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먼저 갈 곳이 어딘가? (2)
명태성의 말에 내가 곧바로 머릿속으로 약왕당을 떠올린 이때.
공손무결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명태성은 급히 머리를 숙이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크흠. 거 사람들하고는. 방문표를 부서당 한 개씩으로 제한하게 된 이유가 생도들이 부담스러워해서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이렇게 몰표를 줘서 곤란한 일들을 만든다니까.”
별호만 대면 천하의 사람들이 ‘아!’ 소리를 내뱉는 양반들이 자신의 부서에 와달라는 요청을 해오는데, 시간적으로 모든 부서를 들여다볼 여유는 없으니 그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비유하자면 내로라하는 선임들이 신입을 세워놓고 우리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 순서대로 다섯 명만 뽑아봐라 하는 거랑 비슷하지.’
어떤 생도들에게는 충분히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니지만.’
공손무결쯤 되는 사람이면 일찍이 나를 보았을 때.
어느 정도 그런 내 성격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다른 생도들이 혹여라도 박탈감을 느낄까 그러는 것이겠지.’
그랬다가 괜히 자신들 때문에 생도들 사이에서 시기나 질투가 생겨서야 곤란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운을 뗀 공손무결은 방문표를 받은 자만 무림맹의 해당 부서를 견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했고.
“…하니 방문을 하고자 마음을 먹었던 부서가 있다면 표를 받지 못했다고 주저하지 말고 가서 문을 두드리면 될걸세. 더불어 언용운 생도?”
“예.”
“여러 선배의 구애가 마냥 기꺼울 수만은 없을 것이야. 혹여라도 버겁다면 그 방문표들을 과감히 내던져 버려도 좋네. 책임은 내가 질 것이야.”
더불어 내가 처한 어려움을 다시 한번 짚음과 동시에 내게 선택의 자유까지 줬다.
허허로워 보여도 참 여러 가지로 꼼꼼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공손무결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깍듯하게 포권을 취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일정이 허락지 않아 당장에 모든 부서를 견학할 수 없겠지만. 단기 파견이라든지 방학 기간에 진행되는 견습 대원 모집이라든지 여러 제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야 하지.”
“베풀어주신 표들은 맹의 선배님들께서 보여주신 호의라 생각하여 잘 간직하다가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배움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말을 참 예쁘게도 하는구만. 내가 괜한 걱정을 했어. 자 그럼 대충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한 것 같고. 밀직원장?”
그런 내 말에 기분 좋게 웃어 보인 공손무결은 곧바로 곁에 있던 밀직원장을 찾았다.
밀직원장은 미래로 치면 무림맹주의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예. 맹주님.”
과연 은밀한 업무들을 전달하는 사람답게 이심전심이라 이건지 밀직원장은 자신이 직책이 불리자마자 별다른 하명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밀직원장 국도진입니다. 지금부터 나눠드리는 표는 무림맹주실의 방문표로 여러분의 신분이 한시적으로 무림맹에 소속되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맹주님을 알현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일종의 신분패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방금 맹주님께서 방문표를 내버려도 좋다고 하셨는데 이 표만큼은 내버리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그럼 지금부터 맹주님과 제가 한 분 한 분 표를 달아 드릴 것인데 표를 받고 뒤집어 보시면 맹주님을 알현하는 날과 시가 적혀 있을 것입니다. 숙지를 하시어 다른 부서의 방문 일정을 계획할 때 그 시각은 피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당부 사항을 전한 밀직원장은 가장 먼저 내게 다가오더니 소매에서 비단으로 된 자루 한 개를 꺼내더니 손수 벌려 주었다.
- 네 품에 쌓인 방문표를 저 안에 넣으라는 모양인데?
‘그런가 보네요.’
- 끌끌. 미리 저런 자루를 준비해 놓은 것을 보니, 저 밀직원장이라는 자는 네 녀석에게 몰표가 나올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구나.
‘뭐, 무림맹 돌아가는 사정을 가장 먼저 접하는 사람이시니까요?’
- 아무튼 저 남궁가의 영감쟁이만 우습게 되었구나 클클클! 뭐? 옥과 석이 뭐가 어쩌고 저째?!
킬킬거리시는 사부님의 웃음에 입꼬리가 따라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무시한 나는 짐짓 담담한 척 밀직원장이 벌려 준 자루에 타 부서에서 받은 방문표를 와르르- 쏟아 넣었다.
그러자 밀직원장이 손수 자루의 주둥이에 달린 끈을 당겨 자루를 오므려 주기까지 하길래 나는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렇게 밀직원장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선 공손무결.
그런 공손무결에게 밀직원장은 무림맹주실이라는 글자가 아로새겨진 방문표를 건넸는데.
공손무결은 그 방문표를 겉으로는 덤덤하게 받아드는 척을 하면서 한편으론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미안하네.]
[음. 맹의 선배님들이 표를 몰아 주신 일로 그러시는 거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거 말고. 백본회의 부회주의 일 말이야.]
백본회의 부회주면 남궁욱 그 노인네를 말하는 건데?
[그게 왜 맹주님이 미안하시죠?]
[무림맹이라는 곳이 번듯해 보여도 따지고 보면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백도 문파 사이에 일어난 싸움 뜯어말리고, 한 번씩 심하다 싶은 흑도 놈들이 있으면 토벌하고, 뭐 그런 것이 주된 일일세. 별거 아니지.]
[너무 신랄하신 거 아닙니까? 동기들이 얼마나 견학일을 기다렸는데요.]
[하하. 그랬나? 하나 어쩌겠나. 실상이 그런 것을. 한데 맹의 본부에 그것도 백본회 같은 곳에서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면, 그 실상을 잊는 사람이 종종 나온다네, 어쨌거나 송사를 이리 들고 와 해결을 해달라 부탁을 해오니 강호가 제 손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을 하는 양반들이 생기는 것이지. 그리고 그런 착각은 종종 자신의 가문이 황가까지는 못 가도 왕부 정도는 된다. 뭐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들어 제 혈족을 세자 취급을 하는 작태를 보이곤 하지.]
그렇게 운을 뗀 공손무결은 방문표를 내 허리춤에 손수 걸어주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자네가 이래저래 승승장구하는 일로 남궁욱 그 너구리 같은 영감이 자존심을 상해하는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오는 길에 보니 자네 상대로 얄궂은 협잡질을 벌이고 있더군. 내 한 소리를 하려다가, 자네가 너무 대처를 잘하길래 그 순간에는 어찌하나 궁금해져서 잠시 보고만 있긴 했는데.]
[확실히 얄궂기는 했습니다.]
[그래. 사실 그런 양반들이 어린 싹들에게 애초에 헛짓거리를 못 하게 막아주는 것도 내 일이라면 일인데, 그러지를 못했으니 내 사과를 하는 것일세.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오늘 일을 계기 삼아 조만간 남궁세가 쪽에 대표를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기별을 넣을 참이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감히 무림 말학이 맹주님의 사과를 받아 보겠습니다.]
[좋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이거 매듭이 다 매어져 가는구만. 남은 긴한 이야기들은 알현 일정도 있고 하니 추후에 나누기로 하세.]
[옙.]
[아, 참 근데 먼저 들를 곳이 있다던 그 부서 말일세. 혹시 약왕당인가?]
[어?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자네라면 십중팔구 그곳을 고를 줄 알았지.]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지?
‘내가 빙의자임을 알리는 없으신데.’
그렇다면 금침대법을 노리고 있는 내 내심을 알 리는 없을 거고, 추론 과정에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았지만 굳이 따져 물을 주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따로 알현 시간이 있기도 하니 나중에 여쭤보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단단히 지어진 방문표의 매듭.
공손무결은 어째선지 대견하다기 그지없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피식 웃었다.
“무림맹에 온 것을 환영하네.”
“……?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맹주님.”
* * *
무림맹주실의 방문표를 스무 명의 생도들이 각기 전달받았다.
그 즉시 내가 맡고 있던 견학조의 조장직이 일시적으로 해제됐다.
지금부터 견학 기간의 종료 시까지 어떤 부서를 찾아가 무엇을 배우든 생도 개인의 자유였다.
하지만 낙양까지 오는 여정에서 내 지시를 받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동기들은 곧바로 흩어지지 않았고 개중에 용명이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아까 직속 타격대에서 나오신 각주 선배님과 대화하실 때 보니 형님께서는 마음속에 정해 놓으신 부서가 있으신 것 같던데 맞습니까?”
“어. 약왕당을 제일 먼저 들를 생각이다.”
그런 내 말에, 일단 내 말이라면 따르고 보는 언 동생들과 애초부터 약왕당이 목표였던 당옥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청죽관의 동기 중 몇 명과 팽소진은 미간을 좁혔다.
“약왕당?”
“듣기로는 거기는 잘못 갔다간 시간 낭비만 한다던데 거기를 가자고?”
뭐, 그런 반응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약왕 오균천.
그는 생도들에게 방문표를 보내놓고 정작 바람을 맞히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여 생도들 사이에선 약왕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까딱하면 바람을 맞고 귀중한 하루를 날리기 일쑤니.
어지간하면 약왕당은 가지 말라는 조언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실상은 좀 다르지만.’
사실 약왕 어르신은 자신의 기분대로 바람을 맞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기인 역용술과 축골공을 활용해 감쪽같이 숨어서 됨됨이를 지켜보다가 싹수가 파랗다 싶으면 얼굴을 내밀고 노랗다 싶으면 만나주지 않을 뿐.’
그 사실을 아는 나였고.
모두가 잘되자고 하는 일이었으며, 금침대법이라는 확실한 청사진도 있었기에 나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소진 누님은 구하고자 하는 답을 얻고 싶으시면 그냥 잠자코 따라오셨으면 좋겠고.”
“언용운 너…! 하아…. 알았어.”
“누님 용운이랑 뭔 문제풀이라도 하셨습니까? 구하고자 하는 답이 뭡니까?”
“돼지 너는 알 거 없어.”
“만날 알 거 없대. 그럴 거면 무식하다고 하시지를 말던가.”
우선은 팽소진의 입을 다물게 했고.
이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소진 누님은 납득하셨고. 다른 반대 의견 있는 사람은 거수. 나 막 강요하고 그러는 사람 아닌 거 다들 알지? 어디 자신 있게 손들 한번 들어봐.”
나 화 안 났어.
만약에 반대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높이에 맞춰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득을 해주려고 했는데.
“곡준평? 방금 손이 살짝 움직였던 것 같은데? 혹시 불만 있나?”
“…어? 아닌데… 이건 그냥. 어! 파, 팔이 가려워서 잠시 들었던 건데?”
“다음부터 이런 이야기 할 때 간지럼증이 느껴지면 간지러워도 참아.”
“…어.”
“준평이는 그냥 팔이 가려웠던 것이었고. 음. 제갈 소저는 다른 의견 없소?”
“용운 님께서는 제가 다른 의견이 있다 하면 위기 결승에서 제게 따가신 권리를 사용하실 참 아니신가요?”
“맞소.”
“이 제갈설지를 이긴 대가가 고작 그렇게 사용되어서야 제가 용납을 못 하죠. 뭐, 안 그래도 약왕당에 갈 생각이었어요. 첫날부터는 아니고 확실히 재실하고 계신다는 소식이 있을 때 가려고 했지만.”
“그럼 다들 동의 한 거요?”
그렇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행선지를 결정한 나는 견학조를 이끌고 약왕당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약왕 어르신께서는 현재 출타 중이십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약왕당을 지키고 있던 의녀에게 약왕 어르신은 출타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쯤 오시겠습니까?”
“한번 나가시면 어떨 때는 금방 오실 때도 있는데 어떨 때는 사흘 또 어떨 때는 보름씩 일을 보고 오시는 일도 있으셔서.”
성질이 급한 생도였다면 여기서 벌써 ‘이럴 줄 알았다.’ 하며 바람을 맞았다 생각을 하고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화를 냈을 수도 있겠지.’
하나, 내겐 확신이 있었다.
의녀의 말대로 실제로 약왕 어르신은 약초와 영초를 구하러 가든 사람을 구하러 가든 며칠씩 자리를 비우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주 자리를 비웠다면 방문표를 보내지도 못했겠지.’
그도 그럴 게 방문표는 부서의 장의 허락이 있어야 반출이 가능한 것이었다.
내게 약왕당에서 보내온 방문표가 왔다는 것은 약왕 어르신이 막연하게 출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됨됨이를 확인코자 나와 동기들을 시험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방문표를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미 첫날 일정을 약왕당으로 정했습니다. 어르신께서 방문표를 보내오셨으니 멀리 가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아. 확실히 그렇군요.”
그런 내 말에 의녀가 일순 두 개의 선택지를 입으로 늘어놓았다.
“음. 그러시다면 약왕당의 사랑채에서 기다리실래요? 약차와 다과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테니 조금 쉬고 계시면 약왕 어르신께서 돌아오시지 싶습니다. 아니면 혜민각(惠民閣)에 가보실 수도 있긴 있겠네요. 외출하시면 한 번씩 들르시거든요.”
약왕당의 사랑채와 혜민각.
전자는 말 그대로 손님들 쉬시라고 준비된 공간이었고.
후자는 약왕 어르신의 제자들이 집도 절도 돈도 없는 병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는 곳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네.’
딱 보기에는 사랑채 쪽이 달콤해 보였고, 우리야 따지고 보면 호북에서 출발하여 이제 막 낙양에 도착한 참이니 좀 쉰다고 하여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즉. 일리까지 있는 제안이었다.
하나 약왕이 우리의 됨됨이를 가늠해 보려고 하는 이상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 혜민각으로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