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풍근이네 풍근
내 말이 의도대로 팽소천의 뇌 속 근육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인지.
“뭐? 하체가 약해 보인다고?!”
팽소천이 바로 발끈을 하고 나섰다.
“아무리 우리가 발가벗고 뛰어놀 때부터 형 동생 하며 지낸 사이라고 해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씩씩거리는 팽소천의 모습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뭐 저런 것 가지고 열을 내냐는 듯 혀를 차셨다.
- 도제라는 자도 검이 만병지왕이라는 소리에 게거품을 물더니, 저놈은 근육으로 저 지랄이로구나.
아. 하마터면 웃을 뻔했네.
개인적으론 나도 사부님의 말씀에 일견 동의하는 바가 있었다.
하나, 원작의 팽소천과 작중에서 묘사되는 하북팽가의 도법의 특징을 아는 나였기에, 팽소천 저 양반의 근육부심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외겸전.’
상승 무공의 이해도와 내력 증진에 집중하는 다른 대파의 무공과 달리, 팽가의 도법은 타고난 체질 아래 내공과 외공을 동시에 갈고닦아야 극에 닿을 수 있다고 원작에서 묘사됐다.
‘그런데 내가 하체가 약하다 했으니. 그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꼴이지.’
하지만 내가 아무런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팽소천의 속을 긁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균형이 좀 안 맞아.’
팽소천이 오호단문도의 초식을 시연할 때.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도 몸을 공중에 띄웠다 내리며 시전하는 초식에서 착지가 불안하다는 의견을 분명히 내셨고.
‘내 눈에도 보였지.’
무림인으로 치면 하룻강아지에 불과한 나였지만, 전생에 이래저래 보고 경험한 통밥도 있었고, 또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하면 남들과 흐르는 시간이 달라지는 나였기에 그 점이 내 눈에도 보였다.
뭐, 사실 팽소천의 근육은 균형이 맞을 수가 없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관의 근력 단련법이라는 게, 전생처럼 기술이 집약된 단련기구와 계측기 장비를 사용하여 과학적인 단련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식하게 바위나 그에 상응하는 무거운 것을 끌거나 짊어지는 식으로 수련을 하는 것이었기에 균형까지 잡기는 힘들었다.
‘팽씨들은 대게 맹호지체라는 체질을 타고나는 비율이 높아서 그딴 식으로 수련을 해도 저렇게 몸이 발달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저렇게 발끈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심 팽소천 본인도 제 근육의 좌우 균형이 좀 안 맞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왼 다리랑 오른 다리의 근육의 균형이 좀 안 맞네.”
“……!”
“하체를 보면 상체를 안다고. 좌수 우수랑 등 근육도 그런 거 아냐?”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라 언용운! 말로만 그러지 말고 사내답게 몸으로 나를 납득시켜 봐라!”
그런 내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팽소천이 씩씩거리며 내게 대련을 신청해왔다.
팽소천이라는 인간이 말로 해서 무언가를 깨달을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한번 붙는 거야 내 쪽에서도 바라는 바긴 한데.’
하지만 그 방식이 오호단문도와 파천십검이 부딪히는 것이어서야, 팽소천이 청죽관에 들락거리게 하겠다는 내 의도와 맞지 않았다.
나는 붙는 방식을 내 의도에 맞추기 위해 다시 한번 비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신체 단련 이야기를 하다가 왜 결론이 날붙이를 섞는 것으로 나? 사내답게 몸으로 납득시키라며? 그럼 검과 도가 아니라 진짜 몸으로 겨뤄야지.”
그렇게 팽소천을 향해 가벼운 핀잔을 날린 나는 옆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모든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소릉이 녀석에게 입을 열었다.
“소릉아.”
“예. 언 형.”
“우리 자치회실에 남는 책상 하나 있지?”
“예. 공보부장님이 공석이시라 남는 책상이 하나 있기는 하지요?”
“그거 좀 가져와라.”
* * *
소릉이 녀석은 번개같이 자치회실에서 책상 하나를 빼 왔다.
그런데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하성이 놈과 정현을 달고 왔다.
“형님들! 왜 친형제끼리 싸우고 그러십…. 어? 용명이 형님이 아니신데요? 어 이분은…?”
“음? 운매관의 팽소천 소협 아니십니까?”
“맞다. 니들도 저번에 숨어서 봤으니, 대충 알겠지만 아버님들끼리 의형제간이시라 어릴 때 형제처럼 컸어. 근데 용명이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와?”
“아. 우 소협이 형제끼리 다투시는 것 같다 그러길래 언 소협과 작은 언 소협 사이에 뭔 사달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인사해라. 이쪽은 하북팽가의 소천이 형.”
“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정현이라 합니다.”
“저도 인사드리겠습니다. 은하성입니다. 용운 형님의 형님이시면 저한테도 형님이 되시니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소천이 형. 이쪽은 내….”
어디 내놓기에 한 번씩 부끄러운 말이긴 한데.
쓰흡.
바라보는 눈망울들이 초롱초롱하니.
옜다 인심 썼다.
“…동생들.”
“음. 뭐, 그래 용운이 녀석에게 동생이면 나한테도 동생이지. 반갑다. 팽소천이다.”
그 바람에 잠깐의 통성명 시간이 있었는데, 애초에 팽소천과 언 동생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던 차라 나쁠 것은 없었다.
하여 잘됐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팽소천 쪽에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진짜 몸으로 겨루자는 게 뭔 소리냐? 책상은 왜 가져 왔고?”
“솔교(摔跤)를 해보자.”
“솔교? 몽고인들이 하는 그 박투를 말하는 것이냐?”
솔교는 씨름을 지칭하는 말로, 중원에서 씨름 이야기를 하면 십중팔구는 팽소천처럼 원나라 때 자행되었던 몽고 씨름을 떠올렸다.
물론 그런 씨름을 할 것이었으면, 책상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지.
“그거 말고. 수비솔교(手臂摔跤).”
내가 하려는 씨름은 팔씨름이었다.
원작에서 한 번도 언급이 된 적이 없었기에, 알까 싶었는데.
“수비솔교?”
역시나 몰랐다.
하지만 다들 무림인이었기에 한 번 보여주기만 하면 감을 잡겠지.
“한번 보여줄게. 은하성. 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내 반대편에 서봐라.”
“예. 형님.”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팔꿈치 책상에 붙인 다음. 하성아, 손 내봐 봐.”
“이렇게요?”
“어. 이렇게 양쪽 모두 팔꿈치를 책상에 붙이고? 다음엔 요렇게 손을 맞잡는 거야. 자, 이제 시작하면 하성이 너는 네 쪽으로 나는 내 쪽으로 힘껏 당기는 거다?”
“옙.”
“시작.”
“쓰아아아앗!”
“힘 다 준 거냐?”
“크런데요옷?!”
꽝-
“앜!”
“이렇게 넘기는 쪽이 이기는 거고.”
그렇게 시범을 보이자, 팽소천이 바로 오른 소매를 걷어붙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몸으로 겨룬다는 조건에 부합하는군. 좋아. 그럼 붙자.”
그에 시금치를 주식으로 삼는 뱃사람도 울고 갈 우람한 팔뚝이 드러났다.
그걸 확인한 언 동생들과 허리춤의 사부님이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팽가의 무공은 외공 수련을 상당히 중시한다더니 그 말이 과언이 아닌가 봅니다.”
“그, 그러게요.”
“…수비솔교. 방금 처음 해봤습니다만 저런 팔뚝이랑 하면 팔이 꺾여선 안 되는 각도로 꺾이는 거 아닙니까?”
- 보니까 완전 힘과 힘을 겨루는 것 같은데, 팽가 녀석을 네가 이길 수 있겠느냐?
뭐, 저런 반응들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만큼이나 팽소천의 오른팔은 강해 보였다.
‘하지만 팔씨름은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지.’
전체가 십이라면 기술의 영역이 적게는 이 많게는 삼이나 사쯤은 된다.
물론 힘이 한쪽이 압도적이라면 기술이 관여할 틈이 없긴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팽소천의 힘이 나를 압도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럴게, 검은 사부님께 배웠어도.
어느 순간부터는 신체 단련은 내 식대로 했다.
‘사부님께서도 내 방식이 낫다고 인정하셨지.’
하여 나는 좌우를 가릴 것 없이 손목 이두 삼두 어깨 등 하체 할 것 없이 신체를 전반적으로 고르게 강화해 왔다.
‘팔씨름은 오롯이 팔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야.’
거기다 내가 상대할 팔은 저 오른팔이 아니었다.
“소천이 형?”
“응?”
“근데 왜 우수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어?”
“음? 그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하는 거라며?”
“방식은 이렇게 하는 건데. 애초에 형이 발끈한 이유가 뭐야?”
“내가 발끈한 이유?”
“어. 내가 형한테 하체가 약하고 상체의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였잖아? 아냐?”
“……!”
왼팔 딱 대.
* * *
내 말에, 팽소천은 쭈뼛쭈뼛 왼쪽 소매를 걷어붙였다.
팽소천의 왼팔.
이른바 맹호지체를 타고난 양반인지라 일반적인 강호인보다 훨씬 발달해 있긴 했다.
하지만 도를 휘두르는 우수에 비하면 솔직히 말해 볼품이 좀 없었다.
- 저 정도면 해볼 만하겠는데? 제자야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보기에도 그랬지만 팔씨름을 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 순간 감이 딱 왔다.
‘이건 내가 무조건 이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심판을 맡기로 한 정현이 ‘시작!’ 소리를 뱉었고.
“!”
“!”
순수한 팔 힘만으로 잠시 잠깐을 버텨내나 했던 팽소천의 좌수가.
“흐엌!”
고르게 발달한 온몸의 힘을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내 감아치기에 당하지 못하고.
“따흑!”
어린아이가 흐느끼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팽소천의 입에서 뽑아내며 쾅!!! 하고 넘어갔다.
그 바람에 책상 하나가 박살이 나긴 했지만.
그것으로 상황은 끝이었다.
“풍근이네 풍근.”
“푸, 풍근?”
나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있는 팽소진 앞에서 탁! 탁! 손을 마주털며 말했다.
“바람풍에 근육 할 때 쓰는 힘줄 근. 보기에는 듬직해 보여도 실상은 근육 안에 바람이 들어찬 거 같다고.”
“…푸, 풍근.”
몸으로 납득시켜 보라는 자신의 요청을 들어줬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청죽관에서 수련했으면 나처럼 실전압축근육이 됐을 텐데. 쯧쯧.”
나는 거리낄 것 없이 입을 열어 미끼를 던졌고.
그렇게 내가 던진 미끼를 팽소천이 콱 물었다.
“큭. 그래, 내가 졌으니 네 말이 맞았다 치자! 근데 연무장조차 구려서 교체하고 있었다면서? 여기서 수련하면 근육이…! 실전 뭐라고 했더라 방금?”
“실전압축근육. 줄여서 실압근.”
“그래 그거! 아무튼! 청죽관에서 수련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 뭔 말이냐? 말의 앞뒤가 안 맞지 않느냐?”
“우리 시설이 전반적으로 좀 낡기는 했지. 근데 이게 오늘부로 도착했거든.”
나는 말과 함께 오늘 도착한 아령(啞鈴)과 역기(力器) 그리고 무쇠 권각갑을 모아놓은 곳을 가리켰다.
“그게 뭐길래?”
백 번 듣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낫고 마냥 보는 것보다는 한번 해보는 게 낫다.
나는 아령 중에 실한 것을 하나 들어 팽소천의 손에 들려주었다.
“접었다 폈다. 팔에 자극을 줘봐.”
“!”
“그 옆에 하얗게 써놓은 숫자는 근수야. 보면 알겠지만, 근수별로 쭉 구비를 해놨지, 뭔 말인지 느낌이 오지?”
“…확실히 이것들을 사용하면 바위나 통나무를 짊어지는 것보다 필요한 근육을 골고루 발달시킬 수 있긴 하겠군.”
“우리가 남도 아니고. 뭐 형이라면 같이 써도 괜찮을 거 같은데, 청죽관에서 같이 수련할래?”
꼭 말을 듣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는 인체의 신호가 있다.
꿀꺽.
팽소천의 목 넘김이 그랬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물론 시설 사용료는 내야 한다? 이거 책상 부순 것도 배상하고.”
* * *
그날부터 청죽관에서 새어 나오는 고함과 신음소리 속에 팽소천의 음성이 끼게 되었다.
“하나에 앉고 둘에 일어섭니다. 하나!”
“뜨아악!”
“둘!”
“크. 크아아악! 체육부장님 살려 주십시오!”
“더더더더! 끝까지 폅니다! 언용운 부회장과 운매관에서 온 팽소천 생도를 보십시오! 여러분보다 세 배는 무거운 역기를 짊어지고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청죽관의 생도들이 흘리는 땀방울이 새 판석을 적시며 하루하루가 흐르니.
봄을 상징하는 절기가 하나둘씩 지나 어느덧 계절은 봄의 끝자락을 향해 갔는데.
그중에서도 한식(寒食)이라 하여 헌 불을 끄고 새 불을 피우는 의례를 치른 다음 날.
내외빈과 사대 기숙사의 생도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정무학관의 총장 경혜사태가 횃불 하나를 움켜쥐고 단상에 우뚝 섰다.
“우리는 어제 하루 동안 찬 음식을 먹고 불을 때지 않는 것으로 지난 일 년간 꺼지지 않았던 구화(舊火)를 소멸시켰습니다. 여기 제 손에 들린 이 횃불은 제가 직접 비벼 피운 것으로, 생도들이 아침을 먹었던 학관생 식당의 부뚜막아래 불타는 신화(新火)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화를 이제 이 화로에 옮겨 붙이겠습니다.”
화륵-
화르르륵-
“대대로 정무학관의 춘계 기숙사 대항전은 신입생들의 무대였습니다. 여기 타오르는 이 신화처럼 뜨겁고 건강하게 경쟁하여 장차 백도 무림을 이끌어나갈 젊은 불꽃들이 여기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마침내 춘계 기숙사 대항전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