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02화 (102/444)

제102화. 도보다 검이 어울려 (1)

행정처장 임태옥이 청죽관의 승리를 선언했다.

“…….”

“…….”

하나, 경기장으로 사용됐던 제삼 연무장에 잠시 정적이 내리깔렸다.

정적이 내리깔린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뇌정지들이 온 거지.’

학관이 설립된 이래 처음 일어난 일에 모두의 사고가 정지된 것이다.

“…우리가 대련에서마저 졌다고?! 명문 대파의 피와 정신을 이은 우리가 청죽관 저 잡뼈들에게 졌다고?!”

“…천하제일 후기지수가 있는 향란관이. …대련에서마저 청죽에게 패배할 줄이야.”

향란관 녀석들과 그런 향란관을 응원하던 관객들은 맞닥뜨린 패배에 망연자실한 상태라 찍- 하는 소리밖에 내지 못해 그랬고.

우리 기숙사의 생도들과 우리를 응원하던 관객들은 대련이 시작되기 전에 경룡이 형이 그랬듯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 우리가 이긴 것이지?”

“…그런 거 같은데? 운매와 윤국이면 모를까 청죽과 향란의 발음을 틀릴 리가 없잖나? 그리고 분명히 언용운의 승리라고 그랬어.”

“그럼 우리가 그 향란관을 완전히 이겼단 말인가?”

하나, 그런 정적은 그리 오래 깔려 있지 못했다.

임태옥에게서 대련의 승자와 패자가 명시된 결과지를 받아 간 흑판 관리자가 방금의 결과가 반영된 총점을 새로 써넣었기 때문이었다.

청죽 : 십팔 점

윤국 : 십이 점

향란 : 육 점

운매 : 사 점

향란관에 추가된 이 점.

그건 탈락자에게 주어지는 최저 점수였고, 변동 없는 청죽의 점수는 그 자체로 결승 진출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행동이 모두에게 이 경기의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 순간이 꿈이나 환상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그에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처음에는 조금 무질서한 환호의 집합이었다.

하나, 어느새 그 환호성이 분명한 청죽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더니.

“청죽! 청죽!! 청죽!!!”

그렇게 청죽을 연호하던 목소리들이 어느 순간 내 이름으로 바뀌었다.

“언용운! 언용운!!”

그에 나는 회한을 검집 속으로 채워 넣은 뒤, 답례를 하기 위해 사방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렇게 좌, 우, 전 세 방향을 향해 답례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뒤를 도니.

‘향란관 쪽 좌석이군.’

칙칙한 무복을 걸친 인간들이 저마다 뭐 씹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향란관과 나.

서로 간에 피차 예를 주고받고 할 관계는 아니었다.

‘태도 점수를 생각하자.’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종목에서 광탈을 하며, 이번 대회에서 전 종목 기본 점수 획득의 어둠의 신화를 창조한 향란관 입장에서는 이제 와 태도 점수가 있으나 마나 할 것이었으나.

우승을 노리는 우리는 사정이 달랐다.

‘대련 종목은 결승전에서 승리한 기숙사와 패배한 기숙사에게 주어지는 점수는 각각 팔 점과 육 점.’

향란관과 마찬가지로 앞의 종목들에서 기본 점수만 따내는 데 그쳐 현재 총점이 사 점에 불과한 운매관이 결승 상대가 된다면, 뭔 짓을 해도 청죽관이 우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윤국관이 올라오면?’

최악의 경우 청죽과 윤국이 이십사 대 이십이라는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태도 점수를 최소 일 점에서 최대 십 점까지 줄 수 있으니.

‘사 점 차는 잘못하면 뒤집힐 수도 있는 거지.’

대회 시작 이후로 질서정연한 모습을 꾸준히 보였고, 경기장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쓰레기를 줍는 등 어른들이 보시기에 예뻐할 행동들을 기숙사 규모로 해왔으니 그럴 리는 적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저, 멀리 영길리에 있는 어느 가상의 마법 학교에서는 실제로 용케 살아남았다고 몇 점, 배운 것을 잘 활용했다고 몇 점, 서양 장기 좀 잘했다고 몇 점, 용기가 넘친다고 몇 점, 사랑을 보여줬다고 몇 점.

그딴 식으로 우승자가 뒤바뀐 예가 있었다.

‘내가 그런 짓을 당했으면 호구머시긴가 하는 그 학교 바로 불 질렀다 진짜.’

하니, 포권 한 번으로 막아낼 수 있는 미연의 사태를 굳이 거를 이유가 없었다.

하여 나는 향란관 쪽으로도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러자마자 허리춤으로 옮겨가신 사부님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 뭔, 저놈들한테까지 예를 보이느냐?! 뭐가 이쁘다고!

떠올린 생각들을 굳이 사부님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내 포권에는 한 가지 안배가 더 있었으니까.

‘사부님 눈에는 제가 예를 표하는 것으로 보이시나 보군요? 일반적인 포권과 지금 제가 하고 있는 포권은 그 모습이 약간 다를 텐데요?’

- …그러고 보니 주먹을 덮은 손바닥 쪽의 중지가 서 있구나? 그게 무슨 뜻이냐?

‘엿 먹으라는 뜻입니다.’

그때였다.

그렇게 사부님께 이 행동의 출처를 묻는 사부님께 저 멀리 비단길 너머의 오랑캐들이 쓴답디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때.

내 포권이 향하는 방향의 정면에 있던 남궁윤이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그렇게 포권을 취해봤자 너는 우리에게서 답례를 받아 갈 자격이 없다. 네가 이 환호를 한 몸에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어차피 너희 보라고 한 게 아니니까. 답례를 받아 갈 자격인가 뭔가 하는 건 내 쪽에서도 필요 없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남궁가의 적장자로 태어나 평생 꽃길만 걸어서 그런지 이 녀석도 무공만 뛰어났지, 사회성은 그닥인 녀석이다.

[못 알아들은 시점에서 알 것 없는 이야기고. 거, 그 뒤에 이야기나 해보자. 내가 왜 환호를 들을 자격이 없냐?]

[그걸 몰라서 묻나? 당금수석과 천하제일 후기지수 양자 간의 자웅을 가려보자는 내 제안을 너는 저열한 꼼수로 받았다. 그러고도 할 말이 있다는 건가?]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굴 수 있는 거겠지.

뭐, 나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원작에서도 남궁윤이 주인공인 정현에게 한 소리를 듣는 사건이 있긴 했으니까.

[미안한데 제일 큰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남궁윤.]

[뭐가 틀렸다는 거지?]

[나는 네 아랫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학관도 남궁세가가 아니다. 네 제안을 내가 왜 받아 줘야 하지?]

원래 남궁윤에게 이런 비슷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정현이고, 그 소리를 듣는 장소가 결승전이니 녀석이 받는 느낌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 그건!]

뭐, 춘계 대항전 이후로 녀석의 오만함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는 결과만큼은 같을 것이다.

[사실 손빈병법을 쓴 손빈이 떠올린 삼사법이 과연 꼼수인지도 모르겠다. 하나 네놈이 우기니 백번 양보해 꼼수라 치자고. 하면 대저 꼼수란 게 뭐냐? 하수들이나 걸려드는 것이 꼼수다. 그러니까 너는 방금 네 얼굴에 침을 뱉은 거지.]

[드, 듣기 싫다! 네 녀석 특유의 궤변!]

[듣기 싫어도 들어! 지가 먼저 전음 날려 놓고는?!]

만날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산 녀석 아니랄까 봐.

[그리고 이게 무술학개론 수업인 줄 아냐? 너 하나가 천하제일 후기지수면 뭐 하냐? 세 명의 생도를 어떻게 꿰어 내는가로 승패가 갈리는 게 기숙사 대항전의 대련 종목인데?]

[…크윽.]

[뭐, 어차피 향란관의 우승 가능성은 물 건너갔고 나라도 꺾어서 체면치레하려는 너희 기숙사 간부들의 속셈도 이해는 간다만.]

[…….]

[중요한 건 청죽은 최초로 우승을 목전에 뒀고, 너희는 최초로 전 종목 예선 탈락을 했다는 것. 그리고 너는 탈락했고 나는 결승으로 간다는 사실이다. 남궁윤.]

그렇게 내가 남궁윤을 향해 날이 선 말을 쏘아붙이고 있는 이때.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좀 살살 패거라.

아, 그러게요.

살살 팬다는 게 갑자기 성질이 뻗쳐서 저도 모르게 그만.

* * *

한편, 연무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련된 단상에서 언용운이 향란관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과연 언용운 생도로군요.”

다름 아닌 정무학관의 총장 경혜사태였다.

“저 모습을 좀 보세요. 듣기로 향란관 생도들과 이래저래 얼굴 붉힐 일이 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자리를 빌려 저리 예를 표하는군요.”

그런 경혜사태의 모습에 입꼬리가 귀에 걸린 사람이 있었으니 청죽관의 사감인 노삼이었고.

가만히 학우선을 부쳐가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은 윤국관의 제갈민이었으며.

까득하고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은 향란관의 창량이었다.

남이야 그러시든지 말든지.

경혜사태의 관심이 오롯이 언용운에게 가 있었다.

“참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치열하게 경쟁하나, 승부가 끝나고 나면 정무의 이름 아래 동도이다. 우리 학관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어린 친구가 저러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언용운 생도는 참 생각이 깊어요. 보면 볼수록 세간의 풍문과는 영 딴판인 친구입니다.”

그런 경혜사태의 음성에 귀에 걸려 씰룩이던 노삼의 입이 결국 바람 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하하하핫. 언가 녀석이 제법 물건이긴 하지요!”

“예. 언용운 생도도 생도지만 청죽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개강하던 때 즈음에는 그저 신입생들에게서만 보이는 풍조이려나 했는데. 오늘 보니 재학생들도 제법 일심이 되어 응원을 하더군요. 추계 대항전도 기대해볼 만하겠는데요? 노 교수님이 애를 쓰셨습니다.”

“제가 한 게 뭐 있겠습니까?! 다 제 놈들이 알아서 한 거죠! 저는 이빨 하나 내어준 거밖에 없습니다! 하하하핫!”

“…이빨이요?”

그때였다.

경혜사태가 노삼의 빠진 이빨 하나와 청죽관 생도들이 의젓해진 게 대체 무슨 상관인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던 그때.

향란관 쪽에서 언용운의 포권에 마주 예를 표해오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그에 경혜사태의 아미가 자기도 모르게 좁혀졌다.

“…저런. 저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군요. 청죽과 향란이 서로 쌓인 앙금이 있음은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언용운 생도도 용기를 내서 화해를 청한 것일 텐데. 저걸….”

그리고 아차 했다.

대저 정무학관의 총장이란 중립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지금의 광경을 본다면 경혜사태와 비슷한 생각을 했겠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아. 창량 교수님…. 이건 그게 그러니까.”

“총장님께서 저희 향란관에 악의가 없으심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 구태여 해명하려 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해명은 제 쪽에서 해야겠지요. 저희 생도들이 누구보다 예법에 밝음을 아실 겁니다.”

“예. 잘 알지요.”

“향란과 청죽 양쪽의 신입 생도들이 혈기가 방장하여 서로 간에 신경전들이 있다 보니, 저희 생도들은 언용운 생도가 표하는 포권이 예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양쪽 생도 모두 잘 지도하면 되겠지요. 큰일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 곁에서 듣고 있던 노삼이 콧방귀를 끼고 나섰다.

“광탈을 하고 나니 꼬아서 심통이 난 것을 포장하기는.”

“…광탈?”

“빛처럼 탈락했다고. 젊은 친구들이 쓰는 말인데 자네는 처음 듣지? 만날 그 보고서 형식으로 줄 딱딱 맞춰 올리지 않으면 소통을 안 하니까?”

“하! 개관 이래 최초로 우승 기회를 처음 잡아 보셔서 신이 많이 나신 모양인데 떳떳하십니까 선배님? 언용운, 정현, 은하성 세 사람 모두 종목 중복 출전에, 규정의 틈을 이용하여 이학년 생도인 고완산 생도까지 동원하셔 놓고요?”

“허. 그렇게 중복 출전을 하면 부상을 당할 확률이 높아져 자칫하면 몰수패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쏙 빼놓고 말하는구만?”

“…….”

“그리고 이렇게 해도 좋으냐, 행정처에 문의를 하고, 회장단 회의에서 안건으로 다뤘으니 자치회들끼리도 동의한 일인데? 뭐 폄하하려면 해. 나는 그것이 바로 전략이라는 말을 돌려줄 테니. 우직하게 일 번에 남궁윤, 이 번에 진운, 삼 번에 무길을 써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전략이긴 하구만.”

이 순간.

창량의 입술이 터질 듯이 짓씹겼다.

그도 그럴게, 이번 대련의 선중후 순서는 향란도 나름대로 고민을 한 결과였다.

남궁윤이 도발을 하면 지기 싫어하는 언용운이 덥석 미끼를 물 것이라고 봤고.

그러지 않을 확률도 생각하여 세 번째에 무길을 배치한 것이었다.

언용운이 아닌 정현이나 은하성이 상대가 된다면 모산의 검이 통할 것이라 보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언용운이 제 검을 어찌 그리 쉽게 파훼했는지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당옥기를 배제하고 나니 어차피 후위를 맡길 만한 신입생도 없어서, 자신하는 무길을 한 번 더 믿었다.

단지 그 전략이 통하지 않았을 뿐.

‘무길. 그놈도 문제다. 사고를 쳤으면 잠자코 있을 것이지! 지키지도 못할 주장을 왜 한단 말인가?!’

뭐,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끄집어내 봐야 조롱거리만 늘어날 뿐이었다.

창량은 뜨거운 숨을 단숨에 코로 몰아낸 뒤.

이를 깨물며 경혜사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일단 연구동에서 좀 쉬다 오겠습니다.”

“아. 그, 그러시렵니까?”

“예. 어제 일이 많아 늦게 잤더니 조금 곤하군요. 운매와 윤국의 경기가 있고 쉬는 시간이 좀 있고 결승이지 않습니까? 결승에 맞추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리하십시오. 창량교수님.”

“굳이 올 필요 있을까? 너무 곤하면 안 와도 되긴 하는데?”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총장님.”

그렇게 창량이 몸을 돌려 나가자, 경혜사태가 노삼을 응시하며 엷은 한숨을 뱉어냈다.

“…어휴. 철이 좀 드셨나 했는데 참 한결같으십니다. 한결같으셔요. 제갈 교수님은 좀 말려주시지 않고요?”

“예전에 많이 말려 봤습니다. 소용없더군요. 그 시간에 떡이나 먹는 게 합리적인 행동이지요.”

“…….”

“험험. 철이 안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급입니까? 그저 제가 그동안 당한 걸 조금 돌려주었을 뿐입니다. 총장님도 창량 저 친구가 그간 얼마나 저를 먹여왔는지 봐오셨을 텐데요?”

“예. 똑같으십니다. 똑같으셔요들. 에효 다른 건 몰라도. 청죽의 아이들이 알아서 저렇게 크고 있는 게 맞기는 맞나 봅니다.”

그렇게 경혜사태의 주름이 깊어가는 이때.

그 옆에서 노삼과 창량이 지지고 볶든 말든, 제갈민이 떡을 먹든 말든 자신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운매관의 사감 교수이자 언용운의 의숙부 되는 팽재혁이었다.

‘용운이 녀석이 참 잘하긴 했는데.’

언용운의 선전이 숙부로서 기껍기는 했다.

마냥 기꺼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추후에 오늘의 결과를 적어 형님들께 전서응을 띄워야 할 텐데, 용운이 저 녀석이 아직도 도를 배우겠다는 의사 없이 검을 사용하고 있으면 나는 어찌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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