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눈깔을 왜 그렇게 떠?
회한에 감긴 검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하자.
무길이라는 녀석은 분명 흠칫했다.
“흐, 흥. 내력이 많다고 검이 예리한 것은 아니지. 그 진주언가에서도 쫓겨난 놈이 대충 주워 익힌 검술에 구파일방의 하나로 우뚝 선 우리 모산의 검이 질 리가 없다.”
하지만 이내 곧 자기 암시를 걸기라도 하는 듯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리더니, 허리춤에 찬 제 녀석의 검을 뽑았다.
스렁-
그런 녀석을 향해 한마디를 할까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어 말았다.
무길이라는 놈이 범하고 있는 오류와 오판이 너무 많아서 말해봐야 입만 아팠다.
‘본인이 날고 있는 게 아니라 사실 추락하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하여 나는 무길의 도발과 자기 암시에 어울려 주는 대신 녀석의 검에 집중했다.
‘푸른 검신에 북두칠성을 새겨넣은 검.’
- 칠성검이로구나.
무당파와 화산파가 진산제자나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거둔 속가제자에게 각각 송문검과 매화검을 하사하고, 개방이 매듭을 허락한다면 모산파는 제자들에게 저 칠성검이라는 것을 하사했다.
- 한데, 나 때 봤던 칠성검은 검신이 저렇게 퍼렇지 않고, 무길이라는 놈이 입은 향란관의 무복처럼 시커멨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인가…?
‘아뇨. 맞을 겁니다. 사부님 때는 모산파의 세가 약해서 모두가 그런 칠성검을 썼나 본데.’
사부님이 말하는 시커먼 검은 지금도 있었다.
현철(玄鐵)을 사용하여 양의 기운이 강한 년, 월, 시를 맞춰 만들어 내는 사인(四寅) 혹은 사진(四辰)의 칠성검이라는 것이었는데.
‘저 무길이라는 녀석 말처럼 모산파가 구파의 한자리를 꿰찬 요즘은 워낙에 제자가 늘어서, 모산파 내에서도 상청검수라 불리는 이른바 정예들만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화산파의 제자의 급은 검집과 검에 놓인 매화의 수로, 개방의 제자의 급은 매듭의 개수로 나뉜다면 모산파는 검의 색으로 대략적인 급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길이 놈의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신이 시커멨다면 나도 전심전력을 다해야겠다는 나름의 각오를 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되레 힘 조절이 관건이었다.
‘사냥이나 생사결이 아닌 수업 중의 대련이니까.’
사부님이 언급해주신 칠성검의 색 덕분에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되새긴 나는 과하게 넘실거리던 검기를 압축했다.
한데 이런 내 행동이 무길이 놈에게 또 하나의 오판을 야기한 것일까?
“역시! 허장성세였구나! 그저 복어처럼 몸을 부풀리는 것이었나 보군?!”
이내 곧 칠성검에 검기가 휘감겼고.
아로새겨진 북두칠성의 음각이 진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효시로 삼은 무길이 검초를 펼치며 나를 중심으로 가로로 돌기 시작했다.
“이 가짜 놈아! 본때를 보여주마!”
그렇게 무길이 놈이 검에 기운을 실으며 빙빙 돌기 시작하자.
이내 곧 사방에서 복사꽃 내음이 풍겨오는가 싶더니.
샤샥- 샥- 샤샥- 샥-
어느 순간 분열을 하듯 무길이라는 녀석이 수십으로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늘어난 녀석이 동시에 검을 뻗어왔다.
쌔액! 쌔액!! 쌔애애액!!!
수십 명의 무길과 수백 개의 검기가 일시에 나를 향해 짓쳐들어오는 광경이 펼쳐졌다.
- 도화산란(桃花散亂).
그에 노파심을 접는다 하셨던 우수에 들린 사부님이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전해오셨다.
- 환검이되 검이 중심이라 검기 하나하나를 모두 대처해야 하는 화산의 검과 달리, 모산의 검은 검이 아닌 환이 중심이다. 저 중 딱 하나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것은 허상이다.
연무장을 지켜보고 있는 동기생들 사이에서는 ‘헉!’ 하고 헛숨을 삼키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해는 간다.’
모산의 검을 오랜만에 보는 사부님의 노파심도, 모산의 검을 처음 보는 동기생들의 놀라움도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 입꼬리는 이미 귀에 걸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진짜랑 가짜가 확연하게 구분이 되니까.’
환술로 빚어진 가짜들은 불투명해 보였기에 딱 봐도 허상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내 정신 면역 특성은 환술에 초점이 맞춰진 모산파의 검술에도 통했다.
‘찾았다.’
나는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숨기지 않으며, 뻗어오는 숱한 무길이 놈 중 투명도가 낮지 않은 유일한 녀석을 향해 파천의 검을 세워 들어갔다.
쌔애애애액!
이런 류의 검을 상대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선택지를 줄이기 위한 파훼 동작 없이 맹렬하게 찔러 들어가는 내 검.
그 검을 확인한 무길이 놈은 분명 당황했다.
“?!”
하지만 그래도 검을 허투루 휘둘러 온 놈은 아닌 모양이었는지, 급히 공세를 거두어들이며 내 검을 쳐내려 했다.
챙-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유도한 바였다.
나는 무길의 칠성검과 내 회한이 맞붙자마자 미세하게 손목을 틀어 놈의 검과 내 검의 면을 맞붙였다. 그리고 내력을 밀어 넣었다.
파천십검의 초식 같은 것은 아니었고, 사부님께 검의 기초를 배울 때 배운 착(着)이라는 동작이었다.
“!”
그에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무길이 녀석이 눈을 키웠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계속해서 내력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회한이 들린 우수를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켜듯 호선을 그었는데.
“나불대더니만. 이 검처럼 주둥이가 착 붙었네?”
“…큭!”
‘착’에 의해 칠성검과 회한이 맞붙어 있는 상황이라, 무길이 녀석의 우수 또한 나와 함께 짝을 맞추어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에헤이. 버티지 마. 버티지 마. 백날 용을 써봐야 네 실력으로 무리다?”
그에 무길이 놈의 몸의 중심이 완전히 좌측으로 쏠려버렸고.
빡!
나는 완전히 드러난 녀석의 오른쪽 오금을 힘껏 걷어차 주었다.
“끅!”
무릎이 땅에 닿으면 패배한다는 규칙이 있었으니.
기실 이것으로 승부는 끝이었다.
그런데 무길이 놈은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는지, 과정이 치욕스러워서 그런 건지, 도끼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물론 칠성검에서 내력도 거두지 않았다.
허. 이놈 봐라?
“눈깔을 왜 그렇게 떠?”
나는 눈물을 머금고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온 약을 처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퍽!
퍽!
“눈을 왜 그렇게 뜨냐고!”
* * *
그렇게 내 주먹이 무길의 안면에 연달아 꽂히자.
“그만! 그만!!”
창량이 노기등등하게 달려와 나와 대자로 뻗은 무길 사이의 거리를 벌리더니 나를 향해 노성을 쏟아 냈다.
“향란관의 무길이 한쪽 무릎이 땅에 닿은 순간 이미 승부가 끝났는데 왜 거기서 주먹질을 하는가? 정무학관이 자네가 뒹굴던 기루나 도박판인 줄 아는가? 자네가 진정 백도 무림의 후기지수가 맞나?!”
일견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 말 같기는 했으나, 창량의 말에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빠져있었다.
그리고 어째 태도도 건수 하나 잡았다는 식이었다.
나는 피식 새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세상 억울한 척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께서 사감을 맡고 계신 기숙사의 생도라 무길 저 친구 쪽으로 마음이 쏠리시는 것은 저도 이해를 합니다!”
“뭐, 뭐라?!”
그리고 몸을 돌려 이 상황을 떨어져 관람하고 있는 교수님들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쪽은 제가 아닙니다. 칠성검에 음각된 북두칠성은 무길이라는 친구가 이렇게 뻗어 눕기 전까지는 분명 진한 검기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 말에, 교수 중 몇몇이 ‘나도 봤소.’ 소리를 토했다.
나는 그런 응원에 힘입어 계속해 말을 이었다.
“하여 피치 못하게 일권을 내지른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청죽관을 싸잡아 버러지 같다 모욕했고, 은연중에 저를 낳아준 진주언가도 낮잡아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손속에 자비를 둔 것입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그렇게 내가 말을 마치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중에서도 교수님들.
그 교수님들 중에서도 초록 무복 위에 하얀 피풍의를 걸친 여협 한 분은 손을 들고 공식적인 우려를 표해왔다.
“모용린입니다. 창량 교수님의 꾸짖음은 전후 사정과 관계없이 백도 무림의 후기지수 모두가 들어 이로운 말이긴 합니다만, 전후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 이상 나무라시면 정말로 무길이라는 생도를 편애하시는 것처럼 비출 수가 있겠습니다. 고정하시지요.”
이름을 듣고 보니 은하연을 제자로 삼은 검후임을 알 수 있었다.
검후 모용린.
안에 입고 있는 무복은 학관의 교수임을 상징하는 짙은 녹색이었으나 그 겉에 굳이 하얀 무명 피풍의를 하나 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녀는 딱히 어떤 기숙사에도 적을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여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말에는 강한 힘이 실렸다.
“…끙. 무길의 패배다. 청죽관의 언용운은 자리로 돌아가고. 신입생 중에 향란의 자치회에 든 자는 여기 뻗어 있는 녀석을 의무실로 데려가라!”
* * *
무술학개론의 첫 수업이 끝났다.
나와 무길의 싸움이 제법 어수선한 상황을 야기했는지라, 이후로는 대전 상대를 지목하는 신입생이 나오지 않았다.
하여 남은 대련 상대들은 추첨으로 정해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생도가 이기고 졌다.
그 모든 과정의 관전을 마친 나는 언 동생들과 자치회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청죽관의 생도들의 승패를 기록지에 기록하는 작업을 하는 와중에 가만히 원작에서 이름을 날렸던 녀석들의 승패에 관해 떠올려 보았다.
‘정현과 제갈설지를 제외하면 주인공 세대들끼리 맞붙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네?’
용명이 녀석과 천장호, 팽소천, 운매관 삼인방.
윤국관의 팽소진.
향란관의 남궁윤과 당옥기.
녀석들은 각각 수월하게 승리를 거뒀다.
우소릉은 비겼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도망만 다니지 않을까 예상을 했는데 실제로 그랬다.
돌아온 녀석에게 공격이라도 한번 해보지, 했더니.
‘제가 지면 언 형과 청죽관에 누를 끼친다면서요, 같은 소리를 했지.’
진짜 환장한다.
은하연은 졌다.
하지만 의의는 있었다.
‘애초에 당장의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은하연은 기실 검을 제대로 쥔 지가 아직 한 달도 안 된 녀석이었다.
그런 와중에 진검 대련을 하는 것이니 겁을 집어먹지 않은 것만 해도 칭찬할 만한데.
검후께 배우고 있는 옥녀검의 기본기에 충실한 초식을 펼치며 나름대로 선전까지 했으니까.
‘밑천이 드러나서 결국 패배했으나 충분히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 어울리는 대련을 했지.’
마지막으로 은하성.
‘…이놈은 이겼지만 못 싸웠지.’
초반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쓸데없이 고전했고, 그로 인해 패배 직전까지 갔다가 상대가 잡은 승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얼결에 승리를 당했다.
“크흠-캬! 이것이 승자의 맛일까요? 자치회실의 공기부터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은하성의 머리에 나는 있는 힘껏 꿀밤을 선사해 주었다.
빡!
“아! 형님?!”
“화상아. 요즘 조바심을 좀 내는 것 같아서 사람이 좀 됐나 싶었는데, 대련 과정이 그렇게 개판이었는데 승자의 맛 소리가 나오냐?! 언제 사람 될래?!”
“예? 그런 말씀은 억울한데요?!”
“뭐가 억울해? 대련 이겼다고 좋아하고 있던 거 아냐?”
“아닙니다!”
“그럼 승리의 맛 같은 소리가 왜 나와? 졸전을 펼쳐놓고 짜식이!”
“그건 형님께서 무길이 놈이랑 싸우러 나가셨을 때 저희끼리 내기를 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내기?”
하성이 녀석과 내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은하연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옥기 연구에 들어가는 도구를 구비 하는 일이랑 체육부 격구 장비 마련하는 일로 단순 잡무가 갑자기 엄청나게 생겼길래 몰아주기 내기를 했어요.”
“나랑 무길을 두고? 뭐 몇 초식만에 제압하나 그런 거로?”
“역시. 언 공자님이시네요. 전후를 듣지도 않고 바로 맞추시는군요?”
“얘들이나 은 소저나 내가 진다에 걸 사람들은 아니니까. 어디 보자, 검이 맞닿은 순간부터 검을 떼지를 않았으니 그것 전체가 한 초식이고, 오금을 찼으니 둘. 내가 주먹을 두 대를 먹였나? 맞소?”
“예. 저희가 눈을 부릅뜨고 확실하게 세고 있었어요. 두 대. 합해서 사초 만에 무길을 쓰러뜨리셨습니다. 하성이가 일 초 제가 네 초, 우 소협이 다섯 초, 정현 도장이 여덟 초.”
“음. 몰아주기였으면 정현이 당첨이고 나머지가 승자가 되는 거군….”
…이 아니고.
아니 잠깐만.
뭔가 이상한 게 끼어 있잖소.
“정현이 그 내기를 했다고?”
“…….”
“참내, 하기만 하신 줄 아십니까 용운 형님? 아주 한 대만 더… 한 대만 더… 숫자도 제일 간절하게 세셨습니다.”
“…진짜로? 은 소저? 소릉아? 하성이가 하는 말이 진짜냐?”
“큽. 예. 뭐. 그러시기는 했죠?”
“푸흡. 예. 저도 봤습니다 언 형.”
“…정현? 얘네들 말이 진짜야? 아니지? 다 같이 짜고서 나 놀리는 거지? 예? 선도부장님?”
“…워, 원시천존. 제가 내일 일 교시 수업이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 …근묵자흑이라더니 용운이 네 옆에 붙어 있다 보니 정현 저놈 저것도 아주 말코 중에서도 시커먼 흑말코놈이 되어 가는구나.
그놈의 근묵자흑은….
뭐, 아무튼.
내기의 승자들에겐 미안하지만 야근은 모두의 숙명이었다.
“근데 승자들도 야근은 같이해야 할 것 같다.”
대저 어지간한 일은 뜨거운 감자일 때 들쑤셔야 한다.
그래야 많이 뜯을 수 있는 것이다.
“향란관에 피해 보상 청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