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92화 (92/444)

제92화. 무길이라는 분은 바보인 걸까요?

무길이 언용운을 대련 상대로 고르자, 무술학개론 수업을 주도하던 창량이 미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청죽관의 언용운. 향란관의 무길은 중앙으로.”

그 말에 언용운이 두둑두둑 목을 풀며 연무장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은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는데.

“…무길이라는 분은 바보인 걸까요?”

은씨 남매 중 은하연의 말엔 다른 언 동생들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누님. 뭐, 신종 자결 방법 같은 것일까요?”

하나 은하성이 입을 열었을 때는 제갈설지를 제압하고 돌아온 정현이 멋쩍게 웃으며 제동을 걸었다.

“언 소협께서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시는 분이 아니신데, 살(殺)까지야 가겠습니까?”

“…일종의 비유였는데, 정현 도장이 그렇게 받아 버리시면….”

“예?”

“…아닙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현 도장은 참 만사에 진심이신 것 같으셔서. 참 부럽습니다. 부러워요.”

“아. 감사합니다. 은 소협도 매일매일 운기조식을 하실 때 그저 내력을 돌리는 것에 그치지 마시고 이어서 명상을 하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

“저는 그렇게 하는데, 무당의 제자가 된 지 이미 한참인데도 아직도 도(道)라는 글자가 매일 새롭게 느껴짐을 마주하고 나면 만사에 진심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샘솟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예?”

그렇게 잠시 다른 길로 샌 이야기를 다시 원래의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은 우소릉이었다.

“근데요. 저 무길이라는 분은 저랑 같은 점수로 간신히 추가 합격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언 형을 대련 상대로 지목을 한 걸까요?”

그런 우소릉의 말에 은하연, 정현, 은하성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내 말이.”

이래저래 언용운의 진면목을 꾸준히 확인해온 언 동생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고.

조금이나마 언용운이라는 인간의 맛을 본 청죽관의 신입생들의 생각 또한 그와 같았다.

하지만 다른 기숙사의 신입생들은 무길의 선택이 이해가 가는 모양이었다.

“당금말석이 당금수석을 대련 상대로 지목하다니. 별일이 다 있군.”

“그만큼 언용운이 당금수석 자리를 차지한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다는 거 아니겠나?”

“하기는. 창량 교수님도 그러시지 않았나. 입관 시험 성적은 제대로 된 무위 수준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제갈민 교수님은 대단하다 추켜세우셨지만, 사실 내 눈에는 뭐가 대단한지 이해가 안 갔었어. 장학 제도도 세 개나 혼자 가져가고 말이야! 그 무슨 객잔 골목에 흑도 놈들이 숨어든 걸 발고한 걸 공으로 쳐준 모양이던데, 망할 놈들. 내가 묶던 객잔으로 와줄 것이지. 그럼 그 공이 내 차지가 됐을 것 아닌가?”

“하기는. 듣고 보니 그렇네. 젠장, 그럼 내가 먼저 언용운과 대련을 해보겠다고 손을 들어볼 걸 그랬군.”

“자네가?”

“그래. 저 녀석이 진주언가에서 쫓겨난 시점을 생각하면 검을 쥔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런 주변의 음성을 들은 청죽관의 언 동생들은 저마다 콧방귀를 꼈다.

“참나.”

“하?”

“와.”

“허?”

그런데 개중엔 정현의 것도 껴 있어서 다른 언 동생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고 알았다.

“큭큭.”

“하하.”

“큽. 근데 정현 도장도 콧방귀 같은 걸 다 하실 줄 아시네요?”

“으, 은 소저! 다른 기숙사의 동기분들이 너무 어이가 없는 소리들을 하시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은 소협! 우 소협! 다른 분들도 그만 놀리십시오!”

“아. 웃겨라. 하. 근데 새삼 언 공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고 보니 검을 드신 지 고작 일 년밖에 안 되신 건데 저 정도 시라는 거잖아요? 저는 절대로 내년 이맘때 저런 분위기를 풍길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감히 누굴 평가할 주제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감히 해보자면, 언 소협은 이른바 천재라는 인종이신 게 아닐까 합니다.”

언용운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무림학관의 검술천재가 본인인데 사돈 남 말한다며 어이없어했겠지만, 본인이 자리에 없었다.

그에 정현과 은하연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근데 은 소저도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 재능을 이끌어줄 사부님도 얻으셨으니 고기가 물을 만난 형국입니다.”

“다 언 공자 덕분이죠.”

“조바심에 휩싸이지 마시고 열심히만 하시면 금방 꽃을 피우실 수 있을 겁니다.”

“예. 언 공자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죠. 으음. 그나저나 아깝네요.”

“음? 무엇이 아까우시다는 겁니까?”

“이렇게 눈먼 자들이 많은데 내기판을 벌이지 못한다는 거요.”

“…예?”

“돈을 걸라 하면 무길에게 걸 사람들이 저렇게 잔뜩 있는데 저 눈먼 돈들을 쓸어 담지 못하다니 아쉽잖아요.”

그렇게 은하연이 아쉬워하고 있는 이때.

잠자코 있던 은하성이 입을 열었다.

“아쉬운 대로 저희끼리라도 하죠? 수업 시간에 대놓고 내기판을 벌이는 것은 경을 칠 일이지만. 뭐 저희끼리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근데 그런 은하성의 말에 우소릉이 그건 좀 아니지 않냐며 주춤주춤 입을 열었다.

“근데 저희끼리 내기했다는 거 걸리면 언 형이 다 압수해 가실 것 같은데요?”

“…아. 그건 또 그렇네.”

“그리고 애초에 내기가 성립이 됩니까? 다 언 형에게 거실 것 아니신가요?”

그때였다.

우소릉의 말에 은하성과 정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때.

은하연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돈 말고 일거리를 걸면 어때? 오늘 체육부장님도 새로 오셨고, 언 공자가 옥기에게 연구실을 내주기로 하셔서 잡무가 산더미야. 우리 차장님들한테만 미루기 미안해서 이따가 언 공자한테 말해서 자치회 일동 모두가 사이좋게 야근을 하려고 했는데, 그거 몰아주기 어때? 다들 어떠신가요?”

확실히 은하연은 은하연이었다.

언용운을 제외하고는 딱히 상담에서 실패를 맛본 적이 없는 은하연답게.

그녀가 야근과 몰아주기라는 떡밥을 던지자 다른 언 동생들이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흠흠. 근데 우 소협이 말씀하셨듯 저희끼리 내기를 하면 다 언 소협이 승리를 한다에 걸지 않겠습니까? 내기가 되겠습니까?”

“천하의 정현 도장도 야근은 무서우신가 보네요?”

“…저는 내일 일 교시 수업이 있어서.”

“…내일 일 교시면 공자와 석존 그리고 노자의 생애와 말씀으로 돌아보는 유불도의 이해 그 과목 들으세요, 설마?”

“예.”

“그 과목을 넣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 줄이야. 심지어 일 교시를… 아무튼 우리끼리 걸면 다 언 공자한테 걸겠지만, 단순히 승패에 거는 게 아니라 언 공자께서 몇 초를 소비하시느냐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가장 멀게 말한 사람한테 몰아주는 걸로?”

그렇게 은하연이 방법까지 제시하자, 다른 언 동생들이 모두 골똘해졌다.

내기에 참여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였다.

“하성이 너부터 걸래?”

“옙! 고민할 것도 없이 일 초로 하겠습니다. 저는 용운 형님께서 단박에 저 시커먼 말코 놈을 날려 버리신다는 것에 걸게요.”

“…야. 정현 도장이 바로 옆에 계신데 말코 소리는 좀.”

“아. 맞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튼 하성이는 일 초. 정현 도장은요?”

“흠. 제가 본산에 있던 시절 무당에 모산파의 장문인과 제자분들이 찾아오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산의 검을 견식을 해본 일이 있습니다. 꽤나 독특한 검이었습니다.”

정현의 말에 은하성이 ‘아 정현 도장 다음에 말할걸.’ 소리를 뱉었지만, 정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골똘히 머릿속에서 그때 견식 했던 검식을 상기해 보았다.

“처음 봐서는 능히 대처하기가 쉬운 검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언 소협은 진법에도 밝으시니까 파훼를 남들보다 쉽게 하신다고 치고…. 거기에 제압하시는 데 필요한 초식이 서너 초 정도 필요하다고 치면…. 음. 여덟아홉 초? 음. 그중에 여덟 초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정현 도장은 여덟 초. 우 소협은요?”

“고민이네요. 빨리 말했으면 이런 고민을 안 했을 텐데, 정현 도장 말까지 듣고 나니까 더 고민인데요?”

“시간 없어요. 언 공자 검 뽑으셨잖아요. 셋을 셀 동안 대답 안 하시면 제 마음대로 정합니다? 하나. 두울.”

“으아. 다섯. 다섯으로 할게요.”

“알겠어요. 우 소협은 다섯. 마지막으로 저 은하연은 넷으로 갈게요.”

* * *

허리춤에서 회한을 스르렁- 뽑아 들자, 우수로 옮겨오신 사부님께서 내게 질문을 해오셨다.

- 내가 고분에 처박혀 있던 사이 모산파가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지?

‘맞습니다.’

- 그간 무맥을 한 단계 성장시킨 대종사급 말코가 나온 것이냐?

‘음. 그건 아닐 겁니다. 그저 육십여 년 전에 일어난 정마대전의 여파로 공동파가 나날이 쇠락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니까요?’

- 하면 나 때 덤벼오던 그놈들의 검과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모산파의 도사들이랑도 검을 섞어 보셨습니까?’

- 당시 말코 놈들의 문파 중에 나와 검을 안 섞은 제자를 가진 곳은 없다고 보면 되느니라.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현혹에 주의하거라. 모산파의 검술은 엄밀히 따지면 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문좌도의 술법을 검으로 펼치는 것에 가까우니.

원작을 읽었던 나였기에 사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모산파의 인물이 두 명이나 활약하니까.’

무길은 아니고.

하나는 교수님 중에, 하나는 한 해 위의 선배 중에 있는데.

이른바 주인공 세대에 포함되는 양반들은 아니었지만, 마교와 본격적으로 엮일 때쯤 알토란 같은 활약들을 하기에 내 뇌리에 모산의 검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들어 있었다.

하지만 제자를 걱정하는 사부님의 노파심이 썩 나쁘지는 않아서, 나는 그냥 얌전히 사부님의 걱정을 들어드렸다.

- 혹 그 현혹에 휘말리거들랑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휘주에 있을 때 수련을 하지 않았더… 아. 가만, 그러고 보니 네 녀석 방술이나 진법… 그러니까 모산파 놈들이 특기로 삼는 쪽으로는 네 녀석도 도가 트지 않았더냐?

‘그렇긴 하죠?’

- …그런데 왜 듣고만 있느냐?! 괘, 괜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은 꼴이 되지 않았느냐?!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자 걱정을 하시는 사부님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서 불초제자 눈시울이 뜨거워질 뻔했는걸요?’

- 아주 놀려 먹거라. 놀려 먹어.

아니 진짠데요.

눈시울이 뜨거워질 뻔한 것만 빼면.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과 생각을 주고받으며, 파천검법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는 이때.

“언용운. 무길. 준비됐나?”

주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창량 교수가 나와 무길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창량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비가 되었음을 고했는데.

아직 검조차 뽑지 않은 무길이라는 녀석은 대뜸 창량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이며 허락을 구했다.

“존경하는 교수님.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 저 친구에게 제가 한마디를 하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무길의 물음에 창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적절한 호승심은 건전한 경쟁의 동력이 되는 법이지. 짧게 해라.”

“예. 교수님.”

음?

원작에선 처음 대련에서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에 뭔 소리를 하나 싶어 가만히 들어봤더니.

“언용운! 이 천하의 망나니 놈아! 이 자리에서 네 거짓된 명성을 낱낱이 밝히고. 감히 버러지 같은 청죽관 놈이 향란관의 여생도를 희롱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다!”

- 저놈이 점심에 뭘 잘못 주워 먹고 회까닥 돌았나?

사부님의 말마따나 정신이 나갔나 싶을 정도로 개소리였다.

‘진짜 뭐지?’

무길이 나를 지목했을 때만 해도 그저 향란관의 자치회 쪽에서 져도 상관없는 자로 무길이라는 녀석을 써먹으려는 것인가 했는데, 어째선지 저놈의 행동에선 자신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뭐, 나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좋다.’

저놈이 나만 모욕했으면 내 기분만 잡치고 흐지부지 끝났을 텐데, 근거 없는 자신감에 취한 녀석이 청죽을 싸잡아서 모욕을 해버렸다.

이건 기숙사대 기숙사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

단단하고 번쩍이는 금창약을 청구할 구실이 된다는 소리.

그것도 개인 체급이 아니라 기숙사급 체급으로다가.

나는 뒤틀려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눌러 내린 뒤.

창량을 바라보며 우선적으로 그 점을 명확하게 짚었다.

“썩 건전하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요?”

“…….”

그에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게 된 창량 교수.

나는 회한에 묵빛 아지랑이를 휘어 감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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