 선배가 돼서 또 한 사람의 청죽인으로서 집안 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그 말씀은?”

“그래. 체육부장. 내 맡기로 함세.”

내 간곡하고도 단호한 부탁에 고완산은 결국 수락을 입에 올렸다.

나는 혹여라도 고완산이 마음을 바꿀까 미리 문밖에 대기시켜 놓은 은하연을 바쁘게 불러들였다.

“감사합니다. 고 선배. 근데 낙장불입이십니다? 은 소저! 어제 꾸며놓은 서류 좀 가져오시오!”

“여깄어요. 언 공자. 자, 자 선배님. 거기 갈아놓은 먹물에 이렇게 손을 담그셨다가 여기에 찍으시면?”

꽝-

“끝.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체육부장님?”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어?”

* * *

한편, 역천괴마 소식을 듣고 돌아온 언용운이 청죽관을 살려내기 위해 나름의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이때.

청죽관과 정반대에 위치한 기숙사인 향란관에서는 어떤 모의가 한창이었다.

주최자는 향란관의 공보부장인 운혁을 필두로 한 일당이었고.

“오늘 오후에 사대 기숙사의 신입생들의 모두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인 무술학개론의 첫 수업이 있지?”

“예. 선배님.”

참석자는 무길이라는 이름의 후기지수로 공동파의 쇠퇴로 인해 새롭게 구파일방의 말석을 차지한 모산파의 제자였다.

“그 수업은 대대로 첫 수업때 짝을 맞춰 대련을 한다. 짝은 용기 있게 지명하는 자가 있으면 그걸 우선하고 나머지는 추첨으로 뽑지.”

“그렇습니까?”

“그래. 너는 거기서 언용운을 지명해라. 그 건방진 놈이 우리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다.”

“제가 언용운을요?”

“그래. 요즘 향란관에 어슬렁거리며 네 동기인 당옥기를 꾀어내는가 싶더니, 어제는 외출까지 나갔다 왔다. 그 개자식이 나와 얼굴을 붉힌 일이 있는데, 그 일로 원한을 품었는지 우리 대 향란관의 이름에 갖은 방법으로 먹칠을 하고 있다. 네가 본때를 보여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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