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고스트 위기왕 (3)
언용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제갈설지의 아미가 좁혀졌다.
‘할아버님의 이름을 걸라고?’
말 자체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는 말과 궤를 같이하는 말이었다.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들어 하늘과 땅 그리고 자신에 걸고 맹세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충분히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 경우엔 저 말을 뱉은 사람이 언용운이라는 게 문제였다.
‘용운 님은 숨 쉬는 것에도 안배가 있는 사람인데….’
망나니라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학관 내에선 언용운의 이야기가 나오면 덮어 놓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나, 제갈설지가 보기엔 그런 행동들은 큰일 날 행동들이었다.
‘실제로 많은 큰일이 났지.’
언용운과 날을 세웠단 사람은 기숙사와 학년을 따지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쓴맛을 봤다.
그렇게 쓴맛을 본 사람 중엔 심지어 제갈설지 본인도 있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코가 깨지거나 이마에 딱밥을 맞고 기절하는 꼴을 당한 다른 학관 사람들에 비하면 비교적 순한 맛을 보았다 할 것이다.
‘개, 개같이 패배.’
하나, 떠올리자마자 울컥하는 기분이 바로 되새겨질 정도로 그때의 쓴맛만큼은 아직도 제갈설지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었다.
‘아직 내가 패배한 건 아니야. 나는 와신상담을 하고있는 중일 뿐이야.’
아무튼 이 순간 제갈설지의 두뇌는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지를 빠르게 되짚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왜 할아버님의 이름을 걸라 그러셨을까?’
수많은 맹세법 중에서 언용운은 하필이면 제갈설지가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님을 콕 찝어 말했다.
‘용운 님은 자신이 이길 것이라 확신하는구나!’
그건 언용운이 그녀를 잘 알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언용운이 대국에서 이긴 다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건 내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갈설지의 머릿속엔 한꺼번에 세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중 첫 번째는 자신이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이해가 가.’
이유야 어쨌든 입관 시험에서 매듭이 지어진 일에 불복한 쪽은 자신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언용운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
‘이건 뭔지 모르겠네.’
아무리 제갈설지라도 사람의 심중을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신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아무런 단서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저 내기를 받지 않거나, 내가 이기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하여 지금 중요한 것은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용운 님은 왜 나를 이길 것으로 생각하시는가?’
언용운이 언급한 제갈설지의 할아버지는 신기군사의 재림이라 불리며, 관무불가침의 질서 속에서도 이따금 황실에 불려가 황제에게 바둑을 가르치시는 분이셨고, 제갈설지는 가문 내에서 그런 할아버지와 유일하게 돌을 깔지 않고 정선을 두는 사람이었다.
‘할아버님 본인이나 백여 년 전에 신기군사라 불리셨던 조상님을 꺾었던 기인이 아니고서야. 내가 질 리가 없는데?’
아니야.
제갈설지.
너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넘겨짚었다가 정현 도장한테 패했잖아.
‘조금 더 냉정하게 봐보자.’
제갈설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앞서 있던 휴식 시간에 살펴보았던 언용운과 사마랑 사이의 대국에서 나온 기보를 상기하여 머릿속으로 바둑 한판을 뚝딱하고 두어 보았다.
‘랑 님은 용운 님의 맹렬한 기풍(棋風)에 당황해서 여러 실수를 했고, 그 실수를 신경 쓰다 지레 겁을 먹어 불계패를 선언했다.’
그녀도 이렇게 사전에 기보를 본 바 없이 난생처음 언용운 같은 기풍을 마주했다면 실수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사마랑 정도로 많이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모든 실수를 했다 치더라도, 그녀라면 중반에서 형세를 맞춰내고 종국에선 끝내기로 아슬아슬하게 이겨냈을 터였다.
‘소무후라는 별호는 솔직히 나도 허명이라 생각하고, 인간관계에서의 수싸움에서는 솔직히 용운 님보다 우위를 점한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가로세로 열아홉 줄의 경계 위에서 하는 수 싸움에서만큼은.
‘나는 신산(神算)이고. 제갈가의 바둑은 무적이야.’
생각은 여기까지.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제갈설지가 웃음을 머금으며 언용운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좋아요. 저 제갈설지는 할아버님의 성함이신 제갈척 그 이름 석 자를 걸고 맹세하건대, 방금 용운 님과 나눈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할게요.]
* * *
‘이렇게까지 형세 싸움이 이루어지고 나니 진짜 한 폭의 그림 같네.’
바둑판 위에 빽빽하게 들어찬 하얀 돌과 검은 돌이 마치 초원과 중원을 양분하는 만리장성과 같은 형국을 이룬다.
물론, 실제 만리장성이야 의지와 예산만 있다면 쌓고 또 쌓아 계속해서 길이를 늘일 수가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바둑판에는 엄연한 경계가 있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기 전까지는 바둑의 ㅂ도 몰랐던 나였지만, 은하연 그리고 당옥기와 숱하게 연습한 터여서 어느 정도 대국의 흐름을 보는 눈이 생겼는데.
지금은 그런 눈을 떠나서 바둑돌을 둘 자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끝난 거 아닙니까? 사부님?’
- 바둑판 옆면에 줄을 더 그어주지 않는 한은 그렇겠지?
딱.
‘그런데도 기어이 두네요.’
- 집 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으니, 우리가 다음 수를 천하의 머저리같이 둔다면 제갈가의 아해가 기적적으로 회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죠. 이건 저도 알겠는데요. 제갈 소저가 돌을 놓은 곳 바로 아래 붙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 맞느니라. 그리 두거라. 그러면 끝이다.
딱.
“!”
정말로 그것으로 끝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좀 놀려줬을 테지만.
- 끌끌끌. 이러면 정말로 끝인 것이지.
‘킬킬킬.’
- 변변찮았느니라!
이번에는 사부님이랑 생각으로만 킬킬거리고 말았다.
“…내, 내가 졌어…? 정말로?”
제갈설지의 동공에 초점이 사라진 게, 굳이 놀려먹지 않아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여 괜히 저 승부욕 귀신을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돌을 쥐는 법도 사마랑 때와는 달리 당옥기한테 배운 대로 제대로 했지.’
저 정도면 충분했다.
뭐,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계가(計家) 그러니까 누가 바둑판에 더 많은 집을 지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끝나게 되었고.
“…내가 바둑으로 졌다고…? 진짜로…? 어째서…? 이건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어, 어떻게?”
“서, 설지야.”
상태가 심히 좋지 않은 제갈설지가 윤국관의 다른 자치회 임원의 부축을 받아 대국장을 빠져나가고 나자, 대국의 전반을 감독하시던 곤륜파의 한영 교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정무학관 춘계 기숙사 대항전! 위기 종목의 최종 승자는 청죽관의 언용운 입니다!”
그에, 숨을 죽이고 있던 관객들과 청죽관 생도가 목청을 높였는데.
“와아아아!!!”
“청죽! 청죽!!”
그 고함 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운 와중에, 한영 교수가 나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제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더군요?”
“예?”
“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일전에 비영파천보라고 했지요? 빼어난 경신술에 그런 바둑 실력이면 정말 제 연구실에 딱 맞는 인재라서요. 언제 한번 놀러 오십시오.”
아니.
대학원생이 되지 않겠냐는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
* * *
한영의 제안은 적절한 수사를 곁들인 화술로 기약 없는 미래로 날려 보낸 나는 곧바로 언 동생들을 찾았다.
굳이 이쪽에서 힘들게 찾을 필요는 없이 대국장을 벗어나자마자 녀석들이 내 쪽을 찾아왔다.
“젠장, 믿고 있었습니다 형님!”
“저도요!”
“빈도는 놀랬습니다. 저라면 두지 않을 수를 두시길래, 왜 저런 수를 두셨나 계속 곱씹었는데. 종국에 와서 보니 그게 제갈 소저의 명치를 짓누르는 그런 수였더군요.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신 건지. 나무도 숲도 아닌 그 너머의 바다를 홀로 보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빈도는 정말 끝도 없이 감탄을 했습니다!”
녀석들의 재잘거림을 손으로 설렁설렁 받아준 나는 바쁘게 언 동생부터 찾은 원래 이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은 소저? 그래서 투자는 어떻게 됐소?”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이 생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만큼 벌었어요!”
“수고했소. 정현. 그래서 우리 생도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거냐? 아까 보니 제일 우측에 있던데?”
“예. 대국 들어가시기 전에 지시하셨던 대로 자리를 지키라 했습니다. 노삼 교수님은 총장님께서 찾으셔서 대회 본부에 가셨지만, 회장님도 계시니 질서를 어지럽히는 생도나 이탈자는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이거 다 챙겨서 그리로 가자.”
그렇게 언 동생들과 은자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대국장의 관중석으로 가 보니.
다른 관중들은 경기장을 다 빠져나간 가운데 청죽관 생도들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 말을 전해오셨다.
- 그 많던 관중들이 다 어디를 간 것이냐? 사마랑이랑 제갈설지에게 걸었다가 장강으로 갔나?
‘큭큭. 학관이 주최하는 거라, 입장 신분에 따라 걸 수 있는 최대 금액 제한이 있어서 그 정도까지는 손해를 입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 그럼 다 어디를 갔느냐?
‘자리 잡으러 갔겠죠.’
다음 종목은 격구.
예선을 겸한 격구 준결승 시합이었다.
무술과 더불어 가장 인기가 있는 종목이었기에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평범한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서 나간 것이었다.
‘정무학관 생도들 자리는 미리 정해져 있긴 하지만 다른 기숙관의 생도들도 위기의 우승과는 인연이 없게 되었으니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갔을 거고요.’
뭐, 아무튼.
그렇게 청죽관 생도들만 오롯이 남은 가운데 내가 들어서자 동기생들 사이에서 환호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청죽! 청죽!!”
“언용운! 언용운!”
고맙긴 했지만, 이 소리를 들으려고 일부러 선배와 동기들을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동기생들에게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낸 뒤.
녀석들이 잠잠해졌을 때.
뒷열에 계신 선배님들을 응시하며 은자가 든 자루를 와륵와륵 내려놓았다.
“청죽관 생도 여러분. 돈들은 좀 따셨습니까?”
그런 내 말에, 선배 동기 할 것 없이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쭈뼛거렸다.
‘내가 이길 거란 생각을 다들 못 했구만?’
그래도 목놓아 환호를 보내왔던 것을 생각하면, 동기 녀석들은 나를 응원하면서도 그저 제갈설지라는 이름은 이름대로 무서워서 참여 자체를 하지 않은 듯했다.
하나, 뒷 열의 선배님들 중엔 얼굴이 벌게지거나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것을 보니 아예 저 양반들은 제갈설지에게 걸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예상대로네.’
뭐, 탓할 일은 아니었다. ‘기숙사 대항전에가서 돈놀이를 하거들랑 청죽관의 상대에게 걸어라.’ 하는 말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슨 격언처럼 통용되는 터였으니까.
‘양금표처럼 적극적으로 양심의 경계를 넘어서 주도적으로 청죽의 패배를 꾀하는 짓을 하는 게 아니고서야 누구한테 걸든 개인의 자유이긴 하지.’
하지만 마냥 두고 볼 일도 아니었다.
춘계 대항전이야 신입생들끼리 어찌해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다가올 추계 대항전과 거기서 더 나아가 천하 각지와 정무학관에까지 마수를 펼치는 마교나 악인들과의 싸움에선 선배님들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여, 나는 입을 열었다.
“따신 분이 없으신 모양이로군요. 보시다시피 저는 좀 많이 땄습니다.”
개중에 제법 은자를 잃은 선배님도 계셨던 모양인지 제 발이 저린 선배님 중 한 분이 바로 반응을 해왔다.
“뭐,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아니면 책하려는 것이냐? 직접적으로 이적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누구한테 걸든, 따든 잃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재학 중인 청죽관 생도 중에 이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은 없었다.
“삼학년이신 서진효 선배님이시군요. 예. 자랑 좀 하려고 합니다.”
“뭐?!”
“근데 그저 돈 많이 땄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청죽관에 걸어서 이렇게 많이 땄다고 자랑하려 합니다.”
“……!”
“책을 잡으려고 여쭌 게 아닙니다. 말씀대로 이적 행위를 한 게 아니고서야 어디다 걸든 제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다만 후배로서 자치 부회장으로서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즐거우셨습니까?”
딴 돈을 자랑하는 내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얼결에 다른 기숙사에 돈을 건 사람의 대표가 되어버린 서진효 선배.
“…하! 뭔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결국 놀리려는 거냐? 돈 잃고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느냐?!”
선배는 이렇게 된 이상 할 말은 하겠다는 듯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와중에 노성을 내왔다.
나는 그런 선배님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배님께서는 오늘 이전에 네 번의 대항전을 더 봐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즐거우셨는지를 여쭙는 겁니다.”
“…그! 그건! 큭! 누군 좋아서 그리한 줄 아느냐?! 네놈은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그리 걸었겠지만 우리는! 우리는!”
그런 내 말에 서진효 선배는 입술을 짓씹으며 울분을 토해냈다.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었다! 젠장! 상대 기숙사에 걸고 내 이럴 줄 알았다 자조하며 돈푼이라도 만지는 게, 그나마 축제의 한가운데서 유일하게 조롱받는 사람들이 식은 미소라도 지어 볼 수 있는 것이었단 말이다! 네놈은 이해를 못 하겠지!”
“이해합니다. 한데, 이해한다고만 하면 네놈은 절대 이해를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겠죠?”
“…그건!”
“하지만 그 또한 이해합니다. 예로부터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그랬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곳간이 차는 쪽에 마음이 간다는 이야기도 되죠.”
향란관의 귀공자님들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체통 없이 돈돈 거린다 하겠지만.
“이 상황과 완벽히 일치하는 말은 아니긴 하지만 저는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제까지의, 조금 전까지의 청죽관은 선배님들의 마음까지 잡아두지는 못했던 거겠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건 단순히 돈을 따고 잃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해하기에 이렇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지금부터는 예전처럼 다른 기숙사에 은자 걸고 자괴감 느끼실 필요 없을 겁니다. 이제 청죽관에 마음을 두셔도 됩니다.”
“…….”
어쩌면 낯간지러운 이야기.
하나 사이에 은덩이가 끼어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나는 내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고 계시는 선배들도 그런 편안함을 얻길 바라며 툭 까놓고 한마디를 던졌다.
“방금 잃은 돈, 따게 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