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04화 (104/444)

제104화. 도보다 검이 어울려 (3)

뜻대로 사는 게 부러우시면 누님도 그렇게 하시라는 내 말에 팽소진은 분명히 동요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녀는 일순 얼굴을 바꾸며 시치미를 뗐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감정 교류가 끊겼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가문에서 쫓겨난 망나니 인생을 두고 편해 보인다고 말한 것을 비꼬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려나?’

예컨대 ‘그리 살면 좋냐?’ 혹은 ‘자랑이다, 이 자식아’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나, 원작을 읽은 나는 알았다.

방금 팽소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새어 나온 그녀의 본심이라는 사실을.

그도 그럴 게 팽소진은 장차 도를 꺾고 검을 쥐는 사람이었다.

대저 강호에서 명문 대파라 일컬어지는 문파와 세가들은 자신들이 대대로 써 내려온 역사에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그런 자부심의 근간은 결국 무학과 그런 무학을 펼치는 데 사용되는 병기다.

‘검이 멋지냐 도가 멋지냐 하는 유치한 주제로 으르렁거리던 팽무혁과 공손무결만 봐도 알 수 있지.’

하여 명문 대파의 후기지수가 가문의 무학과 병기 대신 다른 무학과 병기를 주워섬기는 일은 극히 드물다.

갈라지고 갈라져 나와 피가 묽어질 대로 묽어진 분가의 사람이라면 모를까 정말로 드문 일인 것이다.

‘뭐, 그렇다고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에 권사 가문에서 난 검사인 나도 그 예다.

상당히 특이한 사례인 나를 빼놓는다고 하더라도 은하연의 사부 되시는 모용린 교수도 있었다.

‘검후 모용린.’

작중의 모용세가는 요하를 사이에 두고 대대로 팽가와 천하제일도를 논해온 가문이었지만, 모용린은 가문을 나와 검을 쥐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검후가 되었지.’

교수님 쪽은 방계라서 적녀 그것도 맏이인 소진 누님과 사례가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고, 또 이쪽은 아버지가 그 팽무혁이라는 게 크게 다르긴 하지만.

뭐, 아무튼.

시대상을 고려하면 진주언가의 적자였던 내가 망나니가 되어 쫓겨난 것만큼이나 엄청난 일을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 바로 눈앞의 팽소진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개입했다고 해서 인물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바뀐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징후와 원인도 여전했다.

대대로 하북팽가의 무인들이 이름을 빛내 온 운매관을 두고 윤국관을 택한 것이 바로 징후였다.

‘원인은 바로 저거고.’

나는 생각과 함께 시선을 팽소진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는 곧게 뻗은 도로 옮겼다.

팽무혁, 팽재혁, 팽소천이 어깨에 걸고 다니는 대도들과는 모양과 크기가 많이 다른 직도(直刀).

그렇게 내 시선이 팽소진의 허리춤으로 향하자.

내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전해오셨다.

- 저 아해도 팽가의 아해라 하지 않았더냐?

‘예. 저번에 보신 도제의 따님이자, 소천이 형의 쌍둥이 누나입니다.’

- 쌍둥이이면 한배 그것도 거의 한 시에 난 녀석들인데 저리 다르구나, 눈매와 콧날만 빼면 완전 다른 거푸집에서 난 것 같도다.

사부님의 말마따나 팽소진은 팽소천과 다르게 났다.

전반적으로 우락부락한 팽소천과 달리 고운 외모를 가진 것은 복이었다.

하나 팽소진은 가장 중요한 맹호지체를 타고나지 못했다.

맹호지체를 타고나지 못한 게 왜 문제인고 하면.

‘맹호지체를 타고나지 못하면 현철대도를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으니까.’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오기 전까지 독파해온 무협지들은 한철과 현철을 상하 관계로 묘사하는 것이 많다.

한데 ‘무림학관의 검술천재’에서는 그저 양자 간의 성질이 다른 것으로 묘사된다.

‘장인과 추가하는 재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철은 차갑고 가볍다. 현철은 뜨겁고 무겁다.

하여 산지도 각각 북 그리고 서와 남으로 다르며, 한철이나 현철 같은 귀한 재료로 무기를 만들어 쓰는 문파와 세가는 자신들의 무공의 성질에 따라 한철만 쓰기도 하고 현철만 쓰기도 하고 섞기도 한다.

작중에 묘사되기는 팽가의 오호단문도는 그중 오직 현철만을 재료로 쓴 시커먼 대도를 사용했을 때 가장 위력적인 무공이라 했는데, 오호단문도를 몇 수 직접 받아본 나였기에 그 위력과 무거움을 알았다.

‘글로 읽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팽무혁은 내력을 싣지 않고 휘두르고 이쪽은 검기를 감아 받아내는데도 뼈마디가 저릿저릿 울릴 정도였다.

‘팽무혁이 휘두르는 것은 그냥 현철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만 년 이상 묵은 놈을 접어 때려 만든 것이라 그런 것이긴 했지만.’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거나 물만 마셔도 근육이 붙고 인(寅)의 기운을 찍어 누를 수 있는 맹호지체를 타고나지 못한 팽소진은 현철대도로 오호단문도를 제대로 펼쳐낼 수 없었다.

“누님이야말로 시치미를 떼시네요.”

“무슨 시치미. 그런 거 없는데?”

“제가 보기엔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직설적으로 한마디를 드려볼 생각입니다.”

“해보든지. 들어나 보자, 나도 모르는 내 시치미가 뭔지.”

“아, 근데 그건 대련이 끝날 때 드릴 거라.”

“기분 탓인가? 묘하게 네가 이길 것처럼 말한다 너?”

“기분 탓이 아닐 겁니다.”

* * *

나는 회한에 잿빛 아지랑이를 감았다.

팽소진의 직도에도 염화를 닮은 붉은 검기가 감겼다.

어쩌면 춘계 기숙사 대항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대련의 시작에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나와 팽소진만이 숨을 내뱉으며 서로에게로 치달았다.

챙!

아무리 무가라 하여도 무작정 무만 쫓고 무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챙! 채채챙!!

그러면 대체 소는 누가 키워?!

세가에는 서무를 보는 사람도 필요하고 예에 능한 사람도 있어 나쁠 게 없다.

하여 무에 재능이 없다면 일찍이 서책을 읽게 하거나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또는 주판을 쥐게 하거나 아니면 비파라도 타게 하던지 아무튼 다른 길을 열어주곤 했다.

채챙채앵!!!

근데 여기서 문제는 팽소진이 무재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지,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지.’

방금의 동작만 봐도 그랬다.

살기가 나부끼는 현장에서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나곤 하는 나였는데.

나부끼는 단발머리 사이에서 빛나는 팽소진의 눈동자는 조금 늦긴 해도 분명히 나를 따라붙어 오고 있었고.

채챙!

딱 늦은 시간만큼 동물적인 각각으로 도를 움직여 공격이 올 것 같은 자리에 미리 가져다 놓는 감각이 있었다.

그 행동으로 피가 튀어야 할 순간에 불꽃이 튀게 하고 있었으니, 이는 분명한 재능이었다.

캉!

한두 번은 운이라도.

그 이상은 운이 아니었다.

카카캉!

단지 맹호지체를 타고나지 못했을 뿐이지, 팽소진 역시 천재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인 것이다.

원작에서도 공인된 바였으나.

이렇게 내 눈으로 보니 더욱 확실했다.

“고육지책인 겁니까?”

“뭐?”

“현철을 적게 써 크기를 줄인 직도, 중도(重刀)의 무리를 담고 있는 초식을 적절히 덜어내고 강(强)과 쾌(快)의 무리를 담은 초식에만 집중한 듯한 연계.”

“고, 공격하면서 말 시키지 마!”

챙! 채채채챙!

캉!!!!

그것만으로도 번번이 맹호지체를 타고난 팽소천을 꺾어왔고, 또 방금 용명이 녀석도 꺾어냈다.

하나, 고점이 분명했다.

한계가 있는 것이고, 끝에 닿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저 정무학관을 졸업장을 딴 어쭙잖은 도객이 되어 삼시를 챙겨 먹으며 칼밥을 먹고사는 게 꿈인 사람이라면야 상관없을 것이다.

하나 팽소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 가혹한 일이었다.

뭐, 아무튼.

말 시키지 말라면 말 시키지 말아야지.

나는 입을 다무는 대신 속도를 조금 더 올리기 시작했다.

* * *

팽소진은 결국 검을 든다.

물론 그 과정이 단칼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고민하고, 방황도 하고, 팽무혁 팽재혁과 갈등을 빚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정현과 우정을 쌓아나간다.

하나, 지금에 와 생각하면 그 일련의 과정 중에 고민과 방황의 시간은 썩 중요치 않았다.

‘고민으로 지새웠던 날들은 그저 속앓이만 하고 심마에만 들었던 시간이었고, 방황의 시간은 스승을 찾아다니는 시간이었지.’

물론 그 과정을 정현 제갈설지 당옥기 등등이 도우며 우정을 쌓긴 했지만.

주인공 세대들끼리의 우정이야 지금에 와서는 내가 적당히 소개시켜 주면 어떻게든 되는 일.

그것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개입하며 조금씩 조금씩 뒤틀려 가는 흐름에 대응하려면 주인공 세대가 하루라도 빨리 제 길을 찾아 커 줘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래야 나도 편해져.’

그러니까 누님의 등을 조금만 떠밀어 줄까?

어려울 것은 없었다.

나는 이미 팽소진의 사부가 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으니까.

‘무림맹주. 구패검 공손무결.’

알기만 아나?

검을 배우고 싶으면 찾아오라는 언질과 함께 무결이라는 이름이 적힌 동패까지 받아 뒀다.

‘가만있자….’

원작의 정현은 하북팽가와 팽소진의 갈등이 봉합되었을 때 웅패환이라는 비전 영약을 선물로 받았었지?

‘거기다 맹주님한테 제자 소개비 명목으로다가 추가로 뜯어내야지. 흐흐.’

- 또또 무슨 생각을 하길래 입꼬리가 그렇게 비틀리느냐?

흠흠.

사부님 말씀이 맞다.

‘웃고 있을 때가 아니지.’

팽소진이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때는 다가올 기말고사였다.

그 기말고사에서 언용명과 팽소천이 자신을 넘어섰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또 은하연의 옥녀검이 눈에 띄게 성장해 버거워졌음을 직접 겨뤄 알게 된 뒤 본격적으로 심마에 빠진다.

하여, 방법도 간단했다.

‘그냥 실력으로 압도하면 돼.’

공식적으로 검을 쥔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이처럼 공개적인 자리에서 팽소진을 추월하면 그것 자체로 원작과 비슷한 흐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청죽관의 춘계 기숙사 대항전 우승이 결정된다.

그럼 나는 춘계 대회 우승 자치회에게 주어지는 무림맹 견학 인원 선정권을 활용해 팽소진을 공손무결에게 데려가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부녀 사이의 갈등이야 원작대로 알아서 지지고 볶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팽소진도 검을 쥔 판국이 되어버리니 팽가에서 더 이상 내게 검보다 도가 어울린다며 귀찮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 떠나서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지지고 볶느라 정신도 없겠지만.’

그때였다.

내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순간.

팽소진이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을 내리그어 왔다.

쌔애액!!

나는 번개 같이 회한을 비틀어 강검의 묘리로 팽소진의 현철직도를 밀어냈다.

챙!!!!

그에 팽소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강검의 묘리를 흘려내기 위해 바쁘게 잔발을 밟으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비영파천보의 묘리를 운용해 팽소진을 향해 득달같이 땅을 박찼다.

“?!”

그에 팽소진이 경기를 일으키듯 도를 휘저어 왔고.

“히익!”

“저, 저런?!”

사방의 객석에서도 헛숨 삼키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대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사방에 선 대학원생들도 흠칫하며 뛰어 들어오려는 것이 느껴졌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대련 초반도 아닌데 갑자기 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속도를 내가 단박에 몇 배나 급격하게 끌어 올렸으니.

채! 채챙!!

잘못 보면 딱 동귀어진 혹은 육참골단의 현장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나, 나는 그저 감당할 수 있었기에 속도를 올린 것이었다.

채채채채챙!

이 몸을 차지한 이래 거르지 않고 단련해온 신체.

이런저런 사건들에 휘말리며 거쳐온 살기의 틈바구니에서 거듭난 검수로서의 감각.

사부님과 함께 바둑을 두며 내심으로 고민했던 활로와 사로.

꾸준히 지켜봐 온 다른 천재들의 대련.

그 모든 과정에서 숱하게 휘둘러 온 파천검법의 초식.

그리고 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

그렇게 꾸준히 담금질을 해온 심과 신에 파천의 기가 감응한다.

또옥-

그에 조금 진하게 엉겨져 나온 내력이 제갈설지와 정현의 대련을 처음 본 이래로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심상의 벽에 주먹만 한 구멍을 내니.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검기가 응어리를 이루고 그 응어리가 가닥가닥 감겨 실처럼 넘실대며 회환에 예리함을 더한다.

- 검기성사(劍氣成絲)

아.

이게 이른바 검사(劍絲)의 경진가?

초식의 변화는 없었다.

쌔애애애액!

질러내는 것은 파천맹진이고, 내려 베니 파천낙뢰, 그어 베니 파천선풍.

보폭과 간격을 줄여 그 모든 과정을 이어 내니 파천격류.

분명히 같은 초식이었다.

하나 그 위력이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다.

캉!!!

그것으로 끝이었다.

휘둘러진 회한에 팽소진의 현철직도의 이가 나가고야 말았다.

“흐아?”

그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팽소진이 연무장의 끄트머리로 몰려 있는 사실을 잊고 뒷걸음을 치다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꽈당!!!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팽소진.

“내 생각엔.”

나는 그런 팽소진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한 번은 앓아야 할 열병을 입으로 전했다.

“누님도 도보다 검이 어울려.”

그와 동시에 행정처장 임태옥이 내 승리를 아니 사실상 청죽관의 우승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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