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90화 (90/444)

제90화. 무술학개론

“…뭔가 당한 거 같은 느낌이 드네만. 아무튼 잘 부탁하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체육부장님.”

“후. 체육부장이라니 부장은커녕 자치회에 들어올 생각을 한 적도 없는데, 과연 내가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고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선배님께서 제일 잘하실 수 있는 일만 맡길 것이니까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만?”

“예. 체육부장님께서는 다가올 춘계 기숙사 대항전에서 있을 격구 경기에서 어떻게 하면 저희 청죽이 다른 기숙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만 집중적으로 고민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것만 집중적으로 한다면 확실히 내 능력의 범주긴 한데.”

고완산은 그것만 잘해주면 됐다.

다른 기숙사가 그간 벌인 격구 경기의 기록지를 뒤져 전술을 분석해 파훼법을 찾고, 청죽관의 전력을 그 파훼법에 맞게 끌어올리는 일.

그것만 제대로 해도 본인의 몫을 다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나? 원래라면 생도들의 기량 증진과 건강과 위생까지 챙겨야 하는 자리로 알고 있는데.”

“예. 나머지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어차피 청죽관의 전체적인 기량 증진이야 이번 자치회가 출범하고 나서 쭉 제가 맡아왔지 않습니까?”

“하기야 그렇긴 하지. 근데 건강이랑 위생 쪽은 어쩌시려고? 그것도 본디 체육부장의 업무라 알고 있는데.”

“보건 업무 말씀이십니까?”

“맞네. 단순히 챙기는 것을 넘어서 다른 기숙사들은 체육부와 총무부가 합심하여 각 기숙사의 이름을 건 고약 같은 것을 민간에 팔아서 재원을 얻거나 하는 것으로 아는데, 자네 의학이랑 본초학 쪽으로도 조예가 깊나? 체육부에서 사용할 재원이 좀 마련이 되어야 할 것인데, 격구라는 게 사실 장비도 중요하거든.”

음.

보건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고완산이 왜 꺼내나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청죽관의 열악한 장비 사정은 어떻게 해결이 되겠냐는 질문을 우회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직역하면 우리 돈 있냐?’

그런 고완산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숨이 섞인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 웃음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일까?

고완산이 멋쩍어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체육부장 못하겠다고 이유를 대던 놈이 막상 수락하자마자 돈 이야기를 했군. 뭐 보여준 것도 아직 없는데 말이야. 하하. 미안하네. 그리고 좀 더 크게 웃어도 되네.”

“아, 그런 이유로 웃은 게 아닙니다 선배님.”

“그럼?”

돈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데란 생각에 웃은 건데.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 드려야 하지?

“그냥 보여드리는 게 빠르겠습니다. 은 소저, 내가 어제 부탁한 것 중에 격구 장비 견적 뽑아 달라고 한 거 준비됐소?”

“서류상으로는 됐지요. 재료 확보랑 장인들을 수배하는 건 시작해봐야 아는 문제라 사정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요. 체육부장님께 보여 드릴까요?”

“그래 주시오.”

그렇게 내가 미리 준비해 두라고 한 서류를 확인하자, 고완산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 이건!”

“예. 주문하려는 격구 장비 품의서입니다.”

“용안목(龍眼木)과 물소 가죽을 사용해 만든 장시(杖匙: 격구채)를 마련해 주겠다고?!”

“음.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걸로 바꾸셔도 됩니다.”

“아니,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 이건 내가 따로 구하려고 했는데, 터놓고 하지도 못하는 취미에 너무 큰돈을 쓰는 것 같아 참은 건데!”

“그. 진정하십시오.”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자네 어디 있다가 이제 왔나! 작년에 좀 오지!”

근데 그 정도가 심했다.

하여 나는 고 선배를 은하연에게 넘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은 소저. 선배님이 좀 흥분하신 것 같은데, 천천히 설명 좀 해드리시오. 아울러 돈 걱정 하지 말고 필요한 게 생기시면 재깍재깍 말씀을 하셔도 좋다는 말도 드리고.”

“큽. 그럴게요.”

그렇게 고완산 선배를 총무부에 떠넘긴 나는 가만히 선배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청죽관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사업도 해볼 생각은 있지.’

물론, 내게 약학이나 본초학에 관한 소양은 없었다.

전생 덕분에 독에 관한 소양은 좀 있었고, 간단한 외과적 응급 처치 정도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약재를 조합에 약을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청죽관의 재학생과 신입생 중에서도 그쪽으로 눈이 뜨인 사람은 없었다.’

공보부는 똑같이 부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하성이 놈과 소릉이 녀석이 적임이라 차장은 뽑아뒀는데, 괜히 체육부는 차장도 안 뽑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똑똑-

“들어와라. 당옥기.”

“……? 난 줄 어떻게 알았어?”

적임자가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까.

“여기 문 두드리고 들어오는 사람 너밖에 없다.”

“음? 당 소저? 요즘 자주 보네요. 아, 저번에 말놓기로 했나요 우리?”

“…으응.”

“제가 반말은 익숙지 않아서. 흠흠. 아, 안녕이라고 하면 되, 되나?”

“응! 하연이 안녕!”

어색하기 그지없는 은하연이 말을 놓는 장면을 보는데.

생각해 보니 더 어색할 사람이 한 명 더 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 누구신가?”

나는 빠르게 고완산 선배에게 당옥기를 소개했다.

“아. 선배님 이쪽은 제 친굽니다. 당옥기라고 무복 색을 보시다시피 향란관의 신입 생도인데, 친구가 저밖에 없어서 우리 자치회실에 자주 출몰하는지라 앞으로 종종 보시게 될 겁니다.”

“너 말고도 친구 있거든? 아니 많거든!”

“그런 걸로 치고. 당옥기. 이쪽은 우리 체육부장님이시다.”

“치긴 뭘 쳐…! 가 아니고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 그래. 반갑다.”

그렇게 고완산 선배에게 당옥기를 소개시킨 나는 다시금 시선을 당옥기를 향해 옮겼다.

“그래서.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냐.”

“당연히 우리 애들 때문이지. 너 애들 밥은 줬어?”

한데 생각 없이 열린 당옥기의 입에 자치회실에 다시 한번 어색한 기류가 들어찼다.

“애들?”

“애, 애들?”

“…거미. 독거미를 말하는 겁니다.”

“…아. 거미. 저는 또 뭐라고.”

“독거미? 도, 독거미가 여기 있나?!”

“제 개인 연공실에 뒀습니다. 자치회실에 둔 건 아니니. 그 선배님? 이제 책상에선 좀 내려오셔도 됩니다.”

- 저 덩치로 거미 같은 미물을 무서워하다니…. 저놈 저거 격구 실력은 온전한 거 맞느냐?

‘순식간에 책상 위로 올라가던 순발력에 초점을 맞춰주십시오 사부님.’

- …하기는.

뭐, 아무튼.

“당연히 우리 홍옥이랑 석류를 말하는 거지 달리 무슨…?”

마음 같아선 생각 좀 하고 말을 하라고 당옥기의 이마에 꿀밤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아?”

본인의 얼굴이 벌게지기도 했고, 또 당옥기에게 맡길 일도 있어서 그냥 참았다.

‘청죽관의 특제약 부활 사업을 맡을 사람은 너다 당옥기.’

녀석한테도 손해 가는 것은 아니었다.

원작의 당옥기는 이 시기에 혈수만독주를 구하려다 비싼 가격에 좌절한다.

그리고 방향성이 괜찮다 판단되면 혈수만독주를 연구실에 들여올 수도 있다는 말에 혹해 대학원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도우미 일을 일찍이 시작한다.

‘딱히 학관 생활에 정을 못 붙이던 상태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지.’

결과적으론 갈리기만 갈렸다.

본인이 원하는 성과는 혈수만독주가 구해져 도우미를 관두고 오롯이 제 연구에 집중한 이 학년 중순 무렵부터 얻기 시작하니까.

‘굳이 실패가 예정된 원작의 길을 가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당옥기에게 연구실을 제공해주고.

녀석은 원하는 연구 실컷 하면서 겸사겸사 청죽관의 특제약 부활 사업도 진행하고.

그러다 보면 양산형 천독단과 만독단도 어느 순간 완성될 것이다.

완전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

“아무튼 당옥기.”

“응?”

“나랑 일 하나 하자.”

물론, 당옥기가 알 한 개를 먹을 때 내가 두 개를 먹긴 할 거지만?

- 허허이. 용운이 이놈이 제 기숙사 식구들도 모자라 이제 남의 기숙사생한테까지 저 일 하나 하자 소리를 하는구나? 도망쳐라 당가의 아해야!

* * *

연구실을 내주고 연구비도 적절히 지원해 주겠다는 내 제안을 당옥기가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봤는데.

“…수상한데.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은데.”

“거. 의심 진짜 많네. 싫으면 말던지.”

“아니 누가 안 한대?! 고마워! 할게! 할 거야!”

- …쯧쯧. 저것도 제 팔자를 제가 꼬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보부장은 파견 나간 선배가 돌아오시면 맡기면 되고.’

그렇게 청죽관의 자치회 인선은 대략 마무리되었다.

이후로는 서류 더미에 잠시 묻혀야 했다.

당옥기가 요청해온 이런저런 연구 용품에 대한 재고 파악과 서류 작업을 하고, 명상도 잠시 하고.

뭐, 그러고 나니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오늘의 점심 상대는 경룡이 형.

우리 진회장님이셨는데.

“뭐, 자네 연공실이니 당 후배 건은 부회장 자네 뜻대로 하게. 근데 고완산 그 친구 나도 작년에 눈여겨보기는 했네만, 본인이 한사코 거절해서 못 데려왔었는데 그 돌부처 같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돌렸나? 참. 자네가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군. 자네가 청죽관의 복덩이야 복덩이!”

“제가 없었어도 고 선배는 함께해 주셨을 겁니다. 생각보다 청죽관에 대한 애정이 많으신 분이시던데요.”

원작에서도 그랬고.

“아니야. 자네가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야. 내가 정무학관에 입관해서 제일 잘한 일이 자네 데려와야 한다고 노삼 교수님 바짓가랑이 붙든 일이야.”

그렇게 경룡이 형과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내 시간표상의 오늘 첫 수업이자, 신입생 전체 필수 과목인 무술학개론의 첫 수업 시간이 되었다.

* * *

사대 기숙사의 신입생들이 모두 모인 대연무장.

아직 교수님들이 오시지 않은 터라, 무복의 색별로 나눠 모인 신입생들이 각자 떠들고들 있었다.

물론, 그렇게 떠드는 신입생들 중엔 언동생들도 포함이었다.

“무술학개론은 첫 시간에 대련을 한다던데 저 잘할 수 있을까요?”

“은 소협. 배움의 터에 왔는데 잘하는 게 중요하겠습니까? 부족함이 있다면 앞으로 채워나가면 될 일이니 오히려 반길 일입니다. 넘침이 있다면 그것을 오히려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나처럼 딱딱한 말씀이긴 한데, 오늘은 정현 도장 말씀이 맞아. 스승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

“쳇. 정현 도장은 이미 용운 형님께 인정받는 실력이시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누님도 검후 교수님이 봐주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고요. 안 그래 우 동생?”

“후하. 후하. 저는 그런 거 잘 모르겠고. 이거 지명하고 싶은 사람은 지명을 하고 나머지는 추첨으로 대련할 상대가 정해진다던데…. 누가 절 지목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설마 저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겠죠?”

듣던 중에 몇 놈.

아니 정확히는 하성이와 소릉이 녀석이 좀 샛길로 빠지는 것 같아서 나도 입을 열었다.

“은하성. 네가 익힌 남궁가의 검도 정현이 익힌 무당의 검이나 검후 교수님의 옥녀검에 뒤지는 검이 아니다.”

- 우리 파천검법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 파ㅊ… 아무튼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요즘 하는 것처럼만 하면 돼.”

“예. 형님….”

“그리고 우소릉.”

“예?”

“혹 누가 너를 지명하더라도 너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 거다. 만만하게 본 거라면 모를까.”

“그, 그럴까요?”

“그래. 그리고 네 쾌검은 은근히 까다로우니까 자신감을 좀 가져. 그래서는 이길 것도 지겠다. 스스로 자신감을 못 지피겠으면 그 속에서 내 이름이나 청죽관의 이름이라도 태워 봐.”

“언형의 이름이나 청죽관의 이름을 태워 보라고요?”

“그래. 쉽게 생각해서 네가 지면 내가 쪽을 판다고 생각해봐라.”

“…아.”

그때였다.

요즘들어 조바심을 보이는 은하성과 한결같이 자신감이 없는 우소릉의 마음가짐을 다잡아주고 있는 그때.

저마다 녹색 의복들을 갖춰 입으신 한 무리의 교수님들이 연무장에 들어서셨다.

- 처음 보는 얼굴들도 많구나?

사부님의 말마따나 개중엔 처음 보는 얼굴들도 있었다.

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입관 시험이야 교수님 중에 일부만 감독관으로 차출되는 것이었고, 입학식 같은 행사에도 사감 교수가 아니면 참석이 의무는 아니었다.

하여 불출을 선언하고 자신의 연공이나 연구에만 몰두하는 은둔형 교수님도 계셨다.

‘은 소저의 스승이 된 검후도 대표적으로 그런 유형이시지.’

하지만 일 학년들이 모두 모여 일대일 대련을 펼치는 무술학개론의 첫 수업은 그런 교수님들도 관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뭐, 아무튼.

그렇게 많은 교수님이 모인 와중에 비교적 낯이 익은 교수님이 연무장의 중앙으로 나오시며 입을 여셨다.

“뭐, 향란관의 생도들은 따로 보기도 했으니 잘 알겠지만, 다른 기숙사의 생도들은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무술학개론 수업의 공동 교수 중 한 명을 맡게 된 창량이다.”

천하십검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검객이자, 향란관의 사감 교수를 맡고 있는 화산백미 창량.

그가 입을 열자, 묵색 무복을 입은 향란관 생도들이 하나같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콧대를 높였다.

아, 아니다. 하나같이는 아니구나. 당옥기는 빼야겠다.

“무술학개론의 첫 수업은 너희들 간의 대련으로 이루어진다. 대련을 실시하는 이유는 입관 시험 성적으로 너희들의 등위를 갈라놓긴 했지만, 입관 시험의 등위는 오롯이 무위의 수준을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데 왜 나를 쳐다보면서 말하지?

“너희들의 실질적인 무위를 여기 모이신 교수님들과 함께 가늠을 할 것이고, 그 등위를 토대로 이 수업의 공동 교수님들이 앞으로 수업을 진행해 나갈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입을 연 창량은 곧바로 수업의 시작을 입에 담았다.

“선배들에게 들었겠지만 그래도 내 수업이니 방식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겠다. 대련 상대는 기본적으로 추첨으로 결정된다. 하나, 무인에게 투쟁심이 있다는 것은 칭찬할 일이니 따로 겨뤄보고 싶은 자가 있는 자가 있는 신입생이 있다면 추첨에 앞서 기회를 줄 것이다. 겨루고 싶은 자가 있는 사람 거수.”

그런 창량의 음성에 황색 무복을 입은 제갈설지가 손을 들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 윤국관의 제갈설지. 너는 누구와 겨뤄보고 싶나?”

챵량의 물음에 답을 준비하는 제갈설지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분명히 나랑 비빌 급이 아니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입을 벙긋거려 주었다.

‘내 상대가 되고 싶다면 동생들부터 넘고 오기로 했잖소?’

그에, 제갈설지의 이가 빠득 하고 갈리는가 싶더니.

펼쳐진 그녀의 손가락이 나를 지나쳐 내 옆에 선 녀석을 가리켰다.

“…정현 님. 정현 님과 겨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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