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08화 (108/444)

제108화. 무림맹으로 (3)

출정식을 마친 우리는 낙양이 위치한 북으로 길을 잡았다.

시급한 일로 파발 역할을 하는 상황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이동하는 시간까지 넉넉하게 잡힌 견학 연휴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거기다 연휴 기간 연장 또한 가능하고.’

출정식 전에 나눠준 인솔자의 숙지 사항이나 식에서 하신 총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혹여 견학 일정이 연휴 기간을 초과하게 되더라도 그럴 만한 사정 혹은 관련 견학지와의 협의를 증명할 수만 있으면 연휴를 연장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수업은 못 듣지만.’

그 부분은 학관 쪽에선 출석 인정이나 학습 자료 제공 등 편의를 봐주게 되어 있었다.

뭐, 아무튼.

그런고로 절대 서두를 필요가 없는 걸음이었다.

‘오히려 서두르다가 내력이 고갈되는 사태를 조심해야지.’

많은 준비를 하고 나선 걸음이다.

이 준비를 뚫고 우리에게 위기를 안길 일이 생긴다면 그 순간에 생사를 결정 짓는 것은 일신의 무력과 그 무력이 제대로 발할 수 있게 하는 만전의 몸 상태다.

하여 그렇게 적절한 속도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많이 기운 상황이 되었다.

나는 출발 전에 확인했던 지도를 떠올리며 은하연을 찾았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겠는데. 은 소저 여기서 남소현은 너무 멀지 않소?”

“예. 너무 멀어요.”

“남양은?”

“멀지는 않은데 우로 빠져야 하니 갔다가 관도로 다시 오는 것과 목적지가 낙양임을 생각하면 돌아가는 꼴이네요. 오늘은 그냥 근처에서 노숙하는 게 좋겠는데요?”

“흠. 흙이나 구름을 보니 많이는 아니라도 비도 좀 올 수도 있겠는데? 우소릉.”

“예. 언 형.”

“좌측에 있는 산에 동굴이나 이렇게 처마처럼 생긴 지형 있나 한번 보고 와라. 우리는 여기 있으마.”

“예!”

“하성이는 동기들한테 방금 내용 전달하고.”

“예! 형님!”

그런 내 결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고, 우소릉에게 알아보라 한 야영지로 삼을 만한 지형도 마침 있대서 우리는 그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야영지로 정한 장소에 도착하여 해의 위치를 보니 시간이 아주 여유롭지는 않았다.

나는 빠르게 견학조를 분대화하여 임무를 하달했다.

“당옥기랑 우소릉 그리고 옆에 있는 세 명.”

“우리?”

“어 그렇게 다섯은 짐 여기 풀어놓고 근처에서 버섯 같은 거 있으면 좀 따와 동물을 잡아와도 좋고. 아 근데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없으면 없는 대로 준비해온 건량이랑 육포로 때워도 되니까. 무슨 일 있으면 호각 불고.”

“알았어. 다들 가요.”

그런 내 지휘에 대부분은 군말 없이 잘 따랐다.

“용명이랑 은 소저 그리고 그 옆에 선 세 명은 계곡에서 물 좀 길어 오고 오면서 장작도 좀 주워 와.”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천이 형이랑 하성이, 천장호, 남궁윤, 곡준평, 한종. 이렇게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삥 둘러서 땅 좀 파. 준평 한종 우리 애들이 놓고 간 짐 중에 휴대용 삽 하나씩 꺼내서 다른 기숙사 애들한테 줘.”

하나, 모두가 군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묵묵히 양식을 찾아보러 가거나 물과 땔감을 구하러 간 사람도 있었지만.

“안 그래도 걷느라 오늘의 신체 단련 할당량을 못 채웠더니 찌뿌둥했는데 잘됐군!”

신나서 삽질을 시작한 팽소천 같은 사람도 있었고.

또 작업을 하다 말고 허리춤에 손을 올리는 녀석도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남궁윤이었다.

“하. 이걸 내가 도대체 왜 해야 하나?!”

남궁윤.

이놈은 고쳐 쓰기는 고쳐 써야 하는 녀석이다.

‘일단 천하제일 후기지수 소리를 노름으로 딴 녀석은 아니고.’

주인공 세대라 불리는 원작의 무리 중 순수한 무력으로는 정현 다음가는 녀석이라, 훗날 굵직한 마두와 싸울 적에 왼팔이나 오른팔쯤 되는 자들을 제법 믿음직하게 막아내 주는 녀석이었으니까.

‘원작에서도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하고.’

남궁세가의 입지가 너무 탄탄한 데다, 그런 남궁세가 안에서 오냐오냐 자라다 보니 당장에 저 꼴이 난 녀석일뿐.

주인공 세대와 어울리며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여러 사건을 거치며 좋은 혈통을 타고난 자가 무릅써야 할 의무에 대해 깨달으며 협객이 되어가는 녀석.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새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주기적으로 특유의 귀족 같은 모습으로 고구마를 먹이는 놈이었다는 건데.’

학관에 있을 때는 향란관 출입 금지령이 떨어져서 어떻게 방법이 없었는데, 이 기회에 굴릴 수 있으면 좀 굴려야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남궁윤의 음성에 내가 잠시 생각을 한다고 가만히 있자, 팽소천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몫까지 해줄 테니 힘들면 그만해라 남궁윤! 운동 되고 좋은데 나는?”

안 되지 안 돼.

남궁윤을 좀 굴려 놓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그렇게 날아가서는 안 되지.

그에 내가 입술을 뗐는데 때마침 남궁윤 또한 같이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팽 소협의 눈에는 내가 힘들어서 이러는 걸로 보이나? 나는 힘들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서로 간에 할 말이 겹친 상황.

그래도 명가의 자제답게 남궁윤은 손짓으로 내게 먼저 발언할 권리를 양보했다.

나는 사양치 않고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학관은 남궁가가 아니라고. 누가 그랬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고.”

“그러니까 왜 이 일이 필요하냐는 거다 내 말은.”

“산짐승들 때문이다.”

“산짐승?”

남궁윤은 콧방귀를 꼈다.

뭐 그런 것을 겁내느냐는 투였다.

그런 녀석의 말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쯧쯧 하고 혀를 차셨다.

- 검기성강이 가능한 초절정의 경지에도 들지 못한 녀석이 감히 산의 짐승들을 얕잡아 보는구나?

‘그러게요.’

- 사람이 풍기는 기도와는 기색 자체가 달라서 덤벼들기 전에는 알아채기도 어렵거니와, 맷집이나 피부도 단단한 놈들이 많아서 검강으로 일검에 양단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종에 따라 여간 귀찮은 게 아닌데. 네 준비성을 철저하다 칭송은 못 할망정! 에이이잉!

구중궁궐 부럽지 않다는 남궁가의 본가에서 자란 녀석이 그런 걸 알겠습니까?

산짐승이라고 해봐야 몰이꾼이 몰아다 주는 놈들에게 화살이나 좀 쏴봤을 녀석들이 다 그렇죠.

아무튼 나는 내 할 말을 했다.

“그래. 산짐승. 그놈들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오밤중에 내려와 뒤적거리면 잠을 설치기 마련이거든.”

그런 내 말이 납득은 가긴 하는지 녀석은 질문을 바꿨다.

“좋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근데 너는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

“나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정현, 제갈설지, 소진 누님 이렇게 넷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그럼 너희 넷은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

“이렇게 넷은 오늘 밤에 번을 설 것이다. 나랑 제갈설지랑 초번초로 두 시진. 정현과 소진 누님이 후번초로 두 시진. 그리고 또 이렇게 야영할 일이 있다면 역할들은 공평하게 바꿔가며 할 것이다. 문제 있나?”

“…….”

“삽. 다시 들어야겠지?”

더 이상의 반박거리를 찾지 못한 남궁윤은 씩씩거리며 다시 삽을 들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도 사부님께서는 분이 풀리지 않으셨는지 또 한마디를 하셨는데.

- 저저.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어물쩍 넘어가는 것 좀 보게? 성질 같아서는 그냥 한 대 세게 쥐어박아 버리고 싶구나.

나 또한 사부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 그래서야 곤란했다.

‘태도가 불량해서 그렇지 질문 자체는 해볼 만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대 쥐어박아도 별로 속이 안 시원해집니다. 저런 놈들은 처맞고 이따금 부모님 모시고 오거든요.’

- 그래서 그냥 넘어가겠다는 것이냐?

‘에이, 그럴 수야 없죠.’

제 나름대로 떠올린 계획이 있습니다.

- 계획?

뭐, 계획이라 하여 거창한 심계 같은 것이 깔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궁윤에게 똥을 안기는 것이 다였으니까.

“그 정도면 대충 땅은 다 판 것 같으니 남궁윤 이것 좀 받아라.”

“이게 뭐지? 큼큼. 윽. 냄새가 좀 구리구리 한 것 같은데?”

다만 똥을 안긴다는 것이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똥을 주는 것이었을 뿐.

“똥이다.”

“?”

“호랑이 똥.”

“???”

“그걸 좀 뿌려놓으면 여간해선 짐승들이 근처에 오지 않거든.”

본래 비위가 강한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남궁윤 네가 해라.

“여기 호리병 하나 줄 테니까 물에 적당히 개어서 방금 삽으로 파놓은 길에 뿌려….”

“웁!”

“야! 야!! 토할 거면 저쪽에 가서 토해! 잠자리 근처에다 토하지 말고! 저리 가라 이 새끼야!”

* * *

그렇게 남궁윤이 가까운 수풀로 달려가 구역질을 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네놈은 애초에 이러려고 나를 데려온 것이냐?”

수풀에서 구역질을 하다 온 남궁윤은 나를 향해 도끼눈을 뜨더니, 자신을 욕보이려고 데려왔느냐는 말과 함께 불결한 곳에서 잘 수 없다며 강짜를 부렸다.

그에 나는 호각과 솥에 넣으려던 육포 조각들을 건네주며 말했다.

“자의식이 너무 비대하다 남궁윤. 나는 네 생각보다 훨씬 너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아.”

“뭐?”

“아무튼 꼬우면 너는 혼자 자라. 요 바로 밑에 경사만 내려가면 여기랑 비슷한데 면적만 조금 좁은 지형 있었잖아?”

불침번도 있고 저놈도 절정 반열을 넘보는 고순데 별일이야 없겠지.

“그래도 삽질한 공은 있고 가시거리 안이기도 하니 불침번은 서주마. 불결하고 싫으면 혼자 자고 아침까지만 복귀해.”

“바라던 바다!”

그런 내 말에 남궁윤은 ‘하!’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낚아채듯 내가 든 물건과 제 봇짐을 챙겨 아래에 있는 목으로 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다.

“천장호.”

“말씀하십쇼. 용명의 형님.”

“너 나 모르게 밤사이 개방에 제자 하나 들였냐?”

“큽. 저한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근데 남궁윤 저 새끼 왜 저 꼴이야? 내가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런 내 말에 후번초였던 팽소진과 정현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너, 자로 들어가고 나서 대충 반 시진쯤 지났나? 멧돼지가 남궁윤의 잠자리에 뛰어들었어.”

“팽 소저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급한 사태기는 했으나, 모두를 깨울 일은 아니기에 저랑 팽 소저 그리고 남궁 소협 본인이 합심하여 조용히 멧돼지는 잡았으나, 새벽에 비가 오는 통에 그 일이 나서 남궁 소협의 옷가지와 짐이 엉망이 됐습니다. 어찌 보면 인과응보요 달리 보면 언 소협의 선견지명이 적중했다 하겠습니다. 역시 소협께는 도기(道氣)가 흐르시는 게 분명….”

“거 풍월은 그만 읊고. 정현 너 남궁윤 못지않은 깔끔쟁이라 옷가지 여벌 넉넉하게 있지?”

“어. 예. 그렇습니다.”

“그거 한 벌만 줘봐. 네 체격이 남궁윤이랑 거의 비슷하네.”

그렇게 정현에게서 여분의 옷가지를 얻어낸 나는 바쁘게 은하연을 불렀다.

“왜 그러세요 언 공자?”

“우리 여분의 화섭자랑 건량 같은 거 좀 있지 않소?”

“있죠?”

“이 옷이랑 그것들 묶어서 지금 남궁윤한테 가서 팔고 오시오. 저놈 저거 엄청 깔끔쟁이에 자존심이 센 놈이라, 지금이라면 달라는 대로 줄 거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그것이 상인이니까.

은하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남궁윤 멧돼지 조우 사건’ 이후로 우리는 세 번의 밤을 보냈다.

그사이 두 번은 깔끔한 객잔에서 숙박을 또 한 번은 노숙을 했다.

야생의 맛을 본 남궁윤은 따로 사과를 해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더는 내 지시에 토를 달지는 않았고 개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여 이후로는 여정에 걸림돌이라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뭐, 그나마 기념할 일이라고 해봐야 지나는 길이라 소림사가 위치한 숭산과 그런 숭산을 찾은 엄청난 수의 향화객, 그 곁에 붙어있는 소림의 부속 무관을 보고 ‘소림은 소림이다.’ 소리들을 한 정도?

아, 물론 이건 내 기준이고.

남궁윤은 이래저래 내게 굴려지며, 밥 짓기라던지 불침번이라던지 이것저것 제 손으로 처음 해보는 일들을 좀 많이 했는데.

잡일은 처음인 귀공자가 내놓는 결과가 좋을 수가 없어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힘들다 진짜.”

혼잣말이 좀 늘었다.

아무튼.

그것 말고는 정말로 별일이 없었다.

하여 우리는 목표했던 무림맹 소재지 낙양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낙양.

아홉 왕조의 도읍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어 있는 도시이지만, 중원 전체를 놓고 보면 북직예의 북경과 남직예의 금릉, 같은 성내로 한정을 해도 개봉에 밀려 입지가 상당히 쪼그라든 도시.

하나 무림맹이 들어서며 다시 일어난 도시.

“무림맹에 견학을 오시는 정무학관의 생도들 아니십니까?!”

“소영웅들이여 장차 기개를 크게 떨치시기를!”

“근데 당금수석에 춘계 대회에서 최우수 생도까지 동시에 오르셨다는 언용운 소협은 누구십니까?!”

한 다리 걸치면 크든 작든 무림맹에 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정무학관의 생도들이 견학을 오는 일이 연례 행사여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들이 참 반갑게 들도 맞아주는 가운데 우리는 무림맹에 도착했는데.

그렇게 우리가 당도했다는 소식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고.

우리 중 한 명이 그런 노인의 품에 달려가 안기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윤이 왔느냐?!”

“작은할아버님!”

그 모습을 보며 은하연이 한마디를 했는데.

“하. 누가 보면 세상 고생 저 혼자 다 하신 줄 알겠네.”

그런 은하연의 말에 다른 모든 생도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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