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도보다 검이 어울려 (2)
‘소천이 이놈은 매일 청죽관에 들락거리길래 용운이 녀석에게 도법을 전수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럼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팽재혁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제 운매와 윤국의 아이들이 나서는군요.”
연무장의 양편에 세워진 막사에 내걸렸던 깃발에 푸른 대나무와 검은 난초에서 붉은 매화와 노란 국화로 바뀌었고.
“방금부로 운매와 윤국 양측의 명단 제출이 완료되었소이다. 그럼 대련 종목의 예선 마지막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소이다!”
양 기숙사의 대표 생도들이 대회를 주관하고 있는 행정처장에게 대련에 나설 순번이 적힌 명단 제출이 완료되었다.
그에 팽재혁은 잠시 상념을 접어두고 연무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용운을 팽가에서 품는 일도 중요했고 팽무혁에게 전서응을 띄울 일도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에 앞서 팽재혁은 운매관의 사감이었다.
그에게는 운매관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지켜봐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이기든 지든 얻어가는 것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운매와 윤국이 맞붙는 춘계 기숙사 대항전 대련이 시작되었다.
앞서 치러진 청죽과 향란의 대련이 세 번째 경기까지 치러지고 나서야 승자와 패자가 갈렸던 반면, 운매관과 윤국관의 경기는 단 두 경기 만에 끝이 났다.
양측에서 선봉으로 뽑혀 나온 생도는 운매가 천장호, 윤국은 제갈설지였는데, 처음에는 합이 좀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제갈설지의 기세가 점점 더 매서워져 감에 따라 살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초(傷招) 정도는 되는 검들이 티 안 나게 실리기 시작하자.
“제, 제갈 소저?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러시오? 함께 조별 과제를 수행하던 때를 잊으….”
성정 자체가 직접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천장호가 얼마 안 가 항복을 선언했다.
“…셨군! 잊으셨어! 흐미! 거지 죽네! 거지 살려!! 졌습니다! 항복! 항보오오옥!!”
그런 천장호를 보며 노삼은 혀를 찼다.
“…저 저 염병할 놈이. 살려달라고 할 거면 제 이름이나 운매를 잡아넣을 것이지…. 하필이면 그 자리에 거지를 잡아넣어서 거지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먹칠을 해.”
그리고 그런 노삼을 향해 교수 중에 친향란관 인사로 분류되는 남궁정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비유가 맞습니까? 거지라면 원래 얼굴에 먹칠이 조금씩은 되어 있는 것 아닌지요?”
“분명히 말해 두건대 이건 먹이 아니다.”
“그럼?”
“때다.”
뭐, 그러고 있는 사이.
양측 중군으로 나선 대표 생도는 운매관이 언용명, 윤국관의 팽소진이었다.
“언용명. 그러고 보니 청죽의 언용운이랑 이름이 엄청 비슷한데?”
“듣자 하니 친동생이라더군? 근데 그걸 이제 알았나? 운매관에 돈까지 건 사람이?”
“돈이야 운매관을 믿고 건 것이지. 그나저나 그 언용운의 동생이라니. 이거 어떤 무위를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걸?!”
뭇사람들의 기대대로 언용명과 팽소진의 대결은 제법 불꽃 튀는 공방전이 펼쳐졌다.
쾅! 꽝!
두 사람은 연무장 전체를 알뜰히도 써가며 각자의 권과 도를 겨뤘다.
콰아아앙!!
뭣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광경이었다.
하나, 그런 둘 사이에는 분명한 우위와 열위가 있었다.
“누님의 도는 예나 지금이나 빈틈이 없군요. 제 주먹이 누님께 닿으려면 팔 한쪽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테니, 이쯤하여 저의 부족함을 인정하겠습니다.”
언용명은 그것을 깨닫자마자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팽소진에게 한번, 그리고 운매관 쪽으로 한번 포권을 취했다.
“운매의 언용명이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였으니, 윤국의 승리를 선언하겠소이다! 윤국의 팽소진 승리! 그런고로 대련 종목의 결승 진출은 윤국관의 몫이 되겠소이다!”
그렇게 팽소진의 승리로 윤국관이 이 연승을 하며 대련이 끝났으니.
청죽 : 십팔 점
윤국 : 십이 점
운매 : 육 점
향란 : 육 점
향란관과 더불어 운매관 또한 개관 이래 최악의 성적을 거둔 꼴이 되고 말았다.
하나, 팽재혁의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흥. 그동안 너무 승승장구하긴 했지.’
이렇게 패배의 쓴맛을 한번 경험해 보는 것도 때에 따라선 좋은 약이 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일단 향란은 깔았고.’
당장 흑판에 적힌 점수는 태도 점수가 반영되지 않은 것이라, 동점자는 매난국죽의 순서대로 순위가 갈려 있게 돼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리 확정이 되겠지.’
용운의 포권을 본체만체하고 자리를 뜬 향란관보다 운매관의 태도 점수가 나쁠 리는 없었다.
생각을 마친 팽재혁은 경혜사태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시 저희 애들 좀 다독이고 오겠습니다.”
“아. 예. 그러십시오.”
그렇게 팽재혁이 운매관 생도들이 앉아 있는 좌석으로 향했는데.
“죄송합니다 교수님. 순번을 제가 짰는데, 윤국관 녀석들 손바닥 위였나 봅니다. 저희 측의 상마(上馬)가 소천이였는데 녀석이 나서보지도 못하고 대련 종목에서 탈락하게 된 것은 제 불찰입니다.”
도착한 팽재혁을 향해 운매관의 자치회장 호연찬이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그에 팽재혁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우리가 윤국 녀석들에게 수를 안 읽힌 적이 있었느냐? 순번이 읽히고도 승리를 쟁취하는 게 지금까지의 운매였다.”
“죄송합니다. 숙…. 아니 교수님.”
“언용명 생도도 머리 숙일 것 없다. 너를 탓하려고 한 말이 아니니. 최선을 다하고 부족함을 깨달았을 때, 졌음을 인정하는 것 또한 운매관이 지향해야 할 용기다. 아니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래. 회장 이하 자치회 간부들과 다른 생도들이 모두 합심하여 추계 대회에서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용기를 잃지 말되, 운매라는 이름이 거저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님을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닫기를 바란다.”
“예! 교수님!!”
“단! 천장호! 너는 내일부터 일과가 끝나면 내 연구동으로 오도록!”
“예? 아…. 옙.”
“그리고 소천이 너는 지금 당장 나 좀 보자.”
* * *
운매관 생도들은 단속을 했다.
이제 팽재혁에게 남은 문젯거리는 언용운이었다.
그 문젯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팽재혁은 팽소천을 이끌고 팽소진을 찾아갔다.
“숙부랑 돼지? 제가 윤국을 택한 이후로 소 닭 보듯 하시길래, 삐치신 줄 알았는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누님. 저는 돼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예?! 이렇게! 근육이 발달한 돼지를 보셨습니까?”
“응. 봤어. 멧돼지.”
“…오.”
“오는 무슨 오! 그리고 소진아! 내가 언제 너를 소 닭 보듯 했느냐?! 너나 소천이는 물론이고 언가네 형제들까지 얼마나 내가 아껴 주었는지 잘 아는 녀석이 그런 말을 하느냐. 사람 섭하게.”
“본체만체하시고, 따로 연락이나 찾아오신 적도 없는 것은 사실이시잖아요?”
“그거야. 내가 니들 숙부이긴 하지만 또 운매관의 사감이고 도법 교수고 하니, 괜히 너희를 두고 숙부 덕을 본다 어쩐다 뒷말을 하는 자들이 나올까 봐 그랬지.”
“그래서 어쩐 일이신데요?”
팽소진의 되물음에 팽재혁은 두말할 것 없이 팽무혁에게서 날아온 전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팽소진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전서를 읽어 나갔다.
“내 동생 재혁은 보아라… 음. 아버님이 용운이를 팽가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시는군요? 또 오지랖이 발동하셨네요. 그냥 알아서 살게 두면 되는 것 아닌가요? 심지어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던데?”
“내 너의 말에 일부 동의하기는 한다.”
“그럼 숙부 선에서라도 안 하시면 되잖아요?”
“하나, 무에 있어서만큼은 반드시 좋은 스승이 필요한 법이다. 예컨대 도가의 심법을 적어 놓은 비급들을 보면, 마음은 납처럼 내력은 수은처럼 수장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곤 한다. 이게 납은 무거워 가라앉고 수은은 뜨니 마음은 가라앉히고 내력은 띄워 움직이라는 뜻인데, 이런 걸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비급만 가지고 어찌 알 수 있겠느냐? 고래로부터 무림인들의 사승 관계와 세가의 혈연이 진하게 이어져 내려오며 위계질서가 엄중해진 것에는 다 이유가….”
팽재혁이 생도들과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화통한 사람으로 통하고, 조카들에게는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이었지만.
확실히 교수는 교수였다.
교육 철학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저렇게 일장 연설이 나와버리는 것이다.
그런 팽재혁의 장광설에 팽소진도 반쯤 백기를 들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고요?”
“네가 용운이 녀석에게 지금이라도 도를 쥐는 게 낫다는 것을 알려주거라.”
“그러니까 지금 이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는 저더러 결승전에서 용운이를 무위로 눌러주라는 이야기시죠?”
“과연 우리 가문에서 첫 번째로 배출한 윤국관 생도답구나. 그걸 바로 알아듣다니.”
소천이 이 자식은 근 한 달 동안 도의 멋짐을 말 그대로 보여만 줬다던데.
“아니 제가 어떻게요? 대련 순번이 어찌 될 줄 알고요? 저한테 그거 정할 권한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청죽은 청죽대로 순번을 꼬을 텐데?”
“만약에 만나게 되면 그리해 달라는 것이다. 결승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제일 좋은 상황이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끝나고 네가 따로 한번 찾아가다오.”
하나 팽소진이 보기에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만나도 문제예요. 제가 용운이를 눌러요? 숙부도 무술학개론이나 저희보다 앞에 한 청죽의 대련 보셨을 거 아니에요? 저는 모산의 검을 용운이처럼 일격에 걷어내는 그런 거 못 해요.”
“그건 신경 쓸 거 없다. 용운이 녀석이 언가의 비급을 팔아먹은 일을 너도 기억할 테지?”
“그걸 어떻게 까먹겠어요.”
“애초에 진주언가에서 용운이 녀석이 그 비급을 가까이하도록 두었던 연유가 녀석이 상단전이 열려 있던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체질과 연관이 있을 것이야. 내가 보기엔 그건 단순한 검술의 영역이 아니었다.”
사실 공식적으로 언용운의 무위가 제대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하여 팽재혁으로서는 대략적으로 추측을 해보는 수뿐이었다.
“자질이 있음은 분명하나, 녀석이 허송세월을 한 시간을 생각하면 절대로 소진이 네 상대가 아닐 것이야, 그 성실한 용명이 녀석도 꺾은 네가 아니냐?”
“…간신히 꺾은 건데.”
그렇게 언용운의 과거 행적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고 있는 팽재혁이었기에.
“용운이 녀석이 한계를 느끼고 단념할 수 있도록 네가 애 좀 써다오.”
한계를 느끼고 단념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 나왔을 때.
팽재혁은 팽소진의 얼굴에 서린 표정을 보지 못했다.
* * *
“벌써 마지막 경기로군요. 양 기숙사의 생도들은 후회 없는 경기를 펼치길 바랍니다.”
대련 종목의 결승전이 경혜사태의 축사와 함께 막을 열었다.
원작과 달리 정현이 빠진 운매가 과연 제갈설지의 심계를 뚫고 원작처럼 결승전에 올라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역시나 윤국관이 상대가 되었다.
‘태도 점수 많이 받을 만한 행동들을 해놓기를 잘했지.’
물론 불확실한 태도 점수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깔끔하게 대련까지 우승해서 전 종목 석권 우승을 하는 게 최고니까.’
나는 그러기 위해 양 기숙사 대표 생도 간의 인사 시간을 빌려 제갈설지에게 전음을 보냈다.
[제갈 소저.]
[…왜 그러시죠.]
멀쩡하게 검을 펼치며 예선을 통과하길래 바둑에서 진 것으로 심마에 들지는 않았구나 했는데, 막상 나와 말을 섞으니 천하의 제갈설지가 흠칫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타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구만?’
뭐, 아무튼.
나는 제갈설지를 향해 바로 본론을 던졌다.
[나는 정현을 선봉으로 낼 것이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어찌 보면 남궁윤이 내게 한 행동과 똑같은 행동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의아를 표해오셨다.
- 그건 왜 알려주는 것이냐? 남궁가의 아해의 전철을 밟으려는 것이냐?
‘에이, 걔랑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죠.’
사정이 다르니까.
오만에 취해 선봉이 자신임을 밝힌 남궁윤의 행동은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만, 이쪽은 맺어놓은 약속이 있다.
‘제갈설지는 정현부터 넘기로 했지.’
바둑판 앞에서 나눈 내기는 단순히 그녀가 소원을 들어주는 것만을 포함하는 게 아니었다.
이쪽의 조건은 제갈설지가 이기면 정현을 건너뛰게 해준다는 조건이었으니, 앞에 나눴던 약속을 다시 한번 공인하는 성질까지 가지고 있었다.
‘녀석이 존경하는 할아버님의 이름까지 걸고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제갈설지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걸릴 수밖에 없는.
이른바 알고도 걸릴 수밖에 없는 계략이었는데.
“이제 양측이 제출한 선봉의 이름을 호명하겠소이다! 윤국의 선봉은 제갈가의 설지!”
내 예상대로 제갈설지는 선봉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게 손과 입술을 파들거리며 걸어 나온 제갈설지는 이번에도 정현을 넘지 못했다.
“…흐하. 흐헉.”
“그만! 그만! 정현 생도는 걸음을 물리고 제갈설지 생도는 이만 검을 놓으시오이다! 더 이상 대련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 아니오이까?! 윤국관의 자치회 간부는 어서 제갈설지 생도를 데리고 나가시오. 나가서 물 좀 먹이고 약학당으로 보내시오! 저러다 주화입마에 걸리겠소이다!”
하여 청죽관이 먼저 일 승을 확보한 상황에서 중군으로 내가 나섰다.
“청죽의 중군은! 언용운!”
“와아아아아!!”
“당금수석! 당금수석!”
“언용운! 언용운!”
윤국관의 남은 대표 생도는 두 명.
창읍 만가의 만벽.
하북 팽가의 팽소진.
두 명의 후보 생도 중에 윤국관의 중군으로 불린 사람은 다름 아닌 팽소진이었다.
“윤국의 중군은! 팽가의 소진!”
자박자박 걸어 나온 그녀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
내 쪽에서는 기실 초면이었으나, 언용운이라는 인간 기준으론 어릴 때 놀아주시던 누님이 된다.
뭐, 이런 상황을 팽소천을 통해 겪어 보았기에 나는 어색하지 않게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러게요. 누님.”
더욱이 팽소진은 주인공 세대에 당당하게 들어가는 인물이라 더욱 잘 알았다.
‘팽가의 직계이면서 도를 버리고 검을 쥐는 사람.’
그렇게 내가 원작의 팽소진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눈앞의 팽소진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너한테는 백부가 되는 우리 아버님이 우려하고 계셔, 재혁 숙부도 걱정하고 있고.”
“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설지가 분해하는 거 보니까 여간 똑똑한 게 아니던데, 시치미를 떼는구나? 그래, 직설적으로 말할게. 아주 검을 쓰기로 한 거니? 어른들은 네가 도를 쥐기를 바라시던데?”
“망나니는 본디 어른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아 망나니인 법이죠.”
“하하. 그것참 편해 보이네.”
“그럼 누님도 하시던지요?”
이 순간.
무언가를 들킨 듯.
팽소진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던 평정이 깨졌다.
“정곡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