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무림맹으로 (2)
무림맹으로 향하는 정무학관 생도들의 견학 연휴 기간은 보름이었다.
길다면 길어 보이는 시간이었으나, 이동하는 데 사용되는 시간과 ‘견학’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있고.
그리고 여독을 푸는 시간과 견학을 다녀온 소감과 느낀 점을 적어 제출하는 일종의 레포트인 수상록(隨想錄)을 작성하는 시간을 고려해보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연휴라는 명칭이 붙는 이유는.
‘쓰기 나름이니까.’
나를 비롯한 스무 명의 무림맹 견학자는 견학지가 무림맹으로 딱 정해져 있는데,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양측의 일정 조율, 견학을 오는 생도들의 신상 조회 등이 이루어졌고, 막상 가서도 허술하게 소화하기는 힘든 일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백마흔두 명의 신입생들은 자유롭게 짝을 이뤄 원하는 견학지를 선택해 상대 측의 동의를 받은 뒤 학관에 신고를 하기만 하면 됐다.
‘수상록을 써서 제출해야 하는 것은 똑같지만.’
좋아하면 좋아했지, 어지간해선 정무학관의 생도의 견학 신청을 거부하는 일은 없으니.
극단적인 예를 들면, 정무학관과 지근거리에 있는 무당산이나, 제갈세가, 같은 곳을 견학지로 신청해놓고 빠르게 일정을 소화한 뒤.
“자네들은 어디로 가기로 했나?”
“우리는 로하구에 있는 약재 시장을 견학하고 싶다고 제출했는데 그게 허락이 났네.”
“아니, 완전 지척이 아닌가? 시간이 엄청 널널하겠는데?”
“그렇지, 남는 시간은 주변의 명승이나 들러 오랜만에 풍류 좀 즐기고 올 생각이네. 춘계 대항전 준비한다고 고생은 죽도록 했는데 보람은 청죽이 다 가져가고, 심신이나 좀 달래려고.”
저 친구들처럼 남은 시간은 놀든 개인 정비를 하든 어찌 활용하는지는 개인의 자유였다.
‘그저 자유의 대가를 스스로 치를 뿐이지.’
뭐,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견학인지라, 오늘은 생도들이 기숙사별로 모여 있지 않았다.
같은 견학지를 택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었고, 인솔자 또한 조장 개념으로 총생도회의 권고에 따라 생도들끼리 정했는데.
무림맹 견학조의 경우 학관에서 차고 있는 완장의 격이 내 쪽이 월등하게 높았다.
‘그래서 내가 인솔자가 됐지.’
하나, 딱히 힘들 것은 없었다.
각 기숙사에서 추천해온 인원이라 해봤자.
‘운매관은 자치회가 추천한 추천인은 용명이 녀석과 천장호. 거기에 내가 부여된 재량으로 넣은 팽소천까지 해서 총 세 명.’
윤국관은 제갈설지와 팽소진.
향란관은 당옥기와 남궁윤.
나머지는 언 동생들과 청죽관의 동기들.
그렇게 스무 명의 인원이 채워져 있다 보니 내가 무엇을 하자고 했을 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사람은 딱히 없는 구성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남궁윤과 천장호가 변수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원작에 비추어 보면 남궁윤은 천하제일세가의 귀공자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대세를 따르긴 하는 녀석이었고.
천장호는 입이 뇌를 거치지 않을 때가 많고 좀 게을러서 그렇지 시킨 일은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제갈설지가 안 버티고 얌전히 참석을 할 줄이야.’
자존심이 상해서 자기는 자격이 없다 어쩐다 불참 각을 세울 줄 알고 소원권을 따놨는데.
‘뭐, 따로 기간을 설정한 바 없으니 날아가는 것도 아니니 언제고 쓸 일이 있겠지.’
아무튼 인솔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인원 구성이 저런 데다 손과 발이 되어 줄 언 동생들도 있었으니까.
‘당장은 다른 곳으로 견학 가는 청죽관 생도들한테 자치회발 안내 사항 전달한다고 다들 흩어져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직 한 명 남아 있었다.
예컨대 은하연이라거나, 아니면 은하연이라던지, 또는 은하연 같은?
“은 소저? 견학 인원들 파악이랑 소지품 확인 끝났소?”
* * *
마음 같아선 좀 도와주고 싶었지만, 나는 나대로 학관에서 나눠준 인솔자가 확인해야 할 사항에 관한 서류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고.
또 인원 중에 여생도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소지품에 관해서는 은하연이 나서는 게 효율이 좋았다.
그래서 맡긴 것이었는데.
“잠시만요오!”
은하연답지 않게 총원 스무 명밖에 안 되는 인원을 파악하고 준비물을 검사하는 것에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일까?
책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 들어 슬쩍 뒤를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팽 소협? 왜 봇짐에 아령만 잔뜩 들었어요? 화섭자랑 상비약은요? 그리고 건량은 어쩌고 육포만 가득 있고요?!”
“아, 용명이가 화섭자랑 상비약은 내 것까지 자기가 두 개씩 챙겨 준다고 했는데? 건량은 나 같은 사람은 근손실이 나서 취급하지 않지. 대신 육포를 두 배로 챙겼소만? 심지어 닭의 안심을 저며 만든 녀석이라 기름기도 훨씬 적은데 먹고 싶으면 은 소저도 좀 드릴까?”
“필요 없어요! 작은 언 공자?!”
“예? 예!”
“두 개씩 챙겨온 물건 팽 소협한테 돌려주세요. 가는 길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서 찢어지면 어쩌려고요?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기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 오셨는데.
- 쯧쯧. 일복 한번 많구나. 다른 녀석은 몰라도 하연이 저것은 따지고 보면 다달이 돈까지 내가며 친구를 하자 해서 벌어진 일이니, 제 팔자 제가 꼰 꼴이니 누굴 탓하겠느냐.
‘…외람되지만 그래도 이번 달은 면제해 줬습니다. 그거.’
- 자랑이다! 자랑이야! 처음에는 살짝 깎는 정도로 그치려던 놈이 생색은!
그런 사부님의 음성에 한두 마디 변론하고 있다 보니, 퀭한 얼굴의 은하연이 돌아와 한숨을 폭 쉬며 입을 열었다.
“저는 왜 일이 안 끝날까요?”
“…….”
“보니까 애초에 명승지 같은 곳을 골라서 놀러 가려는 사람들도 있던데. 후우.”
“…무림맹 소재지가 낙양이잖소. 예전만 못하다 하나 아홉 왕조가 도읍 삼은 곳인데 볼거리가 있을 거요. 도착하고 나면 짬도 아주 없지는 않을 거고. 그렇게 짬이 나면 저번에 약속했던 당호로 하나 사드리겠소.”
- 굳이 ‘하나’를 끼워 넣는 저 지독함 봐라.
‘…….’
“말을 그렇게 하시면 제가 싫다 그러기도 이상하고. 좋다 그러면 먹을 거에 넘어가는 애 같아지잖아요.”
“싫음 마시고.”
“누가 싫대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줄 맞춰 서 있는 사람의 인원 파악이랑 소지품 확인은 끝났어요. 인원은 정현 도장이랑 하성이 그리고 우소협은 시키신 일 하러 잠시 빠졌고, 나머지 중엔 옥기 빼고 다 왔어요. 소지품은 한 명이 좀 이상했는데 그 이상함이 없어지도록 조치했고요.”
“고생했소.”
그렇게 인원 파악을 해놓고 있으니.
맡긴 일을 끝낸 언 동생들이 속속 돌아왔다.
“맡기신 일 다 처리했습니다 언 소협.”
“저도요! 말씀하신 혹시라도 사고를 치거나 수상록을 확인해서 논 것이 걸리면 사는 게 고달프게 해주겠다는 언형의 전언 동기들한테 확실히 전달했어요!”
“용운 형님! 저도 석류랑 홍옥이 경룡 형님한테 맡기고 왔습니다!”
“고생들 했다. 어찌 보면 내심 기다리던 날이었을 텐데, 어째 우리는 이날까지 일이 많네.”
“아닙니다. 자고로 유비무환이라 했습니다. 오히려 언 소협의 철저함에서 저는 도를 보았습니다. 이것 또한 보고 배울 만한 것이니 견학의 일부라 하겠지요.”
한데, 당옥기 이 녀석이 오지 않고 있었다.
‘뭐 한다고 이렇게 늦어?’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치는 그때.
양반은 못 되는지 당옥기가 나타났다.
그런데 뭔 놈의 짐이 저렇게 많은지.
“…끙.”
양손과 등에 하나씩으로 모자라 머리에도 하나 입에도 하나 물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오길래.
“…뭔?”
- 홀로 피난이라도 가는 모양이구나.
그러게요.
“아무튼 좀 돕자. 얘들아.”
언 동생들과 녀석의 짐을 한 개씩 빼앗아 드니, 마침내 입에 자유가 생긴 녀석이 푸하하고 입을 열었다.
“고, 고마워!”
“고맙단 인사는 필요 없고. 보아하니 늦게 온 이유는 짐 때문인 거 같은데, 뭔 놈의 짐이 이렇게 많냐? 열어봐도 돼?”
“내가 등에 메고 있는 거는 개인 물품이랑 옷가지라 좀 그렇고 다른 건 열어봐도 되긴 하는데, 별거 없는데?”
하여 살짝살짝 열어보니, 두 보따리는 제 녀석이 연구한 자료와 물어볼 것들을 모아놓은 서책들이었고, 다른 보따리 두 개는.
철질려에, 독탄에, 접이식연노(連弩)에 독이 발린 것 같은 화살들과 각종 휴대용 암기들?
- …피난 가는 게 아니라 혼자 전쟁을 나갈 요량인가 보구나.
그런 당옥기의 과한 준비성에 정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워, 원시천존. 이건 유비무환의 수준을 넘은 준비성인 듯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무림맹이랑 싸우러 가냐? 나는 견학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호, 혹시 모르잖아. 저번에 그런 일도 있었고.”
해금방이랑 얽혔을 때를 말하는 건가?
녀석은 그 일을 겪었으니 저런 준비성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근데 이번엔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데.’
검을 쥔 지 얼마 되지 않는 은하연을 제외하면 최하가 검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고수 반열에 오른 후기지수가 한꺼번에 스무 명이나 같이 움직인다.
게다가 무림맹과 정무학관 사이에는 널찍하고 안전한 관도가 있으며 그 사이에 산적 나부랭이가 똬리를 튼 산채는 없다.
‘뭐, 그래도 챙겨 가서 나쁠 것은 없나?’
세상만사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 * *
정무학관 출정식이 끝나고.
신입생들이 정문을 보무도 당당하게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전서응 한 마리도 하북에 있는 팽무혁의 집무실로 날아갔다.
그 전서응이 싣고 간 소식을 듣기 위해, 언정웅과 석금필이 팽무혁이 팽가장을 찾으니 근 한 달 만에 세 사람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세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모임의 좌장인 팽무혁이었다.
“오늘은 거지가 왔네.”
그런 팽무혁의 음성에 언정웅과 석금필이 급히 좌우를 살폈다.
“아이들 소식을 개방에서 직접 전해주러 오셨다고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기척도 없는 것 같은데요?”
“클 거(巨)에 종이 지(紙). 오늘은 종이가 저번보다 좀 크더라 이 말일세! 크하하하! 두리번거리는 꼴들이라니! 개방에서 직접 전해주러 오셨다고요오?!”
“…아, 아하하.”
“…거, 흰소리는 그쯤 하시고 거 읽어 주시기나 하시지요, 의형.”
“험험. 뭐 알았네. 어디 보자. 춘계 대항전부터 쓰여 있구만, 청죽이 우승했다는 놀라운 소식이야 듣기는 했다만 어디 어떻게 우승을 했나 한번 볼까?”
그렇게 팽무혁의 입에서 하북의 후기지수들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북의 후기지수 이야기가 골고루 나왔다.
“용운은 청죽의 위기와 대련 대표로, 용명과 소천은 운매의 격구와 대련 대표로, 소진은 윤국의 대련 대표로, 호열은 운매의 격구 대표로 출전하였다.”
하나 그 뒤로부터는 팽무혁이 ‘거지’라 표현한 큼직한 종이에 세필로 적어진 모든 이야기가 거의 언용운의 이야기였다.
“…예선에서 사마랑을 꺾더니, 결승에선 제갈설지를 꺾었다.”
“허허허. 그 제갈설지를요? 언 가주님 용운이 녀석이 바둑도 둘 줄 알았습니까?”
그에 석금필이 연신 감탄사를 추임새처럼 내뱉었고, 언정웅은 반신반의를 하면서도 입꼬리를 씰룩였다.
“모르겠습니다. 제 아들이지만 요즘 들어 알면 알수록 모르겠습니다. 노름을 바둑으로 했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는데, 잃다 잃다 가문의 비전까지 날려 먹은 녀석이라 솔직히 저도 얼떨떨합니다.”
그리고 언용운이 오가는 감정이 좋지 않은 향란관을 향해서 포권을 취해 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땐, 세 사람이 동시에 아직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음에도 캬 소리를 내었다.
“…음? 용운이 녀석이 생각보다 검에 대한 애착이 깊은 것 같습니다?”
한데, 어느 순간 팽무혁의 흥이 뚝 하고 떨어졌다.
“세상 치열하게 사는 녀석이나 제 놈 나름의 성취를 하고 나면 꼭 검에 술을 뿌리곤 한답니다? 하여 고집을 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니 재혁이 이놈이 이걸 말이라고 써 보낸 것인가?”
그런 팽무혁의 모습에.
물밑에서 이루어진 ‘언용운에게 도(刀) 권하기 사건’을 전혀 모르는 석금필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언정웅은 따로 더 권한 줄은 몰랐지만 공손무결이 찾아왔던 날 함께 있긴 하였기에 그날의 분위기와 의형의 성격을 토대로 대략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단숨에 파악했다.
그에 언정웅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멈췄다.
“의형. 용운이 녀석에게 따로 도를 더 권하셨나 보군요? 그때 녀석의 결정을 기다려 주기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크험! 잘 닦인 길이 있는데, 녀석이 쓸데없이 이상한 길로 빠져 돌아갈까 봐 그렇지!”
“제가 직접 품에서 키워 봐서 아는 녀석인데 이리 가라 하면 저리 가는 녀석입니다. 그 녀석이.”
“나도 아네. 그래서 저리 가기 전에 이리 오게 하려고 한 거 아닌가 이 사람아.”
팽무혁의 뜻을 이해는 했다.
하지만 언정웅이 보기엔 이미 떠난 배였다.
“의형의 뜻에 감사하고 이해도 합니다만, 이미 용운이 녀석은 저리 간 모양입니다. 청개구리 같은 녀석이기도 하지만, 또 가슴 속에 세운 바가 있으면 누가 뭐라 하든 말든, 설령 가문에서 내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제 의견을 관철시키는 녀석이 아닙니까? 재혁 동생이 쓴 글을 보니까 이미 뜻을 세운 것 같습니다.”
그런 언정웅의 태도에 팽무혁과 석금필이 동시에 눈을 키웠다.
“어찌 그리 판단하는가?”
“무슨 뜻을요?”
그에 언정웅이 안주 없이 맑은 술 한 잔을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고 입을 열었다.
“그 검은 본래 저희 세가의 감 총관이 사용하던 애병이었습니다. 언가에서 쫓겨날 때 끌러서 주었다고 하더군요. 검명은 회한이라 합니다.”
“…쫓겨날 때 받아 나온 검이라고요?”
“…뉘우치고 후회한다?”
“예. 그 술을 뿌리는 행동은 그날을 잊지 않겠다는 제 녀석 나름의 의식 아니겠습니까?”
“…….”
“…허.”
“품 안의 자식이라지 않습니까? 어릴 때는 부모가 이끌더라도 장성하면 스스로들 뜻을 세우는 법입니다. 막을 수가 없어요. 그저 복을 빌어줄밖에요. 의형도 석 가주님도 자녀들이 속을 썩인 적이 없으시니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걸 깨달을 날들이 오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