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무길은 바보가 아니었다
제갈설지가 대련 상대로 정현을 지목하자, 모여 있던 사색 무복의 신입생들 사이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제갈 소저가 정현을 선택한 거지? 언용운이 아니라?”
“확실히 정현이라 했네. 왜 문제라도 있나?”
“아니. 입관 시험 당시 언용운 제갈 소저 정현 이렇게 셋이 동점이긴 했지만, 언용운과 제갈 소저 쪽은 조장이어서 실질적으로 정현은 삼등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나?”
“그건 그렇군.”
“해서 개인적으론 당시 감독관을 맡으신 교수님들이 언용운의 손을 들어 주셔서 열리지 않았던 수석 결정전이 오늘 열리지 않을까 기대를 했거든.”
“하기야 나도 당금수석 자리를 놓친 것을 제갈 소저가 상당히 분해했다는 소문을 듣기야 했네만.”
음.
듣던 중 맞는 말이네.
“그 뒤에 말이 더 남은 거 같은데?”
“뭐, 천하의 소무후 제갈설지 소저가 아닌가? 다른 생각이 있지 않을까?”
“흠.”
“기왕지사 당금수석의 자리는 넘어갔고, 설욕을 하려면 다가올 월단평이나 기숙사 대항전에서 해야 할 테니, 무당파 내에서 검의 천재로 위명이 자자한 정현과 이 시점에 한번 검을 섞어놓고 싶었겠지.”
이건 아닌데.
이미 제갈설지는 대차게 한번 덤볐다가 ‘개같이 패배’ 소리를 듣고 간 참이었으니까.
‘뭐, 비공식 대련이어서 언 동생들이랑 그때 같이 왔던 당옥기 정도 말고는 알 리가 없긴 하네.’
뭐, 아무튼.
“청죽관의 정현. 윤국관의 제갈설지는 중앙으로 나머지 생도들은 연무장에 테두리에 쳐놓은 경계석 밖으로 물러나라.”
그렇게 제갈설지와 정현의 공식적인 첫 대련의 판이 깔렸다.
나는 창량 교수의 말에 따라 연무장에서 물러나기 전에 정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입을 열었다.
“정현.”
“예. 언 소협.”
원작의 정현은 제갈설지에게 검술로는 한 번도 패하지 않는다.
워낙에 구르고 굴러서, 작중 내내 만전의 몸 상태였던 적이 극히 드뭄에도 그랬다.
‘그에 비하면 이쪽의 정현은 진짜 가슴이 푸근해질 정도지.’
나와 함께 다니며 잘 먹고 잘 훈련하고 잘 쉬어서 어쩐지 때깔이 반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니까.
‘하지만 방심을 해선 안 되지.’
구르는 돌이 만전이긴 힘들어도 확실히 이끼는 끼지 않는다.
내 옆의 정현은 원작에 비하면 덜 구른 돌이었다.
물론, 정현이 그동안 논 것은 아니었다.
가장 열심히 청죽관의 전체 수련을 참여하고 있는 녀석이었고, 선도부장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쯤에서 마음을 한번 다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배려가 습관인 정현의 성정.
그리고 한번 이겼던 상대라는 사실.
독이 바짝 오른 제갈설지.
삼박자가 자칫 잘못 맞아떨어지면 피곤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정현의 실력이 위라는 것은 원작이 공인하고 파천검문의 장문인 사부님과 후계자인 내가 공인하는 바지만.’
저 정도 실력 차이에서는 마음가짐이 승부를 결정짓기도 하니까.
그에 나는 입을 열었고.
“봐주지 마라.”
그런 내 말에 정현의 눈빛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예. 아까 우 소협에게 해주셨던 말씀 저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너를 지명한다고 미워하는 것은 아닐 거라는 거? 하긴 제갈설지는 일단 너보다는 내가 미운 거 같긴 하다.”
봐주지 말라는 소리가 제갈설지의 귀에 들어간 것인지, 옆통수가 상당히 따가워오고 있었다.
“아뇨. 그 뒤의 말씀 말입니다. 제 패배가 청죽관과 언 소협의 이름에 누를 끼칠 수 있다는 말씀이요.”
음.
이런 표정의 정현이 방심 같은 것을 할 리는 없지.
나는 정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줬다.
그리고 창량의 말에 따라 연무장의 테두리에 쳐놓은 경계석 밖으로 걸음을 옮기니,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의문을 보내오셨다.
- 정현 저 백지 같은 녀석이 방심치 않도록 단속을 하는 모습이 퍽 훈훈하기도 했고, 또 봐주지 말라는 말 자체가 파천검문의 후계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니 스스로 거는 암시 같기도 해서 보기에 퍽 대견했는데. 정작 네놈의 표정은 왜 그러느냐?
‘제 표정이 어떤데요?’
- 이 자리에 참 면경이 없구나. 저기 우물이 있으니 물 한 바가지 떠다 살펴보거라. 꼭 똥을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느니라.
‘아. 그건 돈을 못 걸어서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내기판을 벌이면 분명히 제갈설지가 이긴다에 많은 사람이 표를 던질 텐데, 정규 수업 시간에는 내기판을 열 수가 없으니 그 눈먼 돈을 못 긁어 오는 게 참 아쉽습니다.’
- …정현이 녀석이 나름 의지를 다지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드느냐…? 너어어는 진짜.
* * *
“그럼 규칙을 설명하겠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고 두 번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니 잡담들은 그만하고 귀를 세우도록. 살초와 꼼수는 금지한다. 그런 수가 보이면 내가 바로 개입할 것이고, 그런 수를 사용한 생도는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살초와 꼼수를 적절히 펼칠 수 있는 것 또한 기량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지만.
어쨌거나 이건 수업이었다.
그것도 첫 수업.
양자 간의 승패를 가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신입생들의 기본적인 무위를 확인하고 나아가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첫 단추인 만큼 충분히 이해가 가는 규칙이었다.
“제한 시간은 이 모래시계가 다 떨어질 때까지다. 그 전에 의사에 반하여 무기를 놓치거나, 양 무릎 중 어느 한쪽이라도 땅에 닿거나, 경계석을 넘어 장외로 떨어지거나 혹은 양자 중 어느 한쪽이 졌다는 의사 표현을 하면 패배다. 제갈설지. 정현. 준비됐나?”
그렇게 창량의 설명이 끝나자.
제갈설지가 검결지를 정현이 무당의 기수식을 취했고.
“예.”
“예.”
“그럼 시ㅈ…!”
창량의 입에서 시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제갈설지가 득달같이 땅을 박찼다.
챙!!
챙! 채채챙!!!
그렇게 진검을 사용하는 공식적인 첫 대련이자, 실질적으론 두 번째 대련인 제갈설지와 정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연무장을 수놓는 두 사람의 검초에 신입생 대부분이 입을 쩍 벌렸다.
“정현 저 녀석이 검술만큼은 천재라더니, 저 제갈 소저의 공격을 다 막아내고 있군?!”
“그러게 말이야 나는 눈으로 쫓는 것도 다 못 쫓을 지경인데.”
“뭐, 저렇게 막기에 급급해서야 답이 없지. 역시 제갈 소저의 검이 세인들의 말처럼 문무를 겸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야.”
발톱을 세운 용처럼 달려드는 제갈설지의 와룡검과 그런 제갈설지의 검을 유유히 받아내는 정현의 태극검이 그야말로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제갈설지 쪽이….’
- 지겠구나.
‘예. 그것도 저번 대련보다 훨씬 빠르게요.’
제갈설지와 정현의 대련을 한번 보았기에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에 제갈설지의 검에는 번뇌와 고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었다.
- 제갈가의 아해 저것이 짧은 시간에 설욕을 할 생각에만 매몰되어 너무 많은 생각을 검에 담은 모양이로다.
‘그러게요.’
-…한데 벌써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느냐? 네 동기들은 단순히 눈으로 초식을 쫓기만도 바쁜 것으로 보이는데? 하기사 그런 놈들과 네 녀석은 종자가 다르긴 할 테지 내 눈은 틀릴 리가 없으니.
‘……? 칭찬이십니까 방금 그거?’
- 험험. 칭찬은 무슨. 파천검문의 제자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한다!
아무튼.
제갈설지와 정현의 대련은.
챙강!
태극을 짊어진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있던 정현이 내지른 단 한 번의 공격에 제갈설지가 검을 놓치며 끝이 났다.
사부님과 내 예상대로 정현의 승리였다.
“…쯧. 제갈설지 네 패배다.”
그에 창량이 무언가가 탐탁지 않은 듯 입을 열었고.
제갈설지는 연패가 믿기지 않는지 선 채로 검을 놓친 제 우수를 바라보며 망부석이 되었는데.
“…씽.”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얼마 전에 배운 전음을 사용해 ‘개같이 연패’ 소리를 해주려다, 그것까지 하면 제갈설지가 주화입마에 걸릴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런데 제갈설지 저 승부욕 귀신에겐 그건 그거대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는지.
벌게진 눈으로 울컥하며 제 검을 줍더니, 저쪽에서 먼저 전음을 보내더니.
[두고 보세요.]
[내 앞에서 두고 보자는 말을 한 사람치고 좋은 꼴을 보고 간 사람이 없긴 한데, 봐달라시니, 봐드리긴 하겠소. 단 순서는 지키시고. 정현부터 넘으시오.]
[진짜 두고 보세요!]
씩씩거리며 연무장을 내려갔다.
그렇게 첫 대련이 끝났고.
오늘 대련의 전초전을 봤던 언 동생들과 당옥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입생들이 정현의 승리를 받아들이느라 입들이 벌어진 이때.
창량 교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대련 상대를 지목하고 싶은 다른 생도 있나?”
그런 창량의 음성에 검은 무복을 입은 생도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향란관의 무길이로구나.”
자신이 사감으로 있는 기숙사의 생도여서 창량도 손을 든 생도가 누군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 교수님.”
“그래 너는 누구와 겨뤄보고 싶나?”
“언용운과 겨루고 싶습니다.”
근데 나도 저 무길이라는 생도를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은 아니었고.
‘우소릉 그리고 아버님이랑 막역한 사이인 석가장의 자제인 운매관의 석호열이라는 친구랑 같이 턱걸이로 붙은 친군데?’
그러니까 지금 이건 전체 석차 꼴등이 수석을 지명한 상황이었다.
* * *
무길은 바보가 아니었다.
운혁이 그에게 무술학개론의 첫 대련 상대로 언용운을 지명하라 했을 때.
그는 운혁이 자신에게 왜 그런 일을 맡기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남궁윤. 그 친구를 두고 굳이 제게 이런 부탁을 하시는 이유는…. 전체 석차 꼴찌인 제가 수석인 언용운을 거꾸러뜨리는 모습을 기대하시는 것이군요?”
“맞다. 교수님들이고 선배님들이고 다들 당금수석 당금수석 하며 그 녀석 이야기를 하는데, 무길 네가 언용운을 밟아주면 그런 이야기가 쏙 들어갈 것이다. 언용운 본인도 더 이상 당금수석임네 하며 으스대며 돌아다니지 못하겠지.”
의도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운혁의 말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제가 근데 언용운 그 녀석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저는 꼴찌고 녀석은 수석인데요?”
“내 의도를 알아채길래 머리가 좀 돌아가는 녀석인가 했더니, 결정적인 대목에서 맹하구나. 생각을 해봐라. 수석과 꼴찌를 순수한 무위로 갈랐나? 아니잖나! 자네도 조만 잘 걸렸으면 좀 더 높은 등위를 차지했을 거야.”
“하지만 입관 시험에서 언용운의 조는 다른 조의 구슬을 빼앗아 오지 않았습니까? 그만큼의 실력이 있다고 저는 받아들였었는데요?”
“그러니까 그것도 조별 과제였지 않나. 내 사질인 정현. 그놈은 우리 무당파의 웃어른을 발고할 정도로 위아래가 없는 놈이지만 검술 실력만큼은 무당 전체가 인정하는 기재다. 그놈이 언용운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다.”
“아! 지금까지 정현이 언용운의 해결사 역할을 해왔다는 말씀이시군요? 무력이 필요할 때 나서는?”
“그래. 게다가 그 구슬 사태는 우소릉이라는 도둑놈도 한몫을 크게 거들었다. 교수님들이 뭐에 씌셔서는 그냥 넘어가서 그렇지. 언용운은 그냥 혀가 아주 밉살맞고 머리 돌아가는 게 비상한 놈일 뿐이다. 무공은 아무리 높게 쳐도 신입생 평균 정도일 거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언용운이 동윤관에서 선배들을 쥐어팼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쯧. 청죽관 그 허접들을 선배라고 부르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됐다. 아무튼 그놈들은 별것 아닌 놈들이다. 그리고 내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그날 정현도 함께했다. 녀석이 그날도 해결사 노릇을 했겠지. 그리고 동윤관은 우리로 치면 검선관 같은 곳이다. 무기를 사용할 수 없어.”
“그러니까요. 주먹만으로…. 아! 혹시?!”
“그래. 진주언가는 원래 권법으로 이름난 가문이다. 백번 양보해 주먹깨나 쓸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놈은 망나니다. 청죽관 안에서야 마음대로 날뛰고 입막음을 하겠지만, 모든 신입생과 숱한 교수님이 보는 앞에서 복권되지 못한 망나니가 가문의 무공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항상 차고 다니는 그 검으로 나서겠군요?”
“맞다. 무위만 놓고 보면 무길 네가 절대로 하위권 생도가 아니거니와. 언용운이 놈이 쫓겨난 때를 역산하면 그놈이 검을 든지 빨라 봐야 이제 고작 일 년이다. 일 년 만에 네 수준을 따라잡을 정도로 검이 쉬운가? 여기까지 하지. 절절매며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다만 이건 너한테도 기회라는 이야기다.”
운혁과 그런 대화를 나눈 뒤.
무길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 고민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방금 있은 제갈설지와 정현의 대련이었다.
‘정현은 진짜다.’
운혁 선배의 말이 맞았다.
향란관과 청죽관의 자리가 가까이 있어 좀 전에 언용운이 하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주변 인물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을 이름을 걸고 싸우라는 듯한 말을 강조했다.
‘언용운은 가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무길의 목구멍으로 다디단 꿈이 마른침의 형태로 넘어갔다.
‘수석을 거꾸러뜨린 꼴찌!’
언용운의 자리가 내 것이 된다.
동기생들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학관의 관계자들이 언용운이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향란관은 전통과 역사와 근본이 있으니 허접한 청죽관처럼 선배들이 내 앞에서 설설 기시지는 않겠지만.’
자치회에 없는 자리를 내서라도 자신을 밀어줄 것이다.
공명심과 욕심에 사로잡힌 무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