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도보다 검이 어울려 (4)
팽소진은 나를 향해 자신이 엉덩방아를 찧었다는 사실도 잊고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청죽! 청죽!! 청죽!!!”
“…흐아?! 그 짧은 시간에…. 완전히 추월 했… 검이 어울린다는 말은 뭐…?”
“언용운! 언용운!! 언용운!!!”
하나 청죽관 생도들과 관객들이 질러내는 목소리에 팽소진의 말은 완전히 묻혔다.
뭐, 상관이야 없었다.
‘어차피 당장에 돌려줄 말은 없으니까.’
바둑에서 진 제갈설지만큼 인지 부조화가 온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해줘 봐야 귀에 잘 들리지도 않거니와 마음에 새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했어.’
내버려 두면 지금까지는 가문과 그녀 스스로 합리화와 동기 부여를 해왔기에 완전히 자각하지 못했던, 맹호지체가 없는 자가 마주하는 벽을 그녀 스스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 발로 나를 찾아오겠지.’
하여 나는 팽소진의 중얼거림에 답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딸깍-
그리고 회환을 허리춤에 채워 넣은 뒤 사방을 향해 포권을 올렸다.
청죽 : 이십육 점
윤국 : 십팔 점
운매 : 육 점
향란 : 육 점
그러는 사이 결승 대련에서 발생한 점수가 흑판에 더해졌다.
그 점수를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하셨다.
- 왜 점수가 저것밖에 안 되느냐? 태도 점수인가 뭔가가 있다 하지 않았느냐?
‘그거는 이제 총장님과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교수님들이 의논하셔서 정하는 거라 나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교수님들이 회의를 하시는 동안 생도들과 대학원생들은 폐회식 준비를 하고요.’
- 하면 아직 우승이라 확정을 짓기에는 좀 그런 것 아니냐? 태도 점수가 일 점에서 십 점이라면서? 그러면 저번에 네가 말한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면 너희가 이십칠 점 윤국이 이십팔 점이 나오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단언하긴 했지만, 사부님의 우려가 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긴 대로 산다는 말처럼 노삼 교수님은 학관 내 정치에 능한 인물이 아니라 친청죽파 인사라 부를 사람은 그나마 검후 정도밖에 없긴 했다.
‘아, 총장님과 수위부의 부장님 그리고 임태옥 처장님이 나한테 호의적이시긴 하시네.’
그나저나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나보다 친한 교수가 없는 노삼 당신은 도대체….
아무튼 그것까지 더해서 친청죽관 인사라 부를 만한 사람은 딱 다섯이었다.
반면 윤국관 출신 부호들이 교수들의 연구를 금전적으로 지원하거나 인척들을 식객으로 두기도 하는 터라 내심으론 청죽관보다는 윤국관에 호감이 가는 교수님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청죽관의 점수는 똥처럼 매기고 윤국관의 점수만 높일 수는 없었다.
전 종목을 청죽관이 석권해 버린 상황이었으니까.
‘압도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지.’
윤국이 학관에 뿌려놓은 금은이 빛을 발하려면?
최소한 대대로 기숙사 대항전의 꽃이라 불려온 대련 종목에서만큼은 윤국이 우리를 꺾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하여 나는 아니 청죽은 우승을 확신할 수 있었는데.
“우승이야! 청죽관이! 우리가 우승을 했다고!”
“나는 눈이 없는 줄 아나?! 나도 봤어 이 사람아! 그래! 우리가 우승이야! 그것도 전 종목 석권 우승!!”
이 우승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가장 열심히 뛰어다녔던 자치회 식구들이, 막사와 관객석에서 달려와 나를 감쌌다.
“격구 결승 득점의 사나이인 제가 남궁윤과 당당하게 자웅을 겨뤘던 이 은하성이 몸을 달궈놓고 있었는데 이게 용운 형님 선에서 마무리가 돼버리네요! 아! 아쉬워라!”
그중에 가장 먼저 운을 뗀 사람은 하성이 놈이었는데.
“근데요, 그 말씀은 그럼 은 형은 언 형께서 지는 것을 응원하셨다는 것인가요?”
“…어?”
주접을 떨다가 소릉이 녀석의 악의 없는 질문에 한 방을 먹고 모두에게 웃음을 안겨 주었다.
“하하하.”
“크흡.”
“큭큭큭.”
다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갈아입을 무복과 땀을 닦을 수건을 챙겨온 은하연이었다.
“여기. 땀 닦으세요.”
“아, 고맙소.”
그렇게 건네받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으니, 은하연의 질문이 재차 이어졌다.
“근데 마지막 합에서 언 공자의 무위가 한 걸음 더 나아가신 거죠? 도기가 감긴 팽 소저의 도가 이가 나가 버리던데요?”
그에 대답해 주려고 수건을 얼굴에서 뗐는데, 곁에 섰던 정현의 입이 먼저 열렸다.
“예. 이른바 검기성사라 부르는 경지에 오르신 모양입니다. 지난 무술학개론 수업 시간 때 언 소협의 검기가 크게 일렁이며 그 조짐을 보이긴 하셨는데,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시고 벽 하나를 깨어내신 모양입니다.”
“깨달음은 무슨. 그냥 실마리를 조금 풀어낸 거지.”
“돈오(頓悟)의 순간마저 별일이 아니다 취급하시는 언 소협의 모습에서 빈도는 오늘도 또 도를 발견합니다. 저도 같은 벽 앞에서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오늘 보여주신 언 소협의 대련과 방금의 말씀은 훌륭한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축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언 공자.”
“감축드려요!”
“축하드립니다 형님!”
그때였다.
그렇게 언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몇 보쯤 떨어진 곳에서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으니, 다름 아닌 경룡이 형.
우리 진경룡 회장님이었다.
“거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으음. 그냥. 자네들이 보기 좋아서 말일세.”
한데 자세히 보니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 우십니까?”
내 말에 언 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그에 경룡이 형은 턱을 들어 그렁그렁한 눈을 감췄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날릴 때를 놓친 늦봄의 꽃가루가 조금 눈에 들어갔을 뿐이네.”
어휴.
예선전을 치를 때 잔뜩 긴장해서는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하시더니만.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진경룡은 다섯 학기째 청죽관을 살려보려고 동분서주했던 사람이니까.’
도합 백팔십여 명에 달하는 청죽관 관련인 중에 진정으로 감개무량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다른 선배님들은 당연히 자격 미달이고, 노삼 교수님조차 자격 미달이나, 경룡이 형 한 명만큼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저러고 있어서야 곤란했다.
‘단상에 나가서 우승기를 받아 오셔야 할 양반이 눈이 퉁퉁 불면 안 되지.’
하여 내가 채근을 좀 하려는데.
경룡이 형의 입이 먼저 열렸다.
“고맙네. 청죽관을 선택해 주어서, 못난 선배들을 포기하지 않아 주어서.”
“…….”
“청죽은 오늘로 정말로 다시 태어날 걸세. 물론 나나 다른 못난이들은 자네 같은 천재와 나란히 걸음을 맞추지는 못할지도 몰라. 하나, 부지런히 쫓아 보겠네.”
거, 사람 멋쩍게 하시기는.
시비 거는 놈들 참교육하는 건 전공인데 이런 건 참 어색하단 말이지.
나는 할 말을 고르려다 잘 안 골라져서 그냥 방금 하려던 말을 하기로 했다.
“거, 마음은 알겠는데 그러다 퉁퉁 부은 눈으로 우승기 받으러 가시겠습니다.”
“험험. 그럴 수야 없지! 어떻게 쥐게 된 우승기인데! 크훌쩍. 뭔 놈의 꽃가루가 이리 기승인지!”
“그러게요. 자자, 회장님도 수건 한 장 드릴 테니 낯 좀 닦으세요. 언 공자도 막사 가셔서 새 무복으로 얼른 갈아입고 나오시고요. 폐회식에 필히 두 분은 불려 나가실 것 같으니 용모들을 깔끔하게 하셔야죠.”
* * *
그렇게 잘 다린 빳빳한 무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연무장 위에 기숙사별로 도열하라는 행정처의 전언이 내려왔다.
그에 선배와 동기들을 인솔하여 줄을 맞추어 서 있으니.
태도 점수의 심사 결과가 나왔는지, 흑판에 적힌 각 기숙사의 총점이 바뀌기 시작했다.
탁탁-
탁탁탁-
뭐, 이변은 없었다.
태도점수는 청죽이 구 점, 윤국이 육 점, 운매가 오 점, 향란이 이 점을 받았다.
그렇게 이번 춘계 기숙사 대항전의 최종 점수가 정해졌다.
청죽 : 삼십오 점
윤국 : 이십사 점
운매 : 십일 점
향란 : 팔 점
그렇게 우리의 우승이 공인되었고.
“금번 춘계 기숙사 대항전의 우승 기숙사는 청죽관이오이다!”
경룡이 형이 받아 온 우승기가 청죽관 생도들 바로 앞에 세워진 가운데.
“다음으론 대회의 최우수 생도 발표가 있겠소이다! 청죽관의 언용운! 언용운은 단상 앞으로!”
내 이름이 불렸다.
그에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가니.
수상을 하기 위해 나와 계시던 정무학관의 총장님이신 경혜사태가 전음으로 나름의 친근함을 표해오셨다.
[자주 보네요. 언용운 생도.]
[앞으로도 자주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호호. 나도 청죽의 바람이 얼마나 거세질지 기대하며 지켜볼게요.]
그에 나도 포부를 돌려 드렸다.
그러자 흡족하신 모양인지 호호하고 웃으시더니 고아한 음성으로 공식적인 치하를 시작하셨다.
“생도 언용운. 그대는 위기와 대련 두 종목에서 번뜩이는 재치와 뛰어난 무위로 청죽관의 종합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기에 춘계 기숙사 대항전 최우수 생도로 선정하여 표창합니다.”
그렇게 우승기 전달식과 시상식 폐회식이 차례차례 끝났고.
“다시 봤다 청죽관!!!”
“추계 대항전도 기대할게요!!”
숱한 관객들의 박수 아래 회장을 빠져나온 청죽관 생도들은 곧바로 동윤관으로 이동했다.
동윤관으로 이동한 이유는 이번 대회의 뒤풀이를 하기 위함이었다.
뒤풀이라 하여 마냥 놀자판을 벌이려는 것은 아니었고, 실질적인 논공행상의 성질을 가진 모임이었다.
이번 대회로 청죽관이 얻게 된 부상들이 제법 됐다.
‘최우수 생도에 선정되며 받은 내 영단은 빼놓더라도.’
상금, 영초, 무림맹 현장 학습권, 거기에 좋은 술까지 있었으니까.
단상에 선 나는 자치회에서 미리 의논한 바에 따라 그 부상들을 어떻게 지급할지를 설명했다.
“상금은 여름 방학 기간에 기숙사의 시설 중 침소를 전면 개선하는 데 보탤 요량입니다. 지급받은 삼십 년 하수오들은 약재당에서 연구 중인 환단에 사용하겠습니다. 당장 몇 뿌리 안 되는 영초를 소수만 씹어 삼키는 것보다 지속 가능한 청죽의 발전을 위하여….”
뭐 이번 대회의 우승 자체를 내가 멱살을 잡고 시킨 꼴이었고, 내가 제시하는 청사진도 모두 건설적이었기에 가벼운 질문들은 있었어도 불만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무림맹 견학 인원 선정 건은 운매, 향란, 윤국 그간 해왔던 자기네 기숙사 사람만 채우는 방식이 아니라, 본래 그 제도가 생긴 취지에 따라 다른 기숙사 생도들에게도 두 명 정도씩은 자리를 배정해 줄 생각입니다. 하여 청죽관에서 선발되는 인원은 열셋에서 열넷 정도가 될 예정입니다.”
현장 학습 인원 선정권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는 아예 호응까지 튀어나왔다.
“이의는 없네! 따지고 보면 그게 바로 저번에 노삼 교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말씀하셨던 청죽의 정신 아닌가?! 다른 게 의협인가? 그게 바로 의고 협이지!”
“그러고 보니 그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언 부회장이 남개의 정신을 이은 사람이 맞긴 맞나 보군!”
음.
이건 원작에서 정현과 운매관이 주인공 세대들을 견학에 포함시켰던 사건을 내 주도하에 한 건데.
“우리는 다른 기숙사 녀석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자고!”
“근데 향란관 그 밴댕이 녀석들이 언용운 부회장이 인원을 양보해 주겠다고 하면 받긴 받을까? 또 욕으로 여기는 거 아냐? 부회장이 포권을 했을 때처럼 말일세!”
“그건 그거대로 좋지 않나? 자고로 밴댕이들 앞에서 대인의 풍모를 보이는 것만큼 강렬한 욕이 어디에 있겠나?”
뭐, 상관없나?
“아 그건 그렇고. 그런 이야기는 어차피 홍보차장들이 또 공지들 하실 것 아닌가? 우승이 기쁨이 가시기 전에 그 부상으로 받아 온 미주나 한 잔씩 하세!”
어찌 됐든 뒤풀이는 뒤풀이였기에 먹고 마시는 시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계도 기름칠해 줘야 돌아간다는데.’
하물며 사람들을 끌고 가는데, 이런 날에 축하주를 허락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에 자치회는 총장님께 받아 온 미주와 우승을 할 것을 염두에 두고 단강제일객잔과 학관의 주사 고고와 숙수님들께 부탁해 놓은 음식, 그리고 자체적으로 준비한 두강주라 불리는 삼삼한 황주를 생도들에게 제공했고.
또 우리도 마셨다.
그렇게 동윤관에 날라져 온 술동이로 다 같이 들이킨 술잔이 몇 순배쯤 돌았을까?
“점소이 나 집에 안 들어가!!!”
“회장님! 저는 완산입니다! 고완산!!”
“아! 우리 고 부장! 자네는 그런 발재간이 있는 사람이 작년에는 왜에에! 그랬나아! 아 미운 사람!!”
“그, 그건.”
“아니야 사실은 안 미워! 고 부장! 자네도 복덩이야 우리 부회장 내 동생 용운이만큼은 아니지만!”
“어휴. 당연하죠.”
아까 꽃가루 때문에 수분을 많이 쏟아내셔서 빨리 취한 경룡이 형을 필두로 슬슬 사람들의 코가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나는 밖의 해검지에 걸려 계신 사부님께도 한잔을 올리기 위해 두강주 한 병을 들고 조용히 동윤관을 빠져나왔다.
한데 이때.
황색 무복을 입은 단발머리 생도가 나를 찾아왔으니.
“언용운.”
다름 아닌 팽소진이었다.
“너. 아까 했던 그 이야기 뭐야. 자세히 좀 말해봐.”
음.
생각보다 너무 빨리 오셨는데?
뭐, 빨리 오든 늦게 오든 돌려줄 답은 정해져 있으니 상관이야 없었다.
“좀 있으면 학관에서 가려 뽑은 신입생들을 무림맹으로 견학을 보내는 때 아닙니까? 그때 따라오십시오. 따라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