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고스트 위기왕 (1)
춘계 기숙사 대항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화(新火) 점화를 마친 경혜사태가 단상에서 내려와 태사의에 앉았다.
그러자 숱한 교직원 사이에서 제법 눈에 익은 얼굴의 사내가 걸어 나와 목을 가다듬으며 단상 위에 섰으니.
“금년의 춘계 기숙사 대항전의 식전 행사의 진행을 맡게 된 임태옥이라 하오이다. 행사 진행에 앞서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께는 감사를 심신을 갈고 닦아온 생도들에게는 응원을 보내는 바이오이다.”
다름 아닌 임태옥이었다.
그의 얼굴이 익숙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전해 오셨다.
- 저 중늙은이가 직책이 뭐였더라? 입관? 입학? 처장인가 뭔가라고 하지 않았더냐? 은근 자주 보이는구나?!
‘겨울에서 초봄까지는 입관처장으로 늦봄에서 가을까지는 행정처장을 맡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학관의 대소사는 다 얼굴을 비추는 분이시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자주 뵐 수밖에요.
- 그렇구나. 나는 교수 중에도 그 대학원생인가 뭔가 하는 그런 것이 있는가 했다.
그렇게 사부님과 생각을 나누고 있는 사이.
임태옥은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총장님께서 언급하셨듯 춘계 대항전은 각 기숙사의 신입생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시합을 펼치는 축제이오이다. 하여, 다소 서투를 수도 또 젊은 치기들에 불이 붙을 수도 있을 것이오이다. 이에 이 늙은이는 지켜보는 분들께는 너그러운 마음의 격려를 해주시기를. 당사자인 신입생들은 지나친 과열은 금물임을 다시 한번 당부드리겠소이다.”
그렇게 의례적인 당부가 끝나자.
“다음 식순이 있겠소이다. 우선 신입생 대표 당금수석 언용운은 앞으로.”
임태옥이 나를, 아니 정무학관이 당금수석을 찾았다.
예행 연습을 거친 약속된 식순이었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나는 절도 있게 몸을 빼 단상 곁에 위치한 깃발 게양대 앞에 가서 섰다.
게양대에 마련된 대는 총 세 개였는데, 개중에 두 개는 이미 정무(正武) 그리고 정의맹(正義盟)이라는 글자가 용사비등한 필체로 수놓인 깃발이 걸려 나부끼고 있었다.
‘가운데에 걸린 건 정무학관기고 그 옆에 걸린 정의맹 기는 백도 무림의 결집을 상징하는 무림맹기 였다.’
뭐, 아무튼.
그렇게 두 개의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한 개의 대가 비어 있었는데 그 대에 남은 깃발 하나를 내걸기 위해 임태옥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우승기 반납 및 게양식이 있겠소이다!”
우승기.
사대 기숙사를 상징하는 사색과 문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바탕에 우승(優勝) 두 글자를 수놓고 금술까지 달아놓은 깃발.
이, 깃발은 말 그대로 다른 세 개의 기숙사를 눌렀다는 상징이었다.
하여, 제도상으론 춘계 기숙사 대항전에서 한 번, 추계 기숙사 대항전에서 한 번, 종업식에서 한 번 주인을 새로 가리게끔 되어 있는 깃발이었다.
“운매관의 자치 회장은 우승기를 들고 나와 신입생 대표에게 반납하시오이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 운매관이 두 해 연속 최종 우승을 차지한 데다, 작년에는 춘계 ‧ 추계 ‧ 종업 세 분기를 모두 석권하였기에.
자신들의 회장이 우승기를 짊어지고 게양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마치 정무학관의 진짜 주인들은 자신들이라는 태도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운매!”
“운매!!”
그 소리를 등에 업고 보무도 당당하게 게양대 앞에 당도한 운매관의 자치 회장 호연찬은 내가 없는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
후득-
후드득-
좌우로 크게 우승기를 흔들어 보인 뒤.
자신만만한 웃음을 머금고는 천천히 기를 끌러 내게 내밀었다.
“잠시 맡겨두마.”
“어떤 잠시는 때때로 영원이 되기도 하죠.”
“뭐?”
못 돌려받을 거라고.
이 말이 턱 밑까지 찼으나, 그 말을 굳이 전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나. 머지않아 알게 될 텐데.’
나는 운매관의 자치회장 호연찬이 머금었던 미소를 똑같이 머금으며 그가 반납한 우승기를 게양대에 옮겨 걸었다.
‘옮겨 걸 때까지는 너희들 거였지만,’
다시 내릴 때는 주인이 바뀌어 있게 될 거다.
* * *
반환된 우승기가 게양대에 걸려 나부끼기 시작하자, 남은 식순들도 차근차근 진행됐다.
남은 식순이라고 하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기숙사 대항전에서 실시되는 네 종목의 선수로 가려 뽑힌 대표 생도들이 앞서 나오고.
각자의 종목이 적힌 푯말 뒤에 서서 건전한 경쟁을 하겠다는 다짐을 한 뒤.
선수들에게 임태옥이 점수 책정 방식에 관해 안내해주는 절차였다.
“기숙사 대항전에서는 대대로 다섯 개 종목을 겨루어 왔소이다. 제술(製述), 위기(圍棋), 격구(擊毬), 무술(武術), 그리고 태도(態度). 그중 가장 배점이 높은 것은 태도이오이다. 각 기숙사의 전반적인 질서와 응원같은 단합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심사위원들의 투표로 그 등위를 가릴 것이며 배점은 최소 일점에서 최대 십점까지….”
하여, 신입생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지만.
꽃놀이를 겸하여 관객 신분으로 출입한 인근의 백성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오면서 들으니 이번에는 내기판이 각 시합장 바로 앞에서 이루어진다는군.”
“음.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네. 해서, 어디다 걸 셈인가? 이번에도 운매관이 아닌 향란관에 걸 참인가?”
그 다른 이야기가 뭔고 하면, 바로 정무학관에서 수익 창출을 위해 공식적으로 개최하는 내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럴 걸세. 솔직히 이길 때가 되었다고 보네.”
“그놈의 이길 때가 됐다는 소리는.”
“그리고 운매관은 배당이 너무 짜. 상남자는 한 방을 노리는 것 아니겠는가? 자네 같은 하(下)남자들이나 운매관에 거는 것일세.”
“그래 봐야 향란관에 걸려는 사람이 한 방? 하남자아?! 나 참 어이가 없군. 청죽관쯤 돼야 배짱이 두둑하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사람아 청죽이 왜 나오나?! 그건 배짱이 아니라 돈을 쓰레기처럼 버리는 일이지! 심지어 청죽관 출신도 안 걸걸?”
“그래도 예년에 비해 겉보기는 많이 좋아진 것 같지 않나? 질서도 제법 정연하고 정열을 하고 있으니 어디 가서 후기지수임네 해도 될 것 같아 뵈는데? 아, 그리고 보니 올해는 당금수석도 청죽관 이라던데?!”
혹자 중엔 후기지수들의 경기를 가지고 그런 판을 벌여도 되느냐를 두고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놀이감과 구경거리가 없는 시대인 만큼 인근 지역에 문화 생활을 제공하는 측면과 제법 많은 수수료가 정무학관의 발전 기금으로 들어오기에 이점 또한 분명해서 꾸준히 시행되어 오고 있었다.
뭐, 아무튼.
그렇게 임태옥은 임태옥대로, 구경꾼은 구경꾼들끼리 떠들어 대는 사이.
정무학관의 춘계 기숙사 대항전의 개회식이 끝났다.
[위기(圍棋)]
청죽관 언용운 對 향란관 사마랑
윤국관 제갈설지 對 운매관 백가결
그리고 첫 종목인 위기의 준결승 대진표가 나붙음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정무학관이 심판을 서는 내기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게 위기! 그러니까 바둑이구만?!”
“사마랑이면 바둑 잘 둔다고 무림맹의 높으신 분들이 불러다 놀았다는 사람 아닌가? 흠. 근데 언용운 이 사람도 당금수석 인데? 바둑도 잘 두려나?”
“볼 것도 없어! 듣자하니 하북에서 망나니로 유명했다던데! 무공은 좀 하는지 몰라도 저런 쪽으로는 젬병일걸?! 그런 의미에서 사마랑! 사마랑에게 걸겠소!”
“아니 나보고 향란관에 건다고 핀잔을 주던 사람이?! 나도 사마랑에게 걸겠소!”
그때였다.
그렇게 사마랑의 배당률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는 이때.
연청색 무복을 입고 바쁘게 뛰어온 여생도 하나가 전낭에서 은자를 와르르 쏟으며 씨익 웃었다.
“이거 다 걸게요.”
“누구한테? 향란의 사마랑?”
“아뇨. 언 공자, 아니 청죽의 언용운이요!”
* * *
위기란 바둑을 말한다.
나는 사실 바둑을 둘 줄 몰랐다.
‘배울 틈이 없었으니까.’
하여, 바둑돌을 쥐는 법을 배운 것 자체가 고작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야! 바둑돌 그렇게 쥐지 마. 왜 엄지랑 검지로 쥐어?’
‘규칙상 안 되는 거냐 당옥기?’
‘…음? 규칙상 안 되지는 않을걸?’
‘그럼 문제 될 게 없잖아?’
‘멋이 없잖아 멋이! 그리고 그딴 식으로 바둑돌 쥐는 녀석한테 계속 지니까 너무 열받아!’
‘나 원 참. 지가 이겼으면 열 안 받았을 거면서.’
‘캬아악!’
‘됐고. 그럼 어떻게 쥐어야 하는데?’
‘이렇게 검지랑 중지로 돌을 싹 집은 다음에 이렇게 손을 쫙 펴듯이.’
딱.
그런데 전(前)용운이 녀석도 바둑 실력은 영 아니었는 모양인지.
춘계 기숙사 대항전의 예선에서 맞수로 만난 사마랑이라는 놈이 이렇게 나왔다.
“예전에 우리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하나?”
“미안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 부끄러운 기억이라 잊은 척을 하는 것인가? 일곱 살 무렵 네 외할아버지이신 산서금붕의 생신날 우린 만난 적이 있다. 지금처럼 이렇게 마주 앉아 바둑도 뒀지.”
“그랬냐?”
“그래. 당시 네 녀석은 내가 무려 여덟 점을 접어줬음에도 졌다.”
하긴 전용운이 녀석이 바둑 같은 걸 즐길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었으면, 가문의 비전을 날려 먹지도 않았겠지.
반면, 내 상대로 나선 사마랑이라는 녀석은 후기지수 중에 바둑 잘 두는 녀석으로 유명하고 제 놈도 그쪽으로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원작에서는 결승까지 갔었지?’
상대가 제갈설지라 패배의 쓴잔을 마셨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사마랑은 비소를 날리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이후로 무공은 어디서 기연을 좀 얻었는지 몰라도, 집에서 쫓겨나고 한 것을 보면 바둑 실력이 늘었을 것 같지는 않고. 어떠냐? 네가 우리 향란에 먹칠한 일을 공개적으로 사과한다고 하면 나는 아홉 점 정도는 깔아줄 용의가 있다.”
“필요 없다.”
“풉. 자존심을 부리는 거냐? 청죽관의 위기 대표로 나온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들 깔기도 했다던데? 아, 이건 모욕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저번처럼 꼬투리 잡을 생각은 말고.”
하지만 해볼 만했다.
내겐 사부님이 계셨으니까.
- 거, 상당히 나불대는 녀석이로구나. 저렇게 주둥아리가 나불대는 녀석 중에 바둑 잘 두는 놈을 내가 한 놈도 못 봤거늘!
‘뭐 저런 걸로 언성을 높이고 그러십니까. 사부님 실력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제 옛날 실력을 보고 저럴 뿐인데요.’
- 네 녀석이 곧 파천검문이니라! 감히 어디다 대고 하여간이냐?! 제깟 놈이 바둑을 둬 봐야 얼마나 잘 둔다고?! 나는 왕년에 그 신기군사라 불리던 제갈목이도 바둑으로 이겨 먹었던 사람인데!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미래에도 다른 욕은 참아도 ‘이 새끼 게임 죱밥’ 소리를 들으면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말자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여튼, 사부님은 본인 얼굴에 금칠을 하고 계신 게 아니라 실제로 대단한 바둑 실력을 가지고 계셨다.
‘내가 이쪽으로 까막눈이라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야.’
객관적으로 그랬다.
청죽의 위기 대표를 누구로 할지 한창 고민 중일 때.
칼을 품고 둬도 된다면 내가 나가라 하시며 신기군사 어쩌고 하는 저 말씀을 그대로 하시길래, 주변인 중에 바둑 좀 둔다는 녀석인 당옥기 그리고 은하연을 통해 교차 검증까지 마친 차였다.
나는 그런 사부님을 믿고 설계에 들어갔다.
“거, 맘에도 없는 배려하는 척하지 말고, 내가 그 공개 사관지 먼지 하기를 바라는 거면 너도 뭘 걸어라.”
“하하. 한 점도 안 접어줘도 되니까 나도 뭘 걸라는 거냐?”
“쓰흡.”
“……? 뭐냐 그 씁소리는?”
“매번 확인을 해줘야 하는 게 사마씨치고 두뇌 회전이 느린 거 같아서. 알고 보면 삼마랑 아니냐?”
“개자… 하. 격장지계. 후후. 나를 화나게 하려는 거군?”
“이마랑인가? 영 모질라네, 딱 그냥 정해줄게. 네 몫으로 된 전 재산이랑 이마 걸어.”
까득.
“이마?”
“…씁. 이거 이거 이마랑도 못 가겠는데. 이거 완전 일마랑 아냐? 딱밤 한 대 걸라고. 이 말이 그렇게 어렵나?”
“…하. 오냐. 대신 나는 네 엉덩이를 걷어차 줄 것이다. 네가 향란관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그 순간에! 분명히 나는 접어준다 하였으니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아라?!”
“너야말로 내 딱밤을 맞고 멍청해져서 무마랑이 되더라도 원망하지 마라.”
그렇게 녀석과 나의 대국이 시작됐다.
딱.
- 음 저렇게 시작을 하는구나. 너는 우하귀의 화점 바로 밑에 두거라.
그런데 문득.
당옥기와 바둑을 뒀던 때 녀석이 내가 엄지와 검지로 바둑돌을 쥐었을 때 엄청나게 열받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에, 당옥기와 함께 교정했던 바둑돌 쥐는 법을 잠시 원래로 되돌렸다.
딱.
그러자 사마랑의 얼굴에 그야말로 비웃음이 걸렸다.
바둑돌 쥐는 법도 모르는 놈이 바둑을 두는 것으로 모자라 내기까지 거냐는 듯한 웃음.
사실 당옥기도 처음에 딱 저랬었다.
‘물론 당옥기의 웃음은 저 꼴보기 싫은 웃음과는 결자체가 달랐지만.’
뭐,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국을 진행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 거기서 날일 자로 벌리거라.
딱.
딱.
- 바로 붙여라.
딱.
어느 순간.
사마랑의 손이 우뚝 멎었고.
이어서 킬킬거리는 사부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 끌끌끌! 변변찮았느니라!
사마랑이 열세를 뒤집을 길이 없어졌다.
사(師)파고를 앞세운 내 승리였다.
물론 바둑은 끝까지 두거나 한쪽이 항복을 선언해야 끝이 난다.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마랑은 바둑돌을 쥐지도 못하고 부들거리며 장고에 들어갔고.
“……!”
“거,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갔나?”
나는 바둑돌을 쥐려던 엄지를 검지 대신 중지에 붙인 뒤.
입가로 가져가 예열을 시작했다.
“후욱. 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