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일 번으로 만들어 드릴 수도 있는데 (1)
혜민각으로 가보겠다는 내 말에 약왕당을 지키고 있던 의녀는 미간을 좁히며 진심이냐는 듯 되물어 왔다.
“혜민각을 가시겠다고요?”
답이 거기에 있는데 당연히 가야지.
“의녀님 본인이 그쪽으로 가봐도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약왕 어르신께서 출타하실 때면 이따금 들르시는 곳을 떠올리다 보니 얼결에 나온 말입니다. 혜민각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아시고 가시겠다 하시는 것이신지요?”
잘 알지.
한데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신 모양인지 내게 질문을 해오셨다.
- 약왕당이 산하에 두고 있는데 혜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백성들 돌봐주는 그런 곳 아니냐? 좋은 일을 하는 곳인 것 같은데 어찌 저 의녀는 못 갈 곳을 이르듯 말하는 것이냐?
‘좋을 일을 하는 것과 힘든 것은 별개니까요. 생각을 해보십시오. 천하에 돌팔이가 좀 많습니까?’
천하의 의원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랬다.
이 시대의 의원이라는 게 썩 대우가 좋은 직군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의원이 될 만한 머리나 손재주를 타고났더라도 침보다는 붓이나 검을 손에 쥐는 게 보통이어서 천하에는 명의보다는 돌팔이들이 많았다.
‘거기다 진료비나 탕약값도 백성들에겐 상당한 부담일 테고요. 한데 혜민각은 약왕의 제자들이 진료를 보는 데다가 진맥과 시침의 비용은 받지 않고 탕약까지 원가로 지어주니….’
- …환자들이 엄청나게 몰리겠구나?
‘예. 거기다 틈만 나면 의생들이나 의녀들이 드잡이질을 당하는 곳이라 고되기로 유명합니다.’
- 허. 거기서 드잡이질을 하는 자들이 있다고?
성격이 대나무 같으신 사부님께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셨지만, 나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원래 아프면 서러운 법이지.’
아프고 불편한 몸만큼 마음까지 닳아가는 법이다.
그리고 취지와 과정이 어떠했던 의(醫)의 실패는 죽음이라는 결과로 연결된다.
‘그럼 이제 부정, 분노, 협상, 우울의 단계가 차례차례 와버리는 것이고.’
의녀님의 반응이 왜 저런지도 이해가 갔다.
정무학관의 견학생이라 하면 어쨌거나 천하에서 가려 뽑은 후기지수들이고, 무림맹주의 손님이자 약왕 어르신의 손님인데, 괜히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겼다가는 곤란하다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혜민각에서 하게 될 짧은 고생의 시간?
솔직히 별거 아니었다.
전생 현생 합쳐서 넘어온 산전수전에 비하면 혜민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고됨쯤이야 애초에 별게 아니었다.
‘거기다 그 끝에 약왕의 금침대법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딱 하루 고생을 왜 못 하겠어.’
뭐, 이런 속마음을 내비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적당한 말을 골라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혜민각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당연히 알고 있고, 때때로 의생 선배님들과 의녀 선배님들께서 곤란을 겪으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여 항상 손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 어찌 마음 편히 약왕당의 사랑채에서 차나 홀짝이고 있겠습니까?”
한데 그런 내 말을 들은 의녀의 눈시울이 일순 붉어졌다
“…아.”
“……? 제가 실례되는 말이라도 한 것입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어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견학을 온 생도들이 약왕당을 찾은 일이 제법 되는데 학을 떼시면 떼셨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거든요. 그마저도 요즘은 잘 오시지 않으셨고요.”
하기야 생도들 사이에서 가봐야 시간만 낭비한다 어쩐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장차 백도 무림을 이끌어갈 후기지수께서 저희 같은 사람의 노고를 알아주시니 주책맞게도 감정이 조금 북받쳤습니다.”
뭐, 아무튼.
조금 눈시울이 붉어졌을 뿐인지라, 빠르게 감정을 추슬러 낸 의녀는 고개를 옆으로 빼꼼 빼고 다른 생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알기로는 견학 부서 결정은 개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라 알고 있는데, 다른 분들께서도 같은 의견이신가요?”
그런 의녀님의 음성에 가장 먼저 정현이 입을 열었다.
“저는 같습니다. 사실 언 소협께서 약왕당으로 가자고 하셨을 때부터 내심 혜민각으로 가시겠구나 여기고 있었습니다. 빈도도 언 소협을 쫓아 약왕당의 위민(爲民)을 견식해 보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의녀님이 준비해준 견습 의생들의 옷으로 환복을 한 뒤 혜민각으로 향했다.
* * *
혜민각은 무림맹에서 재원을 받아다 쓰는 소속 부서였다.
하나, 맡고 있는 역할이 불특정 다수의 병자를 상대하는 것이었기에 시설 자체는 무림맹의 본부와 동떨어진 낙양 이북의 산 아래에 있었다.
재밌는 건 혜민각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이 산이 그 유명한 북망산(北邙山)이라는 점이었다.
‘저승, 삼도천, 스틱스강 같은 곳이랑 동의어로 쓰이는 산 아래 위치한 의원이라니 그야말로 역설적이네.’
뭐, 애초에 북망산이라는 말이 저승의 동의어처럼 쓰이게 된 계기가 풍수가 너무 좋아 너도나도 무덤으로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풍광은 나쁘지 않았다.
“그. 그만한 대나무 대롱을 이 사람 폐부에 찔러 넣어서 숨구멍을 빼시겠다고요? 시, 싫습니다!”
“부인! 제 이름 정효생 석 자를 걸고 단언하건대 이건 정말로 위급한 상황입니다! 계속 그렇게 부군의 앞을 막고 계시면 저희가 시료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 부군께서 돌아가십니다!”
“그런 걸로 찌르면 당연히 사람이 죽겠지요!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원이라더니 완전히 사람 잡는 곳 아닙니까?!”
“이건 약왕께서 고안하신 시료 행위입니다! 부군을 해치는 게 아니라….”
“싫어요! 의원이 북망산 아래 있는 것부터 꺼림칙했는데!”
다만 문제는 가끔씩 이런 주장을 하는 병자나 보호자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음 고작 하루 짬을 내어 혜민각의 일을 돕고 있는 내가 벌써 저 터가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를 벌써 다섯 번째 들었으니 가끔은 아닌가?’
뭐, 아무튼.
나는 의술은 뛰어나나 사람을 대처하는 법을 잘 모르시는 정 의생을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정 선배님? 제가 한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언 견습 자네가? 하기야 사람 설득하는 일은 자네가 나보다 낫겠군. 후. 부탁 좀 하겠네.”
뭐, 어려울 것은 없었다.
“부인?”
“뭐, 뭐요! 무슨 말을 하시려구요?!”
“우선 뭘 잘못 알고 계십니다. 혜민각이 북망산 아래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 버티고 서서 저승 문턱을 넘으려는 사람을 이승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발상을 전환하여 이 시대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여지를 만들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드린 뒤.
“한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잘 들여다보십시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다던 그 부군이 맞습니까?”
“…….”
“시시각각 부군의 혼백은 북망산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정이 깊어 보이시는데, 정말로 부군을 이승에 잡아두고 싶으시다면 지금 부인께서 정 의원님께 하셔야 하는 말은 싫습니다가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 주시라 일 것입니다.”
“……!”
부드러운 질책을 섞어 길을 제시하기만 하면?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너무 놀라서! 제발 이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맡겨 주십시오 부인. 바로 조치에 들어가겠네. 혹시 모르니 언 견습이 다리를, 은 견습은 좌수를, 우 견습은 우수를 좀 붙들어 주시게.”
끝.
쉽죠?
- 하여간에 물에 빠트려도 입만 동동 뜰 녀석이로다.
‘왜 입만 뜹니까? 저 수영할 줄 아는데요?’
- …하여간에 한마디를 안 져요, 한마디를. 고얀 놈 같으니. 뭐, 방금도 그렇고 아까 약왕당의 본당에서의 일도 그렇고 아침나절에 남궁욱 앞에서 보였던 기개도 그렇고 오늘은 잘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파천검문의 제자다웠느니라.
‘…북망산이 코앞이셔서 그런가? 왜 갑자기 잘 안 하시는 칭찬을 하십니까?’
- ……? 그게 무슨 말이냐…? 설마 안 하던 짓을 하면 갈 때가 됐다 뭐 그런 말이냐?!
뭐, 아무튼.
그렇게 한 가정의 가장을 구하는 일에 손을 보태고 나서, 잠시 휴식 시간을 받아 혜민각의 뒤편에 있는 탕약 달이는 곳에서 목을 축이는데.
혜민각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다른 역할을 받고 갈라져 있었던 언 동생들도 운 좋게 휴식 시간을 비슷하게 받게 되어 하나둘씩 자리에 모여들더니.
객원 식구인 당옥기를 마지막으로 완전체를 이뤘다.
“하연아. 나 너무 힘들어.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어.”
“옥기 너는 힘든 거 인정이지. 우리 중에 유일하게 당장 의생으로 투입되어도 손색이 없다고 제일 고생했잖아.”
당옥기는 이래저래 잡무를 했던 의생 역할을 했다.
한데, 그녀가 맡은 구역의 잡무담당이 마침 남궁윤이었어서 나는 당옥기를 향해 한 가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남궁윤은 좀 도움이 좀 됐냐?”
“그 새ㄲ… 아 여기 있는 거 아니지?”
“응. 없어.”
“미친놈. 생전 이런 곳에 와본 적도 없는 놈 같은데 진짜 왜 따라온 건지!”
그러게.
왜 따라왔지?
원작의 남궁윤은 약왕당까지는 정현의 뜻에 따라 함께 오지만, 혜민각과 사랑채로 선택지가 갈렸을 때 사랑채를 택한다.
“진짜 처음엔 환부 보고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한, 한 시진? 그동안은 걔도 내가 돌보는 환자에 포함돼 있었다니까?! 뭐 지금은 반인분(半人分)? 딱 그 정도 하는 거 같아.”
뭐, 상관은 없나?
그때였다.
그렇게 내가 남궁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당옥기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관해 물어왔다.
“아, 근데 아까 언용운 너희 쪽 시끄럽던데 뭔 일이야?”
“맞아요. 저도 약방문대로 약재 싼다고 정신없어서 힐끔 봐서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던데, 정확히 무슨 일이었어요 언 공자?”
“그때를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제가 나서야겠군요. 때는 바야흐로 조금 전. 병자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데 보호자가 혜민각의 위치를 트집 잡으며 시료를 반대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러자 하성이 놈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용운 형님께서 한마디를 하셨지요! 혜민각이 북망산 아래에 있는 이유는 이곳에 버텨서서 저승 문턱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잡아두기 위함이다! 크으!!”
이 새끼는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웅변 연습만 하나?
“와.”
“오올.”
“역시. 언 소협이십니다.”
“언 형. 근데 정말로 혜민각이 이곳에 잡은 이유가 그것인가요?”
“뭐가 와고 오올이야. 왜 여기에 만들었는지는 나도 몰라. 땅값이 쌌겠지. 알게 뭐냐. 사람 살렸으면 됐지.”
“크으.”
“와.”
“오올.”
“우와.”
“역시. 언 소협이십니다. 어느 길을 통하든 활인의 길로만 이어지면….”
사부님.
제가 보기엔 이 녀석들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이는데.
이거 제 착각 아니죠?
- 착각은 아닌 듯하구나. 힘들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신이 나 보이는데?
역시 사부님 보시기에도 그렇죠?
“…보아하니 거 힘들이 남아도시나 본네. 안 쉬어도 되겠는데? 휴식 끝. 맡은 바를 향해 복귀한다 실시.”
* * *
그렇게 힘이 남아도는 녀석들을 원대복귀 시킨 뒤.
나도 원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가면서 보니 뒷터에서 모였던 언 동생들 말고도 여기저기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동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천이 형은 열심히 약재 상자를 옮기고 있고.’
약을 달일 때 사용되는 땔감에 사용되는 장작을 패고 있는 용명이랑 천장호.
약재를 싸고 있는 제갈설지랑 팽소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생 중 하나를 보조하고 있는 남궁윤.
‘저 멀리 청죽관 동기 한종이 녀석이랑 곡준평도 보이….’
음.
그런데 저게 무슨 상황이지?
혜민각은 원가로 받는 약값 외엔 별도의 진료비를 받는 곳이 아니기에, 환자를 받는 순서에 두 가지 원칙을 적용하고 있었다.
첫째. 위급한 순서대로.
둘째. 위급도가 하(下)에 해당하는 사람이면 따로 마련된 창구에서 빨리 온 순서대로.
이 두 가지 원칙으로 환자를 진맥하고 치료하는데.
한종과 곡준평이 맡은 임무는 위급도를 확인하는 의생을 도와 색이 다른 띠를 환자들에게 매어 주는 역할이었다.
‘어찌 보면 제일 중요한 역할이지.’
한데 어떤 비단옷을 입은 염소수염의 중늙은이가 한종과 곡준평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한종과 곡준평의 역할이 환자들에게 띠를 매어 주는 것이라면, 내 역할인 각내 호위는 혜민각의 전반적인 치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내버려 두면 안 되겠는데?’
나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동기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한종. 곡준평. 무슨 일인데?”
근데 내 질문에 동기들이 답을 하기 전에 염소수염이 입을 열었다.
“끗발이 높은 놈을 데려오랬더니 또 솜털이 덜 가신 놈이 왔구나! 광동에 상행을 다녀왔더니 왜 이리 모르는 얼굴이 많은지!! 변 의원 오늘 등청 안 했나?”
“안 했고. 이놈 저놈 하지 마시고.”
“어허! 이 놈이 말투가 어찌 그러느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도 모르시오? 아무튼 용건만 말하시오. 보시다시피 바쁜 곳이오.”
내가 내뿜는 기세에 염소수염은 분명 흠칫했다.
“그, 그래서 변 의원이 등청을 안 했다고?”
“변 의원인지 똥 의원인지 안 했다니까. 그 양반이랑 노가리 까러 오신 거면 돌아가시면 되겠소만?”
하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배에 힘을 주며 계속해 난장을 피웠다.
“변 의원 더러 그런 말을 하다니. 이제 보니 내 광동에 다녀온 보름 사이 새로 온 놈인가 보구나? 이놈이 제 윗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놈 아니냐! 당연히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구나?!”
“모르오만? 그게 용건과 관계가 있소?”
“있지! 나는 맹진항에서 수운을 하는 염진회라는 사람으로 무림맹의 일을 돕는 상인이다. 여기 널브러져 있는 비렁뱅이들이랑 너희 의생 놈들 다 나 같은 사람이 먹여 살리는 것이다 이 말이다!”
“해서?”
“해, 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변 의원이 없으면 그 밑에 있는 의생 하나 데려오거라! 내 여독이 안 풀려서 그런가 담이 와서 침 한 대 맞아야겠으니!”
“아. 목적이 그거셨소? 그거라면 진즉에 말씀을 하시지. 이곳은 위급한 순서대로 병자를 봐주는 곳이니.”
뚜둑- 뚜둑-
“일 번으로 만들어 드릴 수도 있는데.”