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94화 (94/444)

제94화. 너는 검보다 도가 어울려 (1)

- 한데, 뭔 놈의 들여다볼 서류가 이렇게 많으냐? 지금까지는 하연이 그 아해가 만든 서류에 수결만 하면 되더니만?

‘음. 따지고 보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 마찬가지라고?

‘예. 지금 은 소저가 만들고 있는 서류에 향란관의 관인이 찍히게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뭐,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지만.

무길의 행동은 충분히 청죽관 차원에서 항의해도 될 법한 행동이었지만, 그 항의를 통해 보상금을 뜯어… 아니 받아내는 일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막말로 향란관 놈들이 이 일을 무길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 버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꼬리 자르기라.

‘예. 그러기 전에 빼도 박도 못하는 공식 항의를 할 생각인데, 책잡히지 않고 놈들에게서 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는 문서를 만드느라 그렇습니다.’

- 하기사 젊은 놈이고 늙은 놈이고 그 시커먼 옷 입고 돌아다니는 놈들은 한같이 그럴 만한 놈들이긴 하더라만. 한데 체육부장이랑 하성이 놈이 들여다보고 있는 건 그쪽 일이 아닌 거 같던데?

‘아. 거기 시킨 일은 향란관에서 배상금이 오면 사용할 용처에 우선순위를 매기기 위해 청죽관의 수련 시설과 장비 노후도 좀 살펴보라 했습니다.’

- 참나. 단순히 항의하는 걸 넘어서 그걸 보상금으로 바꾸는 일은 어렵다는 듯이 말하더니, 아주 이미 돈은 들어온다고 보고 있구나?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제가 직접 챙기는데요.

그때였다.

그렇게 쌓인 일을 쳐내는 와중에 사부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자치회실의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우리가 만들 서류를 들고 총생도회에 나가 싸워야 할 사람이 도착했다.

“그래, 무술학개론 첫 수업들은 어떠셨나? 다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으셨ㄴ… 음? 후배님들? 이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들은 다 뭔가…?”

“아, 경룡이 형. 오셨습니까?”

“…아주 온 건 아닐세. 생각해보니 급한 일이 있는 거 같아서 가봐야겠네. 다들 고생하게.”

“생각을 해야 급한 일은 사실 급한 일이 아니죠. 그리고 지금 이것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소릉아. 문 잠가라.”

“예! 언 형!”

“정현은 경룡이 형 좀 자리로 뫼시고.”

“예. 언 소협.”

“내, 내 발로 가겠네.”

그렇게 회장석에 앉은 진경룡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결재함에 미리 가져다 놓은 서류 세 개 중에 두 개는 점심시간에 말씀드렸던 체육부 예산 집행 건입니다.”

“격구 장비랑, 당 후배를 시켜서 우리 기숙사의 특제 고약 부활 사업과 기타 조제 연구를 지원한다던 그거?”

“예. 그리고 남은 하나는 수련 장비 주문에 관한 건입니다. 모래주머니는 충분히 확보됐는데, 차차 이게 익숙해지시면 무쇠로 된 기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제가 시안을 좀 그려 뒀습니다.”

“무, 무쇠?”

“은 소저의 상단에서 신세를 질 때 써봤는데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확실이 아니라 확 죽고 싶을 거 같은데….”

“예?”

“아닐세. 근데 그 세 건을 집행하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치고는 총무부장이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 탑이 너무 무지막지한데…? 저거 정무연감(正武年鑑) 아닌가?”

정무연감은 일 년 동안 정무학관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과 각종 행사에서 발생한 기록지들을 한데 묶어 펴내는 일종의 정기 간행물이었다.

나는 왜 은하연이 정무연감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선 무술학개론 시간에 있었던 일을 진경룡에게 늘어놓았다.

“…그렇게 돼서. 공식 항의서와 함께 피해 보상을 하라는 서한을 향란관 쪽에 제출해야 했기에 이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만. 확실히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야. 한데 향란관 녀석들이 순순히 배상금을 내놓겠는가?”

“그래서 은 소저랑 제가 정무연감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보다 한참 위의 선배님 때에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고 들었네. 물론 그때는 우리 청죽관이 향란관 쪽에 배상금을 내어 준 것이니, 확실히 선례가 되겠군?”

내 의도 중 일부를 알아챈 진경룡의 말에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경룡이 형은 직접 저 문서를 들고 총생도회에서 향란관의 자치 회장과 협상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일부만 알아서는 곤란했다.

“단순히 선례만 활용하는 게 아니라 이 정무연감을 통해 압박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음? 그걸로 압박이 된다고?”

“향란관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겠습니까? 체면이 깎이는 일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정무연감을 살펴보니까 각 기숙사의 자치 회장이 한마디씩 써 놓는 부분이 있더군요. 저희 쪽 문서에 수결 안 하면 거기다 오늘 있었던 일 써넣어 버리겠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향란관 놈들은 울분을 머금고 수결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룡이 형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허.’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묘안이군. 확실히 향란관 녀석들이 제일 싫어할 일이긴 해. 근데 그 란은 본래 우리 기숙사를 소개하는 란인데 그렇게 써도 되나?”

“실제로 그런 식으로 안 쓸 건데 뭔 상관입니까? 요는 향란관 놈들의 머릿속에 이 새끼들은 실제로 그런 짓을 할 수도 있는 놈이다는 인식을 박아주는 겁니다.”

“아!”

“신입생인 제가 자치 부회장이 된 일이나, 알 만한 사람들은 대충 아는 동윤관에서 선배님들과 푸닥거리한 일 같은 게 그런 인식을 하는 데 도움을 줄 거고요.”

“확실히 그렇군!”

“예?”

“응?”

“…쓰흡. 아무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 은 소저가 쓴 서류를 보면? 그냥 보상금 주고 치우자는 생각이 바로 들 겁니다. 그때 회장님은 향란관 자치 회장인 매진악 선배한테 ‘서명하시오.’ 한마디만 하면 되는 겁니다.”

“용운 동생.”

“예?”

“자네를 적으로 만났다면 나는 아마 돌아버렸을 거야.”

- 저놈이 아직 네 맛을 덜 본 모양이로다. 네 녀석의 지독함은 적아를 크게 가리지 않음을 알고 나면 저런 소리가 나오지 않을 텐데. 덜 굴렀네 덜 굴렀어….

‘…음?’

- 뭐?

* * *

운매관의 사감이자 정무학관의 도법(刀法) 교수인 팽재혁.

그는 팽가의 가주이자 사사롭게는 친형인 팽무혁에게 달에 한 번은 연통을 해주기로 약속을 했다.

억지로 맡은 일은 아니었다.

팽소천, 팽소진 장차 팽가를 이어갈 두 친조카.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 진주언가의 두 자제인 언용운과 언용명.

그런 팽가와 언가의 혈맹이나 다름없는 석가장의 외동아들 석호열.

장차 하북 무림을 이끌어 나갈 후기지수가 많이도 들어 왔기에 팽재혁 본인이 자청을 한 감이 있었다.

그처럼 자청을 한 일이었지만, 팽재혁의 자청에는 사실 연통을 한 번씩 넣는 게 딱히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깔려 있었는데.

‘그저 이런저런 시험이 있으면 그 점수나 좀 적고 건강하다 이런 것만 써 보내면 될 줄 알았는데….’

그건 팽재혁이 지금까지의 교수 생활을 돌이켜 본 뒤에 내린 판단이었다.

평화로운 강호만큼이나 정무학관도 이렇다 할 풍파 없이 평화로웠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아니.

사실 아니라고 보기는 그랬다.

팽소천, 팽소진, 언용명, 석호열.

이렇게 네 놈은 팽재혁이 예상한 대로 어느 기숙사를 택했고, 무술학개론 수업에서 누구를 상대로 지고 이겼다만 써넣으면 됐으니까.

그러니, 정확하게 따지면 딱 한 녀석이 문제였다.

‘용운이 네 이놈!’

뭔 놈의 엮인 사건 사고가 이렇게 많단 말이냐?!

청죽관에 자치 부회장이 된 일부터 무술학개론 수업에서 향란관이랑 시비가 붙더니만 그 일을 빌미로 향란관 그 고고한 놈들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낸 일까지 써넣을 게 한둘이 아니었다.

‘제기랄!’

제기랄 소리가 나오지 않으려야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용운을 향한 속된 말이 아니라 지금 팽재혁이 처한 상황이 그랬다.

그도 그럴 게 언용운이 벌이고 마무리한 일이 워낙 많은데, 서신이라고 해서 널찍한 종이를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편이 아닌 전서응을 사용할 것이었으니까.

하여, 팽재혁은 매의 다리에 감긴 통에 들어갈 정도의 조그마한 종이 안에 언용운이 얽힌 일들을 다 써넣느라, 덩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필을 들고 눈알이 빠질 듯이 종이와 씨름을 하며 깨알같이 글씨를 적어 넣고 있었다.

‘이 숙부가 무위 단계에서 호통을 좀 쳤기로서니 아주 엿을 먹이는구나! 엿을 먹여!’

누가 말했던가?

하면 된다고.

몇 번의 오탈자로 인해 처음부터 다시 서신을 작성하기를 아홉 번.

마침내 완성된 서신이 전서응의 다리에 감긴 서통 안에 들어갔다.

“하얗게 불태웠다. 형님께 잘 전해 드려라.”

빼액-!

그렇게 팽재혁의 손을 떠난 전서응은 힘차게 북상을 시작했다.

호북에서 하남으로.

하남에서는 전서응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개봉의 분가에서 도도하게 먹이와 물을 받아먹으며 하루를 쉬었고, 거기서 다시금 날개를 펼쳐 마침내 하북땅 보정(保定)에 위치한 팽가에 이르니.

빼애액-!

집무실에 내려앉은 전서응을 확인한 팽무혁의 입이 열렸다.

“학관에서 소식이 왔구나! 게 아무도 없는가?”

“여기 있습니다 가주님!”

“지금 당장 석가장과 진주언가에 아이들 소식이 왔다고 기별을 넣어라. 이 녀석 먹이랑 물좀 든든히 주고.”

“예 가주님!”

팽무혁은 곧바로 석가장과 진주언가에 팽재혁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는 기별을 넣었다.

그에, 한달음에 언정웅과 석금필이 달려오니, 팽가의 사랑채엔 걸판진 술상이 차려졌다.

“내 실수로 언제 보자고 날을 안 잡고 기별을 넣었는데, 다들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들 왔구만?! 이렇게 셋이 오늘 다 모일 줄 알았으면 내 인삼차를 준비해 놓을 것을 그랬군. 으하하핫!”

“인삼차…? 아. 인삼…. 아. 아하하하. 팽 가주님의 농담은 언제 들어도 참 재밌습니다!”

“지금 사람이 셋이라고 인삼차 소리를 하신 겁니까 의형?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습니까 석 가주?”

“에잉. 농담을 이해를 하려고 들면 되나? 가슴으로 받아들여야지. 재미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제가요?”

언제나처럼 팽무혁의 숙숙농담으로 시작된 술자리였으나.

오늘은 하던 일을 제쳐놓고 온 언정웅이 재촉을 했는데.

“아무튼 거 농은 그쯤 하시고 재혁 동생이 보내왔다는 서신이나 좀 읽어 주십시오.”

그런 언정웅의 재촉에, 팽재혁의 서신이라는 칼자루를 쥔 팽무혁이 짐짓 으스대며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급하신가. 내 우리 부인한테 듣자 하니 용운이 놈이랑 용명이 녀석이 쓴 서신이 얼마 전에 언가에 도착했다면서, 자네 부인이 한시름 놓은 것 같더라 하던데?!”

“그렇긴 한데, 인편으로 온 녀석들 서신이야 벌써 길게는 보름에서 짧게는 열흘 정도 전의 일일 텐데, 그거랑 재혁 동생이 써보낸 따끈한 소식이 어찌 같겠습니까?”

“다르기야 하지. 그러니까 자네도 이렇게 한달음에 온 것이고. 이 의형에게 잘해야겠나 못해야겠나? 말해보게!”

“제가 의형께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 서신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는데, 그 서신이라는 거 말입니다. 용운이 이 놈이 제 어미한테 서신 한 통 쓰라 했다고 진짜 딱 제 어머니한테만 써 보냈지 뭡니까?! 그마저도 무탈하니 걱정 마시라 뭐 그런 말뿐이라 저는 지금 그놈이 무슨 기숙사에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왜 나한테 성을 내고 그러나. 나도 자네들이랑 같이 펴보려고 아직 봉인을 개봉하지도 않았네, 이거 보시게.”

“그냥 목소리가 조금 커진 것일 뿐입니다. 제가 의형께 성을 왜 내겠습니까?”

“아, 아무튼 그럼 개봉하겠네…?”

“왜 그러십니까? 의형?”

“서신이 유실이라도 됐습니까 팽 가주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글씨가 너무 작아 단박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

“재혁이 이놈은 뭘 이렇게 세필로 빼곡하게 써놨어? 읽게 좋게 큼직하게 좀 쓸 것이지, 아무튼 안력을 돋았으니 이제 읽겠네? 허험! 소진은 윤국에! 소천과 용명 호열은 운매에 들어갔습니다!”

“오.”

“호오. 그렇게 되었군요.”

“소진, 소천, 용명은 무술학개론 첫 수업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오. 감축드립니다. 팽 가주님 그리고 언 가주님.”

“호열은 애석하게 패했으나 상대가 남궁윤이었습니다!”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석 가주님. 하나 남궁윤이면 후기지수 중 검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말이 돌던 친구 아닙니까? 상대가 나빴나 봅니다.”

“아닙니다. 녀석의 실력이 부족한 거지요.”

그때였다.

그렇게 석씨세가의 가주 석금필과 진주언가의 언정웅이 서로 덕담을 건네고 있는 그때.

팽무혁의 입이 풀을 바른 듯 딱 붙어 버렸다.

그에 석금필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음. 근데 용운이 녀석의 이야기가 쏙 빠졌는데요? 설마 그게 끝입니까?”

“…끝은 무슨 방금 읽은 게 전체 중에 고작 십 분의 일일세.”

“한데 왜 더 안 읽으십니까 의형?”

“나머지가 전부 다 용운이 녀석 이야기라.”

“예?”

“네?”

“이게 맞게 썼는가 싶어서 벌써 세 번째 훑어보는 중이었네. 맞게 쓴 거 같으니 일단 읽겠네.”

그렇게 팽가의 사랑채에 팽무혁의 음성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언정웅의 입꼬리가 주책맞게 씰룩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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